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와 정조를 통해 본 리더십
Article at a Glance
조선시대에 ‘덕후’를 의미하는 우리말로 ‘벽치(癖癡)’라는 표현이 있었다. 한 가지에 편협하게 빠진 바보들을 뜻하는 단어였다. 현명한 군주라 불리는 정조는 벽치를 극도로 싫어했다. 벽치들은 식견이 좁고 상식이 부족하며 온갖 상품을 가지고 싶어 하다 보니 적국인 청나라 물건까지 좋아하는 것이라고까지 비난했다. 하지만 원래 전문가란 상식이 넓은 사람이 아니라 좁고 깊은 사람인 경우가 많다. 21세기 현대에 ‘덕후’가 그 가치를 인정받는 이유도 바로 이 전문성 때문이다.
역사를 보면 과거에 천대받던 것이 현대에 들어와 존중받고, 과거에 하늘처럼 떠받들던 것이 지금은 천대받고 있는 현상을 곧잘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코카인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많이 유통되고 가장 위험한 마약이다. 하지만 코카인이 처음 등장했을 때는 만병통치약으로 각광을 받았다. 서양에서 문화 황금기라고 불리는 르네상스 시대에 광대는 그림 속에 등장만 해도 불경죄로 처벌받을 정도의 천한 직업이었다. 그러나 요즘 연예인은 그야말로 하늘이고 스타다. 군주보다 더 존경받는 존재가 됐다.
21세기에 천지개벽한 현상이 또 있다. 요즘 ‘덕후’라고 하는 마니아다. 덕후라는 말은 일본의 오타쿠라는 말을 번안해서 사용하는 것인데 마니아나 오타쿠나, 두 단어 모두 원래는 좋은 의미가 아니었다. 무엇 하나에 빠져서 모든 것을 팽개치는 사람을 비하하는 말이었다.
조선시대 오타쿠, ‘벽치(癖癡)’
사실 우리말에도 오타쿠에 해당하는 단어가 있었다. 마니아가 우리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때는 바로 정조 시기였다. 이때 쓰였던 다양한 표현법이 보이는데 예를 들면 ‘완물상지(玩物喪志)’라는 말이 있다. 완물상지는 특정한 물건을 너무 좋아해서 정상적인 생활을 못한다는 뜻이다. 정확히 오늘날의 덕후다. 골동품이나 문방구, 그림, 도자기, 화병, 꽃, 소설 읽기 같은 것에 빠져서 과거 공부, 가사, 심지어는 부인과 자식에 대한 의무까지 포기하고 가산을 탕진하는 사람을 말했다.
오타쿠를 뜻하는 또 다른 말로 ‘벽치(癖癡)’라는 표현도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한 가지에 편협하게 빠진 바보들’을 비꼴 때 이 단어를 썼는데 정작 이 소리를 듣는 벽치들은 오히려 이런 표현을 영예로 알았다고 한다. 스스로에게 별명을 지어 붙인 벽치들도 있었다. 가령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덕무는 자신을 책만 읽는 바보라는 뜻으로 ‘간서치(看書癡)’라고 지칭했다. 또 신의측이란 사람은 ‘나에게로 돌아갔다’라는 뜻에서 ‘환아(還我)’라는 별명을 지었다.
오타쿠의 종류도 무척 다양했다. 벼루, 종이, 붓, 먹 등의 문방구류는 기본이고, 속담, 방언, 담배, 돌, 칼, 곤충, 채소, 조류, 벌레 등등 천차만별이었다. 이것들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면서 불경스럽게 제목에 ‘경전’이라고 붙였다. 녹색앵무새경(녹앵무경·綠鸚鵡經), 비둘기경전(발합경·鵓鴿經), 담배경전(연경·烟經) 등이 대표적 예다.
정조 때 확대된 이런 현상, 즉 새로 탄생한 벽치들에 대해 정작 정조는 어떻게 평가했을까? 현명한 군주라는 정조는 이들을 극도로 무시했다. 아니, 사회적으로 위험한 종자로까지 간주했다. 정조는 중국 소설을 읽는다며 김조순과 이상황을 처벌했고 해당 소설을 몽땅 불태웠다. 남공철과 이옥은 시험답안에 소설 문체를 인용했다며 처벌했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박지원에게는 반성문을 써서 제출하도록 했다. “소설 나부랭이들이 경전을 헤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단을 물리치고 정도(正道)를 넓히기 위해서는 강력한 규제가 필요하다. 이런 폐단을 근본부터 뿌리 뽑으려면 애당초 잡서를 사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제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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