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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경영 마스터클래스

제조 데이터 요구하는 EU의 DPP 제도

김동영,정리=배미정 | 419호 (2025년 6월 Issue 2)
EU ‘데이터 보호무역’ 압박 거세질 듯
韓, 데이터 공유-거래 생태계 구축해야
Article at a Glance

2025년 하노버 산업박람회에서는 ‘순환경제’가 주목받았다. 이는 EU의 디지털 제품 여권(DPP) 제도 도입과 무관하지 않다. DPP는 제품의 상세한 제조 데이터를 광범위하게 공개할 것을 요구하며 데이터 보호무역으로 발전할 우려가 있다. 특히 한국 기업의 EU 시장 진출에 새로운 비관세 장벽 및 구조적·기술적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이로 인해 배터리, 섬유 등 주요 산업에 데이터 수집·관리 및 공급망 노출 부담이 커질 가능성이 크다. 이런 위기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고 데이터 주권을 확보하기 위해 한국 또한 자체적인 산업 데이터 생태계 구축이 시급하다. 정부의 일방적 추진이 아닌 민간의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데이터 공유 및 거래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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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4월 독일에서 열린 하노버 산업박람회(Hannover Messe) 부스 곳곳에서는 ‘순환경제(Circular Economy)’라는 키워드가 눈에 띄었다. 특히 매년 유럽연합(EU)의 디지털 전환 전략의 발전 단계를 소개하는 8관에서는 각국 정부와 기업들이 모여 순환경제 구현과 대응 정책 설명에 한창이었다. SAP와 같은 제조 솔루션 기업이나 데이터 정책을 논의하는 국가 부스에서도 순환경제가 핵심 주제였다. 뭔가 의아했다. 유럽의 녹색전환 전략은 익히 알려졌지만 제조업체들이 나서서 적극적으로 설파하는 모습이 낯설었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에는 ‘디지털 제품 여권(DPP, Digital Product Passport)’ 제도가 있다. EU는 순환경제 구현을 위해 세부 계획을 수립하면서 DPP 도입을 의무화했다. 국경을 넘을 때 각국 정부가 발행한 여권이 사람에 대한 신원을 보장하듯 디지털 제품이 수출될 때 해당 제품을 보증할 수 있는 여권제도를 시행하겠다는 것이다. 보증은 구체적으로 데이터를 매개로 이뤄진다. DPP는 제품수명주기와 관련한 정보가 담긴 데이터 덩어리로 이 데이터를 기반으로 수명이 끝난 제품이라도 재활용 및 재사용이 가능한 부품과 폐기할 부품을 구분해 순환경제를 구축하겠다는 아이디어다. 2026년을 시작으로 배터리(차량용)와 섬유, 철강 제품부터 순차적으로 적용될 예정이다.

문제는 DPP를 통해 각 기업의 제조 경쟁력이 노출될 수 있다는 점이다. DPP가 요구하는 데이터는 단순 라벨링 수준을 넘어선다. 앞으로 유럽에 제품을 판매하는 기업은 제품의 탄소발자국, 원자재 및 부자재의 원산지, 함유물질 정보, 재생원료 사용 비율 등 제품과 관련된 모든 데이터를 측정하고 기록해 DPP 시스템에 등록해야 한다. 공급망 구조, 원자재 출처, 사용된 소재의 상세 내역 등은 그 자체가 제조 노하우나 공급망이 담긴 기밀 정보에 가깝다. 유럽의 순환경제 전략을 ‘환경을 가장한 정보 요구’로 경계해야 하는 이유이다.

더 큰 우려는 이런 디지털 전환 전략이 데이터 보호무역의 형태로 발전할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순환경제 전략은 현재 유럽이 추진 중인 분권형 데이터 공유 생태계인 ‘가이아엑스(GAIA-X)’ 전략과 맞물리면 데이터 보호무역의 수단으로 확장될 수 있다. EU의 데이터 생태계에 참여한 국가 간에만 실질적인 무역이 이뤄지는 ‘데이터 스페이스 블록’ 혹은 ‘데이터 프렌드-쇼어링’의 모습으로 구체화될 수 있다. 이는 제품 경쟁력과 무관하게 EU 시장 진출의 제약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업 및 국가 경쟁력에 심각한 위기 요인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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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U의 데이터 주권 및 데이터 생태계 전략

‘순환경제’와 ‘DPP’ 제도로 대표되는 유럽의 디지털 전략의 속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EU의 데이터 주권을 이해해야 한다. DPP 제도 역시 EU 데이터 전략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유럽의 데이터 전략은 ‘일반개인정보보호법(GDPR, General Data Protection Regulation)’으로 대표되는 개인정보의 측면과 거대 플랫폼 사업자의 시장 지배력 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디지털시장법(DMA, Digital Markets Act)’, 인공지능 규제에 관해선 세계 최초로 제정된 ‘EU 인공지능 법(EU AI Act)’으로 구현되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주목해야 하는 움직임은 데이터 주권을 확보하기 위한 데이터 생태계 프로젝트인 ‘가이아엑스’이다.

1) Industrie 4.0 전략과 데이터

유럽은 일찌감치 제조 중심의 디지털 전환 전략을 수립했다. 한때 ‘4차 산업혁명’으로 표현되는 ‘Industrie 4.0’ 전략이 그것이다. 방대한 내수시장과 오랜 기간 세계의 공장 역할을 담당하던 중국과 고부가가치 무형 산업 중심의 전략을 펼치던 미국 사이에 끼인 독일이 제조업의 생산성 향상을 위해 ‘제조의 서비스화’라는 개념을 들고나오면서 구체화된 전략이다.

‘사이버-물리 시스템(CPS, Cyber-Physics System)’은 이 전략을 표현하는 핵심 키워드다. 디지털 트윈과 동일한 개념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사이버-물리 시스템과 디지털 트윈 모두 오프라인과 온라인 세계를 연결해 제조 생산성을 높이려는 전략으로 현실 세계의 실물 객체를 가상 세계의 쌍둥이 객체로 만들고 가상 세계에서 현실 세계의 시뮬레이션이 가능한 플랫폼을 의미한다. 미국과 유럽 외에도 제조업 기반의 산업구조를 갖춘 국가는 모두 각자의 디지털 트윈 전략을 갖고 있다. 중국의 ‘중국제조 2025’, 한국의 ‘한국 제조업 혁신 3.0’ 등이 해당된다.

제조의 디지털화, 제조의 서비스화 전략의 핵심은 제조 데이터에 있다. 현실과 가상이 완벽하게 동기화돼 현실에 축적된 제조 노하우가 가상 환경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하기 위해서는 암묵적 지식(tacit knowledge)1 을 비롯한 생산의 모든 과정이 데이터로 변환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현실의 실물 객체를 사물인터넷을 통해 측정하고 이를 디지털 신호로 변환해 5G 이상의 환경에서 클라우드로 전송할 수 있는 인프라가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프라는 특정 기업이 아닌 공급망에 포함된 모든 기업에 존재해야 한다. 일부라도 빠지면 현실을 그대로 가상으로 옮겨오기가 어렵다. 가상공간에서의 시뮬레이션 혹은 조작이 현실 세계에 실시간으로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현실 데이터의 확보가 필수다. 물론 AI 기술의 발전으로 일부 결측치는 예측을 통해 채울 수 있지만 근본적인 공백은 해결하기 어렵다. 초기 유럽의 Industrie 4.0 전략이 공장의 스마트화에 초점을 맞춘 이유다.

2) 데이터 전략, 생성에서 공유로

진짜 문제는 공장의 스마트화를 통해 데이터가 어느 정도 생성되자 드러났다. 데이터가 아무리 축적돼도 기업들은 서로 공유하려 하지 않았다. 데이터에는 각 기업의 경쟁우위를 가져다주는 무형자산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무형자산은 기업의 생산성 향상에 큰 도움을 주지만 타사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 이에 연구개발 투자를 통해 경쟁력 높은 무형자산을 개발한 기업은 어떻게든 감추고 싶어 한다. 그런데 데이터를 공유하는 과정에서 자사의 경쟁우위 요인이 다른 회사로 넘어갈 위험이 커진다. 데이터 공유가 이뤄지지 않는 이유이다. 한편 데이터가 저장되는 클라우드 산업 환경도 큰 문제다. 아무리 많은 유럽의 공장이 스마트화되더라도 생성되는 데이터는 모두 미국 기업의 데이터센터에 저장되고 있었다. 미국도 발 빠르게 대응했다. 2018년 ‘클라우드 법(CLOUD Act)’을 제정해 미국 수사기관이 미국 내외에 저장된 데이터에 접근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데이터 형태로 저장된 유럽의 제조 경쟁력이 유출될 가능성이 발생한 것이다.

유럽은 이 문제의 해법을 ‘데이터 주권(Data Sovereignty)’에서 찾았다. 분산형 클라우드 철학을 기반으로 데이터가 어디서 생성되고, 어디에 저장되는지와 무관하게 신뢰할 수 있는 주체끼리만 데이터를 거래하고 공유할 수 있도록 했다. 이를 위해 정부는 데이터 거래를 위한 원칙을 수립하고 이를 준수하는 기업 간에만 거래가 가능한 생태계로 가이아엑스를 구축했다. 생태계 참여를 위해서는 공통의 거래 원칙은 물론 상호 간에 스필오버(spillover)2 효과와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무형자본이 데이터 형태로 존재해야 한다. 생태계 참여는 자유지만 생태계에 참여하지 않을 경우 다른 기업의 데이터를 공유 혹은 거래할 수 없다는 점에서 참여 여부가 중요해지고 있다.

이론적으로만 보였던 데이터 주권 전략이 자동차 산업을 시작으로 성과를 드러내고 있다. 가이아엑스의 데이터 프레임워크를 받아들인 자동차 산업 관련 기업들은 카테나엑스(Catena-X)라는 생태계를 구축했다. 2021년 독일 정부가 약 1억 유로를 지원하고 BMW, 메르세데즈-벤츠, 폴크스바겐, 보시, 지멘스 등 주요 자동차 OES(Original Equipment Supplier), 부품사, IT 기업이 참여하면서 형성된 자동차 산업용 데이터 생태계다. 현재는 유럽 전역의 대기업, 중소기업 등 200여 개 회원사가 참여해 공급망 품질 관리, ESG 관련 데이터를 공유하고 있다. 이러한 데이터 공유와 협력은 생태계 참여 기업들의 생산성 제고에 도움이 된다. 차량 생산 라인에서 배터리 결함이 발견될 경우 카테나엑스의 추적 시스템을 통해 해당 배터리의 전체 공급망을 즉시 역추적해 어느 협력사 부품에서 문제가 되는지 신속히 파악할 수 있다. 또한 DPP도 도입해 개별 부품의 수명주기 정보도 공유 가능해 재활용 기업이 전기차 배터리 같은 고부가 제품의 원재료 성분, 탄소발자국, 사용 이력, 재활용 정보를 추적할 수 있다. 이처럼 표준화된 데이터 공유로 공급망 투명도를 높이고 EU의 순환경제, DPP 제도 정착에도 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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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U 데이터 생태계 전략에 따른 예상 위험

1) 구조적 위험

EU의 데이터 주권 중심의 데이터 생태계 전략과 산업 순환경제 전략이 결합되면 유럽 중심의 데이터 생태계 참여는 선택이 아닌 강제가 된다. 이는 핵심 산업 데이터를 유럽 주도로 관리하려는 전략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한국 기업 입장에서는 EU 시장에 수출하기 위해서 DPP를 의무적으로 제출해야 하고 가이아엑스 기반의 표준 플랫폼을 공통적으로 활용해야 할 가능성이 크다. 이때 한국의 제조 데이터가 독일 등 EU가 설계한 플랫폼을 통해 관리·검증되는 체제가 될 가능성이 크다. 독자적인 산업 데이터 플랫폼이 없으면 향후 EU가 국제 표준을 바꾸거나 표준 플랫폼 사용료를 올릴 때마다 한국 기업들은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당장 2026년이면 배터리와 섬유 분야를 시작으로 DPP를 제출해야 하는 상황에서 연간 사용료는 1조 원이 넘을 것으로 추산되기도 한다. 이는 한국의 대EU 수출액 약 92조 원(2022년)의 1%에 육박하는 막대한 비용이다. 불리한 구조도 문제다. EU는 순환경제, 지속가능성 향상을 위한 데이터 공유라는 명분을 앞세우지만 결과적으로 자국이 주도하는 데이터 생태계로 글로벌 기업들을 편입시키는 효과를 가져온다. 생태계에 포함된 기업들은 EU에 자발적으로 데이터를 제공하면서도 데이터 주도권을 빼앗기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본격적인 시행 전이라 기우일 수도 있지만 EU의 데이터 생태계와 산업 전략이 맞물릴 경우 DPP 제도는 새로운 비관세장벽이 돼 한국 제조업에 비용과 데이터 통제 면에서 구조적 위협이 될 수 있다.

2) 기술적 위험

DPP가 시행되면 한국 제조 기업은 광범위한 기술적·제도적 의무에 직면한다. 일단 EU 시장에 제품을 수출하려는 모든 기업은 제품별 DPP를 발급해야 한다. DPP가 요구하는 데이터는 단순 라벨링 수준을 넘어선다. 제품의 탄소발자국, 원자재 및 부자재의 원산지, 함유물질 정보, 재생원료 사용 비율 등 제품과 관련된 모든 데이터를 측정하고 기록해 DPP 시스템에 등록해야 한다. 해당 제품의 유통·판매·폐기 단계까지 추적 정보를 실시간 업데이트하는 체계까지 마련해야 한다. 상세 데이터 수집과 관리가 가능한 체계의 구축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문제는 개별 기업이 독자적으로 전 공급망의 데이터를 축적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이다. 디지털 시스템 도입과 공급망 전반의 데이터 수집 인프라 구축이 필수적이지만 현 상황에서는 불가능에 가깝다. 중소 협력사의 참여가 어렵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다. DPP의 요구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협력 부품·소재 업체까지 모두 준비돼야 하는데 이들의 영세성을 감안할 경우 단기간에 이를 충족할 방법이 요원하다. 수억 원 규모의 시스템 구축 비용을 감당하고 관련 전문 인력 운용이 가능한 중소기업들이 많지 않은 탓이다. 제품을 중심으로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공동 대응해야 하는 상황에서 준비가 미흡할 경우 EU 시장 접근 자체가 제한될 우려도 있다. 탄소발자국 데이터 혹은 원료 추적 정보를 제대로 갖추지 못할 경우 EU 수출에 제약이 생길 것이라는 경고가 나오는 이유다.

3) 산업별 예상 위협

① 자동차 산업

EU DPP는 자동차 분야에 가장 먼저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자동차 산업의 경우 EU가 배터리 규제를 통해 2026년부터 전기차 등 대형 배터리에 대한 DPP를 가장 먼저 의무화할 예정이다. 한국은 전기차 배터리 제조 강국으로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 등의 대기업과 관련 중소기업들이 EU 시장을 선도하는 중이다. 향후 ‘디지털 배터리 여권(DBP, Digital Battery Passport)’을 통해 배터리의 원료, 채굴지, 제조 탄소배출량, 재활용 가능성 등 세부 정보를 모두 공개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공급망 노출의 우려는 나중이라고 해도 당장에 데이터 생성이 문제다. 리튬, 코발트의 원산지와 함량, 제조 에너지 사용량에 따른 탄소발자국 등의 산출이 필수이며 이러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추적·관리할 시스템 구축이 시급하다. 향후에는 내연기관 및 전기차 전체의 DPP에 대비해야 한다는 우려도 있다. 자동차 1대당 약 3만 개의 부품이 쓰이는데 이 모든 부품의 정보를 하나의 QR 코드로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동차 업계 공급망 전체 데이터를 연계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쯤 되면 경쟁 기업에 제품에 대한 정보가 상당히 많이 노출되는 리스크를 피하기 어럽다. 한국 기업이 EU에 자동차를 수출하면서 DPP를 제출하면 그 자동차의 1~N차 부품 공급업체, 사용된 소재, 제조공정 특이 사항 등 방대한 정보가 QR 코드 하나에 담기게 된다. 공급망의 노출은 유럽 경쟁사들로 하여금 한국 기업의 원가 구조나 핵심 공급원을 역추적할 단서로 충분히 활용 가능하다. 더 나아가 경쟁기업이 동일한 공급망에 접근하거나 한국 기업의 제조 공정을 모방하는 등 기술·상업적 노하우 침해로 이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② 섬유산업

섬유 및 패션산업도 우선 대상 분야다. EU는 2022년 발표한 지속가능 섬유전략에서 2030년까지 의류 등 섬유제품에 DPP를 단계적으로 도입할 계획을 밝혔다. 이미 스웨덴 ‘Trace4Value 컨소시엄’3 에서 섬유 DPP 파일럿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며 섬유류 제품에 적합한 데이터 표준을 마련 중이다. 한국의 섬유 수출 기업들은 향후 EU로 수출하는 의류에 원재료 생산지, 사용된 화학물질, 제조공장 정보, 세탁 및 재활용 지침 등 폭넓은 정보를 제공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의류 태그의 QR코드를 스캔하면 해당 옷이 어떤 원단으로, 어디서 생산되고, 몇 회 재사용 가능하며, 폐기 시 어떻게 재활용돼야 하는지 등이 공개되는 식이다. 문제는 다품종 소량 생산이 많은 패션업 특성상 많은 기업이 영세하다는 점이다. 패션기업(브랜드)뿐만 아니라 원단·염색가공 등 협력업체까지 모든 친환경 인증 및 데이터 트래킹 체계를 갖춰야 EU DPP 조건을 만족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현재 한국 정부는 섬유 기업의 저탄소 설비 전환과 DPP 규제 대응에 필요한 데이터 수집 인프라 비용을 지원하고 있으며 섬유 분야 기업들의 연합체인 지속가능패션이니셔티브(SFI)가 ‘섬유패션 DPP 플랫폼’을 구축 중이다.


3. 산업 공유지 재편에 대비해야

EU의 데이터 전략은 글로벌 공급망의 판도와 기술 주도권 경쟁의 지형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기민한 대응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데이터로 인해 오랜 기간 지리적 집적으로 형성된 산업 공유지가 변화할 수 있다. ‘산업 공유지(Industrial Commons)’란 기술 노하우, 경영 능력, 전문 인력, 경쟁사, 공급사, 고객사, 협력 연구개발 벤처, 대학 등으로 이뤄져 있는 지역이나 국가를 의미한다. 흔히 ‘제조 생태계’로 표현한다. 일반적으로 이런 산업 공유지는 지리적 위치의 제약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모든 지식과 능력이 쉽고 빠르게 전달될 수 없는 탓이다. 디지털 문서로 변환된 설계도 혹은 코드화된 지식은 기업에서 사용하는 전체 지식의 일부에 불과하다. 여전히 중요한 암묵적 지식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기업들이 사용하는 비공식적인 일상 업무 속에서 이동하기 마련이다. 많은 기업이 도요타의 JIT(Just In Time) 생산 방식을 배우기 위해 분석하고 도입했지만 여전히 JIT 방식을 가장 잘 운영하는 주체는 도요타다. 무형자산의 이동은 분명 막을 수 없지만 모든 지식이 전부 이동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암묵적 지식의 이동은 대면 의사소통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리적 확산이 제한돼 왔다. 특정 산업의 생태계가 일부 지역 혹은 특정 국가에서만 발달한 이유다.

하지만 암묵지가 담긴 데이터가 공유된다면 산업 공유지는 오늘날보다 평평해지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전할 수 있다. 특히 제조 경쟁력이 높은 유럽 지역이 해당 데이터를 활용한다면 중장기적으로는 아시아에 편중된 산업 생태계가 유럽 중심으로 재편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산업 공유지는 매우 민감한 생태계임과 동시에 생태계의 구성 요소가 상호 보완적인 탓에 특정 유형의 구성 요소가 시스템에서 이탈하면서 다른 요소들의 생존 능력도 함께 저하되면 빠르게 붕괴되기 시작한다. 또한 산업 공유지에 속한 기업의 사적 수익이 어느 정도 임곗값 아래로 떨어지면 구성원들의 이탈이 시작되고 이 역시 다른 기업이 공유지에 머무는 것에 대한 이익을 감소시켜 산업 공유지 이탈을 심화시킬 수 있다. 제조 데이터의 공유가 산업의 모든 구성 요소의 이동을 한순간에 가져올 수는 없겠지만 데이터 공유로 인해 생태계 내 핵심 분야의 이동이 발생한다면 나머지 산업 생태계는 빠르게 붕괴 혹은 이전될 수 있다.


4. 한국형 산업 데이터 생태계 구축을 통한 제조업 위기 극복

무엇보다 제조 데이터의 공유와 거래는 생태계가 조성될 때 가능하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생태계를 구성하는 경쟁사, 공급사, 고객 등은 자연 생태계와 마찬가지로 생태계에 계속 남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이해할 때 산업 데이터 생태계가 완성될 수 있다. 쉽게 말해 산업 데이터 생태계 내에서 데이터 공유 및 거래를 통해 ‘사적이익(private returns)’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생태계 자체는 각 종이 다른 종들에게 이익이 되는 자원을 주기 때문에 유지된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사회적 이익(social returns)’이라고 한다. 자연에서도, 경제에서도, 산업 데이터에서도 모든 생태계는 각 종이 나머지 생태계가 삶을 유지하기에 충분한 자원을 제공할 때 균형에 도달한다. 생태계의 구성원들은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한편 경제학에서 오래전부터 알려진 바와 같이 투자는 이익을 창출하는 수단이지만 투자 당사자가 그 이익을 오롯이 다 가져갈 수는 없다. 어떤 경제적 이익은 다른 곳으로 흘러 들어간다. 이것이 사회적 이익이다.

산업 데이터 생태계에서는 데이터 공유와 거래를 통해 기업 간 노하우가 전달된다. 그런데 생태계 조성에 있어서 고려돼야 할 점은 생태계 유지에 가장 중요한 요인이 구성원들이 얻는 사회적 이익이 아니라는 점이다. 기업들은 공유를 통해 경쟁사에도 이익이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나 자신에게도 이익이라면 굳이 신경 쓰지 않는다. 이러한 민감한 생태계 참여자들의 이해관계가 조정될 때 제조 데이터 생태계가 구축될 수 있다. 쉬운 과정이 아니다. 하지만 생태계 조성에 성공해야 비로소 데이터를 둘러싼 두 가지 문제가 해결 가능하다. 바로 ‘데이터 사일로(Data Silos)’로 표현되는 디지털 시장 실패와 데이터 주권과 스필오버 간의 균형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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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디지털 시장 실패 극복

디지털 전환은 어느 산업군에서든 데이터 중심 전략으로 거듭나야 한다. 디지털 시대에 데이터 거래 혹은 공유 없이 한 기업, 한 국가 혼자 추진할 수 있는 산업 전략은 없기 때문이다. EU의 데이터 규제 환경과 무관하게 디지털 시대에도 현재의 글로벌 제조 경쟁력을 리드할 수 있는 환경 구축이 필요하다. 이미 우리도 EU와 동일한 데이터 환경에 놓여 있다. 스마트 공장을 통한 데이터 축적은 아직 갈 길이 멀고 그나마 축적된 대기업의 데이터는 해당 기업, 아니 같은 회사 내 부서 간에도 공유되거나 거래되지 못한다. 상호 신뢰가 부족한 탓이다. 신뢰의 부족은 데이터 사일로를 형성해 비효율적인 자원 배분으로 이어진다. 자신을 위한 최선의 선택 결과가 시장 전체에 효율로 이어지지 못하니 디지털판 시장 실패인 셈이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아무리 AI 기술이 발달해도 제조 현장에서 활용할 수 없다. AI 모델이 자사의 데이터를 학습해 유출할 가능성으로 인해 AI의 장점을 활용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새로운 시대를 대비하기 위해서는 데이터 공유와 거래가 가능한 환경 조성이 필수적이다. AI 기술의 필요성은 사람보다 몇 배 빠른 속도의 검색 능력에서도 찾을 수 있지만 수많은 학습을 통해 다양한 무형자산이 공유된다는 점에 있다. 물론 무형자산의 공유는 기업 입장에서 반가운 일이 아니지만 제공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제공받기도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2) 데이터 주권과 데이터 스필오버 간 균형

오랜 기간 축적된 제조 경쟁력을 데이터 형태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공유와 거래가 가능한 데이터 생태계 구축이 필수적이다. EU의 데이터 규제에 반응하는 수동적 전략보다 한국형 산업 데이터 생태계 구축을 통한 능동적 대응이 필요하다. 완성차 부문은 독일이 발 빠른 대응으로 리드할지라도 그 외의 산업에서는 아직도 우리가 리드할 수 있는 산업군이 많다. 반도체, 조선, 철강, 바이오 등 혁신 산업 대부분에서 한국은 산업 데이터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다. 자동차 부문을 독일 카테나엑스가 리드한다면 반도체 부문은 한국의 CHIP-K(가칭) 생태계 중심으로 산업 데이터가 모일 수 있을 것이다. 이 밖에도 Shipbuilding-K(조선), Steel-K(철강), Bio-K(생명공학) 등 다양한 산업 데이터 생태계를 상상해볼 수 있다. 민간 주도의 정부 협력으로 산업 데이터 생태계를 구축하고 이를 기반으로 EU의 데이터 생태계와 상호 인증 방식의 협력을 추진해야 한다.

이미 일본은 EU의 DPP 및 배터리 규제에 대비해 국제 데이터 연동 전략을 추진 중이다. 일본 경제산업성 산하 정보처리진흥기구(IPA)는 EU와 전기차 배터리 관련 데이터 공유 시스템을 상호 연계하기로 합의했다. 특히 도요타, 닛산 등이 참여하는 일본의 ‘우라노스 에코시스템(Ouranos Ecosystem)’은 독일 카네타엑스 플랫폼과 연결해 공급망 정보를 실시간으로 공유한다. 이는 일본이 EU 수출 시, EU가 일본 수출 시 상호 DPP를 요구하는 환경을 조성했음을 의미한다. 일본과 같은 산업 생태계가 존재할 때 우리 기업이 해외에서 이중 규제를 받지 않고 외국 기업도 국내에서 합리적 수준의 규제를 따르게 하는 공정 경쟁 환경 조성이 가능하다. 무엇보다 데이터 주권을 유지하면서 상호 데이터 교환을 통한 스필오버 효과를 극대화한다는 점에서 제조 경쟁력 향상에 기여할 수 있다.

이제는 서둘러야 한다. 올 4월에 막을 내린 2025 하노버 산업박람회에서 필자는 다양한 산업 데이터 생태계가 등장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자동차 산업 데이터 생태계인 카테나엑스를 제외하면 한국이 뒤늦게 시작하더라도 제조 경쟁력을 디지털 시대에도 유지할 수 있으리란 희망이 보였다. 제조 데이터 생태계는 정부의 일방향적인 설계로 이뤄지지 않는다.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민간 중심으로 데이터 스필오버를 경험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함을 공감할 때 형성될 수 있다.

이에 조급함을 버리고 작은 단위부터 서서히 생태계를 키워나갈 수 있도록 세심하게 추진해야 한다. 정부가 나서서 스마트공장 구축 명분으로 중소기업에 지원금을 주고 각 산업 분야의 주요 기업을 생태계에 강제로 가입시킨다고 생태계가 구축되지는 않는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경제 환경 변화에 발맞춰 정부와 민간이 긴밀히 협력하며 성장해왔다. 이제 그 노하우를 제조 데이터 생태계 구축에 활용할 차례다. 데이터 중심의 협력 없이 디지털 시대에 경쟁우위를 확보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점을 대기업과 중소기업, 제조업과 서비스업, 정부와 민간 모두 기억해야 한다.
  • 김동영

    김동영

    KDI 전문연구원

    필자는 디지털, 플랫폼 경제를 연구하고 있다. 경제학 박사로 중앙대 겸임교수이자 사단법인 모빌리티&플랫폼협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KBS ‘성기영의 경제쇼 디지털경제’ 코너에 출연 중이며 디지털 경제 관련 칼럼을 다수 작성하고 있다. 2016년부터 하노버 산업박람회를 참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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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리=배미정

    정리=배미정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사업전략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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