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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R Case Study:삼성 SDI의 포트폴리오 변화 및 캐치업 전략

조직 관성 무너뜨린 빅뱅 전략, ‘변신의 전설’ 낳다

이방실,이정동 | 117호 (2012년 11월 Issue 2)

 

인터넷 검색창에 ‘2차전지라는 단어를 입력하면 2차전지 주요 업체로 자동 연관 검색되는 회사가 있다. 삼성SDI. 이 회사는 2012년 상반기 매출액(28540억 원) 57%(16315억 원)에너지 및 기타사업 부문에서 올렸다. 소형 리튬이온 2차전지 영역에선 글로벌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일본 시장분석기관인 IIT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2012 1분기 기준 소형 리튬이온 2차전지 시장에서 삼성SDI가 세계 시장점유율 26.8%를 기록하며 1위를 차지했다. 삼성SDI의 최근 소식을 접하지 못한 사람은삼성SDI=에너지 기업이란 분류가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이 회사는 원래 TV 브라운관 전문 업체였기 때문이다. 1980년대∼1990년대엔 흑백·컬러TV 브라운관 시장을 주도했고 2000년대 중반엔 전 세계 PDP 시장을 호령했다. 브라운관 전문 업체로 출범해 PDP를 중심으로 한 차세대 디스플레이 업체로 탈바꿈했던 이 회사는 이제 친환경 에너지 기업으로 또 한번 변신 중이다. 단순히 모습만 바꿔가는 게 아니다.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면서도 각 분야에서 경쟁 우위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더욱이 삼성SDI는 브라운관, PDP, 2차전지 등 지금까지 거쳐 온 사업 영역에서 업계의 퍼스트 무버(first mover)도 아니었다. 브라운관은 오리온전기, PDP 2차전지는 모두 LG화학의 뒤를 따라 사업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삼성SDI신속한 추격자(fast follower)’ 전략을 성공적으로 구사해 국내는 물론 세계 무대에서도 1위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한 우물만 파도 1등 한번 하기 어려운 치열한 경쟁 상황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시장을 선도해 오고 있는 삼성SDI의 진화 발전 과정을 DBR이 집중 분석했다.

 

국내 두 번째 흑백 브라운관 업체로 출범

삼성SDI는 삼성전자가 설립된 이듬해인 1970 1월 설립됐다. 삼성이 전자산업에 진출했을 당시 이병철 회장의 꿈은전자 산업의 꽃으로 불린 TV 산업에서 전 세계 1등에 오르는 것이었다. 삼성은 이에 따라 TV의 핵심 부품인 브라운관을 생산하기 위해 당시 진공관으로 유명했던 일본 NEC와 합작, 현재 삼성SDI의 전신인 삼성NEC㈜를 출범시켰다. 브라운관 업체로는 오리온전기에 이은 국내 두 번째였다. 삼성NEC는 비록 오리온전기보다 1년 늦게 시장에 진출하긴 했지만 회사 출범 후 불과 1년도 채 지나기 전에 흑백 브라운관을 생산(1970 12)하는 데 성공했다. 회사 설립 직후 일본 NNE(NEC의 자회사)와 진공관 및 흑백브라운관 기술도입 계약을 맺고 NNE와 일본 제국전자로부터 관련 설비를 도입하는 등 발 빠르게 움직인 덕택이었다.

1974년 삼성NEC 1차 오일쇼크 등 주변 상황 악화를 계기로 NEC와 불합리한 합작 관계를 바로잡기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그 결과 로열티 인하와 독자적 영업 및 구매 권한을 골자로 한 새로운 합의서에 조인할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사명도 삼성전관공업주식회사로 바꿨다.

독자 경영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 삼성전관공업은 1975년 세계에서 세 번째, 한국에서는 첫 번째로퀵스타트(Quick-start)’ 브라운관을 개발함으로써 고속 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다.(퀵스타트 브라운관이코노참조) 이후 컬러 브라운관 사업에 진출하기 위해 1977년 일본 NEC와 기술제휴계약을 맺고 이듬해 컬러TV 브라운관(CPT·Color Picture Tube) 공장 착공에 나섰다.

1980년 컬러 브라운관 공장 준공 후 3년 만에 흑자 전환에 성공한 삼성전관공업은 1984년 사명을 삼성전관주식회사로 바꿨다. 이와 함께 삼성전관은 CPT 생산능력을 당시 연산 300만 개 규모(1984)에서 1980년대 말까지 연산 680만 개 규모로 늘린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이는 당시 삼성전자의 컬러TV 340만 대 생산 계획을 반영해 삼성전자와 외부로의 판매를 각각 절반씩 계산해 정한 목표였다. 그러나 이 같은 계획은 1984 6월 경영이사회에 참석한 이병철 회장의 지시에 따라 전격 수정된다.

 

컬러 브라운관 연산 1000만 개 생산 체제 구축

이병철 회장은 삼성전관에 1988년까지 세계 수요의 10%에 해당하는연산 1000만 개 생산 체제를 구축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어떤 사업이든 최소한 세계 수요의 10%는 차지해야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이병철 회장의 철학이 반영된 결정이었다. 이병철 회장은 삼성전관이 비록 후발주자이긴 하지만 컬러브라운관 사업에서는 그리 늦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마침 1970년대 후반 제2차 오일쇼크로 인해 RCA, 제니스, GE, 톰슨, 필립스, 소니, 마쓰시타, 히타치 등 세계 굴지 전자업체들의 CPT에 대한 투자가 주춤한 상태였다. 경쟁사들이 머뭇거릴 때 과감한 투자를 감행한다면 후발주자로서의 약점을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다는 게 이병철 회장의 판단이었다.

삼성전관은 이에 따라 월산 25만 개 규모인 수원 공장을 32만 개 규모로 증설하고 1988년까지 가천 신공장에 월산 60만 개 규모의 공장을 3단계로 나눠 건설했다. 3년 반 동안 1100억 원이 투입된 대형 프로젝트였다. 연산 1000만 개 생산체제 구축을 계기로 삼성전관은 세계적인 브라운관 기업으로 발돋움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과감한 투자를 바탕으로 1988 1080만 개의 CPT 연산 규모를 달성함으로써 필립스, 도시바에 이어 세계 시장 점유율 3위를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1990년대 들어서면서 삼성전관은 생산거점의 다각화를 통한 글로벌화에 주력했다. 1998년 기준 삼성전관의 브라운관 생산 규모는 4000만 대로 늘어났고 해외 생산 비중은 70%에 달했다.

 

호황 속에 감춰진 위기 감지

1995년 삼성전관은 창업 이래 최고의 실적을 기록했다. 창업 이후 가장 많은 19324억 원의 매출액을 기록했고 영업이익(1468억 원)과 경상이익(1229억 원), 당기순이익(1020억 원) 모두 사상 처음으로 1000억 원을 돌파했다. 바깥에서 보기엔 최고의전성기였다.

그러나 냉철히 따져보니 문제가 많았다. 우선 브라운관 사업 부문에 대한 매출 집중도가 너무 높았다. 또한 영업력에 의해 이익과 매출이 늘었다기보다는 공급부족에 따른 판가 상승의 공이 컸다. 특히 1995년은 공급 부족에 따라 세 차례나 가격을 인상했을 정도로 호황이었다. 하반기 손익분석과 경영효율을 분석한 결과 제품 가격 인상이 없었다면 그만한 이익을 낼 수 없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내부적으로 낭비와 비효율도 심각한 수준이었다. 생산원가가 너무 높았고 부가가치가 낮은 제품도 수두룩했다. 외부 시장 상황도 녹록지 않았다. 전 세계적인 브라운관 증설 경쟁으로 인해 가격은 언제든지 폭락할 위험이 있었다. 일본과의 기술 격차는 여전히 컸고 대만의 중화영관이 삼성전관의 뒤를 바짝 쫓아오고 있었다.

경쟁자는 외부에만 있지 않았다. 삼성전관은 삼성그룹 내 계열사인 삼성전자와도 경쟁을 해야 할 상황에 처하게 됐다. 삼성전관은 브라운관을 대체할 차세대 디스플레이 산업 육성 및 사업 다각화 차원에서 1980년대 후반부터 LCD, PDP 등 평판 디스플레이 사업에 투자를 해왔다. 특히 LCD의 경우 부산사업장에 생산라인까지 준공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삼성전관은 그룹 차원의 결정에 따라 1991 TFT-LCD 사업을 삼성전자에 넘겨야 했다. LCD 생산 공정이 반도체와 유사하다는 점을 들어 삼성전자 메모리 반도체 사업부가 LCD 사업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 디스플레이 시장에서 식구끼리 싸워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삼성전자는 LCD 사업 육성을 위해 공격적으로 투자했고 삼성전관이 사상 최대 실적을 냈던 1995년엔 국내 최초로 LCD 양산 라인을 가동하며 디스플레이 시장 진출을 본격화했다.

이처럼 안팎으로 경쟁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삼성전관의 구성원들에겐 위기의식을 찾기 힘들었다. 창업 이후 단 한 해도 매출이 줄어든 적이 없었고 20년 넘게 흑자 행진을 이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최고경영자였던 윤종용 대표와 임원진은 전성기처럼 보일 때일수록 위기의식을 갖고 미래를 위한 내실 다지기에 힘써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전사적 프로세스혁신(Process Innovation)을 추진키로 결정하고 1995 101 PI(process innovation·프로세스 혁신) 추진팀을 발족시켰다.

 

프로세스 혁신(PI·Process Innovation) 6시그마(6 sigma)

PI는 구성원들의 마인드와 업무의 순서 및 방법 등 기업경영의 모든 프로세스를 고객의 관점에서 전면적으로 재수정하는 작업이다. 대개 회사의 모든 프로세스를 재설계한 후 그 기초자료를 근거로 후속 작업인 IT시스템을 구축해 마무리 짓는다. 중견 기업을 기준으로 할 때 이 두 가지 작업에 소요되는 시간은 통상 프로세스 재설계와 IT시스템 구축 각각에 1년씩 총 2년 정도는 잡아야 한다. 조직의 규모가 큰 삼성전자의 경우 PI 작업을 완전하게 정착시키는 데 5년이 걸렸다. 그러나 윤종용 대표 후임으로 1996 1월 삼성전관의 새 사령탑으로 부임한 손욱 대표는 이 모든 과정을 1년 내에 끝내기로 결정했다. , 1996년부터 작업을 시작해 1997년부터 실제 시행하고 실행 과정 중 일어나는 문제를 보완해 1998년에는 완전히 정착시킨다는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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