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경영

장진호혈투, 지휘관 1명이 연대를 구했다

109호 (2012년 7월 Issue 2)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미군은 한국전에서 두 번의 충격적인 실수를 경험했다. 첫 번째는 한국전의 발발 가능성을 낮게 보고 극동군을 형편없는 수준으로 방치한 것이다. 전혀 훈련이 돼 있지 않았던 미군은 전쟁 초기 인민군에게도 밀렸다. 당시 한국군들은 미군이 도로로만 이동하려고 하고 산비탈로는 절대 다니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오늘날 밝혀진 바로 당시 미군은 훈련부족으로 다리에 힘이 없었다고 한다.

 

두 번째 실수는 중공군에 대한 무지였다. 중공군의 개입에 대한 정보가 계속 들어왔지만 맥아더 사령부는 이를 무시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아주 무시한 건 아니었다. 맥아더는 중공군이 참전하기 전에 압록강과 두만강을 완전히 확보해 전쟁을 끝내려는 계획을 세웠고 항공정찰을 통해 중공군의 동향을 계속 감시하면서 육군과 해병대에게 빨리 북진하라고 다그쳤다. 그러나 한국의 험악한 산악지형과 병력부족 때문에 전선을 유지하며 북진시킬 수가 없었다.

 

한반도는 북쪽이 Y자 형태로 꺾여 있어서 동서로 전선을 유지하려면 중부지방보다 최소한 2배의 병력이 필요하다. 미국은 병력증원 요청을 거절했고 맥아더 사령부는 모험을 택했다. 중앙부를 방치하고 병력을 좌우로 갈라 평안도와 함경도 양쪽으로 나누어 북진시켰다. 중앙부에 커다란 공백지대가 생기면서 양쪽으로 갈라져 북진하는 유엔군 측면이 무방비 상태가 됐다. 한국의 좁은 산길과 산곡으로 들어서면 전선은 모세혈관이 뻗어가듯 갈라지고 가늘어 지면서 서로 멀어졌다.

사령부는 무작정 일선부대에 신속한 진격을 요구했다. 이 진격이 성공해서 통일이 됐다면 과감한 결단이었다고 두고두고 칭송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수십만의 중공군이 이미 들어와 덫을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중공군의 출현

중공군 출현 정보가 계속 보고 됐지만 사령부는 대규모 병력이 잠입했다고 믿지 않았다. 겨울에 나무 하나 없는 한국의 민둥산은 눈으로 덮여 있었다. 전투 사단이 들어왔다면 항공정찰에 잡히지 않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 오산은 미군이 중공군의 특기와 야전능력에 대해 무지했던 탓이었다. 이때만 해도 서구인들은 아시아인들의 복종심과 단결력, 끈기, 강인함을 이해하지 못했다.

 

정찰기가 뜨면 수만 명의 중공군이 하얀 담요 한 장을 덮고 눈 위에 엎드렸다. 미군은 백색의 눈 위에서는 숨을 곳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거대한 대지의 이불이었다. 투박한 솜옷을 입은 중공군은 영하 40도의 날씨에 눈에 엎드려 숨고 밤이 되면 이동했다. 북부지방의 그 험한 산곡을 그들은 수레를 끌며 등짐을 지고 보급품을 날랐다. 솜옷은 입었지만 중공군의 약점은 신발이었다. 농구화 비슷한 신은 방수도 방한도 되지 않았다. 무수한 병력이 동상으로 쓰러졌지만 그들은 묵묵히 지시를 따랐다. 나중에 어느 미군은 심한 동상에 걸린 중공군 포로 한 명이 걸어가는 것을 보고 기겁을 했다. 발이 퉁퉁 부어 기형적으로 커져 있었고 살은 썩고 갈라져서 신발 안에 진물이 고여 걸을 때마다 철벅철벅 소리가 났다. 저 정도면 통증으로 걷는 게 불가능하고 지금 치료를 받아도 절단을 면할 수 없는 수준이었는데도 그는 등에 동료를 업고 걸어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중공군의 최고 장기는 야간 이동술이었다. 이때까지도 미군은 야간에는 싸우지 않는 것을 정상으로 여겼다. 반면 중공군은 소리 없이 야간에 이동하는 능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장진호의 혈전

1950 11, 후대에장진호의 혈전으로 알려진 전투의 격전지인 함경남도 장진호 부근 개마고원 일대에 투입된 중공군은 약 20만이었다. 압도적인 병력에 독특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중공군도 약점이 많았다. 무기와 화력은 열악했고 군대로서 낙후하고 결여된 능력도 많았다.

 

중공군 총사령관 팽더화이(彭德懷)는 전쟁이 장기전으로 가고 미군이 중공군의 전술을 파악하면 승산이 없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그들의 전술은 병력소모가 너무 크고 비인간적이었다.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던 조지 오웰이 이런 말을 했다. 진짜로 야전에서 싸우는 지휘관이나 병사는 오히려 인간적이 되고 적에게나 아군에게 그렇게 잔인하지 않다. 전쟁에서 가장 비인간적이고 잔혹한 명령과 전술을 강요하는 자들은 다 후방에 있는 인간들이다.”

 

팽더화이도 그런 고민에 휩싸였다. 장기전은 살육전이 될 것이고 승리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의 대안은 한번의 철퇴였다. 개마고원에서 아무 것도 모르고 다가오는 미군을 함정에 몰아넣고 완벽하게 몰살시킬 심산이었다. 2개 사단 이상의 미군, 특히무적이라 불리던 미 제1해병사단을 섬멸하면 미군은 전쟁에서 발을 뺄 것이다. 더욱이 해병대를 잃으면 전투를 주도할 부대가 사라지게 된다.

 

중공군이 놓은 함정은 이랬다. 미군은 좌우로 전선을 유지하지 못하고 겨우 트럭 한 대나 지나갈 좁은 산악도로를 따라 종대로 올라오고 있다. 중공군은 항아리 모양으로 그들을 넓게 포위한다. 쉽게 말하면 산악도로를 타고 가는데 주변의 첩첩산중 전부가 중공군이다. 미군이 항아리 안에 들어오면 산곡을 이용해서 그들의 좌우로 병력을 내려 보낸다. 후방으로 침투한 중공군은 보급부대와 포병을 먼저 습격해 처리하고 퇴로를 차단한다. 그 다음 파상공세와 인해전술로 미군을 섬멸한다. 미군이 탈출하려고 해도 도로는 거의 외길이고 양쪽 비탈 위에는 중공군이 새카맣게 포진하고 있다. 탱크조차도 돌파가 쉽지 않다.

 

중공군은 이 전술을 완벽하게 사용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를 찾았다. 장진호였다. 압록강으로 북상하던 미군은 장진호를 만나 다시 둘로 분리되고 완전히 격리됐다. 서쪽은 해병 1사단 7연대와 5연대, 동쪽은 미 육군 페이스 특수부대가 진격했다. 해병 2개 연대 약 3000명의 병력이 중공군 9병단 6만 명이 엎드려 있는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장진호는 오이처럼 남북으로 홀쭉한 형태인데 미군 선두가 장진호의 북쪽 유담리에 도착했을 때 중공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11 27일과 28일 사이에 시작된 최초의 기습은 완벽한 성공이었다. 7연대 1대대의 대대본부가 순식간에 궤멸됐고 대대장이 전사했다.

 

혼란 속에 미 해병은 철수를 결정했지만 이미 퇴로에는 중공군이 가득했다. 비유를 들면 미군은 좌우로 고층빌딩이 가득한 도로를 따라 직선으로 퇴각해야 하는 셈이었다. 빌딩은 모두 중공군이 점령한 가운데 중간중간 교차로를 미군이 점거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죽어라 달려서 교차로의 엄호범위까지만 들어가면 교차로의 수비대와 합세해 다시 아래 교차로로 철수하는 식으로 퇴각 전략을 짰다.

 

이 작전에서 아래쪽 교차로가 먼저 점거당하면 탈출은 불가능해진다. 중공군도 이를 알고 전 교차로에 대해 동시다발적으로 무자비한 공격을 감행했다. 어떤 교차로는 연대본부 주둔지로 강력하게 방어되고 있었지만 중대 단위의 교차로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7연대 F중대가 방어하는 하갈우리 북방의 덕동고개였다.

 

혹한 속 한밤중의 참호파기

F중대 중대장은 윌리엄 바버 대위였다. 태평양전쟁 중에서도 가장 참혹한 전장으로 꼽히는 유황도(이오지마) 전투에 소대장으로 참전해 2번이나 부상당했던 그는 예비역 소집 명령에 의해 뒤늦게 참전했다. F중대에 온 지 며칠 되지도 않아 바버는 묘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2차 대전을 경험한 고참병들은 어린(?) 해병들을 애송이 취급했고 이미 한국 땅에서 전투를 경험한 어린 해병들은 예비역 출신들을 한국 사정은 아무 것도 모르는 늙은 신병 취급을 했다. 역전의 용사인 바버는 그 모욕감을 참을 수 없어서 자신이 뛰어난 장교이며 고참병을 무시하지 말라고 훈시를 했다.

 

중공군 공격이 시작되기 직전인 27일 오후, 바버 대위는 홀로 덕동고개로 와서 방어진지를 설치할 지역을 선정했다. 중대병력이 아직 오고 있는 중이었지만 그는 대담하게 혼자 산지를 돌아다니며 지형을 조사하고 병력 배치방식을 구상했다. 해병은 중공군의 공세가 시작되면 철수해서 병력을 집결, 반격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그러나 바버는 중공군의 포위전술에 대해선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해가 저물 무렵에야 부하들이 도착했다. 바버는 영하 20도의 추위에서 혼자 오들오들 떨며 기다리고 있었다. 긴 시간 내내 바버는 병사들을 그냥 재울지, 아니면 전술교범대로 참호를 파고 재울 것인지를 놓고 고민 중이었다. 화강암 바위산에 땅이 꽁꽁 얼어붙은 한겨울에 참호 파기란 끔찍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전술교리에 참호는 최소한 1m는 파야한다고 돼 있었지만 동토(凍土)에선 60㎝ 깊이를 파기도 힘들었다. 병사들은 혹한 속 이동으로 이미 녹초가 돼 있었다. 병사들의 눈에 한국전에 갓 부임해 온 바버는 여전히 고까운 존재였다. 앞으로 바버가 이 거친 병사들을 통솔하려면 인간적인 신뢰도 얻어야 했다. 이곳은 아직 후방이고 중대는 이곳에 잠시 머물다가 이동할 예정이었다.

 

바버는 병사들을 그냥 재우기로 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생각을 바꿨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찌 알겠는가?” 깜깜한 밤에 참호를 파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바버는 오후 내내 혼자서 지형을 둘러보며 고생한 것을 보상이나 받으려는 듯이 진지구축을 일일이 감독했다. 사격구역도 꼼꼼히 정했고 중화기 거치지역을 몇 번이나 옮기며 새로 정했다. 말 그대로 야전교범대로였다. 병사에 소대장들까지도골통중대장을 만났다고 엄청나게 투덜거렸던 것 같지만 해병대답게 명령에는 복종했다. 참호파기와 진지배치는 밤 9, 10시가 돼서야 끝났다.

 

그날 밤 중공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중공군은 산 위에 숨어 F중대의 배치과정을 다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연히 진지의 공략지점도 파악했다. 전방위로 공격해 들어왔지만 그중에서 노린 지점은 중앙과 왼쪽에 배치한 소대의 연결 부위였다. 이곳을 뚫고 들어와 두 소대를 포위 섬멸하는 것이었다. 그 연결부위의 참호는 4명의 사병이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수류탄에 손가락이 날아가고 눈이 안보여도 사격을 멈추지 않았다. 수류탄이 날아들면 몸으로 덮쳐 동료를 구하면서까지 진지를 사수했다. 그날 밤 이들은 2개 소대의 중공군을 죽였다.

 

이날부터 121일까지 F중대는 덕동고개를 사수했다. 덕분에 유담리의 5, 7연대 병력이 탈출에 성공했다. 4일 동안 계속된 전투로 237명이던 중대는 86명만이 남았다. 그러나 사단급의 중공군을 격퇴했다. 중공군 사상자는 2000명이 넘었다. 생존자들은 그날 바버 대위의 참호파기 명령과 치밀한 진지배치가 없었다면 중대는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전멸했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원칙을 지킨 1명의 지휘관이 자신의 중대만이 아니라 연대 병력을 구했다.

 

타협할 수 없는 원칙

원칙과 야전교범을 고수한다는 것은 과거의 전술, 낡은 전술을 답습하지 말라는 경구와 상충된다. 그러나 이것은 범주의 문제다. 바버 대위는 중대장 취임사에서나는 전략은 모르지만 전술은 잘 안다라고 말했다. 중대원들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것은 그의 성격과 지휘관으로서의 소신을 보여준다. 좀 더 큰 범위의 전략은 창의적이어야 하며 교본을 답습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현장에서 적과 맞부딪히는 실전에서는 양보할 수 없고 타협할 수 없는 원칙들이 있다. 리더는 이것을 고수해야 한다.

 

타협할 수 없는 원칙과 고수해서는 안 될 원칙을 판별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리더는 두 가지 원칙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판별하고 실천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어떤 면에서 보면 원칙은 판별하기보다 실천하기가 더 어렵다. 덕동고개 전투와 바버 대위의 리더십은 원칙 고수를 고민하는 리더에게 용기와 신념을 주는 사례다.

 

 

 

임용한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yhkmyy@hanmail.net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과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 등 다수의 책과 논문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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