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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에서 북경까지

전염병만큼 무서운 ‘미움의 물결’

안동섭 | 298호 (2020년 6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조선시대엔 열대성 풍토병을 장(瘴)병이라 불렀다. 장병이란 용어는 중국에서 유래했는데 대략 위진(魏晉, 220∼589) 시기를 즈음해 생긴 말로 추측된다. 이후 중국 문헌을 보면 장병이란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양쯔강 하류지역, 곧 강남(江南)지역으로 대거 이주가 시작되면서 북방인들이 풍토병으로 고생을 한 것이 원인인 것으로 보인다. 장(瘴)이라는 질병은 한족 중국인의 활동무대가 남쪽으로 내려갈 때마다 함께 남쪽으로 이동했는데 그래서 새롭게 한족 문화에 편입된 지역은 장병 유행 지역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그러다 해당 지역이 한족 문화에 익숙해지고 이 지역에서 과거 시험 합격자들을 많이 배출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이 지역은 장병 유행 지역이라는 오명을 새롭게 한족 문화권에 포함된 지역에 넘겨주게 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전염병에 관한 담론은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인종주의(racist)적인 색채가 있었다는 것이다.


편집자주
인간사에는 늘 반복되는 패턴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다 함은 바로 그 패턴 속에서 현재의 우리를 제대로 돌아보고 조금은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한다는 의미일 겁니다. 철학과 역사학을 오가며 중국에 대해 깊게 연구하고 있는 필자가 주(周)나라가 낙양을 건설한 후로 현대 중국이 베이징에 도읍하기까지 3000년 역사 속에서 읽고 생각할 만한 거리를 찾아서 서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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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인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宮﨑駿, 1941∼)의 초기 대표작인 ‘바람계곡의 나우시카(風の谷のナウシカ, 1984)’는 오염된 세계를 배경으로 한 애니메이션이다. 거대한 곰팡이가 끝없이 자라나 숲을 이루고 유독한 공기를 내뿜는데 그 독성이 어찌나 강한지 사람이 이 독기를 5분 이상 흡입하면 그대로 죽고 만다. 하나같이 마스크를 끼고 눈에 보이지 않는 독기와 싸우는 모습이 꼭 오늘날의 세계를 내다보기라도 한 듯하다. 그런데 원작에서 ‘쇼우키(瘴氣)’라고 부르는 이 오염된 공기를 우리말 자막은 ‘장기(瘴氣)’가 아니라 ‘독기(毒氣)’라고 옮긴다. 현대 한국인에게 너무 낯선 표현이라 의역을 거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인데 사실 장기(瘴氣)는 조선시대 문헌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말이다. 18세기 말의 기록을 한번 보자.

영의정 서명선(徐命善)이 아뢰기를, “제주 목사 엄사만(嚴思晩)이 해를 넘기도록 장독(瘴毒)이 있는 바닷가에서 지내 병세가 위중해졌다고 누차 사장(辭狀)을 올렸습니다. 개차(改差: 교체하다)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그대로 따랐다.

『일성록』 정조 8년 (1784) 11월3일

조선사람들은 바닷가와 같은 습한 곳, 특히 덥고 습한 곳에서 장(瘴)이라고 하는 특별한 기운이 올라온다고 생각했다. 5분 만에 죽지는 않지만 일단 이 기운에 노출되고 나면 점차 쇠약해지다가 끝내는 죽고 만다. 장(瘴)병이 온난다습한 기후로부터 생긴다는 점과 역사상 장병이 유행했던 지역이 대체로 오늘날 말라리아 유행 지역과 중첩된다는 점 때문에 몇몇 의료사 연구자는 장병이 곧 말라리아였다고 주장한다. 온난다습한 지역에서 모기가 번창할 확률이 높고 그렇다면 동시에 말라리아에 감염될 확률도 높을 테니 이는 근거가 있는 주장이다. 서양에서도 말라리아 원충(原蟲) 발견 이전까지 물웅덩이 등에서 올라오는 습기를 말라리아의 원인으로 지목했다(mal-aria를 직역하면 ‘나쁜 공기’다).

하지만 장(瘴)이 곧 말라리아였던 것은 아니다. 일제시대의 기록을 살펴보면 조선의 말라리아 유행 지역은 해안과 산간을 가리지 않았고, 남과 북을 가리지도 않았다. 모기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있었고, 함흥이나 원산처럼 추운 지역에도 있었다. 하지만 함흥이나 원산이 조선시대 때 장병 유행 지역이었다는 기록은 없다. 게다가 조선사람들은 말라리아를 장병과 구분해 학질(瘧疾)이라고 불렀다. 두 병이 구분됐던 만큼 장병을 곧바로 말라리아라고 한다면 옳지 않다. 그래서 신중한 학자들은 장병이란 말라리아를 필두로 한 열대성 풍토병에 대한 총칭(總稱)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많은 전통시대 병명이 그렇듯 장(瘴)병 역시 중국에서 처음 쓰인 말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를 펼쳐보자.

五月驅兵入不毛
오월에 병사 몰아 불모지에 들어가노라니
月明瀘水瘴煙高
밝은 달밤, 노수에는 장연(瘴煙) 높아라
誓將雄略酬三顧
웅대한 계책으로 삼고초려의
은혜 갚고자 맹세했으니
豈憚征蠻七縱勞
어찌 오랑캐(蠻)를 정벌하여 일곱번
놓아주는 수고를 꺼리랴

제갈량(諸葛亮, 181∼234)이 맹획(孟獲, 약 AD 3세기)을 몇 번째인가 놓아주고서 쓴 시다. 덥고 습한 윈난지방의 노수(瀘水)라는 강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에 장기(瘴氣)가 섞여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물론 15세기의 작가 나관중(羅貫中)의 관점이다. 한(漢, BC206∼AD220)나라 즈음에 편찬된 사전인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장(瘴)’자가 없다. 삼국(三國)의 영웅들이 활약할 당시에는 없던 말이라는 뜻이다.

그러다가 위진(魏晉, 220∼589) 시기를 즈음해 이 글자가 처음으로 지면에 등장하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서진(西晉, 266∼316) 멸망 후 양쯔강 하류지역, 곧 강남(江南)지역으로 대거 이주한 북방인들이 해당 지역의 풍토병에 호되게 당한 뒤 그 병을 부를 말을 고안해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강남지역은 상하이, 쑤저우, 항저우 등이 들어선 부유한 지역이지만 서진(西晉) 당시에는 미개발 늪지대에 불과했다. 늪지대가 있으면 모기가 있고, 모기가 있는 곳에 말라리아가 있다. 새로운 환경에 노출된 북방인들은 말라리아를 필두로 한 각종 수인성(水因性) 질병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졌을 것이고, 자신들의 이주에 걸림돌(障碍, 장애)이 된다는 뜻에서 이 병을 장(瘴)이라고 불렀던 것은 아닐까 추측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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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강남지역에서 데뷔한 장(瘴)이라는 질병은 그 후 한족 중국인의 활동 무대가 남쪽으로 내려갈 때마다 함께 이동했다. 후베이(湖北)와 후난(湖南) 부근도 차츰 장병으로 유명해졌고 쓰촨(四川) 남부와 귀저우(貴州) 일대도 그러했다. 장시(江西) 남부와 푸젠(福建) 역시 한족의 진출과 함께 장병 유행 지역에 편입됐다.

한족의 남하와 함께 장병 전선(戰線)이 남하했다는 사실은 이 질병의 사회적 성격을 시사한다. 먼저, 이 병은 한(漢)족이 겪는 병이다. 한족 기록자들은 낯선 남방에서 오랑캐들 사이에 유행하는 병에 걸려 고통받은 본인과 지인들의 경험만을 전할 뿐, 분명히 이 병에 걸려서 고생했을 ‘오랑캐’들에 관해서는 별말이 없다. 이 때문에 한족의 발이 닿지 않은 곳에는 장병이 있었다는 기록도 없다. 둘째, 이 병은 남방병이다. 누군가가 북방에서 무언가에 감염돼 고열에 시달리다 죽으면 다른 병명이 붙는다. 하지만 남방에서 무언가에 감염돼 같은 증상에 시달리다 죽으면 으레 장병에 걸려 죽었다며 두려워한다. 애초에 북방인이 남방에 와서 걸렸던 풍토병에서 유래한 이름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병이 북방에서도 유행할 수 있다고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셋째, 사람들이 특정 지역, 특정 민족과 이 병을 강하게 연결시켜서 상상하기 때문에 이 질병에 관한 담론에는 인종주의(racist)적인 색채가 있다.

당(唐, 618∼907)나라 이후로 장병으로 가장 악명높았던 곳은 중국 대륙의 남방 한계선인 영남(嶺南)지방, 곧 오늘날의 광둥(廣東)과 광시(廣西)였다. 홍콩, 광저우, 선전을 품고 있는 이 지역은 북쪽에 가로놓인 산맥 하나와 남쪽에 펼쳐진 바다가 다른 지역들과의 경계선을 이룬다. 산맥 사이로 난 고개를 통해서만 북쪽 지역과 연결되는데 이런 고개가 다섯 개 있다고 해서 오령(五嶺)이요, 오령의 남쪽이라고 해서 영남(嶺南)이라고 불린다. 이처럼 지리적으로 격절된 까닭에 한족의 대규모 이주도 비교적 늦은 시기에 이뤄졌다.

한족문화권에 뒤늦게 편입된 영남(광둥과 광시)은 마치 신고식을 당하는 신입생처럼 먼저 들어간 선배들(푸젠, 후난, 장시 등)에게서 장병과 관련된 오명을 넘겨받아 뒤집어썼다. 북방인들이 오령을 넘기만 하면 바로 장병에 걸려서 8할이 죽는다느니, 반란을 진압하려고 영남에 군대를 보냈더니 5할이 장병으로 사망했다느니 하는 기록이 드물지 않다. 송(宋, 960∼1279)나라 때의 어떤 기록을 보면 당시 사람들은 영남 안에서도 특별히 장병으로 유명한 몇몇 지방을 ‘대법장(大法場)’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법장이 오늘날 말로 처형장이니 대법장이면 요즘 말로 ‘킬링필드’ 정도 되겠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영남 사람들은 종종 차별에 시달렸다. 이 지역에 임명되는 지방관들은 설령 부임지까지 온다고 해도 관사에 콕 박혀서 퇴임할 때까지 ‘자가격리’하기 일쑤였고, 시골 군수나 현령 자리 같은 건 그나마 보낼 사람조차 찾지 못해서 7∼8년간 공석인 경우도 있었다. 당나라 때의 한 관리는 발령이 났는데도 장병이 두려워 못 가겠다고 버티다 처형당했다. 또 다른 관리는 광둥 지역에 부임했다가 장병으로 바로 사망했는데 비보를 받고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그 지역에 내려간 아들 역시 사망했다고 한다. 이런 일화가 비일비재하다.

광둥의 오른편에는 푸젠이 있다. 면적이 우리나라 정도인 이 성은 영남처럼 해안에 접해 있고 북쪽의 산맥이 다른 성과의 경계를 이룬다. 위도상으로 영남보다 조금 북쪽이지만 마치 우리나라의 충청북도가 사실상 충청남도와 나란히 놓여 있는 것처럼 푸젠도 영남보다 딱히 위쪽에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푸젠의 한 해변도시에서 태어난 류극장(劉克莊, 1187∼1269)이 광둥의 중심지인 광저우에 부임하게 됐을 때 남긴 시 속에 “북방인으로서 남방에 가니 장병이 걱정”이라는 구절이 있는 것을 보면 푸젠 사람들은 자신들은 ‘북방’, 광둥은 ‘남방’이라고 봤던 것 같다.

푸젠은 당나라 즈음만 해도 개발이 덜 된 변두리에 불과했고, 장병 유행구역이었고, 그래서 ‘남방’이었다. 그러다 송나라가 들어서면서 경제가 크게 성장했고 여기에 힘입어 과거시험에서 뚜렷하게 우수한 성적을 내기 시작했다. 특히 남송시대 들어서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과거 합격자를 배출한 지역이 됐는데, 이때 배출한 급제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성리학(性理學)을 완성시킨 주자(朱子: 朱熹, 1130∼1200)이니 그 혁혁한 명성에 대해서 더 부연할 필요가 없겠다.

한때 ‘킬링필드’로 불렸던 푸젠은 바로 이때부터 ‘북방’의 일부가 됐다. 이 지역의 풍토병이 사라져서라기보다는 (아마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한족 상류층 문화의 중심지가 됐기 때문이다. 남방과 북방을 가르는 기준이란 다름 아니라 ‘이 문화’에 얼마나 동화됐느냐였고 과거시험 성적은 이 동화의 정도를 가늠하는 척도였다. 달리 말하면 ‘이 문화’와 코드가 어긋날 경우에만 남방, 곧 장병 유행구역이라는 낙인을 받았다는 뜻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이른바 ‘남방’과 ‘북방’이란 지리적 위치(location)와 문화적 지위(status)가 뒤섞인 관념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장(瘴)이라는 글자는 점차 단순한 병명(病名)을 넘어서 용례를 확장하게 되는데 주로 남방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비(非)한족적인 것들에 으레 이 글자가 붙었다. 1407년, 버마 원정을 떠났던 장홍이라는 명나라 장수는 이렇게 말했다. “버마인들은 종종 음란한 여성을 훈련해서 우리 병사들을 꾄다. 이들과 관계를 맺으면 반드시 병들어 죽으므로 이들을 인장(人瘴)이라고 부른다.” 병사들이 이 이야기를 믿고 현지 여성을 멀리한 덕에 장병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고향에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중국의 영남지방이 송나라 때까지 장병의 덤터기를 썼던 것이 단지 풍토병이 있었고, 지리적으로 남쪽이었고, 다른 지역과 고립돼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해당 지역엔 비(非) 한족 인구가 많았고, 그래서 한족 엘리트 문화에 동화되지 않았고, 그래서 과거시험 합격자 수가 전국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었던 것 역시 중요한 원인이었다. 남송 때부터 이 지역으로 한족 이민자 유입이 급증하고 명나라 때부터 이 지역이 과거시험에서 유의미한 성적을 내기 시작하자 영남지방은 앞서 푸젠이 그랬던 것처럼 킬링필드의 오명을 벗게 됐다. 그리고 푸젠이 폭탄을 영남에 돌렸던 것처럼, 영남은 자신이 짊어졌던 폭탄을 새롭게 제국에 편입된 윈난(雲南)에 돌려버렸다. 폭탄을 떠넘길 신입생을 찾지 못한 윈난 사람들은 그래서 지금도 장병에 걸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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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실제로는 영남과 같은 벽오지보다는 번성한 대도시 쪽이 전염병에 더 취약했다는 것이다. 송(宋, 960∼1279)나라의 카이펑(開封)과 항저우(杭州), 원(元, 1279∼1368)나라의 베이징(北京)과 항저우, 명(明, 1368∼1644)나라의 베이징과 난징(南京) 등 문화적/경제적으로 가장 앞서 있었고 가장 콧대 높았던 지역이 기실 가장 위험한 지역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상할 게 없다. 남송 시절 항저우에는 최소 100만 명이 넘는 인구가 사방이 산과 물로 막힌 비교적 좁은 땅에 몰려 살았다. 전염병이 유행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조건이다. 13세기에 영남지방 대표로 과거시험 최종 라운드를 치르기 위해 항저우로 상경한 젊은이들은 아마 며칠이 지나기 전에 당장 풍토병에 걸려서 물갈이를 심하게 하거나 심지어 죽는 일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깨끗한 북방, 병든 남방이라는 지배담론의 거대한 힘에 갇힌 남방 출신 젊은이들은 북방에 가서 ‘장병’에 걸릴 거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영남 사람을 괴롭혔을 항저우의 풍토병이 없었을 리가 없지만 남아 있는 기록은 이에 대해 침묵한다.

240년 전 제주도에 부임했던 엄사만은 장독(瘴毒)이 섞인 바람이 부는 벽오지에서 더 오래 근무하다간 중국 역사서에서 나오는 사례들처럼 무참히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영의정 서명선과 정조 역시 엄사만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믿었다. 오늘날 제주도에 부임하는 공직자들이 더이상 장병을 두려워하지 않고 국무총리나 대통령 역시 제주도의 바닷바람에 장기(瘴氣)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까닭은 모두 과학이 발전한 덕분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어딘가를 ‘오염구역’으로 지정함으로써 자신이 사는 지역은 청정할 거라는 작은 위안을 얻는다. 올 들어 신종 전염병인 코로나19가 유행한 이후로 세계 각지에선 인종주의(racist) 범죄가 급증했다고 한다. 과학의 발전도 전염병에 올라타 함께 확산하는 미움의 물결은 막지 못한 것이다. 과학이 해내지 못한 일을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해낼 수 있을까. 나우시카는 연민과 우애라고 했다.


참고문헌
1. Zhang, Cong. 2011a. ‘Between Life and Death: Song Travel Writings about Zhang 瘴 in Lingnan’. Journal of Song-Yuan Studies 41: 191–225.


필자소개 안동섭 중국 후난대 악록서원 조교수 dongsob@unix.ox.ac.uk
필자는 연세대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중국 남송시대를 연구한 논문으로 동양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정이의 거경에 대한 연구’ ‘Contested Connection: the 12th-century debate on Zhou Dunyi’s hometown’ 등 다수 논문을 국내외 유력 학술지에 개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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