2027년 가상현실 콩트

"아 잘잤다, VR안대벗고 출근해야지" 광화문 사무실, HMD 쓰고 업무 시작!

207호 (2016년 8월 lssue 2)

Article at a Glance

2027, 서울의 직장인들은 이제 모니터를 보지 않고 HMD 기기를 쓰고 일한다. 손동작을 인식하는 키넥트, 사물인터넷, 3D 스캐닝 기술들과 함께 진화한 VR 기술 덕분에 사무공간을 획기적으로 줄였다.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점점 흐려지는 미래의 모습을 그렸다.

 

편집자주

SF 단편소설의 형태를 빌려 VR을 사용하는 2031년 직장인의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필자는 남성 월간지 <에스콰이어>에서 피처 에디터로 일하며 IT 웹진 <더 기어>에도 글을 쓰고 있습니다. 미래의 가능성을 엿보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허 대리는 파도 소리에 잠에서 깼다. 눈을 반쯤 뜨고 고개를 살짝 들자 바로 눈앞에 펼쳐진 바다가 보였다. 이런 광경을 볼 수 있다니 태어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멋진 바다였다. 질 좋은 바닐라 아이스크림 색 같은 모래톱 뒤로 연한 푸른색의 투명한 바다가 아침의 햇살을 받아 눈부신 반사광을 내뿜고 있었다. 가까운 바다 뒤로는 검은색에 가까울 정도로 어두운 바다가 내려다보였다. 산호초 섬의 바다 빛깔이 이런 색을 띤다. 지금 여기가 어디지? 오키나와? 몰디브? 허 대리는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채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따뜻한 밀가루 반죽 같은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귀에는 아침에 잘 어울리는 싱거운 퓨전 재즈가 흘렀다. 그러다 “730분이에요라는 음성이 들려왔다.

 

 

, 이제 일어나야지. 허 대리는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하고 VR 기기를 벗었다. 그러자 허 대리의 현실이 펼쳐졌다. 이곳은 오키나와도, 몰디브의 리조트도 아닌 보증금 1000만 원에 월세 60만 원짜리 초소형 오피스텔이다. 2031년의 서울 시내권에서 이 정도 가격에 구할 수 있는 오피스텔은 거의 없다. 이곳을 찾아내기 위해 허 대리는 꼬박 6개월 동안 퇴근 후 온 서울을 다 돌아다녀야 했다. 겨우 구한 오피스텔은 아주 나쁘지는 않은 수준이었다. ‘풀옵션 원룸이라곤 하지만 냉장고는 터치스크린도 달려 있지 않은 아주 오래된 물건이었다.

 

 

 

 

 

 

소형 드럼세탁기에는 구형 무선통신 기술인 블루투스 기능밖에 없어서 섬유유연제를 넣으려면 귀찮게 세탁기 앞까지 가야 했다. 방이 워낙 좁아서 세탁기 앞에 가는 건 큰 문제가 없었지만 TV 광고에 나오는 신형 세탁기를 볼 때마다 허 대리는 기분이 나빠졌다. 요즘 나오는 신형 세탁기에는 자동 세제 구입 기능과 음성 인식은 물론 현대인의 불안을 해소하는 음성 인생상담 소프트웨어까지 들어 있다.

 

 

방금 벗은 건 잘 때 쓰는 수면용 VR이다. 허 대리의 집은 4평 정도밖에 안 되는데 창문을 열어봤자 옆 오피스텔의 창문 밖에 안 보였다. 옛날 오피스텔이라 도저히 끌 수 없는 빌딩 공조기 소리도 계속 들렸다. 하필 월세가 싼 방이어서 공조기가 너무 가까웠다. 허 대리는 스스로 무던한 성격이라고 생각했지만 조금이라도 신경이 곤두선 날이면 공조기와 냉장고 소리가 거슬려서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래서 두 달 전 야근하며 짜증을 참을 수 없던 어떤 날에 5개월 무이자 카드 할부로 맞춤 VR 안대를 하나 지른 것이었다.

 

 

VR 안대는 일반 수면용 안대보다 조금 두껍게 생겼고 귀 쪽 부분도 좀 두껍다. 뒤쪽에 신축성이 있는 스펀지를 끼워 얼굴에 딱 맞는다. 앞부분도 얼굴형에 완전히 밀착돼서 일단 쓰면 눈앞의 빛이 모두 차단된다. 맞춤형 VR이라는 건 그 회사에서 아주 강하게 내세우는 마케팅 포인트이기도 했다. 눈앞의 빛을 모두 차단시키면 진짜 실감나는 VR 영상을 즐길 수 있다고. 허 대리가 이 맞춤형 VR을 산 가장 큰 이유 역시 이것이었다. 잘 때만이라도 마음에 드는 현실 - 아니, 현실 비슷한 것과 마주하고 싶었다.

 

 

결제를 마치자마자 라인카카오 메신저를 통해 바로 HTQTR VR(오트쿠튀르 VR, 회사 이름이다) 고객센터에서 연락이 왔다. 라인카카오 메신저는 라인과 카카오가 2020년에 전략적 제휴를 목적으로 합병해 나온 서비스다. 둘은 누구의 이름을 앞에 둘까를 놓고 5개월 동안 싸우다가 홀수 해엔 라인카카오, 짝수 해엔 카카오라인으로 쓰기로 했다. 아무튼 아무리 기술이 발달했어도 HTQTR VR을 수령하기 위해서 최소 1회의 오프라인 미팅이 필요했다. 안대가 감기는 얼굴 앞부분의 골상을 파악하려면 실제로 만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허 대리는 오트쿠튀르라는 이름에 걸맞은 대단한 서비스를 기대했다. 이탈리아 장인이 올까? 아니면 이를 테면 몇 년 전 ‘007’ 영화에서 벤 위쇼가 연기한 Q처럼 최신 트렌드에 밝은 느낌의 천재형 청년이 올까?

 

 

둘 다 아니었다. 회사 근처 커피숍에서 점심시간에 만난 HTQTR VR 3D 페이스 스캐너는 뭔가를 몰래 팔러 나온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그 젊은이는 가방도 없이 와서는 트레이닝복 주머니에서 소형 헤어스프레이같이 생긴 걸 꺼내고 2025년판 갤럭시 XYZ 14에 끼웠다. 스마트폰에 연결하는 3D 스캐너였다. 그는 허 대리의 얼굴에 모기약을 뿌리는 듯한 포즈로 3D 스캐너를 허 대리의 얼굴에 1분쯤 이리저리 갖다 대더니다 됐어요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HTQTR VR은 얼굴을 측정한 지 이틀 후에 로젠택배로 도착했다.

 

 

 

 

HTQTR VR은 기분 나쁠 정도로 잘 맞았다. 쓰기만 하면 아무것도 안 보인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너무 안 보여서 자기 전에 문단속을 꼭 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21세기의 기술이란 이렇게 사람을 필요 없는 것으로 만든 것이로구나 싶어져 조금 기분이 묘해졌다.

 

 

HTQTR VR은 수많은 HMD 기반 VR 기기 중에서도 특히 수면과 휴식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실제로 전자파를 최대한 덜 내는 기술을 적용해 잘 때도 안심하고 두르고 잘 수 있다는 것이 회사 측의 설명이었다. 배터리 재생 시간은 10시간. 주중에 잘 때 쓰는 정도로는 충분했다. 케이블을 연결하거나 무선 통신으로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휴식하기 좋은 영상을 2000개 정도 고를 수 있었다. 이어밴드 부분에서는 음악도 흘러나왔다. 허 대리가 아침에 본 영상은 다양한 검색/설정 모드파랑’ ‘은은한’ ‘재즈라는 키워드를 선택했을 때 HTQTR VR 사이트의 알고리즘으로 자동으로 찾아낸 영상이었다. 자신이 본 곳이 어디인지 허 대리는 몰랐다. 사실 큰 관심도 없었다. 평생 그곳에 가볼 일이 없을 것이다.

 

 

잠에서 반쯤 깬 허 대리는 자신의 좁은 방과 방금 본 너무 넓은 바다 사이의 간극을 메우려 시간의 흐름을 더듬었다. , 그래, 그랬지. 내가 그래서 그 영상을 본 거였구나. 세상 어디엔가는 저렇게 맑고 푸른 바다가 있겠지? 내가 언젠가는 그곳에 가볼 수 있을까? 내가 본 바다라고는 강화도의 갈색 진흙 바다뿐인데? 아냐. 출근해야 해.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 허 대리는 잠깐 고개를 젓고 샤워하러 초미니 화장실에 들어갔다. 21세기든 뭐든, 930분까지는 출근해야 한다.

 

 

‘매트릭스’의 그녀

 

 

허 대리는 서울지하철 14호선을 타고 출근한다. 5호선과 14호선 환승역인 광화문역이 허 대리의 목적지다. 14호선의 노량진-광화문 구간은 한때 9호선의 염창-종합운동장 구간처럼 서울에서 가장 많이 붐비는 구간 중 하나였다. 자동차도 커지고 사람의 평균 신장도 커졌지만 한 사람에게 주어진 단위 면적은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허 대리는 집에서도, 출근길에서도 늘 어딘가에 치여 사는 듯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건 단순히 기분탓이 아니었다.

 

 

14호선 노량진역의 급행 플랫폼으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한 번 더 호흡을 가다듬었다. 물엿에 달라붙은 개미떼처럼 사람이 많았다. 내가 저 사이로 들어가야 한다니. ‘나도 남들이 보기엔 저 인파 중 하나일 뿐이겠지허 대리는 체념하며 흐름 속에 몸을 맡겼다. 그래도 구겨진 색종이처럼 10분만 가면 광화문역에 내릴 수 있다.

 

 

이 고통스러운 시간을 잊기 위해 허 대리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작은 물건을 하나 꺼냈다. 스노보드 고글과 테 굵은 선글라스의 중간처럼 생긴 물건이었다. 애플에서 몇 년 전 발표한 애플뷰 에어 3였다. VR 영상을 보여주지만 머리에 뒤집어쓰는 게 아니라 막힌 안경 형태로 영상을 보여주는 형식이었다. 애플은 이걸 HMD(head mounted display)와 대비해서 눈앞에서 보여준다는 뜻의 OED(On Eye Display)라고 불렀다. IT 평론가들은스티브 잡스라면 이렇게 알아듣지 못할 느낌의 약어를 쓰지 않을 것이라 비아냥댔지만 애플의 제품이 으레 그렇듯 물건은 아주 잘 팔렸다.

 

 

애플뷰를 쓰면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 허 대리는 애플뷰 에어 3를 틀어놓고 어제 보다 만 영화를 본다. ‘매트릭스라는 영화였다. 며칠 전 소개팅에서 만난 여자가 재미있게 본 영화라면서 추천해줬다. 그녀는 좀 특이했다. 디지털 기기가 사람의 상상력을 저해한다나, 사람의 판단력을 저해한다나. 허 대리는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묘한 매력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자신이 몇 달 전 HTQHR VR을 샀다는 이야기도 하지 않고 우선매트릭스’라는 영화를 찾아보기로 한 것이었다.

 

 

허 대리는 영화나 소설을 거의 보지 않아서매트릭스라는 영화를 찾는 데도 시간이 좀 걸렸다. 매트리스? 웨이트리스? 크게 재미도 없었다. 슬로모션을 다양한 각도에서 찍는 기법이 당시에는 꽤 파격적이 었던 모양이다. 지금은 4년 전에 나온 아이폰 12S 플러스 세 대만 있으면 바로 할 수 있는데. 기계가 사람들의 뒷목에 케이블을 박고 가상 세계를 굴리기 위한 노예로 쓴다는 설정도 영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허 대리는 사람 사이에 끼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14호선 급행열차 안에서 애플뷰 에어 3의 영상을 틀어두고 있었다. 그 지하철 안에 애플뷰를 쓰고 있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모두 각자 좋아하는 영상을 보며 옴짝달싹할 수 없는 현실을 잊고 있었다. 과음한 사람처럼 승객을 토해내는 지하철에서 허 대리는 겨우 나와 사무실에 도착했다.

 

 

사무실의 문을 열자 몇 명이 허 대리보다 먼저 왔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팀원은 총 7, 지금 보니 부장님과 과장님, 그리고 막내가 먼저 출근해 있다. 개인용 HMD 슬롯이 비어 있어서 바로 알 수 있다. 사무실 문 바로 앞에 작업모 진열장처럼 HMD 걸이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개인용 HMD 걸이는 출근할 때 빼고 퇴근할 때 걸어둔다. HMD를 걸이에 걸어두기만 하면 충전과 소프트웨어 업로드가 자동으로 이뤄진다. 모든 데이터가 한곳에 들어 있으므로 HMD를 사무실 밖으로 반출하지 않으면 데이터 보안도 문제없다.

 

물론 이건 기업용 HMD를 만들어 보급하는 사람들의 논리지만. 허 대리는 자신의 HMD를 들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회사를 좋아서 다니는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인사는 상쾌하게 해야지. “안녕하세요라고 힘주어 말해봤지만 목소리는 힘없이 뻗다 말았다. “, 안녕하세요.” 허 대리와 비슷한 정도로 생기 없는 목소리들이 대답했다.

 

 

 

 

허 대리는 HMD를 들고 자리에 앉았다. 업무용 책상이어도 폭이 약 80㎝에 불과했다. 책상 위에 올려둘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그것만으로도 문제없었다. HMD는 사무실의 개인용 모니터 역할을 완전히 대체했다. 여기엔 장단점이 있었지만 사업주 입장에서는 직원 1인당 면적을 줄일 수 있다는 점이 결정적이었다. LCD 모니터를 놓아야 한다면 10개의 책상이 들어가는 사무실에 이젠 17개 정도의 책상을 둘 수 있었다.

 

 

광화문의 일상

 

 

HMD를 착용한 팀원들은 책상 위에 손가락을 비비면서 뭔가를 쓰고 있었다. 20세기의 직장인들이 이 광경을 본다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를 것이다. HMD의 대중화와 맞물려 사무실에는 선이 없어졌다. 대부분의 충전과 데이터 통신은 무선으로 이뤄진다. HMD 모니터의 입력 장치는 와콤과 마이크로소프트가 함께 만든 키넥트 패드였다. 엑스박스라는 콘솔 게임기에 쓰던 키넥트 기술과 와콤의 태블릿 기술이 함께 적용된 패드로, 고무판 위에 불룩한 센서가 놓여 있는 모양이었다.

 

 

이 기계를 이용하면 터치패드와 3차원 스와이프를 통해 좀 더 복잡한 멀티태스킹이 가능했다. 허공으로 스와이프를 하면서 화면을 넘기다가 화면을 확대하려면 터치패드에 손가락을 벌리는 동작을 취하면 된다. 키보드를 쓰고 싶으면 키넥트 센서에 대고 뭔가를 쓰는 시늉을 하면 된다.

 

 

아까 허 대리에게 대충 인사한 사람들은 모두 HMD를 띄워두고 손가락을 휘적거리며 일을 하고 있었다. 사무실에는 손가락이 책상을 비비는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HMD식 모니터는 사람들과의 소통을 차단하는 대신 완벽한 사생활 보호를 구현했다. 자리에 앉아 있는 윤선민 부장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무엇을 보기에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묘한 표정을 짓는지는 실제로 어떻게 해도 알 수 없었다. HMD 모니터에는 홍채 인식 기능이 있어서 주인의 눈이 아니라면 어떤 영상도 켜지지 않았다.

 

 

이를 이용해서 HMD 모니터 도입 초기에는 스릴을 좋아하는 직원들이 사무실 안에서 야한 영상을 본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여성 직원들은 사소한 오해라도 피하기 위해 얼굴이 상기된 느낌을 주는 볼터치 메이크업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래서 HMD 모니터 도입 초기에 볼터치 화장품의 매출이 폭락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아직도 뷰티 업계에 전해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이것도매트릭스를 알려준 소개팅의 그녀가 해준 이야기다. 그녀는가상현실은 현실의 반대가 아니라 현실의 기묘한 일부분이야. 그 사실을 알아야 사람들이 균형을 찾을 수 있을 거야라는 묘한 말을 했다. 그 여자는 왜 그렇게 어려운 말만 하는 거지? 그녀도 그녀만의 사무실 HMD 모니터에 포르노를 띄워둔 적이 있을까? 내게 그걸 넌지시 알리고 싶었던 걸까? 나를 자극하는 걸까? 그녀도 나를 좋아하는 걸까? 허 대리는 힘이 빠진 나머지 잠깐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직장에 늦지 않게 도착하기 위해 출근하는 데 하루치 에너지의 70%를 쓰는 유사 이래의 모든 직장인들처럼.

 

 

하지만 우리의 허 대리는 꽤 유능한 업무 자원이다. 그는 금방 정신을 차리고 HMD 모니터 속 업무로 뛰어들었다. e메일을 확인하고 답을 보내고, 외부에서 필요한 자료를 만들어서 보내는 동시에 다른 곳으로부터 자료를 요청했다. 바깥에서 보는 허 대리의 모습은 허리가 상할 것 같은 자세로 사무용 의자에 길게 앉은 피아니스트 혹은 판토마임 퍼포머와 비슷했다. 모니터 속의 그는 트랙의 베스트랩 기록을 노리는 F1 드라이버처럼 뇌를 최대한의 속도로 구동하며 일을 진행시켰다. 외부의 시각적 자극을 차단하는 HMD는 업무 효율에 아주 좋은 효과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이 여러 연구 결과를 통해 입증됐다. 물론 그런 연구 결과를 발표한 연구소들은 업무용 HMD의 제조사들로부터 풍족한 연구비용을 받았다.

 

 

사무공간이 줄어들고 모니터가 바뀌었지만 직장인들은 여전히 점심을 다 같이 먹는다. 미팅이 있는 두 명을 빼고 윤선민 부장을 따라 모두 바깥으로 밥을 먹으러 나왔다. 윤선민 부장 아래에 있는 이민태 차장은 말이 많고 남에게 훈계하는 걸 좋아한다. 그는 오늘도 너무 매운 순두부찌개를 앞에 두고 HMD가 없던 시절의 직장생활을 자랑스럽게 떠들었다. “예전에는 사무실에 가면 키보드 두들기는 소리가 타닥타닥 났어. 너희들 기계식 키보드라고 알아? 전자식으로 입력 신호를 일으키는 게 아니라 실제 버튼으로 신호를 줘서 글자를 띄우는 거야. 기계식 키보드만의 손맛이 어땠는지 너희들은 모를 거다. 아날로그의 맛이란.”

 

 

‘아날로그 같은 소리 하네.’ 허 대리는 말했다. 물론 마음속으로만. 압도적으로 편안한 기술 앞에서 굳이 불편한 아날로그를 찾아 쓰려면 남는 자원, 즉 시간과 돈이 꽤 많아야 한다. 키넥트 패드가 대중화되자 기계식 키보드의 손맛 같은 걸 말하는 사람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자취를 감췄다. 한때의 LP 플레이어처럼 기계식 키보드는 기술이 아니라 심미(審美)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허 대리도 한때 기계식 키보드를 사볼까 하다 가격이 너무 비싼 데다 불편해서 그만뒀다. 요즘 제대로 된 기계식 키보드는 100만 원도 넘는다. 유럽 명품 에르메스의 가죽을 씌운 489만 원짜리(부가세 별도) 기계식 키보드도 있다. 이민태 차장이 아무 것도 모르고 떠들 때애플뷰 에어 3나 끼고 영화나 보면 참 좋을 텐데라고 허 대리는 생각했다.

 

 

 

 

그래도 바깥에서의 점심시간이 주는 기쁨은 이민태 차장의 훈계가 주는 짜증보다 훨씬 컸다. 말 그대로 하루에 8시간씩 코앞의 화면을 보고 있으려니 허 대리는 점점 바깥에 나갈 수 있는 점심시간이 절실해졌다. 허 대리만의 고충이 아닌 모양인지 광화문 인근에서 바깥이 보이는 유리창이 큰 식당, 마당이 있는 식당, 노천 테이블이 있는 식당의 인기가 굉장히 높아졌다. 덕수궁과 경복궁 역시 점심시간만 되면 버스 환승 센터처럼 붐볐다. 점심을 거르고 자연의 초록을 보겠다면서 고궁을 걷다 오는 회사원들이 많았다. 사실 그건 재미없는 아저씨들과 점심을 먹기 싫은 여성 직원들이 가장 쉽게 대는 핑계이기도 했다. 허 대리 역시 후딱 밥을 먹고 조금이라도 더 푸른 잎을 보고 싶었다.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

 

 

오후 시간. 개인용 HMD 모니터의 또 다른 장점은 졸릴 때 잠깐 잠들어도 티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대로 물론 화장실을 오가거나 회의를 할 때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완전히 졸수는 없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무튼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자신의 시야를 완전하게 가린 채 일하는 대도시의 문화가 확립된 것이었다. 허 대리는 이 역사적인 흐름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냐 하면여자 생각을 하고 있었다. 허 대리는 프로그램을 몇 번 스와이프해 넘겨서 띄운 라인카카오 메신저로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네가 보라고 한매트릭스너무 어려워.” 허 대리는 여기까지 메시지를 보내고 이제 198개로 늘어난 카카오프렌즈 캐릭터 중 오리너구리인덕구리의 하루이모티콘을 보냈다. 어려운 보고서 앞에서 엉엉 울고 있는 이모티콘이었다. 메시지 옆에 있던 1자가 금방 없어지고 그녀에게 답장이 왔다. 그녀도 아직 내가 마음에 있는 모양이다.

 

 

“매트릭스는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에 대한 아주 고전적인 우화야. VR HMD로 대변되는 가상현실적 체험에 대한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의 발현이기도 하지.” 허 대리는 이렇게 어려운 말을 본 적이 없었지만 그걸 모른다고 그녀에게 알리고 싶지도 않았다. 어차피 그녀와의 화제를 만들기 위해 영화를 본 것뿐이다. 시뮬라크르? 시뮬라시옹? 그게 뭐지? 어차피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나중에 검색해보면 된다. ‘우선 이 핑계로 한 번 더 만나면 되잖아. 매트릭스는 3편까지 있던데 하나 보고 한 번 만나면 앞으로 세 번은 더 만날 수 있어. 그러고 나면 우리 둘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공부를 할 수 있을 거야.’ HMD 모니터 아래로 드러난 허 대리의 입은 살짝 미소를 짓고 있었다.

 

 

원래 직장생활이란 게 기를 써서 시간 맞춰 출근하고, 피곤하다고 잠깐 생각하다 점심 먹고, 점심 먹고 나면 잠깐 졸았다 주변 사람과 수다 떨다 보면 해가 지는 것이다. 2027년의 어느 목요일도 그렇게 지나갔다. 윤선민 부장도, 이민태 차장도 모두 눈앞을 가린 개인용 HMD를 빼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허 대리도 집에 돌아갈 시간이었다.

 

모니터 속의 세계에 하루 종일 빠져 있다 HMD를 벗으면 고개를 돌리기도 힘들 정도로 좁은 자신의 자리가 눈앞에 들어왔다. 책상은 몸을 앞으로 기대고 일할 수 있도록 가슴 받침대가 달려 있었다. 스위스 시계공의 책상에서 영감을 얻은 가구 제작자의 아이디어였다. 그는 이 아이디어로 안 그래도 좁아진 사무공간을 1인당 5% 더 축소시켰고 큰돈을 벌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아주 큰 개인용 책상이 놓인 공방을 차렸다고 한다.

 

 

허 대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연어처럼 다시 인파를 뚫고 집으로 돌아갔다. 매일 비슷한 업무, 출근길보다 조금 더 지치는 퇴근길, 애플뷰 3 에어로도 가려지지 않는 인파의 기분 나쁜 열기와 사람들의 땀 냄새(애플뷰 5 에어를 사면 좀 나아질까?), 이런 것들을 뚫고 집으로 돌아와도 허 대리를 기다리는 건 4평짜리 오피스텔 방뿐이었다. 인생상담 기능이 없는 구형 세탁기와 터치스크린이 설치되지 않은 구형 냉장고가 있는. 허 대리는내가 꿈꾸었던 도시 생활이 이런 걸까라고 잠깐 생각했다. 그가 잠깐씩만 생각하는 이유는 그가 길게 생각하는 능력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2027년의 서울엔 길게 생각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주 적어서 아무도 허 대리를 탓하지 않았다.

 

 

소개팅으로 만난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느라 허 대리는 저녁 약속 잡는 걸 깜빡 했다는 사실을 집에 와서야 깨달았다. 에이, . 이미 늦었으니까 허 대리는 씻고 방으로 나왔다. 어차피 친구가 없어도 허 대리에겐 음악이 있다. 음악 감상은 허 대리가 스스로에게 허용한 유일한 사치였다. 허 대리는 좋은 사운드 시스템을 이용해 훌륭하게 녹음된 아름다운 음악을 듣는 일을 무척 좋아했다. 좋은 오디오는 넓은 면적을 요하고 무겁고 비싸서 허 대리가 꿈도 꿀 수 없는 취미였다. 활로를 넓히려는 오디오 업체들은 헤드폰 앰프라는 새로운 장르의 하이엔드 제품군을 만들어냈다. 좋은 헤드폰 앰프와 헤드폰을 쓰면 평범한 음악 애호가에겐 분에 넘칠 정도의 좋은 소리로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이유 없이 늘어지던 어느 날 길을 걷다 피아노 소리에 홀린 듯이 이끌려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를 듣기 시작했다. 바흐의 세계 안에서는 어떤 혼란도 없었다.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이유로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다. 현실과 가상, 물리적으로 점점 좁아지는 허 대리의 세계와 너무 넓어지는 부자들의 세계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면 뭔가 굉장히 균형 잡힌 것이 필요했다. 허 대리는 이런 생각을 아무에게도 조리 있게 설명한 적이 없었지만 배고픈 사람이 음식을 찾는 것처럼 균형 자체를 찾다 우연히 바흐를 만났다. 그는 잠깐 눈을 감고 베이어 다이내믹 T90이 들려주는 바흐의 연주를 감상했다. 그는 로잘린 투렉이 연주한 파르티타를 좋아했다.

 

 

 

 

()으로 표현된 균형 사이에서 허 대리는 잠깐 잠들었다 눈을 떴다. 눈을 뜨자 보이는 건 전 입주자가 담배를 많이 피워서 누렇게 변색된 좁은 오피스텔 천장뿐이었다. 현실은 담배 연기로 누레진 벽지같지만 적어도 비현실에서는 더러운 벽지를 보지 않아도 돼. 이렇게 허 대리는 자신을 타일렀다. 그는 조용히 침대에 눕고 아침에 충전시켜 둔 HTQTR VR을 머리맡에서 끌어와 머리에 감았다. ‘가만 보자. 어제 본 건 파랑, 은은한, 재즈였지. 오늘은 초록색이 보고 싶어. 은은한 것보다는 좀 더 생기 있는 소리를 듣고 싶어. 재즈 말고 클래식을 들을래.’ 허 대리는 생각의 흐름에 따라 초록, 생생, 클래식을 맞춰 두고 영상을 기다렸다. 눈앞에 아주 푸른 침엽수림이 펼쳐지고 망설임 없이 전진하는 현악 오케스트라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허 대리는 두 눈을 가리고 모니터로 나오는 숲을 바라보며 조금씩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기계의 것인지, 소개팅에서 만난 그녀의 것인지 모를 목소리가 반죽 같은 잠 속으로 들어가는 허 대리의 귀에 울렸다. “잘 자요. 오늘도 고생했어요.” 그 둘의 목소리가 너무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그는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박찬용 에스콰이어 기자 park.chanyong@joins.com

 

 

 

DBR mini box

 

 

 

 

 

 

2027년과 2016년의 AR/VR 관련 기술

 

3D 스캐너

3D 스캐너는 이미 보급 단계다. ‘스마트폰에 연결하는 소형 3D 스캐너는 킥스타터를 통해 2016 6월부터 판매를 시작했다. 현재 3D 프린터/스캐너의 유일한 기술적 문제는 3D 프린터의 생산 속도뿐이다. 사실 가장 큰 문제는 개인용 수요의 부재지만.

 

 

 

IoT

사물인터넷 역시 각종 제품에 활발히 이식되고 있다. 원래 신기술이 가장 활발히 이식되는 곳은 돈과 연결되는 분야다. IoT는 난방비를 줄여주는 보일러를 시작으로 확산되고 있다. LG유플러스와 귀뚜라미보일러는 2015 IoT 실내온도 조절기 판매 제휴를 체결했다. 기존 가스보일러에 IoT 실내온도 조절기를 부착하면 무선공유기와의 동기화를 통해 스마트폰에서 실내 온도를 조절할 수 있다.

 

 

 

키넥트

엑스박스 360으로 익숙한 키넥트 기술은 실제로 마이크로소프트가 연구하는 동작 인식 분야 중 하나다. 카메라 렌즈와 적외선 카메라를 이용해 인간의 움직임 자체를 입력장치화하는 것이다. 키넥트 기술을 이용한 버추얼 키보드 역시 개발이 완료된 상태다. 2014 MS 리서치는 동작 인식 키보드가 시연되는 동영상을 일반에 공개했다.

 

 

 

HMD

HMD 기술은 발전하고 있다. 성능 대비 가격이 내려가고 크기가 줄어들며 무게가 가벼워지고 있다. 현재의 발전 속도를 보면 8K급 해상도를 지원하는 HMD가 나올 날도 머지않았다. 8K 정도면 이론적으로는 인간의 시력으로 현실과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동아비즈니스리뷰 330호 플라스틱 순환경제 2021년 10월 Issue 1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