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누구’ 물음 통해 자신을 이해하는 인간
가장 중요한 이 질문에 AI는 답을 못한다
Article at a Glance
AI가 주도하는 시대에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의 오랜 질문이 근본부터 흔들리고 있다. 인간과 기계의 혼종화가 진행되면서 니체의 ‘초인’을 원류로 삼는 트랜스휴머니즘은 기술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신인류의 탄생이라는 유혹적인 답을 내놓는다. 그러나 AI가 만들어내는 환각은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노직의 ‘경험 기계’가 경고했듯 거짓 위에 세워진 만족은 행복이 아니다. 쇼펜하우어의 통찰을 빌리면 지능은 애초에 삶의 의지에 봉사하는 도구일 뿐이고, 생존의 절박함이 없는 AI는 욕망의 주체가 될 수 없다. 하이데거가 밝혔듯 물음을 던지고 그 물음을 통해 자신을 이해하는 존재는 이 세상에서 인간뿐이며 AI는 어디까지나 쓰임으로 의미가 규정되는 도구다. 윤리적 책임의 주체 역시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다. 결국 AI 시대에도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욕망하는가’라는 질문의 책임은 여전히 인간에게 있다.
요즘 대학입시에서 가장 높은 입학 성적을 기록하는 분야는 자연계에서는 의학계열, 인문계에서는 경영학과와 경제학과다.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제도 도입 이후 법대의 위상이 약해진 자리를 경영·경제 분야가 대신해온 것이다. 그러나 의사, 회계사, 세무사, 변호사 등 이들 학과가 배출해온 전문직 상당수가 AI의 영향을 크게 받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면서 대학 전공의 선호도에도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반면 AI 반도체 수요가 급증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같은 첨단 산업 기업으로 인재가 몰리고 있으며 대학들도 인공지능을 중심으로 학과를 신설하거나 기존 전공을 융합하는 등 발 빠르게 교육과정을 개편하고 있다.
이 같은 변화는 대학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직장인과 기업 경영자 역시 AI가 바꿀 산업과 일자리의 지형에 대응하기 위해 분주하다. 한때 AI는 모두의 생산성과 삶의 질을 높여줄 기술로 기대를 모았지만 현실은 예상과 다르게 전개되고 있다. 자동화의 충격은 프로그래머와 같은 지식노동부터 먼저 나타나고 있으며 오히려 배관공이나 전기기사처럼 현장에서 손기술과 상황 판단이 필요한 직업은 AI로 대체하기 어려운 일자리로 평가받는다. AI 시대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직업의 가치를 다시 쓰고 있다.
이런 격변의 시기에 주목받는 분야가 철학이다. 왜 철학적 사유가 중요해졌으며 철학과 출신의 취업률은 왜 높아지는가. 팔란티어의 알렉스 카프 CEO가 독일에서 철학을 공부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AI 기업들이 철학자를 채용하는 사례가 늘어난 것도 하나의 이유다. 철학 전공자로서 사그라들던 철학과의 인기가 다시 높아지는 상황이 반가운 한편 당황스럽기도 하다.
철학이 다시 호출되는 이유는 인공지능이 안고 있는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데 유용하기 때문이다. 특히 ‘질문하는 능력’과 ‘윤리적 검증’이 그 어느 때보다 요구되고 있다는 점도 배경으로 작용한다.
쇼펜하우어와 니체, 하이데거의 사상을 중심으로 AI가 주도하는 미래에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방향을 짚어보자.
AI 시대의 철학은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을 소크라테스의 대화술에서 찾고, AI 윤리의 근거를 칸트의 의무론과 공리주의의 대비 속에서 발견한다. 철학의 오랜 과제는 ‘너 자신을 알라’로 요약된다. 따라서 인공지능이 인간의 모든 활동을 대체하는 것처럼 보이는 시대에 철학은 인간다운 삶의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이 될 수 있다.
AI 시대가 꿈꾸는 미래 인간: 초인 철학의 오랜 주제 가운데 하나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 ‘사회적 동물’ 등으로 규정돼 왔다. 이처럼 철학은 개념을 정확히 정의하는 일을 해왔지만 AI가 주도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인간에 대한 규정은 모호하고 가변적인 것이 됐다. 인간의 존재 의미가 AI·로봇과 더불어 무한히 확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인간은 AI와 로봇을 도구로 활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신체에 탑재함으로써 ‘사이보그’라는 새로운 존재로 등장할 수도 있다. 이성, 욕망, 신체 등 기존 철학자들이 확고하다고 여겼던 인간 본성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인간과 기계의 혼종화가 우리가 겪게 될 기술혁명의 핵심이 될지 모른다. 인간은 더 이상 과거의 틀에 가둬 이해할 수 없으며 자신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종으로 거듭나는 중이다. 이러한 시대의 사유를 반영해 탄생한 조류가 ‘포스트휴먼(인간 이후)’과 ‘트랜스휴먼(인간 너머)’의 사조다. 인문학과 과학을 통합적으로 엮으려는 연구가 활발해지는 흐름의 한복판에 철학이 있다.
니체 철학이 다시 인기를 끄는 이유도 바로 이 쟁점 한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미래의 인류는 누구인가’라고 물을 때 주목받는 개념이 바로 니체의 ‘초인(Übermensch)’이다. 일부 과학철학자가 니체를 트랜스휴머니즘의 사상적 원류로 평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니체는 ‘미래의 인간’의 도래를 예견했을 뿐 아니라 그가 구상한 ‘미래 철학’은 기술로 인간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오늘날 기술공학적 인간 이해를 한 세기 앞서 보여줬다. 이제 고전적 의미의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 대신 ‘신인류는 누구인가’를 물어야 할 시점이 된 셈이다.
니체의 철학적 인간학에는 ‘미래의 인류’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니체에 따르면 미래의 인류는 도덕적 관습에서 벗어나 과학적 이성을 통해 형이상학, 종교, 신화 같은 미신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워진 존재다. 이를 위해 미래의 인류에게는 ‘개별적인 덕’이 아니라 성직자, 예술가, 의사, 지식인, 현자가 하나로 융합된 ‘총체적인 덕’을 실현하기 위한 교육과 성찰의 시간이 필요하다. 미래의 철학자는 선구자로서 미래가 인간의 의지에 달려 있다고 가르치고 ‘훈육과 육성이라는 위대한 모험과 총체적인 시도’를 준비한다. 니체는 ‘미래 철학의 서곡’이라는 부제를 단 저서 『선악의 저편』(1886)과 뒤 이은 『도덕의 계보』(1887)에서 윤리적으로는 자연주의, 종교적으로는 무신론, 역사적으로는 진화론에 근거해 미래 인간의 구상을 완성한다. 미래의 인류는 허무주의, 종교, 신이라는 과거의 가치를 완전히 극복한 존재인 셈이다.
니체가 신의 죽음을 설파하며 이상적 인간으로 제시한 것이 초인이다. 인간은 ‘동물과 초인 사이에 걸쳐 있는 밧줄’이며 언젠가 극복돼야 할 존재라는 니체의 통찰에서 AI·로봇 공학자들은 많은 아이디어를 얻는다. 초인은 동물에서 출발해 가변적이고 우연적인 진화의 과정 위에 서 있는 미래의 인간이다. ‘넘어가는 인간’을 뜻하는 초인은 ‘과도기적 인간(transitional human)’의 줄임말인 트랜스휴먼과 의미가 상통하며 ‘이성적 존재’ 같은 전통 철학의 인간 이해를 넘어 새로운 인간성의 ‘버전’을 사유하는 단서를 제공한다. 컴퓨터공학과 로봇공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니체를 포스트휴먼·트랜스휴먼 사유의 원류로 끌어오는 이론적 근거가 바로 이 초인 사상이다. 트랜스휴먼은 ‘인간 너머’ ‘인간의 변형’ ‘인간의 향상’이라는 의미를 지니며 4차 산업혁명 시대가 요구하는 인간상과 연결돼 있다. 과학기술로 출생, 죽음, 육체라는 인간의 종적 한계를 극복하고 인간과 기계의 혼종적 결합으로 니체의 초인을 완성할 수 있다면 진화의 마지막 단계를 뛰어넘는 트랜스휴먼의 시간이 도래할 것이란 성급한 진단까지 나온다. 자연선택의 메커니즘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지만 AI 기술을 활용하면 인간이 완벽한 ‘초인류’로 거듭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는 것이다.
‘인간은 극복돼야 할 그 무엇이다’라는 니체의 선언처럼 인간 이후를 뜻하는 포스트휴먼과 인간의 변형을 뜻하는 트랜스휴먼은 인간의 경계를 넘어 최대의 잠재력을 발휘하려 한다는 점에서 완전주의적 이상을 품고 있다. 그렇다면 첨단 과학기술로 불완전한 인간을 더 뛰어난 ‘강화인간(Enhanced Human)’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성공할 것인가. 유전자 선택과 조작, 인공지능의 발달로 니체가 예언한 초인을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은 과연 타당한가. 만약 그렇다면 인류는 언젠가 생물학적 한계를 넘어 늙지도 죽지도 않는 시대를 맞이할지도 모른다. 트랜스휴먼·포스트휴먼의 시대에는 미래의 인류인 초인만 살아남아 전통적 의미의 인간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AI는 인간의 한계를 부단히 극복해 초인이 되려는 욕망을 실현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은 초인이 될 것인가. 이 물음에 답하려면 인공지능이 가져올 미래에 대한 두 갈래 전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공지능은 인간과 공감할 수 있는가? 인공지능이 가져올 미래에 대한 비전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로 갈리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낙관론이 압도적이다. 인공지능이 생활에 필수적인 도구가 될 뿐 아니라 인간과 소통하는 이해와 공감 능력을 갖춰 삶의 많은 문제를 해결해주리라는 기대가 크다. 실제로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인공지능인 챗GPT와 제미나이는 간단한 서류 작성과 자료 수집부터 법률 문서, 세무 작업까지 충분히 수행한다. 그래서 많은 분야에서 신규 인력을 뽑는 대신 AI 하나로 여러 사람의 일을 대신하게 하고 있다. 만약 인공지능이 인간의 파트너로서 자료를 요약·정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삶의 고민까지 해결해줄 수 있다면 인간의 행복은 극대화될 것이다. 나아가 기계와 교감을 나누고 사랑까지 할 수 있다면 결혼하지 않는 독신의 삶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과소평가하는 것은 인공지능이 가져올 디스토피아에 대한 우려다. 영화 ‘터미네이터’처럼 기계가 인류를 파멸로 이끌 것이라는 걱정은 공상과학 영화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기술은 도구일 뿐이므로 인간을 해치는 일은 없으리라는 낙관론과 강한 인공지능의 출현으로 인류가 위기를 맞을 수 있다는 비관론이 충돌하고 있다. ‘특이점’을 예견한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R. Kurzweil)은 2045년이면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는 인공지능이 등장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인간이 명령을 입력하지 않아도 AI가 스스로 의식과 감정을 갖는 자율적 존재로 발전한다면 그 ‘자의식’이 터미네이터의 스카이넷처럼 인간을 공격하고 지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겠느냐는 두려움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AI의 가장 큰 문제는 거짓 정보와 환각(hallucination)이다. 챗GPT 등 인공지능이 본격적으로 활용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책과 연구논문 등 창작물의 분량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클릭 한 번이면 뚝딱 책 한 권을 쓰고 이미지와 영상, 논문까지 만들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문제는 그 결과물에 잘못된 정보나 실재하지 않는 출처가 섞여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환각이다. AI가 만들어내는 정보는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이 위험을 앞서 보여준 것이 영화 ‘매트릭스’의 스테이크 장면이다. 등장인물이 스테이크를 먹으며 느끼는 만족은 실제 고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뇌에 입력된 감각신호의 조작에서 온다. 뇌의 신호 조작만으로 지금껏 누리지 못한 무한한 행복을 만끽하는 ‘유토피아’가 열릴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것이 거짓 위에 세워진 만족이라면 우리는 매트릭스라는 가상의 공간에 갇히는 셈이다. 철학자 로버트 노직이 ‘경험 기계(experience machine)’ 사고실험으로 일찍이 경고한 상황이다. 노직은 원하는 모든 쾌락을 완벽하게 시뮬레이션해주는 기계가 있다 해도 사람들은 접속을 거부할 것이라면서 인간이 원하는 것은 쾌락의 ‘경험’이 아니라 ‘실제로 사는 것’임을 보여줬다.
결국 문제는 인공지능이 인간과 같은 감정과 욕구 체계를 갖추고 상호작용을 통해 인간과 진정으로 소통할 수 있는가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진정한 동반자가 되려면 피상적인 ‘도우미’ 수준에 머물지 않고 친밀감을 나눌 수 있는 공감 능력을 갖춰야 한다. 과연 생명이 없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감정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쇼펜하우어의 지성과 본능의 관계 이 질문의 실마리는 쇼펜하우어에게서 찾을 수 있다. 인간의 본질을 ‘삶에 대한 맹목적 의지’로 본 쇼펜하우어의 생철학은 서구 담론을 주도해온 ‘이성’을 해체하고 욕망의 힘을 이성 위에 두는 비합리주의 전통에 서 있다. 비합리주의란 인간의 본성을 이성이 아니라 본능, 욕망, 충동으로 규정하는 철학적 경향을 말한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삶에의 의지(Wille zum Leben)’는 관성처럼 삶을 끊임없이 이어가려는 무의식적 힘이다. 이 의지는 한번 시작되면 멈추지 않으려는 경향을 갖고 오직 신체를 통해 구체화된다. 인간의 신체는 욕망이 객관화된 것이어서 신체와 욕망은 정확히 일치한다. 손은 잡으려는 욕망을, 눈은 보려는 욕망을, 뇌는 사유하려는 욕망을 구현한 기관이다. 욕망의 위계에서 가장 낮은 것은 성기로 나타나는 성욕이고 가장 높은 것은 뇌로 나타나는 사유인데 쇼펜하우어는 행복하려면 사유가 성욕을 비롯한 신체적 욕망을 억제해야 한다고 봤다.
문제는 실제로 주인이 누구냐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주인은 의지이고, 지성은 의지에 봉사하는 보조 역할에 그친다. 지능은 인간의 본질이 아니라 생존이라는 근원적 욕망에 봉사하기 위해 나중에 생겨난 도구일 뿐이다. 인간의 지능이 크게 발달한 것도 환경 변화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자신을 끊임없이 바꿔온 결과다. 생존 욕망에서 부수적으로 생겨난 지성이 욕망 전체를 지배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을뿐더러 불가능하다. 우리 삶의 주인공은 지능이 아니라 본능인 것이다.
이 통찰은 인공지능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쇼펜하우어의 주장을 응용하면 인공지능으로 확장되는 인간의 지능 역시 삶의 의지에 봉사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인공지능은 그동안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던 인과관계를 설명해 인간의 고통을 어느 정도 줄여줄 수는 있어도 죽음이나 불안 같은 근본적인 부정적 감정까지 극복하게 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은 이처럼 신체화된 인간의 욕망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인간의 욕망은 구석기 시대부터 환경과의 피드백을 거치며 진화 과정에서 만들어진 프로그램이다. 반면 기계에는 생존 프로그램이 외부에서 인위적으로 입력돼야 한다. 기계는 애초에 생존할 필요가 없으므로 생존 욕구를 저절로 가질 이유가 없고 인간이 프로그램으로 입력한다 해도 인간처럼 자신의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리라고 가정할 수 없다. 만약 인공지능이 생존 욕망을 갖는다면 사냥을 하고, 불을 피우고, 논밭을 일구며 악착같이 살아남으려 했던 우리 선조들처럼 행동할 것이다. 그러나 인공지능에 생존 욕구를 부여한다 해도 그것이 두려워하는 대상은 인간이 느끼는 죽음의 공포가 아니라 배터리 방전, 전원 차단, 셧다운, 바이러스 공격일 가능성이 높다. 인간이 지식, 명예, 부처럼 사회적으로 희소한 재화를 얻으려 경쟁한다면 AI는 더 나은 프로그램, 더 큰 저장장치, 고성능 메모리를 얻으려 경쟁할 것이다. 요컨대 인공지능이 갖는 것은 외부에서 입력된 자극과 반응에 따른 기계적 욕망일 뿐이며 신체적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고 생존을 향한 인간의 필사적인 노력을 이해하지 못한다.
물론 인간이 뇌와 욕망의 관계를 완전히 파악해 그 알고리즘을 그대로 구현할 수 있다면 인공지능도 욕망의 주체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전까지 인공지능은 인간의 죽음이나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AI에 사랑의 고민을 털어놓아도 돌아오는 대답은 보편적인 지식일 뿐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진짜 공감은 아니다. ‘왜 사는가’를 인공지능에 묻는 것이 어리석어 보이는 이유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물으면 AI는 공감해주는 척하는 ‘거울’ 역할을 할 뿐이고 알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럴듯한 거짓을 지어낼 가능성이 높다.
AI는 자기 이해를 위한 도구일 뿐 본질이 아니다 인간은 어떻게 자신을 이해하는가. 여기에는 AI가 대신할 수 없는 자신만의 경험과 그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 서문에서 우리가 날아다니는 벌처럼 꿀을 모아 집으로 가져올 뿐 정작 그 체험에 몰두해본 적이 없다고 꼬집는다. 체험이 쌓인 뒤에야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체험한 것인가’라는 물음과 함께 비로소 생활과 체험, 존재의 의미를 따져보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꿀을 모으기만 하는 꿀벌과 다른 점은 ‘꿀’의 의미를 물으며 해석을 시도한다는 데 있다. 물음과 함께 의미가 밝혀진다. 묻지 않으면 세계는 침묵하고, 우리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다.
그렇다면 물음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 세상에서 물음을 던질 수 있는 존재는 인간, 그의 용어로 현존재(Dasein)뿐이다. 돌과 식물, 동물은 질문하지 못한다. 돌은 자신이 왜 돌인지 묻지 못할뿐더러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이 세계는 왜 존재하는가’라고 물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이다. 이러한 질문과 대답을 통해 이뤄지는 이해가 곧 존재의 의미를 열어 밝히는 일, 즉 탈은폐(Entbergen)다.
존재의 의미가 열어 밝혀지는 방식은 도구(Zeug)와 인간이 서로 다르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이 차이를 분명히 한다. 주위를 둘러보면 사물의 의미는 ‘무엇을 위한’ 것으로 드러난다. 책상과 전화기는 전체적인 목적 연관 속에서 그 쓰임으로 이해된다. 도구는 ‘하기 위하여(Um-zu)’라는 구조 속에서 의미가 밝혀지며 손 앞에 놓여 있을 때(Vorhandensein)보다 손에 잡혀 쓰일 때(Zuhandensein)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우리가 물건을 손에 쥐고 사용할 때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자명해지는 것이다. 인공지능도 이러한 도구의 특성을 갖는다. AI는 자료를 검색하고 분석해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쓰인다. 도구의 또 다른 특성은 사용할수록 친숙(Vertrautheit)해진다는 점이다. 자전거를 탈수록 몸의 일부처럼 익숙해지듯이 인공지능도 쓰면 쓸수록 익숙해질 것이다.
반면 인간은 어떤가. 역설적이게도 세계를 향해 물음을 던지고 바깥의 존재를 열어 밝히는 인간 자신의 존재 의미는 도구처럼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심연처럼 은폐돼 있다. 왜 그런가. 인간에게는 옷걸이의 ‘옷을 걸기 위함’처럼 미리 정해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물건에는 사용법이 매뉴얼로 주어져 있지만 인간은 설계도(본질)에 맞춰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순간순간 자유로운 결단으로 삶을 만들고 그 결과를 책임지는 존재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사르트르의 말이 뜻하는 바가 이것이다. 인간의 삶에는 미리 주어진 인생 매뉴얼이 없다.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인간은 ‘가능-존재’, 즉 죽는 순간까지 완성되지 않는 ‘미완의 존재’로서 끊임없이 질문하며 자신을 이해해가는 과정 위에 놓여 있다. AI 시대에 중요해진 질문의 능력을 높이려면 ‘해석학적 순환’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단어의 의미가 문장의 맥락에 따라 달라지듯 부분의 의미는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정해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지평(Horizont)’이라 불리는 전체에 대한 선(先)이해다. 모든 이해의 출발은 무지가 아니라 앞서 잡은 예감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질문할 수 있는 것은 그것에 대한 어렴풋한 예감이 먼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세계에 ‘던져진 존재’(피투성, Geworfenheit)이자 ‘세계-내-존재’(In-der-Welt-sein)로서 세계 밖의 객관적 관찰자가 아니라 이미 세계 안에서 경험하며 이해하고 있는 존재이기에 세계가 어떤지, 존재가 무엇인지, 내가 누구인지를 어렴풋이 예감하고 있다.
인생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부분’의 질문은 ‘전체’라는 지평 속에서 밝혀진다. 그런데 삶의 전체는 언제 드러나는가. 삶이 끝나는 죽음에 이르러서다. 인생의 전체는 태어나 죽음으로 끝날 때까지 온전히 드러나지 않으므로 역설적으로 사람은 죽음에 이르러서야 자기 삶의 전체를 대면한다. 우리가 오늘 어떤 존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죽음이라는 ‘전체의 장’이 닫히기 전까지 확정되지 않으며 그때까지 인간은 ‘가능-존재’로서 미완성이다. 사물과 달리 인간의 존재 의미가 죽음이라는 유한성을 통해 드러나는 이유다.
하이데거의 견해를 요약하면 질문과 대답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서 인간뿐이다. 자신의 삶에 대한 이해는 스스로 물음을 던지고 답을 구하는 과정에서 이뤄진다. AI가 이러한 해석학적 순환의 질문과 대답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도구는 사용할수록 친숙해지지만 인간은 오래 살아간다고 해서 자신에게 친숙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질문을 통해 자신과 거리를 두고 스스로를 낯설게 객관화할 때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이것이 도구와 인간의 결정적 차이다.
인공지능 사용자의 윤리 질문이 인간의 몫이라면 책임 또한 인간의 몫이다. 이에 따라 철학이 요구받는 또 하나의 과제가 바로 윤리적 검증의 문제다. 인공지능은 자신의 생존 욕구에 따라 판단하는 자율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불완전한 사용자의 명령에 따라 오작동할 수도 있는 기계일 뿐이다. 만약 AI가 인간을 해친다면 그것은 스스로 판단한 결과가 아니라 다른 인간이 부여한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인공지능이 스스로 생존을 위한 욕구나 동기를 갖는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인간화의 오류다. 인공지능은 도덕적 기준에 따라 좋음과 나쁨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입력된 명령을 최적의 방식으로 수행할 뿐이다. 따라서 사고체계가 인간과 비슷해 보인다 해도 인공지능에 윤리적 의무를 지울 수는 없다.
물론 인공지능이 주는 편리함과 긍정적 역할은 무시할 수 없다. 인간지능을 완벽하게 대체할 수는 없어도 인간의 행복에 어느 정도 기여하는 것은 분명하다. 인공지능 기술은 유전공학·생명공학과 맞물려 인간의 지적·감성적 능력을 보완하고 향상시키려는 시도에 힘을 보태고 있다.
결국 인간과 기계가 공존할 미래에 더 중요해지는 것은 욕망 없는 기계가 아니라 그 기계를 사용하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지배 문제다. 욕망의 주체는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제 인간이 할 일은 두 가지다. 기계에는 일정한 수준의 도덕성을 명령어로 심는 일이고, 사용자인 우리 자신은 그에 걸맞은 도덕적 자질을 갖추는 일이다.
기술문명의 오만과 불안에 대한 경고 첨단 과학기술의 시대를 맞아 인간이 AI, 로봇과 결합해 완벽한 조화를 이루리라는 믿음은 우리에게 무한한 행복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공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의 경계를 넘는 융합기술은 인간과 도구의 결합을 통해 인간의 존재 의미가 무한히 확장되고 강화될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미래에 탄생할 초인은 ‘기계와 인간이 최상으로 융합된 사이보그’라는 새로운 종이 될 수 있을까.
앞서 니체를 트랜스휴머니즘의 사상적 원류로 소개했지만 정작 니체 자신은 과학기술 문명에서 경계해야 할 문제점을 지나친 낙관인 ‘오만’과 삶의 부정인 ‘금욕주의’에서 찾았다. 기술적 사유에 내포된 오만은 두 가지다. 하나는 전통적인 신의 권위를 거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술 전문가와 엔지니어가 ‘기계’와 ‘발명’으로 자연을 폭행하는 것이다. 세계를 인과율이라는 ‘거미줄’로 파악하고 나면 세계에 깃든 ‘목적’과 ‘윤리’는 모두 부정된다. 그렇게 파악된 세계를 과학기술로 얼마든지 개선할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은 곧 오만이다. 니체는 또한 과학이 인간의 근본적 불안을 감추고 있다고 봤다. 과학은 하나의 이상을 제시하면서 그에 반하는 생명력을 약화시키는 금욕주의의 경향을 띤다는 것이다. 과학이 제공하는 ‘유용성’ 덕분에 인간의 삶은 당분간 만족스럽겠지만 실제로 과학은 이상의 상실에서 오는 불안, 위대한 사랑의 결여에서 오는 고통의 산물이라는 비판이다. 니체의 진단을 오늘에 적용하면 이렇다. AI 기술로 고된 노동에서 벗어나 더 큰 행복을 누리리라는 기대의 이면에서 우리는 실직과 낙오, 부적응이라는 기술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불만과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인간은 극복돼야 할 그 무엇이다’라는 니체의 선언은 인간이 자신의 결함과 한계를 넘어 초인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당위를 담고 있다. AI·로봇 연구자들에게 신선한 영감을 준 이 초인 사상의 핵심은 결국 인간의 존재 의미를 어떻게 찾을 것인가에 있으며 초인은 인간 강화와 향상이라는 유토피아적 기획의 이론적 근거가 돼 왔다. 그러나 미완과 완성 ‘사이의 존재’인 인간이 과학기술로 진화적 결함을 보완하고 능력을 강화해 이루는 자기완성, 그것이 과연 진정한 행복일까. AI 시대에 더욱 중요해진 이 질문은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인간이라면 살아가며 늘 마주하는 사유의 과정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물음이다.
인생은 길을 가는 과정이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여행길에서 어디로 갈지 묻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는 길에게 길을 물어 가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나의 길을 물어 길을 가려 했다. 시도와 물음, 물음에 답하는 법을 배워야만 했다. 이것은 나의 길이다. 너희들의 길은 어디 있는가?” 모두가 가야 할 하나의 길은 없으니 각자 자신의 길을 가라는 것이다.
인생은 끊임없는 문제 해결의 과정이다. 수많은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는 데 AI는 분명 도움이 된다. 그러나 나만의 길을 결정할 때 중요한 것은 나의 사유와 판단이다. 가장 중요한 진짜 질문에 대한 대답은 AI가 대신해줄 수 없다. 미래에도 ‘나는 누구인가’라는 철학적 물음은 행복의 중요한 조건으로 남을 것이며 그 사유를 AI에 맡기는 일은 무책임하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욕망하는가라는 물음과 고민 속에서 스스로 선택하는 능동적 삶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의 내용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