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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siting Machiavelli-11

16세기 나쁜 피렌체, 나쁜 팔로어가 나쁜리더 낳았다

김상근 | 112호 (2012년 9월 Issue 1)





편집자주

많은 사람들은 마키아벨리를권모술수의 대가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억울하게 살고 있는 약자들에게더 이상 당하지 마라고 조언했던 인물입니다. 메디치 가문의 창조 경영 리더십 연재로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김상근 연세대 교수가 마키아벨리를 주제로 연재합니다. 시대를 뛰어넘는 통찰력을 주는 마키아벨리의 이야기 속에서 깊은 지혜와 통찰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탁월한 리더가 없었던 두 나라

마키아벨리의 조국 이탈리아와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 사이에 놀라운 공통점이 있다. 어쩜 그리 두 나라가 똑같은지 감탄하게 된다. 두 나라가 공유하고 있는 첫 번째 공통점은 지정학(地政學)적인 것인데 두 나라 다 반도(半島) 국가이고 열강에 둘러싸여 있는 약소국이라는 것이다. 마키아벨리 시대의 이탈리아는 에스파냐(스페인), 프랑스, 신성로마제국(독일), 오스만튀르크라는 강대국 사이에 둘러싸여 있었다. 한국이 해방 이후부터 미국, 중국, 소련(러시아), 일본이라는 4대 강국의 눈치를 봐야했던 것과 비슷하다. 16세기의 이탈리아가 도시국가로 내분을 거듭하고 있던 것이나 삼국시대부터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있는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분열의 역사도 얼추 비슷하다. 두 번째 공통점은 두 나라 다 문화적 감수성이 뛰어난 민족이란 것이다. 미추(美醜)를 구별하는 예술적 감각이 빼어나고, 음식 문화가 발달되어 있으며,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음주가무(飮酒歌舞)에 능수능란한 민족들이다. 이탈리아 여러 도시에서 개최되는 콩쿠르에서 다수의 한국인이 각광을 받는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탈리아와 대한민국의 국민이 자랑하는 개인적 자질의 우수성과 정확하게 대척을 이루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세 번째 공통점인데 탁월한 리더의 부재(不在)라는 고질적인 사회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이다. 미성년자와의 성추문과 미디어를 통한 정권 장악으로 끊임없이 구설수에 오르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라는 인물이 총리직에 세 번씩이나 임명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이탈리아에 탁월한 리더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부터 대한민국을 이끌었던 많은 대통령들의 비극적인 퇴장을 지켜봐야만 했던 우리의 현실도 이탈리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심복의 총에 맞아 죽은 대통령, 퇴임 후에 교도소로 직행했던 대통령, 자살로 격동의 삶을 마감했던 대통령까지 우리는 대한민국 리더들의 비극적 종말을 지켜보는 아픔을 가진 민족이다. 존경할 만한 리더를 가지지 못해 우울한 우리 모두의 아픔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마키아벨리다. 마키아벨리의 고민도 우리들의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왜 우리에게는 탁월한 리더가 없는 것일까? 이탈리아와 피렌체가 안고 있는 사회구조적 모순 때문에 탁월한 리더는 아예 탄생할 수 없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우리는 난세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분열된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통합시킬 수 있는 탁월한 리더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공직자 마키아벨리의 마지막 임무



마키아벨리는 유능하고 부지런한 피렌체 공화국의 엘리트였다. 공직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랬다. 1506 126, 마키아벨리는 신설된피렌체 9인 군사 위원회의 서기장으로 임명된다. 외교업무를 담당하던2 서기장의 임무와 오늘날 국방부의 역할을 했던 ‘10인회서기관의 직책을 맡고 있었는데 또 다른 주요 보직이 맡겨진 것이다. ‘피렌체 9인 군사 위원회는 오늘날 육군 사령부의 참모부에 해당한다. 피렌체를 방어하기 위해 군인을 모집하고 훈련시켜조국의 수호자를 만드는 부서였다. 무려 3개의 보직을 동시에 맡았지만 마키아벨리가 수령하던 급여는 한 직책에서 지불하는 금액이었다. 그래도 마키아벨리는 불평하지 않았다. 피렌체인은 스스로를 명예스러운 존재로 여기는 일종의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지는 경향이 있으나 마키아벨리는 여기에다 일 중독증까지 더해진 인물이다. 마키아벨리는 용병부대의 폐해를 지적하며 시민군으로 구성된 자체 방위군의 필요성을 줄기차게 주장했던 군사 전문가이기도 했다.1 자신의 평소 주장을 실현하기 위해 마키아벨리는 1507년 한 해 동안 토스카나 지방을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피렌체 공화국의 자체 방위군을 조직하기 위해 모병 활동을 펼친 것이다. 그의 뒤에는 프란체스코 소데리니 추기경이라는 막강한 후원자가 있었다. 우르비노에서 함께 체사레 보르자와 협상을 벌였던 피렌체의 유력 인사로 그의 동생인 피에로 소데리니(Piero Soderini, 1450-1522)는 피렌체 행정부의 수반격인 콘팔로니에레(총독)로 재직하고 있었다. 총독의 형이 보내는 전폭적인 지지, 그야말로 만사형통(萬事兄通)이라고 할 만한 위세를 가진 사람이 뒤를 봐주고 있으니 마키아벨리는 늘 기고만장했을 것이다.

 

당신이 업무에 유능하고 매사에 부지런할 뿐 아니라 최고위층의 후광을 받고 있다면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질투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도 그랬다. 출신도 변변치 않았던 마키아벨리가 공직을 3개나 꿰차고 있고 피렌체의 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소데리니 형제의 후원을 받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이 시기(猜忌)할 만했다. 피렌체 사람들은 태생적으로 경쟁심이 남다르다. 피렌체의 권력 구조에서 소외돼 있던 많은 귀족들은 마키아벨리에 대한 부정적인뒷담화를 수군거렸다. 어떤 사람들은 마키아벨리를아첨꾼(mannerino)’으로 불렀다. 알라만노 살비아티란 귀족은 마키아벨리를건달이라고 부르며 공개적으로 그를 비난하곤 했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고, 모난 돌이 정을 맞게 되는 것은 이탈리아나 한국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서서히 마키아벨리에게 위기가 닥쳐오고 있다는 조짐이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었다. 그의 운명은 피렌체 공화국의 운명과 궤적을 같이 할 수밖에 없었다. 마키아벨리는 소데리니 형제의 최측근 참모였다. 피렌체 공화정과 소데리니 형제의 행운이 마감되는 날, 필연코 그의 운명도 파국을 맞게 되리라.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잠시 주춤거리고 프랑스와 나폴리(에스파냐) 간의 정치적 갈등이 소강국면에 접어들자 이번에는 알프스 산맥 너머의 막시밀리안(Maximilian I, 1459-1519) 황제가 이탈리아 반도를 엿보고 있었다. 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자기 공직의 이름에 걸맞은 대우를 받기 위해 이탈리아 침공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북부 지방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프랑스를 몰아내고 이탈리아를 차지하겠다는 속셈이었다. 도시국가로 분열돼 있던 16세기의 이탈리아는 유럽의 군주들에게 무주공산(無主空山)으로 인식됐다. 이탈리아 땅에 누구든 먼저 말뚝을 박으면 자기 땅이 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막시밀리안 황제에게는 이탈리아 반도로 남하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로마로 가서 교황의 축복을 받으며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왕관을 쓰는 대관식을 거행해야 한다는 강박증이다. 기원 후 800년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왕관을 교황으로부터 직접 대관받았던 샤를마뉴(Charlemagne, 742-814) 이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교황으로부터 직접 왕관을 대관(戴冠)받는 것이 중요했다. 사실 신성로마제국 황제에게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신성한 수호자라는 종교적 의무가 부여돼 있었다. 이탈리아 북부지방에 눈독을 들이고 있던 막시밀리안 황제가 로마에서 거행될 대관식을 향해 남진(南進)한다면 반드시 경유해야 하는 곳이 바로 피렌체다. 만약 막시밀리안 황제가 피렌체에 대해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다면 피렌체로서는 여간 낭패가 아니다. 그동안 피렌체는 신성로마제국의 적대 국가였던 프랑스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지 않았던가? 피렌체 행정부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노련한 외교관을 파견키로 했다. 소데리니 총독은 이번에도 심복 마키아벨리를 지명했다. 그러자 피렌체의 귀족들이 들고 일어났다. 피렌체에 마키아벨리만 있는 것도 아니고 미래의 지도자로 성장할 젊은이들에게 외교 경험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라도 다른 귀족의 자제를 파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출발 준비를 하고 있던 마키아벨리 대신 프란체스코 베토리(Francesco Vettori, 1474-1539)가 대사로 임명됐다. 마키아벨리보다 다섯 살 젊은 귀족 출신이었다.

 

그러나 베토리는 신성로마제국의 궁정에서 피렌체 귀족들이 기대했던 것만큼의 뚜렷한 활약상을 보여주지 못했다. 막시밀리안 황제의 군대가 남하를 시작했다는 소문에 화들짝 놀란 피렌체의 행정부는 결국 마키아벨리를 파견키로 한다. 1507 1217, 엄동설한에 피렌체를 출발한 마키아벨리는 1508 111, 황제의 대표단과 선임 대사 베토리가 체재 중이던 볼차노(Bolzano)에 도착했다. 스위스와 이탈리아 북쪽 국경선에 있는 도시이다. 막시밀리안 황제는 자신의 이탈리아 원정에 드는 비용을 이탈리아인들로부터 뜯어낼 심산이었다. 마키아벨리는 급히 황제를 알현하고 3만 두카토를 세 번에 나눠 지불하겠지만 피렌체 군대를 직접 파병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협상안을 제시했다. 막시밀리안 황제는 금액이 터무니없이 적다고 불평을 터뜨렸지만 피렌체 대사의 순발력과 협상 능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마키아벨리는 황제가 유약한 인물이라고 판단했다. 말로는 이탈리아 정벌을 떠벌리지만 그럴만한 실행력이 없다는 것을 간파했던 것이다. 돈을 더 내라는 황제의 협박에 가까운 요구에도 마키아벨리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그는 피렌체의 10인 위원회에 보고서를 올리면서 황제의 요구에 응해도 좋고 거절해도 상관없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다만, 한번 내린 결정을 끝까지 밀고가고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고 썼다. 사실상 황제의 제안을 거부하라는 뜻이었다. 결국 마키아벨리의 판단이 정확했다. 막시밀리안 황제는 이탈리아에서 프랑스 세력을 몰아내지도 못했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로마에서 대관식을 올리지도 못했다.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이탈리아 영토 안으로 진입하지 말라고 경고장을 날리자 이내 꽁지를 내리고 이탈리아에서 철수해 버린다. 심약한 리더의 공통적인 특징, 즉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막시밀리안 황제의 나약한 모습을 지켜보면서 마키아벨리는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고전(古典)의 도움 없이 설명할 수 없다. 프랑스 출장 때는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기>를 읽었고, 체사레 보르자를 관찰할 때는 플루타코스의 <영웅전>을 읽었으며, 로마에서 교황의 권력이 율리우스 2세에게 극적으로 이양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리비우스의 <로마사>를 탐독했다. 마키아벨리는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의 이면을 통찰하기 위해 고전에서 지혜를 얻었다. 마키아벨리는 막시밀리안 황제와 협상을 벌이면서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 56-117)의 고전을 읽었다. 타키투스의 명작인 <역사>. 알프스 이북 지역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던 타키투스의 또 다른 책 <게르마니아>도 읽었을 것이다. 역사가의 기록에 나타난 알프스 이북에 대한 정보를 얻고 게르만인들의 특징을 분석하기 위해 고전을 참고한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독일 출장을 마친 그는 <독일 관찰기 Ritratto delle cose della Magna>를 집필하면서 자신이 경험했던 신성로마제국(독일)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마키아벨리는 1508 616, 유쾌한 기분으로 피렌체에 귀환했다. 그는 이 외교 업무를 통해 또 다른 성과를 얻게 된다. 평생 절친한 관계를 유지했던 친구 베토리를 만난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생애 후반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이 두 사람이 교환했던 많은 편지를 상세히 살펴보게 될 것이다.2

 

피렌체로 귀환한 마키아벨리는 공직자로서의 최고 전성기를 향해 계속 질주한다. 1509 5, 15년이나 지루하게 계속됐던 피사와의 전쟁을 마침내 끝낼 수 있었다. 마키아벨리가 조직하고 훈련시켰던 피렌체 방위군이 승리의 주역이었다. 아고스티노 베스푸치는 이 전쟁의 승리가 전적으로 마키아벨리의 공헌이며 그에게키케로식 찬사를 바치고 싶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3 전쟁을 끝내고 돌아온 로마의 개선장군에게 키케로가 축하 연설을 했던 것을 빗대어 한 말이다. 필리포 카사베키아는 마키아벨리에게 이렇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이 고귀한 도시를 정복한 위업을 천번 만번 축하하네. 사실 이 일은 실질적으로 자네의 작품이, 자네의 기여가 컸던 것이 분명하네.”4

 

1509년부터 1512년까지 마키아벨리는 공직자로서의 마지막 분주한 일정을 소화해 냈다. 파국적인 결말에 도달할 것을 미리 알 수 없었던 마키아벨리는 최선을 다해서 맡은 바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이 기간 마키아벨리는 두 번의 프랑스 출장(1510 5-10, 1511 9-11)을 다녀왔고 여러 가지 업무 처리를 위해 이탈리아 전역을 분주히 돌아다녔다. 이것이 마키아벨리에게 주어진 공식 업무의 마지막이다. 1512, 피렌체 공화정은 몰락하고 마키아벨리도 공직에서 쫓겨나게 된다.

 

 

 

 

피렌체 공화정의 몰락



1512 8, 작열하는 태양이 토스카나 땅을 달구던 뜨거운 여름, 1494년부터 시작된 피렌체 공화정의 종지부를 찍는 사건이 펼쳐진다. 18년 동안 지속되던 피렌체 공화정은 교황 율리우스 2세와 메디치 가문의 사주를 받은 에스파냐 군대에 의해 몰락하게 된다. 이 사건을프라토 전투(Battle of Prato)’라고 부른다. 피렌체 공화정 몰락의 계기가 된 프라토 전투는 교황 율리우스 2세와 프랑스와의 갈등에서 비롯됐다. 교황의 독주를 견제하던 프랑스가 피사에서 독자적인 종교회의를 개최하려 들자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발끈했다.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교황과 프랑스의 갈등은 즉각 피렌체로 불똥이 튀었다. 피렌체가 늘 친프랑스 정책을 취하면서 양쪽의 눈치를 봤기 때문이다. 교황은 피렌체의 모든 성직자들에게 성무 정지의 파문을 내리겠다고 협박했다. 이탈리아의 적과 내통하는 반역의 무리들에게 징벌을 가하겠다는 교황의 분노가 피렌체의 정국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마키아벨리의 네 번째 프랑스 출장(1511 9-11)도 이 문제를 프랑스와 협의하기 위해서였다. 이탈리아 영토 안에 있는 피렌체가 적국에 동조하고 있다고 판단한 교황은 결국 피렌체의 정권 교체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마침 자신에게 우호적이었으며 교황 선거 때 큰 도움을 줬던 조반니 데 메디치(Giovanni de Medici, 1475-1521) 추기경의 조언도 큰 역할을 했다.5 교황은 북이탈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에스파냐의 군대에게 피렌체 공격을 명령했다. 나폴리의 총독 라몬 데 카르도나(Ramon de Cardona)를 지휘관으로 임명했고 조반니 데 메디치 추기경은 교황사절의 자격으로 에스파냐 군대와 동행케 했다. 메디치 가문으로서는 다시 피렌체를 차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3000명으로 구성된 피렌체 방위군이 외곽도시인 프라토에 최후의 교두보를 쳤다. 예상과는 달리 에스파냐 군대는 1차 공격을 실패하고 말았다. 토스카나 지방을 달구던 8월의 혹서(酷暑)가 먼 거리를 행군해 온 에스파냐 군대를 불리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식량부족으로 군인들의 사기가 떨어진 것도 또 다른 이유였다. 에스파냐 군대는 직접적인 군사 공격을 포기하고 협상을 위해 대표단을 피렌체로 보냈다. 에스파냐의 대표단은 메디치 가문을 복권시키고 친프랑스 정책을 포기할 것과 에스파냐에 조공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 며칠간 굶고 있던 에스파냐 군인들에게 충분한 음식을 제공해 주는 것도 협상 조건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피렌체의 소데리니 정부는 화친 정책을 받아들이자고 조언하던 마키아벨리의 의견을 무시하고 무응답으로 일관했다. 에스파냐 군대의 전력이 우려할 만한 것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식량 부족으로 굶주림에 지쳐 있던 에스파냐 군대는 피렌체가 화친을 받아들이지 않자 흥분하며 날뛰기 시작했다. 싸우다가 죽은 것이 굶어죽는 것보다는 낫겠다는 최후의 결의가 에스파냐 군대를 무적으로 만들었고 프라토에서는 대살육전이 벌어졌다. 피렌체의 방위군은 거의 전멸당했으며 시내에서 패배 소식을 들은 피렌체 시민들은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마키아벨리는 <로마사 논고>에서 절체절명의 순간이 임박했음에 불구하고 안이한 판단과 무대응으로 일관하며 미래의 안위를 운명의 장난에 맡겼던 소데리니 총독을 맹비난한다. 차라리 그때 친프랑스 정책을 포기하고 에스파냐 군대에게 빵을 던져줬더라면 공화정부가 전복되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6 지도자의 안일한 현실 인식과 결단력의 부족이 결국 피렌체 공화정 전복이라는 참담한 결과를 낳았고 결국 마키아벨리가 공직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당하게 된다.

 

위기가 코앞까지 닥쳤는데도 소데리니는 평소의 신중한 태도를 유지했는데 이것도 마키아벨리의 눈에는 중요한 실책으로 보였다. 피렌체 내부에서는 소데리니를 암살하거나 추방하려는 계획이 여러 번 적발됐다. 메디치 가문의 사주를 받았던 필리포 스트로치는 공개적으로 소데리니의 하야를 촉구하곤 했다. 그러나 소데리니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1511 13일에 내려진 포고령이 그가 내린 조치의 전부였다. 누구든지 메디치 추기경의 집에 머물거나 그의 추종자들과 거래하는 자는 반역자로 간주하겠다는 것이다. 소데리니의 포고령은 포고령으로만 그쳤다. 마키아벨리는 소데리니의 안일한 위기의식과 나약한 태도를 이렇게 묘사했다.

 

(소데리니는) 적으로 돌아선 사람들에 대해서 언제라도 이를 단죄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과감하게 그러한 처치를 강구할 수 없었다.”7

 

마키아벨리는 이런 우유부단한 행동의 원인은 인간에 대한 잘못된 믿음 때문이라고 보았다.

 

“참을성 있게 선덕을 베풀면 인간악을 교정할 수 있고 또 적을 대우해주고 상을 주면 반드시 해로운 마음을 솎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이러한 판단은 당연했고 도리에 맞는 일이기는 했다. 그렇다고 해서 선을 숭상한 나머지 늘어가는 악을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며 선한 것이 악 때문에 어이없이 숨통이 끊기는 경우에는, 더욱이 그러하다는 점을 깨닫지 못했다.”8

 

1512 831, 에스파냐 군대의 피렌체 점령이 임박해지자 소데리니는 스스로 공화정의 깃발을 내리고 시에나(Siena)로 망명했다. 1512 916, 드디어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로 귀환하게 됨으로써 피렌체 공화정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된다. 같은 해 918, 9인 군사 위원회가 해산됐고 마키아벨리가 심혈을 기울여 조직한 피렌체 방위군도 함께 해체됐다. 자기가 만든 조직의 와해를 지켜보던 마키아벨리는 숨어서 분통을 터뜨렸을 것이다. 그의 분노는 외부로 표출될 수 없었다. 정권이 바뀌었고 피렌체는 이제 메디치 가문이 이끄는 참주정치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1512 117, 공직에서 해임당했다. 그리고 바르젤로 감옥에 투옥돼 끔찍한 고문을 받는 신세가 된다. 이것이 마키아벨리가 나중에모든 것을 잃은 뒤(post res perditas)’라고 표현했던 1512년의 비극이다.

 

 

 

 

탁월한 리더가 없는 이유

공직에서 쫓겨나는 것도 모자라 바르젤로 감옥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아야 했던 마키아벨리의 뇌리에는 어떤 생각이 떠올랐을까? 자신이 주군(主君)으로 모셨던 총독 소데리니에 대한 실망감이 컸을 것이다. 자신의 능력을 몰라주는 메디치 사람들에게도 섭섭한 감정이 들었을 것이다. 자신이 태어난 16세기를 한탄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중요했던 생각의 화두는 이런 불평이나 불만이 아니었다. 왜 이탈리아가 이런 환난의 시대를 겪어야 하고, 왜 우리 조국 피렌체는 이런 역사의 소용돌이에 끊임없이 내동댕이쳐져야만 하는가? 왜 피렌체에는 르네상스의 위대한 예술가가 즐비한데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탁월한 리더가 없는 것일까? 어린애처럼 순진한 소데리니 같은 인물이 피렌체를 대표하는 리더였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어떻게 하면 우리는 탁월한 리더를 가질 수 있는가? 마키아벨리의 고민은 이런 것이었다.

 

바르젤로 감옥에 투옥된 마키아벨리는 다시 고전(古典)으로 생각을 돌렸을 것이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과 게르만인들의 행동양식을 이해하기 위해 최근에 읽었던 타키투스의 <역사>를 떠올렸을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처럼애정도 없이, 그리고 분노도 없이(neque amore… et sine odio)’ 자기 시대의 리더들을 냉정하게 분석하면서 고전을 통한 리더십의 통찰력을 얻게 된다. 탁월한 리더가 없다는 것은 그 리더(Leader)의 품격이 문제가 아니라 그 조직에 탁월한 팔로어(Follower)의 부재 때문이다! 그들이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문제란 것이다!

 

타키투스의 <역사>는 기원 후 69년에 일어났던 로마제국의 대혼란기를 분석한 책이다.9 마키아벨리는 1세기 후반에 일어났던 황제 갈바(Galba, 기원 후 3-69)의 위기, 오토(Otho, 32-69)의 반란, 비텔리우스(Vitellius, 15-69)의 반란, 유대전쟁을 수행하고 있던 베스파시아누스(Vespacianus, 9-79)의 황제 등극 등이 숨 가쁘게 일어났던 대혼란기를 통해서 16세기 이탈리아의 위기와 혼란을 보았을 것이다. 로마제국의 시대나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16세기 동안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늘 위기가 계속되고 있었다. 네로(Nero, 37-68) 황제의 정신분열증적 혼란기를 겨우 극복한 갈바 황제에 대항해 오토의 반란이 일어났다. 오토에게 매수된 황제 근위대가 반란을 일으키자 로마의 평민들은 동요하면서 갈바 황제의 처단을 주장하고 나섰다. 타키투스는 오토의 반란을 처음에는 반대하다가 갈바의 군대가 와해되는 것을 보고 급격히 오토를 지지하는 쪽으로 입장을 바꾼 로마 평민들을 경멸적으로 묘사했다.

 

“수많은 평민들이 이제 팔라티누스 언덕의 궁전을 가득 메우고 있었으며 그중에는 노예도 섞여 있었다. 마치 경기장이나 극장에서 어떤 볼거리를 요구하듯이 그들은 비록 한목소리로 외쳐댄 것은 아니지만 오토를 죽이고 공모자들을 처형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 요구에는 판단력도 진실성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로 같은 날, 마찬가지로 열렬하게 정반대의 것을 요구하게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어떤 황제에게든 거침없는 갈채와 무의미한 열정으로 아첨하는 것은 평민들 사이에 전해오는 습성이었다.”10

 


로마의 평민들은 중요한 역사의 현장에 있었지만마치 경기장이나 극장에서 어떤 볼거리를 요구하듯이입장을 바꾸면서거침없는 갈채를 보내거나무의미한 열정으로 아첨하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탁월한 리더가 부재했던 로마의 위기를 탁월한 팔로어의 부재로 설명한다. 손바닥 뒤집듯이 입장을 바꾸는 로마 평민들의 잘못된 선택이 나쁜 리더에게 권력의 기회를 줬다는 것이다. 탁월한 팔로어가 없는 사회에는 나쁜 리더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타키투스의 눈에는 오토가 바로 그런 나쁜 리더의 전형이었다. 영혼이 없는 팔로어들에게 오토의 감언이설이 술술 먹혀들었다.

 

타키투스의 신랄한 비판은 이렇게 이어진다.

 

“오토는 왕왕 법정에 출두해 청중의 귀를 사로잡을 만큼 풍부한 표현과 낭랑한 어조로 변론을 하곤 했다. 상투적으로 황제에게 아첨하는 말을 외쳐대는 군중의 함성은 과장되고 진실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마치 독재관 카이사르나 황제 아우구스투스에게 환호하듯 앞다퉈 열성적으로 오토를 위해 서원했다. 그것은 두려움이나 애정이 아니라 노예근성이었다. 노예들이 그러하듯 개인적 동기에 자극될 뿐 공적인 영예는 값싸게 여겼다.”11

 

1세기 로마 사회가 당면했던 리더의 부재 현상을 통해 마키아벨리는 16세기 이탈리아와 피렌체가 당면한 리더의 부재 현상을 봤다. 로마의 역사학자 타키투스의 눈으로 자기 시대의 모순을 보았던 마키아벨리처럼 우리는 마키아벨리의 눈으로 우리 시대를 봐야 한다. 탁월한 리더가 부재한 우리 시대의 불행은 우리 모두가 탁월한 팔로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로어떤 황제에게든 거침없는 갈채와 무의미한 열정으로 아첨하던로마의 평민들이었다. 우리가 바로개인적인 동기에 자극될 뿐 공적인 영예를 생각하지 않았던 나쁜 팔로어였다. 리더가 우리의 문제를 모두 해결해 줄 것이라는 그 잘못된 생각이 우리를 나쁜 팔로어로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그들을 나쁜 리더로 만들게 된 것이다. 다음 세상을 이끌겠노라고 너도나도 나서는 이 시기에 우리는애정도 없이, 그리고 분노도 없이(neque amore…et sine odio)’ 그들을 냉정하게 지켜봐야 한다. 탁월한 리더를 만드는 것은 그들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바르젤로 감옥의 고문장으로 끌려가던 마키아벨리의 입술이 조금씩 떨렸을 것이다. 자신을 배반한 시대를 향해,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지 못하는 그 시대의 리더들을 향해, 이렇게 혼잣말로 말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Neque amore…et sine odio(애정도 없이, 분노도 없이…)”

 

 

 

 

 

김상근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 skk@yonsei.ac.kr

필자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립대 및 에모리대에서 석사 학위를,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 신과대학 부교수로 재직 중이며 ㈜SK케미칼 고문도 맡고 있다. <르네상스 창조 경영>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 15권의 책을 냈다. 르네상스 시대의 창조적 영감을 현대적 언어로 재해석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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