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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an Case Study

日 피닉스 인수한 中 둥샹 심각한 문화충돌, ‘中庸’으로 해결

샹빙 (Xiang Bing) | 141호 (2013년 11월 Issue 2)

 

편집자주

본 케이스스터디는 중국 CKGSB 경영대학원 샹빙(Xiang Bing) 교수와 CKGSB 사례연구센터가 공동 작성했습니다.

 

"나는 중국에서 사용 가능한 최고의 자원을 모두 사용했다. 우리는 이미 최고 수준에 도달했기에 기존 방식에 기반해 진일보 전진해야 한다. 우리는 병목현상의 위기에 있다. 우리는 반드시 해외로 진출해 더욱 좋은 자원을 탐색해야 한다"

―천이훙(陈义红)

 

2008 430, 중국 둥샹(Dongxiang)은 단돈 1엔으로 재무적 위기에 빠져 있던 일본의 스키웨어 회사 피닉스(Phenix)의 주식 91%를 인수했다. 둥샹 창업자인 천이훙은 이 과정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으며 자신을 행운아라 여겼다. 피닉스 산하의 연구개발센터는 일본 내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혔으며 다른 두 곳은 지배구조가 튼튼해 외국 기업에 매각될 가능성이 없었다.

 

하지만 둥샹의 2대주주인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는 둥샹이 피닉스를 인수하자 둥샹에 가지고 있던 지분의 50%를 투매했다. 이는 둥샹의 총주식 가운데 5%에 해당하는 11400만 홍콩달러 규모( 1500억 원)였으며 둥샹의 주가는 이로 인해 타격을 입었다.

 

이러한 위험을 감수하며 둥샹이 피닉스를 인수한 이유는 무엇인가? 세계적으로 외국 기업이 일본 회사를 성공적으로 합병한 사례는 드물었다. 피닉스를 갖게 된 둥샹에는 어떤 도전이 기다리고 있을까? 천이훙은 이미 이보다 앞서 이탈리아 브랜드인 카파(Kappa)를 인수해 중국 시장에서 부활시킨 경험이 있었다. 그가 이번에도 새로운 성공신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천이훙과 카파

 

 스포츠 의류업체 둥샹은 중국의 유명 스포츠 브랜드리닝에서 비롯됐다. 리닝은 중국의 유명 체조선수 리닝이 1990년에 론칭했다. 1년 후 33세의 천이훙이 합세했다. 천이훙은 성공적 사업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으며 누구보다 책임감이 투철했다. 리닝의 비전과 천이훙의 경영 능력이 만나 브랜드 리닝은 10년간의 황금기를 누렸다. 2001년 리닝의 매출액은 7억 위안( 1200억 원)을 넘어섰고 시장점유율은 나이키를 뛰어넘어 29% 1위의 자리를 고수했다. 2위인 나이키는 19%였다.

 

2002 44세가 된 천이훙은 중요한 결단의 순간을 맞이했다. 그는 지난 11년간 모든 것을 쏟아부은 리닝 브랜드를 통해 꿈을 실현했다. 창업자 리닝은 그 결실을 좀 더 젊고 에너지 넘치는 다음 세대의 경영진에게 넘겨주는 것이 회사를 위해 더 바람직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천이훙의 뒤를 이을 후계자를 임명하고 자신은 베이징대로 돌아가 학생의 신분으로 공부에 열중했다.

 

 

둥샹이 소유한 중국 카파의 광고 이미지

 

천이훙은 이제 새롭게 할 일을 찾게 됐다. 한편 리닝스포츠는 갤럽 컨설팅에 의뢰해 브랜드 전략을 새로 짰다. 갤럽은 선진국의 사례를 들어 ‘한 국가의 경제발전이 일정 수준에 오르면 스포츠용품 시장은 글로벌 브랜드가 강세를 띠게 된다’고 조언했고, 이는 천이훙에게 깊은 인상을 줬다. 천이훙의 조언 아래 리닝스포츠는 이탈리아의 스포츠의류 브랜드인 카파(Kappa)의 중국시장 독점 판매권을 확보했으며 원활한 업무진행을 위해 ‘둥샹(Dongxiang)’이라는 회사를 따로 설립했다. 이제 둥샹 소속으로 카파 브랜드를 이끌게 된 천이훙은 둥샹이 단순한 리닝의 자회사가 아닌 자체적 브랜드 경영을 할 수 있는 회사로 성장하기를 기대했다. 그는 한국의 스포츠 패션 브랜드들을 카파의 롤모델로 삼았다. 중국의 소비시장에 걸맞은 건강한 브랜드 이미지를 설립하고 현지상황에 맞는 경영시스템을 구축했다.

2004년 리닝스포츠가 증권시장에 상장하던 무렵 카파 브랜드의 매출은 회사 총매출의 5%에 불과했다. 이 무렵 리닝은 둥샹을 매각하기로 결정했고 천이훙 부부가 이 회사의 지분 100%를 사들였다.

 

 

 

2006 3, 둥샹은 카파의 본사인 이태리 베이직넷(BasicNet)그룹으로부터 카파의 중국 내 브랜드 소유권을 완전히 사들였고 같은 해 530일을 기해 중국 및 홍콩, 마카오 시장에서 카파의 생산, 유통, 마케팅 관련 독자적인 행보를 걷기 시작했다. 그 후 카파의 성장속도는 타의추종을 불허했다. 2005년 가을 시즌에 있던 바이어 교역회에서 둥샹이 수주한 금액은 5억 위안( 870억 원)을 넘었는데 이는 카파의 1년 총매출액 14800만 위안( 260억 원)을 훨씬 초과한 것이었다. 가을 시즌의 호황에 힘입어 2006년 총매출은 8억 위안( 1400억 원)을 넘어섰다. 세계적인 투자사인 모건스탠리는 둥샹의 카파 브랜드 인수과정을 지켜보고 또 교역회 현장의 뜨거운 반향을 목격한 후 둥샹에 적극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2006 5월 모건스탠리는 3800만 달러( 400억 원)로 둥샹의 지분 20%를 매입하며 2대 주주가 됐다.

2007년 둥샹 총매출은 171100만 위안( 3000억 원)으로 전년 대비 99.2%로 성장했다. 중국 전역에 걸쳐 1945개의 판매체인이 운영됐고 이는 전년 동기 대비 70.9% 증가한 수치였다. 카파는 신속하게 중국 3위의 스포츠 의류 브랜드로 올라섰다. 2007 1010일 둥샹은 홍콩거래소에 상장됐다. 주식은 상장 당일 36.4% 급등했다. 주가총액이 2987000 홍콩달러( 4조 원)에 달하면서 리닝을 제치고 단번에 중국 스포츠 의류업계 시가총액 1위 기업으로 우뚝 섰다.

설립 후 5년 만에 중국 스포츠 업계 시가총액 1위라는 명예를 얻어도 천이훙은 만족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업계의 병목현상을 직시하고 긴장하고 있었다. 2008년 이미 중국의 의류시장은 글로벌 브랜드의 각축전이 됐다. 시장점유율은 나이키가 21% 1, 아디다스가 20% 2, 그 뒤를 리닝이 17%로 바짝 쫓고 있었다. 상위 3개 회사의 이익률은 각각 나이키 45%, 아디다스 48.7%, 리닝 48.1% 수준이었다. 둥샹은 생산원가관리를 통해 이익률을 58.8%까지 끌어올렸다. 천이훙은 외부의 경쟁이 아니라 내부의 혁신으로 지속적 성장을 가능하게 했다. 이에 중국 내수시장의 빠른 성장도 힘을 보탰다.

기업 내부의 경쟁력 확보로 인해 천이훙이 이끄는 카파는 가파르게 성장했다. 기업의 경영상황이 가장 좋을 시기에 그는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운이 참 좋았습니다. 지난 10년간 뛰어난 인력, 경쟁력 있는 브랜드, 충분한 자본력, 거대한 시장이라는 가장 좋은 환경에서 기업경영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곧 중국 스포츠 의류 시장에는 병목현상이 발생할 것입니다. 시장의 성장은 한계가 있는데 글로벌 기업 및 로컬기업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처럼 부지런히 일하면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으나 거시적으로 볼 때 이미 성장은 불가한 상황입니다. 중국 업체들의 생산력은 글로벌 기업과 비교했을 때 현저한 수준 차를 보입니다. 이는 향후 10년 내에도 따라잡기 어려우리라 판단됩니다. 이는 비단 스포츠 의류뿐만 아니라 문화 및 산업 전반에 걸쳐 중국 기업의 위기로 다가올 것입니다." 천이훙은 점점 차세대 성장동력을 찾는 문제에 다급해 졌다.

 

일본의 피닉스

 

2008 2월 천이훙은 둥샹의 연례회의에 참석 차 싱가포르로 가는 길에 일본을 경유했다. 일본에서 그는 낯선 이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일본 금융투자사 오릭스(ORIX)그룹의 자본운용부 책임자였다. 저녁식사 초대에 천이훙은 흔쾌히 응했다. 기업 상장 후 이런 투자사의 초대는 종종 있는 일이었다.

일본 투자자는 천이훙을 만나 둥샹의 성공적 상장에 대해 축하했으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오릭스그룹 산하에 스포츠용품을 생산 판매하는 피닉스라는 자회사가 있는데 혹시 흥미가 있는지 하는 내용이었다. 1952년에 창립된 피닉스는 스포츠 의류의 디자인을 개발하고 생산/판매하는 기업으로 스키복 및 아웃도어 분야 일본 시장점유율 1위인 피닉스 브랜드와 카파의 일본 판매권을 보유하고 있었다.

피닉스의 전신은 ‘봉황상회’였는데 독일기업과 기술제휴를 하며 그 이름을 피닉스(죽지 않는 불사조라는 뜻의 phoenix를 따서 Phenix)로 바꿨다. 1960년대 후반 일본의 경제성장기를 맞아 제품이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고 기능성 스키복 개발, 상하이 다운재킷 생산공장 건설 등을 통해 스포츠 의류업체로서는 최초로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바 있다. 특히 일본 최초로 다운재킷 스키복을 개발해 브랜드의 고급화에 성공했고 일본 스키연맹으로부터 인증을 받았다. 이후 이탈리아 MCT와 기술협력을 맺고 카파의 일본 판매대행을 시작했다. 그 해 피닉스의 매출액은 100억 엔을 돌파했고 이후 10여 년간 국제스키연맹(FIS)의 공식파트너사로 선정되면서 글로벌 브랜드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됐다.

1994년에는 중-일 합자회사인 ‘상하이봉황복장유한회사’를 설립했다. 또 사업의 다각화를 이루기 위해 일본에 고급 호텔을 지었는데 천황 일가가 애용할 만큼 품격이 높은 시설과 서비스로 유명해졌다. 1995년에는 상하이에 두 번째 합자회사인 ‘상하이피닉스’를 설립했다.

피닉스는 1998년까지 일본의 업계 정상을 고수했으나 일본 경제에 버블이 사라지면서 경영에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된다. 스키 인구가 급감하자 300억 엔에 달하던 매출액이 200억 엔대로 곤두박질 쳤고 매년 하락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고급 호텔 건설을 위해 융자해온 자금이 부채로 고스란히 남아 재무상황은 나날이 악화되기만 했다.

피닉스의 치명적인 위기는 일본 최대 스포츠 용품점이자 피닉스의 최대 클라이언트인 비바스포츠의 파산이었다. 2004 8월 비바스포츠는 31억 엔의 부채로 도쿄재판소에 파산보호신청을 요청했고 이는 바로 피닉스의 재무위기로 이어졌다. 2개월 후 피닉스도 회생지원을 신청할 수밖에 없었다.

2004 12월 금융투자사 오릭스(Orix)는 자본금 49500만 엔으로 피닉스의 주식 100%를 매입한 후 피닉스의 회생 작업을 시작했다. 기업부실에 책임이 있는 주요 이사들을 퇴출시킨 후 새로운 이사회를 구성했고 84억 엔의 금융부채를 정리했다.

오릭스의 내부경영 혁신 노력에도 불구하고 제품 판매량이 회복되지 않자 2008년에는 29억 엔의 영업적자를 보고 부채는 32억 엔에 달했다. 회생을 위한 4년간의 노력도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이다. 일본 시장의 지속적인 침체로 오릭스는 피닉스의 재생플랜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눈을 돌린 것이 중국 시장이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이 개최되면 중국의 스포츠의류 시장은 큰 전환기를 맞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이들은 둥샹의 문을 두드렸다.

 

자국기업을 인수할 것이나 외국기업을 인수할 것인가

 

새로운 성장 동력에 목말라 있던 천이훙은 오릭스의 제안에 바로 긍정의 의사를 표했다. 물론 자신은 없었다. 일본 기업 인수가 어렵다는 것을 일찍이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오릭스는 매우 간절했고 테이블에는 이미 2개의 제안서가 올라와 있었다. 첫 번째는 몇 백만 달러를 지급하면 카파의 일본 판매권을 넘기겠다는 것이며, 둘째는 공짜로 기업을 인수하되 경영에 책임을 져 달라는 것이었다.

천이훙은 바로 중국으로 돌아가 이사회를 소집했다. 그러나 이사들은 전적으로 반대했다. 이 시점에서 일본 기업이 아니라 중국 기업을 인수해야 옳다며 한목소리로 주장했다. 그들이 반대하며 예로 든 것은 중국 신발업계 최강자 ‘백리국제(Belle International)’의 성공적인 중국 국내 M&A였다.

1970년대 초, 백리신발산업은 홍콩의 작은 신발 가게에 불과했다. 대기업의 OEM 업무를 하다가 ‘스타카토풋웨어(Staccato Footwear)’를 설립해 스타카토라는 브랜드의 제품을 팔기 시작했다. 사업이 진전을 보이면서 2006년에는 중국, 홍콩 마카오를 비롯해 총 3828개의 판매점을 개설했고 중국 150개 도시에 영업망을 넓혀나갔다.

백리는 중국 시장의 급속한 발전에 힘입어 신발 시장의 점유율을 점점 높여 나갔다. 2007 8월 필라(Fila)의 중국 내 브랜드 사용권을, 같은 해 10월에는 중국 브랜드 ‘샤리’를, 11월에는 ‘Sendashonga’ 브랜드와 산하 브랜드 모두를 사들였다. 이듬해에는 홍콩의 상장회사 미라벨을 사들였고 인수 후 상장 폐지시켰다.

이러한 일련의 인수합병을 통해 백리는 신속하게 규모를 확장시켜나갔고 2007년 기준 중국 내 6090, 홍콩과 마카오에는 53개의 직영점을 운영하게 됐다. 그해 연매출은 116 7200만 위안( 2조 원) 달성으로 전년 대비 102.2%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2007 10월에 상장한 둥샹은 자금을 확보하는 데 중점을 둔 반면 백리는 국내 브랜드를 인수하며 성공 가능성을 확실히 보여줬다. 양 회사에 모두 지분을 갖고 있던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는 자연스럽게 둥샹도 백리의 성공 사례에 따라 중국 브랜드들을 인수할 것을 희망했다. 그러나 천이훙의 생각은 달랐다. 외국 브랜드 카파의 중국 성공을 발판 삼아 중국 내수에서 만족할 것이 아니라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고 싶었다. 14년간 몸담았던 리닝에서 나와 독자적인 노선을 가는 것도 바로 그런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그의 마음을 이해해줄 사람은 주위에 없었다.

 

 

피닉스 인수

 

둥샹이 인수한 일본 피식스사의 고기능성 스키웨어

 

천이훙은 2008년 초 손젠진을 브랜드 인수 책임자로 일본에 파견해 피닉스의 현황을 파악하도록 했다. 손젠진은 베이징순메이라는 의류회사에서 마케팅 및 재무, 공장관리까지 책임졌던 유능한 인재였다. 그 후 리닝에서 마케팅 디렉터를 담당하다가 상하이일동체육의 총경리(최고경영자)와 투자사 인화동방의 이사장을 역임했다.

그는 리닝이 나이키나 아디다스 등 글로벌 브랜드와 격전을 벌일 때 가장 최전선에 나서 회사를 지위한 인물이었다. 천이훙은 자신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는 손젠진을 일본에 보내 피닉스를 집중 분석하도록 지시했다. 손젠진은 일본에 다녀온 후 아래와 같은 보고서를 작성했다.

 

1. 높은 생산 원가가 가장 심각한 문제다.

2. 제품 유통경로가 매우 제한적이고 경쟁 브랜드와 비교할 때 심각하게 부족한 상황이다.

3. 제품 포지셔닝이 스포츠 애호가들에게 맞춰져 대중 소비재로는 시장성이 없다.

 

이러한 정황에서 피닉스에 아래와 같은 개혁이 있다면 흑자전환이 가능할 것이고 이는 피닉스는 둥샹의 발전에 새로운 전환기가 될 것이다.

 

1. 브랜드를 대중적으로 다시 포지셔닝 한다. 현재 판매되는 기능성 스키복은 소비층 확대에 제약에 있으니 자체 기술력을 바탕으로 종합아웃도어 브랜드를 개발해 수천억 엔 규모의 시장에 도전한다.

2. 중간생산라인을 개선해 제품의 원가를 절감한다.

3. 유통망을 확장해 판매를 증진시킨다.

 

내부 경영 상황으로 볼 때 피닉스는 2007 1억 달러( 1100억 원)의 매출에도 불구하고 매출총이익률이 37.5%에 그쳤다. 이는 둥샹과 비교했을 때 23%포인트나 낮은 수준이었다. 만일 매출총이익률을 10%포인트 정도만 끌어올릴 수 있다면 영업이익을 내는 것이 가능했다. 이는 일본의 생산시설을 중국으로 옮겨와야 가능했다.

천이훙은 손젠진의 보고서를 보자 의혹들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자신감을 갖고 이사회를 소집해 자신의 소견을 관철했다. 둥샹의 장기적인 성장과 글로벌 브랜드로의 재도약을 위해 피닉스의 합병은 긍정적이라고 설득했고 결국 이사회의 동의를 얻어내게 된다. 2대주주인 모건스탠리 쪽은 피닉스의 인수가 둥샹의 수익성과 주가에 악영향을 줄 것을 우려했다. 하지만 천이훙은 “금융투자자는 단기적 시각을 가질 수도 있지만 기업 운영자는 장기적 시각을 가져야만 한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2008 430일 둥샹은 단 1엔에 피닉스의 주식 91%(7140만 주)를 인수했다. 오릭스가 보유한 주식은 9%로 떨어졌다.

천이훙의 피닉스 인수 소식을 듣고 다른 중국회사들은 땅을 치며 후회했다. 오릭스가 둥샹과 더불어 중국의 주요 업체에 같은 제안을 했으나 천이훙이 일주일이라는 시간에 빠른 판단을 내리고 추진한 것이다. 7일의 판단과 40일의 인수, 천이훙 자신은 이 판단에 대단히 만족해했다. 하지만 모건스탠리는 57일 자신이 보유했던 둥샹의 주식 중 절반을 투매했다. 이는 114000만 홍콩달러( 1500억 원)가 넘는 규모였고 둥샹의 주가는 이로 인해 큰 영향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이훙은 피닉스의 핵심 경쟁력에 감탄했고 자신의 판단을 믿었다. 피닉스에는 우수한 디자이너와 엄격한 생산관리 시스템이 있었고 그 부분이야말로 둥샹이 필요로 하는 핵심 경쟁력이었다. 피닉스 인수 주역인 손젠진이 피닉스의 사장을 맡았고 둥샹과의 공동발전 전략을 다음과 같이 구축했다.

 

1. 경쟁력 통합: 피닉스의 선진적인 디자인과 제품 개발력을 중심으로 카파 브랜드의 전체적인 품질을 향상시킨다.

2. 생산라인 통합: 디자인은 일본에서, 생산은 중국에서 맡아 생산 원가는 떨어뜨리되 품질과 디자인은 향상시킨다.

3.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 카파와 피닉스를 앞세워 둥샹은 향후 글로벌 스포츠 의류 브랜드로 성장한다. 그리고 중국의 내수시장은 물론 일본과 유럽시장에도 진출한다.

 

둥샹의 발전에 피닉스는 없어서는 안 될 주춧돌이 된 것이다. 둥샹은 글로벌 기업을 향해 신나는 도전을 시작했다.

 

일본의 시장시스템에서 살아남을 것인가

 

현실적으로 피닉스의 혁신은 쉽지 않았다. 손젠진은 실무를 담당하는 한 달 동안 일본 중소기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제에 직면하게 됐다.

일본 회사들은 중간단계가 복잡해 생산원가를 떨어뜨릴 수 없었다. 일본은 종합상사 모델이 보편적이며 또 금융기관들과 밀접하게 연결돼 대량의 자본을 지원받았다. 그리고 이 과정마다 얽히고설킨 이해관계가 업무의 효율성을 방해하고 있었다. 또한 구매와 디자인, 생산조직, 유통라인까지 일본 기업은 기본적으로 상부 조직과 하도급의 관계로 촘촘히 짜여 있었다. 중소 규모의 생산공장은 대부분 대기업에 납품할 수 있어야 정상적인 운영이 가능했으며 이는 철저히 대기업에 의존하는 수동적인 시스템을 초래했다.

피닉스의 유통망은 특히나 좁았다. 일본에서 스포츠용품의 유통은 제보와 알펜이라는 두 회사가 양분하고 있었으며 그 밖에 백화점과 아웃렛 유통은 미쓰비시와 이토츠 등 2개 대형 종합상사에 의해 통제됐다. 판매의 권한이 유통망에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매장이 제품 선정 및 매대 진열 등 소비자와 만나는 접점에서 대부분의 결정권을 갖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스템에서 일본의 제품은 종합상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제품의 품질확보나 창의성은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철저한 복종과 순응이 산업 전반의 분위기로 깔려 있었다. 또한 강자독식 현상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약자인 피닉스는 늘 강자에게 잡혀 있었고 그 어떤 변화와 혁신도 도전할 여력이 없었다.

 

중국과 일본의 문화적 충돌

인수 초기에 둥샹의 경영진은 일본의 시스템에서 탈피할 것을 구상했다. 종합상사 시스템을 과감히 탈피해 직접 생산공장과 연결하고 유통은 자체 브랜드 매장을 가져간다는 전략이다. 그러나 손젠진은 시작부터 뜻하지 않은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피닉스를 인수하는 무렵 일본의 남부 오사카의 한 소매점이 파산했고 기업회생기구가 이 업체와 관련된 업체들을 모아 특별회의를 소집했다. 손젠진도 이 회의에 참여했고 회생건에 관련해서는 부정적이라고 투표했다. 그런데 그 회의에 참여한 다른 일본기업은 모두 찬성표를 던졌다. 반대는 오직 손젠진뿐이었다. 모든 부채를 면제하면서까지 도산 위기에 있는 남의 회사를 살리다니, 손젠진은 중국과는 너무 다른 사고에 문화적인 충격을 받았다. 철저한 자본주의리라 생각했던 일본이 오히려 살면 같이 살고 죽으면 같이 죽자는 공산주의적 사고가 강했다. 이는 경제가 성장할 때는 모든 기업에 혜택으로 돌아갈 수 있으나 당시처럼 침체기로 빠져들 때는 한 기업만 도산해도 줄줄이 파산으로 이어지는 재앙을 초래했다.

충격을 받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생산 부문에서도 문제가 발생했다. 손젠진은 회사의 효율성을 위해 경쟁력이 없는 제품라인을 포기하기로 했다. 그런데 내부에서는 그 제품을 생산하면서 먹고사는 다른 공장들이 많기 때문에 그 결정에 동의할 수 없다며 반발했다.

손젠진은 직원들을 상대로 피닉스 자체가 약자이기 때문에 다른 약자들을 돕다가 파산할 수 있다고 설득하려했다. 일본인 직원들은 하나둘 그를 적대시하고 돌아서기 시작했다. 이 즈음 회생신청을 한 오사카 소매점이 결국 파산하기에 이르렀고 관련된 수많은 공장이 잇달아 파산했다. 이러한 사건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스템은 변할 조짐을 보이지 않았다.

손젠진과 일본 직원들과의 충돌은 이후로도 끊이지 않았다. 중국 둥샹 본사는 손젠진의 판단에 힘을 실어줬다. 손젠진은 일본 직원들의 중국인에 대한 우월감과 중국인 사장에게 보이는 적대심을 해소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아야 했다. 그런데 사장과 일반 직원의 소통이라는 것은 일본 직원들에게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계급을 뛰어넘은 소통은 일본 기업에서 보기 힘든 것이었다. 상하관계가 엄격한 일본 회사에서 직원들이 사장과 소통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손젠진에 강하게 반기를 든 것은 피닉스에서 카파 브랜드를 관리했던 담당 부장이었다. 2008년 말 그는 예고도 없이 중국으로 찾아와 천이훙에게 손젠진의 파면을 요구했다.

그는 손젠진의 문제를 들며 불만을 토로했다. 특히 상여금의 격차를 크게 둔 것, 실적이 좋은 직원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해 준 것이 사내에 불협화음을 일으키고 있으며, 둘째, 중간관리를 거치지 않고 사장이 직원에게 직접 상여금을 준 것, 셋째는 인사권과 급여 결정권을 중간관리에게 주지 않고 자신이 직접 관여하는 것 등을 들었다. 그는 손젠진이 사직하지 않으면 자신이 카파의 전 직원들을 이끌고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협박했다. 일본에서 카파는 피닉스의 핵심 브랜드 중 하나기 때문에 이는 엄중한 사안이 아닐 수 없었다.

일본인 간부의 최후 통첩에 천이훙은 심사숙고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생각을 조용히 말했다. 우선 브랜드의 책임자로서 회사의 발전을 위해 일한 것에 감사를 표했고, 둘째 일본 기업의 시스템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소견을 보였으며, 기업을 맡고 있는 책임자의 판단을 존중하겠다는 말로 마무리했다.

 

일본에서의 혁신

 

손젠진의 개혁은 미쓰이물산과의 라인을 차단하는 데서 시작했다. 미쓰이물산은 일본의 6대 종합상사 중 하나인 미쓰이재단의 핵심 기업으로 피닉스의 생산관리·유통·수출입대행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손젠진은 미쓰이와 협력하기 어려운 시스템 차이를 파악하고 과감히 유착관계를 떼어내고자 했다. 그런데 이러한 행위는 중국 CEO가 일본의 경제 시스템에 대항한다는 하나의 선전포고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미쓰이를 퇴출시킨 후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손젠진은 둥샹으로부터 직접 자재를 구매해 제조라인으로 조달하면서 하청 제조업체에는 현금거래라는 우대 조건을 제시했다. 그런데 제조업체가 이를 거절하는 것이 아닌가. 그 이유를 알아보니 미쓰이처럼 차후 결제 조건을 제시하더라도 장기적인 거래관계를 더 원하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 업체들은 이윤보다는 장기협력이라는 파트너십을 더 나은 가치로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중국과 다른 일본의 기업 시스템에 적잖은 충격을 받으며 손젠진은 서서히 피닉스의 내부 상황을 이해하게 됐다. 외부적인 저항보다 더욱 거센 것은 내부 직원들의 저항이었다. 직원들의 수직적인 관료체제는 결코 단시간 안에 바꿀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손젠진은 이에 방향을 돌려 본사를 설득하기로 했다. 일본의 시스템을 억지로 중국의 둥샹에 맞추려고 했던 것이 커다란 실수임을 인정했다. 더불어 일본 경제의 환경에서 일본 기업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두어 점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누누이 강조했다.

그는 우선 미쓰이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종합상사 이토추와 접촉했다. 이토추 또한 일본 6대 상사 중 하나로 미쓰이 규모에 못지않았다. 특히 일찍이 1972년부터 중국과의 무역을 진행했고 중국 정부로부터 중국에 우호적인 일본 회사로 선정된 바 있었다.

손젠진이 이토추를 선택한 데에는 중요한 세 가지 요소가 작용했다. 첫째, 이토추는 미쓰이의 경쟁 상대였다. 둘째, 이토추는 둥샹과 파트너십을 맺어 대중국 업무를 확장하고자 했다. 마지막으로 일본 기업 가운데 가장 둥샹이 원하는 시스템을 보유하고 있는 회사였다.

이토추와의 협력으로 인해 피닉스의 개혁은 점진적으로 진행됐다. 원가절감을 위한 내부조정도 서두르지 않았으며 중국에서 원자재를 구매한다는 것도 당분간 유보했다. 과도기가 필요함을 인정한 것이다. 게다가 중국의 원자재는 일부 일본의 공업표준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 많았다.

안정을 우선시하는 변화가 진행되면서 피닉스의 2008년 매출액은 31200만 위안( 530억 원), 매출총이익률은 40.1%로 성장했다. 이는 둥샹 전체 매출의 9.4%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비록 둥샹의 중국 사업 매출총이익률인 61%와는 하늘과 땅 차이였지만 일 년 전과 비교했을 때 3.2%포인트 증가한 것이었고 초기 목표보다는 10%포인트 향상을 위한 바람직한 첫걸음으로 평가됐다.

유통 분야에서도 획기적인 돌파구를 마련했다. 이는 바로 일본의 유명 의류기업 유니클로에서 배운 것이었다. 글로벌 톱브랜드인 유니클로는 당시에도 최고의 품질과 합리적인 가격으로 다양한 연령층의 소비자를 확보하고 있었다. 창업자 야나이 다타시는 2008년 전 세계가 금융위기로 허덕일 때 유니클로 매장을 신속하게 확장하며 일본 최고 갑부가 됐다. 2011 7월 기준 유니클로의 매출은 스페인의 자라, 미국의 GAP, 그리고 스웨덴의 H&M에 이어 전 세계 4위를 기록했다. 유니클로는 H&M보다 37, 자라보다 9년 늦게 출발한 후발주자였지만 일본 내 800여 개의 매장을 확보한 후 일본 의류시장 1위로 등극했고 11개 국가에 2000여 개 매장을 오픈하는 등 20년간 파격적인 성장을 기록했다.

손젠진은 유니클로의 성공사례를 유심히 살펴봤다. 생산량 90%를 중국에서 소화했고 자사의 전문매장을 통해 일본 종합상사 시스템에서 빠져나오는 데 성공한 것이다. 비록 유니클로가 일본 경제시스템을 혼자서 개혁하지는 못했지만 자율적인 시스템을 적극 추진해 일본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당장은 유니클로의 모델을 그대로 벤치마킹할 수는 없었다. 피닉스는 유니클로에 비하면 상당히 작은 회사기 때문이다. 만약 손젠진이 대놓고 유니클로처럼 행동하면 관련 협력업체들의 비웃음을 살 것이 뻔했다.

결국 손젠진은 중용의 안을 들고 나왔다. 일본의 전통 유통라인에 적응하되 자사 전문매장도 연다는 계획이다. 누군가가 반기를 들고 나오면 피닉스는 기존의 유통라인을 전적으로 존중하되 전문점의 기능은 브랜드 홍보를 위한 플래그숍일 뿐이라고 설득해 나갔다. 이는 나이키나 아디다스 등 글로벌 브랜드도 시도하는 전략이기에 일본의 관계자들도 쉽게 수긍했다.

2009 8월 일본 카파 플래그숍 1호점이 도쿄에서 문을 열었고 머지않아 10개의 매장으로 확대됐다. 손젠진이 이끄는 중용의 전략은 점차 성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2010년 일본 피닉스의 매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7.8%의 성장률을 보였고 중국 둥샹 매출의 14.4%를 차지하게 됐다. 반면 매출총이익률은 43.9%로 전년의 45.2%보다는 떨어졌는데 이는 원자재 및 인력비 상승, 고객프로모션의 활성화에 따른 것으로 감수해야 할 부분이었다.

2010, 둥샹은 피닉스 브랜드를 본격적으로 중국 시장에 들여왔고 2011년부터 적극적인 마케팅을 실시해나갔다. 베이징을 비롯, 화둥지역과 둥베이지역 일선 도시에 전문매장을 오픈하는가 하면 같은 해 6월에는 고급 백화점에 플래그숍을 오픈, 고객을 위한 특별 프로모션을 진행했다. 그 결과 3일 동안의 판매액이 51만 위안( 9000만 원)에 달하는 기염을 토했다.

손젠진은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중국과 일본의 차이를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첫째, 두 나라의 유통시스템의 차이다. 중국은 브랜드숍과 독립적인 판매장을 통해 제품을 적극 유통시킬 수 있었지만 일본은 여전히 종합유통상사와 백화점의 통제하에 판매량이 결정됐다. 둘째, 의류의 트렌드에서 일본이 중국을 약 10년은 앞서가고 있었다. 일본에서 잘 팔리는 제품일지라도 중국 소비자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경우가 많았다. 그러므로 제품 디자인 개발에 중국과 일본의 공동 연구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셋째, 양국의 의류산업 표준이 현격하게 달랐다. 원가절감 때문에 중국에서 생산할 때 많은 부분이 일본의 업계 표준에 미달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었다.

중국과 일본은 지식과 가치관, 규칙과 시스템이라는 산업토양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피닉스가 둥샹의 시스템과 합쳐지기란 어쩌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일찍이 미국의 유명 컨설팅사에 둥샹과 피닉스의 통합 건을 의뢰한 바 있으나 당시 단순한 데이터 분석과 기계적 결론으로 실질적인 도움은 하나도 되지 않았다. 이에 반해 손젠진이 현장에서 얻은 통찰력은 회사 매출로 이어지는 중요한 자원이 됐다.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피닉스는 이제 중국 상하이에 합자회사 두 개를 설립하고 13년간 일본과의 업무 협력을 진행하고 있다. 과거의 시행착오를 통해 현재는 서로의 시스템을 이해해 효율적인 경영이 가능해졌다. 과거에 상하이법인은 제조만 담당했지만 지금은 일본으로 판매되는 제품의 디자인센터로 변모했고 둥샹과 피닉스의 업무 중재 역할을 수행하는 중이다. 천이훙은 자사의 핵심 인력을 일본으로 파견해 현지인들의 장인정신과 핵심 경쟁력을 배워오도록 했다. 이는 중국 본사를 변화시키는 새로운 활력소로 작용했다.

 

둥샹의 성장통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끊임없는 변화와 혁신을 통해 글로벌 기업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 중국의 업계는 여전히 둥샹을 주목하고 있다.

 

 

학교소개

CKGSB(Cheung Kong Graduate School of Business) 홍콩 청콩그룹의 리카싱(李嘉誠) 회장이 설립한 중국 최초의 비영리 사립 경영대학원이다. 베이징에 본교가, 상하이와 선전에 분교가 있다. 현재 5000명 이상의 졸업생들이 민간기업과 공기업, 다국적 기업, 정부 기관에서 활약하고 있다.

 

샹빙(Xiang Bing)

샹빙(Xiang Bing) 교수는 GKGSB의 초대 학장으로 10년간 재직 중이다. 취임 전에는 베이징대와 홍콩과기대 교수로 근무했고 상하이의 중국유럽국제비즈니스스쿨(CEIBS)의 창립 교수로도 일했다. 중국 시안교통대에서 공학 학사를, 캐나다 앨버타대에서 경영학 박사를 취득했다.

  • 샹빙 (Xiang Bing) 샹빙 (Xiang Bing) | - 현) CKGSB 초대 학장
    - 전) 베이징대, 홍콩과기대 교수
    - 전) 상하이 중국유럽국제비즈니스스쿨(CEIBS) 창립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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