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 at a GlanceAI, 반도체, 배터리, 양자컴퓨팅 등 첨단 기술이 국가 안보와 경제 주권을 좌우하는 핵심 전략 자산으로 격상되면서 ‘기술의 안보재화(Techno-Nationalism)’가 다시 화두로 부상하고 있다. 미중 패권 경쟁은 공급망 블록화와 기술전쟁을 촉발했고 EU까지 가세해 자체 ‘기술 주권’ 노선을 가속화하고 있다. 이런 지각변동 속에서 글로벌 반도체·배터리 강국인 한국은 기술 블록화의 최전선에서 ‘강자이자 취약자’라는 이중적 지위에 놓여 있다. 이런 변화 속에서 한국 기업은 핵심 기술 내재화, 글로벌 공급망 다변화, 오픈 이노베이션, 인재 확보, ESG 연계 전략으로 대응해야 한다. 한국은 기술을 경제적 수단이 아닌 국가 생존의 전략 자산으로 인식하는 한편 테크노 내셔널리즘 시대를 주도할 실용적이고 윤리적인 기술 국가로 거듭나야 한다. 그래야 ‘샌드위치 리스크’의 구조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11 Business Trend Insight
테크노 내셔널리즘(Techno-Nationalism)국가가 기술 발전과 혁신을 단순한 경제적 자산이 아니라 국가 안보, 주권, 경쟁력 확보의 핵심 수단으로 보는 관점. 기술 개발을 통해 국제 질서에서 우위를 점하고 자국의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전략적 접근.
왜 다시 기술의 안보재화인가?최근 들어 기술의 안보재화를 뜻하는 테크노 내셔널리즘(Techno-Nationalism)이라는 개념이 전 세계적으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기술 민족주의’라고도 불리는 테크노 내셔널리즘은 기술을 안보재로 보는 관점으로 기술 혁신을 국가 안보와 경제적 번영, 지정학적 영향의 핵심 요소로 간주한다. 과거 냉전 시기에는 미국과 소련 간 군사 기술 경쟁이 세계 안보 위기의 본질이었다면 최근에는 민간 기술이 국가 안보의 핵심 자산으로 격상됐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기술이 단순히 경제적 이익을 창출하는 생산수단이나 상품 역할을 넘어 국가의 생존과 국제정치 질서 유지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기술의 안보재화 개념이 다시 각광받게 된 현실적인 배경으로 가장 먼저 짚어봐야 할 것은 ‘지정학적 불확실성의 전례 없는 확대’다. 특히 2020년대에 접어들면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됐고, 중동 지역에서는 이스라엘과 이란 간의 군사적 긴장이 반복적으로 고조되고 있다. 이 두 지역에서 벌어지는 갈등은 단순히 군사적 충돌에 그치지 않고 글로벌 공급망 전체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네온가스의 경우 전 세계 공급의 약 70%를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서 담당하고 있었으나 전쟁 발발 이후 공급이 급격히 위축됐다. 2022년 한국 반도체 업계는 실제로 네온가스 확보에 비상이 걸렸고 일시적으로 생산에 차질을 빚은 사례도 보고된다. 또 다른 예로 희토류는 전기차 배터리, 반도체, 군수 장비 등 첨단산업에 필수적인 원료이며 중국이 전 세계 생산의 약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중 갈등 심화 및 중국의 희토류 수출 규제 가능성은 한국을 포함한 글로벌 기업들에 직접적인 안보 위협으로 작용하고 있다.
둘째는 4차 산업혁명 기술과 안보의 결합이다. AI, 양자컴퓨팅, 6G, 반도체, 바이오 기술 등은 단순한 경제적 가치 창출을 넘어서 국가 경쟁력의 본질로 자리 잡았다. 특히 AI는 자율 무기 시스템, 감시 체계, 사이버 전쟁 등에 사용될 수 있으며 양자컴퓨팅은 기존 암호체계를 무력화할 수 있는 ‘게임 체인저’ 기술로 간주된다. 6G 통신 기술 역시 민간 통신뿐만 아니라 군사·안보 영역에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기술들은 더 이상 글로벌 공공재로 자유롭게 이전되거나 거래될 수 없는 민감한 전략 자산으로 분류되고 있다. 미국의 CHIPS and Science Act(반도체법), IRA(인플레이션감축법), EU Chips Act, 중국의 ‘중국 제조 2025’ 전략 모두 이런 배경에서 등장한 정책이다. 다시 말해 4차 산업혁명 기술은 이제 경제 패권과 안보 패권을 동시에 좌우하는 ‘쌍두마차’가 됐으며 이는 기술의 안보재화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셋째, 한국이라는 국가의 구조적 특수성이다. 한국은 세계적인 반도체, 배터리 강국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TSMC와 함께 초미세 공정 경쟁을 주도하고 있으며 LG에너지솔루션, SK온, 삼성SDI는 전기차 배터리 분야에서 글로벌 톱5에 들어간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한국은 미중 간 기술 패권 경쟁의 최전선에 놓여 있다. 한국의 반도체 수출에서 중국과 홍콩이 차지하는 비중은 2024년 기준 약 51.7%에 달하며 전체 대중국 수출에서도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또한 반도체 소재·부품·장비(소부장) 부문에서도 일본, 미국, 유럽 등의 기술에 일정 부분 의존하고 있는 구조다. 이는 한국이 기술 주권을 완전히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글로벌 기술 규제와 공급망 블록화의 영향을 가장 먼저 받는 국가라는 점을 의미한다. 실제로 2019년 일본의 수출 규제 당시 한국 반도체 산업은 일시적 충격을 경험했으며 이를 계기로 소부장 국산화 정책이 본격화됐으나 여전히 완전한 독립성 확보에는 시간이 걸리는 상황이다.
이처럼 한국은 반도체·배터리·AI 분야에서 세계적 리더임에도 불구하고 외부 의존도가 높은 ‘강자이자 취약자’라는 이중적 위치에 처해 있다. 특히 한국 경제의 대외 의존도가 약 70%에 달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기술의 안보재화 시대에 한국이 미중 양측으로부터 동시다발적인 압력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은 반도체 장비 수출 제한 등으로 중국 견제를 강화하고 있으며 중국은 반도체 등 핵심 부품의 내재화 및 자급자족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은 기술 주권을 강화하지 않으면 ‘샌드위치 리스크’에 휘말릴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에 직면해 있다.
넷째, 자유무역과 전략무역 시대의 교체다. 1990년대부터 2010년대 초까지 글로벌 경제는 WTO 체제하에서 자유무역과 글로벌 공급망 확대를 기반으로 성장해 왔다. 그러나 2020년대 들어 그 기조가 완전히 바뀌었다. 미중 무역전쟁은 단순한 관세 갈등을 넘어서 기술 규제, 투자 심사, 공급망 블록화로 확장됐으며 미국은 외국인투자심사제도(FIRRMA)를 강화하고 중국 기업의 인수합병(M&A)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EU 역시 데이터 주권, AI 규제 등 독자적 기술 규제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세계는 이제 더 이상 WTO 중심의 다자무역 체제에 의존하지 않고 자국 중심의 경제안보 정책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오늘날 기술의 안보재화는 단순한 트렌드가 아니라 구조적이고 필연적인 세계 질서의 변화다. 지정학적 불확실성, 4차 산업혁명 기술의 군사적·안보적 가치 확대, 한국 경제의 구조적 특수성, 자유무역에서 전략무역으로의 시대 전환까지 모두가 이 변화를 가속화하고 있다. 한국 기업과 정부는 더 이상 과거처럼 기술을 경제적 수단으로만 바라볼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해 있으며 이제는 기술을 국가 생존과 직결된 전략 자산으로 바라보고 정책과 기업 전략을 재설계해야 할 시점이다.
테크노 내셔널리즘,과거와 어떻게 달라졌나오늘날 다시 주목받고 있는 테크노 내셔널리즘, 즉 기술의 안보재화라는 개념은 결코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이미 20세기 후반부터 주요 선진국들은 기술 경쟁력을 국가안보의 핵심 요소로 간주해왔으며 글로벌 무역 질서 속에서 기술 통제를 전략적으로 활용해왔다.
다만 최근의 테크노 내셔널리즘 전개 양상은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과거의 테크노 내셔널리즘은 주로 하드웨어 중심이었다. 반도체 제조, 자동차, 가전제품 등 물리적 상품 생산이 그 핵심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소프트웨어, 데이터, AI 알고리즘까지 그 범위가 확장됐다. 미국은 AI 윤리 가이드라인, 양자컴퓨팅 표준, 블록체인 표준 등 소프트웨어와 데이터 영역에서도 글로벌 표준 경쟁을 주도하고 있으며 중국 역시 자체 AI 알고리즘 개발과 데이터 국유화를 적극 추진하고 있다. 특히 각 국가가 데이터를 안보와 직결되는 자산으로 인식하면서 ‘데이터 국경(Data Border)’이라는 개념까지 등장했다.중국의 경우 사이버보안법(2017년)과 데이터보안법(2021년), 개인정보보호법(2021년)을 통해 자국 내 생성된 모든 데이터를 국내 서버에 보관하도록 강제하고 있으며 EU도 GDPR(일반개인정보보호법, 2018년부터 적용 시작)을 통해 역내 데이터 보호를 강화하고 있다. 이런 흐름은 한국 기업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글로벌 기업과 협력하거나 해외 진출 시 각국의 데이터 주권 규제에 대응하기 위해 별도의 클라우드 인프라를 구축하거나 현지 서버를 운영해야 하는 상황이 늘어나고 있다.
중국의 기술 굴기와 ‘자립자강(自立自强)’ 정책도 오늘날의 테크노 내셔널리즘에서 중요한 특징이다. 중국은 단순히 외국 기술을 도입·복제하는 수준을 넘어 자체 기술 개발 및 산업 생태계 구축에 국가적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반도체 분야에서는 SMIC, YMTC 등 국영 기업을 중심으로 첨단 공정 개발을 추진 중이며 AI 분야에서는 바이두, 알리바바, 텐센트 등 BAT 기업들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모델을 출시하고 있다. 특히 중국 정부는 자립자강을 국가 전략으로 채택하고 기술 내재화를 위한 대규모 투자 및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경제 정책 차원을 넘어 국가안보 및 군사력 강화를 위한 전략적 의도가 포함된 정책이다. 중국의 이런 행보는 미국과의 충돌 가능성을 높이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글로벌 기업들에는 선택과 집중을 강요하고 있다.
테크노 내셔널리즘은 20세기 후반부터 이어진 글로벌 경제 질서 속에서 점진적으로 진화해 왔으며 현재는 그 범위와 강도가 과거보다 훨씬 더 복합적이고 심화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과거 미국-일본 반도체 전쟁이 한정적인 영역에서 벌어졌다면 오늘날 미중 패권 경쟁은 반도체, AI, 양자컴퓨팅, 바이오, 6G 등 거의 모든 첨단산업 영역을 포괄하고 있으며 EU까지 적극 가세하고 있다. 또한 단순히 국가 간 무역 규제를 넘어 글로벌 기업들의 경영 전략과 공급망 구조까지 근본적으로 재편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와 본질적 차이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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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노 내셔널리즘의 변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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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90년대에는 미국-일본 무역 갈등 시기에 테크노 내셔널리즘이 부상했다. 당시 일본은 반도체, 자동차, 전자제품 등 첨단 제조업 분야에서 미국을 위협하는 경제 강국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이에 대응해 미국은 1988년 ‘무역법 개정’을 통해 슈퍼 301조를 도입했다. 슈퍼 301조는 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무역 상대국의 불공정 관행을 조사하고 필요시 보복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한 강력한 무역 규제 장치였다. 이어 미국은 일본 반도체 산업을 겨냥해 반도체 반덤핑 관세 부과, 수출 규제, 기술협정 체결을 강제했다. 1986년 미국과 일본이 맺은 ‘미일 반도체 협정(Semiconductor Agreement)’은 일본 기업의 시장점유율을 제한하고 미국 기업에 우호적인 시장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대표적인 테크노 내셔널리즘 사례로 꼽힌다. 이 협정은 이후 세계 반도체 공급망 구조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 미국이 중국에 취하는 반도체 규제와 매우 유사한 형태를 띤다.
그러다 2010년대 이후에는 미중 무역전쟁을 중심으로 한 테크노 내셔널리즘이 두드러졌다. 미국과 중국은 2018년 본격적인 무역전쟁을 시작했으며 그 핵심은 기술 패권 경쟁에 있었다. 중국은 ‘중국 제조 2025(Made in China 2025)’ 전략을 통해 반도체, AI, 로봇, 항공우주 등 첨단산업 분야에서 자립을 선언했고 이에 미국은 CHIPS and Science Act(2022년)와 인플레이션감축법(IRA, 2022년)을 통해 중국의 기술 굴기를 견제하고 있다. 미국은 특히 반도체 제조 장비, 첨단 반도체 칩, AI 칩에 대해 중국 수출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으며, ASML(네덜란드), TSMC(대만), 삼성전자(한국)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에 대해서도 미국의 규제 방침에 협력할 것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과거 미일 갈등이 주로 제조업 중심이었다면 미중 갈등은 AI, 양자컴퓨팅, 바이오 등 신기술 분야까지 포함하는 것이 특징이다.
여기에 EU(유럽연합)의 기술 주권 전략 등장으로 최근에는 유럽까지 가세했다. 과거에는 미국과 일본, 미국과 중국 간 양자 구도에서 테크노 내셔널리즘이 화두였다면 이제는 유럽도 독자적 기술 주권 확보를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European Chips Act(2023년), GAIA-X 프로젝트, 데이터 주권(Data Sovereignty) 전략이다. European Chips Act는 EU 차원에서 반도체 생산 능력을 확대하기 위한 정책으로 2030년까지 EU 내 반도체 생산 비중을 세계 시장의 20%까지 확대한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있다. 또한 GAIA-X 프로젝트는 EU 내 데이터 인프라 독립을 목표로 미국의 AWS, MS 애저와 같은 글로벌 빅테크 의존도를 줄이기 위한 유럽형 클라우드 플랫폼 구축을 추진 중이다. 이처럼 EU 역시 테크노 내셔널리즘의 흐름에 적극 참여하고 있으며 미국-중국-유럽 간 삼자 경쟁 구도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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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패권 경쟁 속테크노 내셔널리즘의 구조이러한 미중 패권 경쟁 속에서 테크노 내셔널리즘은 입체적이고 다층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한국과 같은 중견국에는 더욱 복잡한 전략적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
1) 글로벌 공급망의 블록화무엇보다 두드러지는 변화 중 하나는 ‘글로벌 공급망의 블록화’다. 과거에는 WTO 체제하에서 부품과 원자재, 완제품이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며 글로벌 생산 체계가 작동했다. 그러나 미국은 2020년대 초부터 중국과의 경제 및 기술 분리를 본격화하면서 ‘프렌드쇼어링(Friend-Shoring)’과 ‘온쇼어링(On-Shoring)’ 전략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프렌드쇼어링은 한국, 일본, 대만, 유럽과 같은 우방국 중심으로 핵심 부품과 자재 공급망을 재편하는 것이며, 온쇼어링은 반도체, 배터리, 첨단 제조 시설을 자국 내로 유치하는 전략이다. 예를 들어 미국은 TSMC와 삼성전자를 초대형 반도체 공장 투자 대상으로 삼았으며 인텔 역시 오하이오주와 뉴욕주에 대규모 반도체 공장 설립 계획을 발표했다. 반면 중국은 RCEP(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 일대일로(BRI)를 통해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지역과의 경제 협력 강화를 시도하고 있으며 희토류와 배터리 핵심 광물 등 전략 자원의 내수 공급 능력을 높이는 데 집중하고 있다.
미국은 기술 분야별로 세분화된 맞춤형 기술 동맹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이는 기존 냉전 시기와 다른 동맹 양상이다. IPEF(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는 디지털 무역, 공급망, 청정에너지, 탈탄소화 등 포괄적 협력 체계이며, 쿼드(Quad; 미국, 일본, 호주, 인도)는 AI, 사이버 보안, 우주 탐사 협력에 집중하는 동맹이다. AUKUS(호주-영국-미국)는 핵잠수함 기술과 AI 무기 시스템 등 군사 기술 공유를 핵심으로 한다. 한편 중국은 ‘디지털 실크로드’와 ‘중국-아세안 기술 협력 프로그램’을 강화하면서 AI, 5G, 위성 인터넷 분야에서 일대일로 참여국과의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즉 미중 양국은 단순히 국가 단위의 기술 경쟁을 넘어 각자의 우방국 네트워크를 통해 공급망과 기술 표준까지 함께 구축하는 전략을 펼치고 있다.
이런 기술 블록화 구도 속에서 글로벌 기업들은 ‘지정학적 플레이어’로서의 역할과 함께 커다란 딜레마에 직면해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대만의 TSMC다. TSMC는 본사가 대만에 있지만 미국 애리조나와 일본 구마모토에 대규모 반도체 공장을 구축하고 있으며 이는 단순한 시장 확대 목적이 아니라 미국과 일본 정부의 요청과 지원에 따른 것이다. 화웨이는 미국의 수출 통제 조치로 인해 자급자족형 반도체 설계 및 생산 시스템을 강화하고 있으며 SMIC 등 국영 기업과 협력해 기술을 내재화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역시 미국과 중국 양측 모두에 생산기지를 보유하고 있지만 미국 정부의 기술 수출 규제 강화로 인해 중국 내 공장 운영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상황이다. 과거 글로벌 기업들은 주로 비용 절감과 효율성 극대화를 위해 글로벌 생산기지를 자유롭게 선택했지만 이제는 국가 간 기술 규제와 지정학적 리스크를 고려해 생산기지와 기술 협력 구조를 재편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됐다.
2) 기술 표준 경쟁미중 테크노 내셔널리즘의 또 다른 중요한 축은 ‘기술 표준 경쟁’이다. 과거 산업혁명 시기 철도 규격이나 무기 규격이 산업 패권을 좌우했던 것처럼 21세기에는 AI, 5G, 6G, 블록체인, 클라우드 등 신기술 분야에서의 표준 주도권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미국은 IEEE, NIST(미국표준기술연구소)를 중심으로 글로벌 기술 표준을 주도하고 있으며 AI 윤리 가이드라인, 사이버 보안 표준 등 다방면에서 국제 규범을 제시하고 있다. 반면 중국은 국제전기통신연합(ITU), 국제표준화기구(ISO) 등 국제기구에서 영향력 확대를 시도하고 있으며 2024년에는 ‘중국 AI 표준 체계’를 공식 발표하며 미국과 유럽을 견제하고 있다. 예를 들어 5G의 경우 화웨이는 5G 핵심 표준 특허에서 전 세계 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6G 표준화 주도권도 노리고 있다. 미국은 이에 맞서 오픈랜(Open RAN) 기술을 지원하며 비(非)화웨이 기술 생태계를 육성하고 있다. AI 분야에서도 중국과 미국은 각기 다른 윤리 기준과 기술 규범을 제시하며 치열한 주도권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런 기술 표준 경쟁은 단순히 경제적 이익이나 기업 간 시장점유율 싸움에 그치지 않고 국가 정체성과 이념의 대리전으로 번지고 있다. 미국은 자유와 개방이라는 가치를 내세우며 자국 중심의 기술 규제와 공급망 블록화 정책을 정당화하고 있는 추세다. 반면 중국은 국가 주권과 내재적 발전 권리를 강조하며 독자 기술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데이터 안보, 사이버 주권 같은 개념이 부각되면서 단순한 경제 블록화에서 한발 더 나아가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라는 글로벌 이념 대결 구도가 펼쳐지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은 ‘클린 네트워크’ 정책을 통해 화웨이와 같은 중국 기업의 통신 장비를 배제하고 있으며 중국은 자국 내 생성된 모든 데이터를 국내 서버에 보관하도록 강제하는 사이버 안전법과 데이터 보안법 및 개인정보 보호법을 시행하고 있다. 이런 정책들은 단순히 기술이나 경제 문제를 넘어 국가 간 신뢰와 가치 체계까지 흔드는 결과를 낳고 있다.
이처럼 미중 패권 경쟁 속에서 테크노 내셔널리즘은 단일 차원이 아닌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한국과 같은 중견국에는 특히 복잡하고 어려운 전략적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은 미국과 안보 동맹 관계에 있으면서도 중국과는 경제적으로 깊은 상호 의존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반도체와 배터리 같은 핵심 산업에서는 양국 모두와 협력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미중 양국의 기술 블록화와 표준 경쟁, 공급망 재편이 본격화되면서 한국 기업들도 더 이상 양다리 전략을 지속하기 어려운 구조적 변화에 직면해 있다.
테크노 내셔널리즘 시대한국의 딜레마와 기회한국은 지금 테크노 내셔널리즘이라는 새로운 글로벌 질서 아래에서 그 어느 국가보다도 복합적인 전략적 딜레마와 함께 구조적 기회를 마주하고 있다. 가장 우선적으로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와 경제 구조를 살펴보면 한국은 미국과는 전통적인 군사·안보 동맹국이자 주요 반도체·배터리 분야 기술 파트너다. 이와 동시에 중국과는 최대 교역국으로서 깊은 경제적 의존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2024년 기준 한국 전체 수출 중 대중국 비중은 약 19%에 달하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반도체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다. 실제로 한국 반도체 전체 수출의 약 40%가 중국으로 향하고 있으며 이는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 반도체 산업이 중국 시장에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돼 있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메모리 반도체뿐 아니라 시스템 반도체, OLED, 이차전지 소재 등 첨단 부품 대부분에서 중국은 한국 기업들에 주요 매출처이자 공급처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한국에 ‘양면 압력(Double Bind)’으로 작용한다. 미국은 반도체 제조 장비, AI 반도체, 첨단 칩 분야에서 중국에 대한 수출을 원천 차단하고 있으며 한국 기업들에도 미국의 규제 정책에 적극 협조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특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중국 내 반도체 공장 운영에 대해 미국 정부로부터 기술 제한 및 투자 승인 조건을 부여받은 상태이며 이는 장기적으로 한국 기업들의 중국 내 사업 운영에 심각한 제약 요인이 될 수 있다. 반면 중국 역시 한국과의 경제적 연결고리를 일방적으로 끊을 경우 자체적으로도 큰 손실을 감수해야 하므로 표면적으로는 협력 기조를 유지한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반도체 국산화, 소부장 내재화 정책을 적극 추진하며 한국 의존도를 줄이려 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YMTC, SMIC 등 자국 반도체 기업 육성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고 있으며 희토류·리튬·코발트 등 전략 자원의 대외 수출 규제 카드도 전략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즉 한국은 미국과 중국 양측 모두에게 협력 파트너이자 규제 및 경쟁 대상이라는 모순적 지위에 놓여 있다.
또한 한국 내부적으로도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대응 역량의 격차가 커지고 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LG에너지솔루션과 같은 글로벌 대기업들은 미국·유럽·동남아 지역에 생산기지를 다변화하면서 대응하고 있다. 자본력과 글로벌 네트워크를 활용해 미중 갈등에 대한 리스크를 일정 부분 흡수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국내 소부장 분야 중소기업들은 대부분 내수 및 중국 시장에 대한 의존도가 높고 기술 내재화 수준도 상대적으로 낮다. 실제로 2019년 일본의 수출 규제 당시 한국 소부장 중소기업들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으며 일부 기업은 생산 중단 위기까지 경험한 바 있다. 정부의 ‘소부장 2.0’ 정책으로 기술 국산화가 많이 진척됐지만 여전히 첨단 반도체 공정용 포토레지스트, 이차전지용 전해질 등 일부 품목에서는 해외 의존도가 높은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크노 내셔널리즘 시대는 한국에 새로운 성장 기회도 제공한다. 한국은 반도체, 배터리, AI, 바이오헬스 분야에서 글로벌 수준의 기술 경쟁력을 갖추고 있으며 미국·EU 모두 한국 기업을 핵심 전략 파트너로 인식하고 있다. 이런 기회와 위기가 공존하는 상황에서 한국이 택해야 할 전략 방향은 명확하다. 그것은 ‘핵심 기술 내재화’와 ‘선택적 개방(Selective Openness)’이라는 두 가지 축을 중심으로 국가 전략을 설계하는 것이다. 반도체, 배터리, AI, 양자컴퓨팅과 같은 전략 기술 분야에서는 미국·중국 어느 쪽에도 과도하게 의존하지 않는 독자적 기술 개발과 생산 능력을 확보해야 하며 비핵심 분야에서는 글로벌 협력과 오픈 이노베이션을 적극 활용해 기술 생태계의 유연성을 유지해야 한다. 한국의 상황에 맞는 테크노 내셔널리즘 전략은 폐쇄적 자립주의나 무조건적인 자유주의 사이에서 절충점을 찾는 실용주의 전략 모델을 취해야 한다.
한국 기업의 대응 전략테크노 내셔널리즘이 글로벌 경제 질서의 핵심 원리로 자리 잡은 지금, 한국 기업들은 과거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경영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과거에는 비용 절감과 생산성 중심의 글로벌 분업 체계(Global Value Chain) 최적화가 기업 전략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국가별 기술 규제, 공급망 블록화, 기술 표준 경쟁, 인재 확보 전쟁까지 고려해야 한다. 한국 기업들은 더 이상 특정 시장이나 국가에 지나치게 의존해서는 생존이 어려운 구조적 환경에 놓여 있다. 이에 따라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대응 전략을 우선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1) 핵심 기술 내재화와 R&D 투자 확대한국 기업들은 반도체, 배터리, AI, 바이오헬스와 같은 첨단산업 분야에서 글로벌 선도 지위를 유지하고 있지만 핵심 공정 기술이나 원천기술의 일부는 여전히 해외에 의존하고 있다. 특히 반도체 극미세 공정(5㎚ 이하) 장비, 전고체 배터리 소재, AI 대규모 언어모델(LLM), 양자컴퓨팅 핵심 알고리즘 등 분야는 미국, 유럽, 일본 기업들의 기술이 선도적인 상황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LG에너지솔루션 등 주요 대기업들은 매출 대비 R&D 투자 비중을 평균 8% 이상으로 확대하고 있으며 국가 차원에서도 ‘K반도체 전략’과 ‘국가 AI 전략’을 중심으로 대규모 연구개발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삼성전자는 차세대 게이트올어라운드(GAA) 반도체 공정 개발에 약 450조 원 규모의 투자 계획을 발표한 바 있으며 SK온과 LG에너지솔루션도 전고체 배터리 개발을 위한 전담 조직을 통해 파일럿 라인 구축과 기술 협업에 적극 나서고 있다. 중소기업 분야에서도 정부는 ‘소부장 특화단지’를 조성하고 첨단 소재·부품·장비 기술 국산화율을 70%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2) 글로벌 공급망 다변화삼성전자는 이미 인도 노이다 공장에서 연간 1억 대 이상의 스마트폰을 생산하고 있으며 LG에너지솔루션과 SK온은 폴란드, 헝가리, 미국 조지아주, 테네시주 등지에 대규모 배터리 공장을 운영하거나 신설하는 중이다. 특히 미국 바이든 행정부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은 미국 내 생산 시설을 보유한 기업에만 세제 혜택과 보조금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 기업들은 미국 내 공장 투자를 더욱 확대할 수밖에 없다. 단순히 생산 거점을 이전하는 것을 넘어 핵심 원재료 및 부품 공급망도 동남아시아, 인도, 중남미 등으로 다변화하려는 노력이 본격화되고 있다. 예를 들어 포스코는 리튬·니켈 등 배터리 원료 공급망을 아르헨티나, 인도네시아, 호주 등으로 확장하고 있으며, 현대자동차는 아시아(중국, 인도, 베트남, 인도네시아), 유럽(체코, 슬로바키아, 터키), 중동(사우디) 등 전 세계에 생산 기지를 두고 글로벌 공급망을 강화하고 있다.
3) 오픈 이노베이션 전략의 적극적 활용과거 한국 기업들은 내부 개발 중심의 R&D 체제를 고수해왔지만 이제는 글로벌 기술 협력과 전략적 제휴 없이는 생존이 어려운 시대가 됐다. 최근에는 대기업뿐 아니라 중견·중소기업까지 외부와의 협업을 필수 전략으로 인식해 수평적 혁신 네트워크가 확산되고 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오픈 이노베이션 프로그램 참여 기업 수는 2018년 18개사에서 2023년 361개사로 급증했으며 참여 기업의 연평균 수출 증가율도 비참여 기업 대비 두 배 이상 높게 나타났다. 이는 외부 기술과 아이디어의 전략적 수용이 기업 경쟁력을 크게 높인다는 점을 보여준다. 아울러 정부와 민간 플랫폼은 기업 간 기술 매칭, NDA 체결, 협업 사례 공유 등 오픈 이노베이션 생태계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이처럼 오픈 이노베이션은 단순한 기술 보완을 넘어 글로벌 협업을 통한 기술 내재화와 시장 확대를 동시에 추구하는 핵심 전략으로 부상하고 있다.
4) 인재 확보 전략 강화한국의 반도체, AI, 양자컴퓨팅, 바이오헬스 분야에서 인재 확보는 기업 생존의 핵심 전략이 됐지만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는 ‘왜 인재가 떠나는가’에 대한 구조적 분석이다. 실제로 많은 석·박사급 인재가 미국, 유럽, 중국 등으로 진출하는 배경에는 단순한 임금 수준을 넘어 연구 자율성, 풍부한 연구 자금, 글로벌 무대에서의 경력 기회 등 성장 가능성에 대한 기대감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한국은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기업 문화, 연구 성과에 대한 낮은 보상 체계, 장기적 커리어 비전의 부족으로 인해 우수 인재가 국내에 머물 만한 인센티브를 충분히 제공하지 못한다. 따라서 단기적 채용 프로그램이나 교육기관 설립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성과 중심의 연구 환경 조성, 글로벌 수준의 보상 체계, 유연한 인사 시스템 구축 등 본질적인 구조 개혁이 병행돼야 한다. 또한 해외에서 커리어를 쌓은 인재가 다시 돌아올 수 있는 ‘리턴 패스(return path)’를 설계해 국내 생태계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는 순환형 인재 전략도 활용해야 한다. 인재 전략의 핵심은 유출을 막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고 싶게 하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5) ESG 경영과 테크노 내셔널리즘의 연계리튬, 코발트, 니켈 등 배터리 핵심 소재 채굴 과정에서의 환경 파괴와 인권 문제가 국제사회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됨에 따라 국내 배터리 업계는 순환경제 체계 구축에 주력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자체 자회사 설립 대신 현지 리사이클러와 협력해 프랑스 데리슈부르그와 합작 공장을 설립하고 북미에서는 도요타통상과 GMBI를 공동 설립했다. 캐나다 Li-Cycle과는 장기계약을 맺고 북미 내 배터리-to-배터리 모델을 구현 중이다. 삼성SDI는 ESG 전략의 일환으로 유럽·북미 거점 인근에 재활용 허브를 구축하고 있다. 헝가리 스크랩은 성일하이텍에서 처리되며 독일에도 대규모 재활용 공장을 건설 중이다. 삼성SDI는 재활용 금속 사용 비중을 14%까지 확대하는 등 구체적 성과도 달성하고 있다. 이는 환경·사회적 책임을 반영한 ESG 기반의 글로벌 경쟁력 확보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기술 안보 시대, 한국의 생존 전략테크노 내셔널리즘이 세계 경제와 국제 정치 질서의 핵심 원리로 자리 잡은 지금, 한국은 더 이상 기술을 단순한 산업 경쟁력의 수단으로만 다룰 수 없는 시대에 들어섰다. 기술은 이제 국가 생존과 직결되는 안보 자산이며 기업과 정부 모두 이에 맞는 전략적 사고방식과 실행 체계를 갖추지 않으면 글로벌 경쟁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다. 특히 반도체, 배터리, AI, 양자컴퓨팅, 바이오헬스 등 전략 기술 분야에서 한국이 글로벌 선도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가 역량을 결집해 대응 모델을 구체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테크노 내셔널리즘 전략 실행에 있어 핵심으로 삼아야 할 방향은 ‘선택적 개방(Selective Openness)’이다. 과거 미국식 테크노 내셔널리즘은 완전한 기술 자립과 폐쇄적 보호주의로 흘렀고 중국식 테크노 내셔널리즘은 국가 주도의 전면적 기술 통제로 이어졌다. 이에 반해 한국은 독자성과 개방성의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즉 반도체, 배터리, AI와 같은 전략 기술 분야에서는 독자적 기술 내재화와 생산 능력 확보를 국가 차원에서 적극 지원하되 그 외 비핵심 분야에서는 글로벌 협력과 오픈 이노베이션을 최대한 활용하는 유연한 전략을 채택해야 한다. 이와 같은 선택적 개방 모델은 한국의 산업 구조와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할 때 가장 현실적이며 효과적인 접근법이다.한국은 미중 양국 사이에서 단순한 수동적 추종자가 아니라 기술 중재자 역할을 수행할 역량과 위치를 갖추고 있다. 예를 들어 AI 윤리 규범, 반도체 공급망 관리, 데이터 보안 표준 등 분야에서 한국은 미국과 중국 모두와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므로 글로벌 컨센서스 형성을 주도할 수 있는 중립 플랫폼을 제공할 수 있다. 특히 한국이 G7 국가에 준하는 기술력과 경제력을 갖춘 민주주의 국가로서 기술 외교(Technology Diplomacy)를 새로운 국가 전략으로 채택하는 것은 매우 시의적절하다. 이를 위해 한국은 UN, OECD, WTO 등 국제기구를 통한 다자 협의체 참여를 확대하고 글로벌 기술 거버넌스 논의에서 적극적인 발언권을 행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테크노 내셔널리즘 시대에는 윤리적 기술 개발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기술 안보와 경제 안보를 강조하다 보면 자칫 AI 무기화, 데이터 프라이버시 침해, 노동권 침해 등 부작용이 뒤따를 수 있다. 한국은 이런 문제를 선제적으로 관리하고 글로벌 사회에 윤리적 기술 개발 리더십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다. 앞으로는 AI 윤리, 데이터 보안, 인권 존중까지 포함하는 포괄적 기준을 산업 전반에 적용해야 한다.
테크노 내셔널리즘으로 대표되는 글로벌 질서의 변화는 한국이 새로운 위상과 역할을 정립할 절호의 타이밍이다. 이 시대는 위기인 동시에 기회이며 그 기회를 살리는 것은 결국 국가적 의지와 기업들의 전략적 선택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