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치 가문의 창조 경영 리더십6

관용의 눈물이 진정 ‘불굴의 용기’다

65호 (2010년 9월 Issue 2)



편집자주 15∼17세기 약 300여 년간 이탈리아 피렌체 경제를 주름잡았던 메디치 가문은 르네상스의 탄생과 발전을 이끌어 인류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 놓았습니다. 르네상스 시대를 연구해온 김상근 연세대 교수가 메디치 가문의 창조 경영 코드를 집중 분석합니다. 메디치 가문의 스토리는 창조 혁신을 추구하는 현대 경영자들에게 깊은 교훈을 줍니다.

 

어느 재벌가의 초상 ()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손자 이재찬 씨가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업의 가문에서 일어난 비극이라 모두에게 충격을 주고 있다. 한 시대를 풍미했고, 지금도 그 영광의 시간은 계속되고 있지만 휘황찬란한 리더 가문의 한 구석에는 고뇌와 절망의 시간을 홀로 버티던 외로운 영혼이 있었던 모양이다. 삼가 애도를 표한다.

한 조직이나 집단의 리더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개인적인 희생을 감내해야 하기에 리더는 정말아무나 하는것이 아니다. 지금 당신이 성공한 CEO로서 승승장구한다 할지라도 그 이면에는 숨기고 싶은 아픈 희생이 있을 것이다. 성공 가도를 달리는 당신 때문에 아빠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당신의 사춘기 자녀가 지금 한숨을 몰아 쉴 수도 있고, 이사회 임원들과의 친교를 위해 주말마다 골프채를 잡을 때 당신의 아내는 고독과 함께 할 수도 있다.

직장 내 남성우월주의의 유리벽을 뚫겠다고 최초와 최연소의 타이틀을 차례로 거머쥐며 대기업에서 성공신화를 다시 쓰고 있는 여성 임원을 만난 적이 있다.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자신은 모든 것을 포기했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물론 싱글이었다.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연애나 결혼을 생각할 만큼 한가한 시간이 없었다고 했다. 결혼이 행복과 동의어는 아니다. 하지만 그 여성 임원은 리더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보통 사람들이 누리는 행복의 일부분을 희생시켜야만 했다. 리더는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땀과 눈물 없는 성공이 없듯이 개인적인 희생이 없는 리더도 존재하지 않는다.

진정한 리더는 내면의 세계를 성찰할 때 탄생하고, 자신이 리더가 됨으로써 초래되는 개인적 희생에 대한 냉정한 균형감각(Trade-off)을 가질 때 성장할 수 있다. 경영학의 리더십 이론은 자신의 개인적 장점을 경영 현장에서 최적화하는 방법을 주로 연구한다. 그러나 인문학적 성찰에 의하면, 리더는 우선 본인이 리더로서 감당해야 할 개인적 희생과 자신의 약점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리더는 많은 사람을 상대하는 공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사적 영역에서 개인적인 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과다한 업무 상 스트레스 때문에 건강이 나빠질 수도 있고, 의무적인 폭탄주 때문에 당신은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일 수 있으며, 늘상 시간의 압박에 쫓기기에 당신의 성격은 신경질적으로 변할 수 있다. 불가피한 구조조정을 단행할 때 당신은 회사를 떠나는 부하 직원들의 처진 어깨와 그들을 맞이하는 가족들의 눈물을 지켜봐야 한다. 인간적으로 괴로운 일이다. 경영자에게는 커리어를 위협하는 중대한 위기가 1 년에 최소한 한 번은 찾아온다고 한다.1  이 불가피한 위기 앞에서 불면의 밤을 견디며 해결의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 당신은 남들보다 더 튼튼한 강심장을 소유해야 한다.

그래서 리더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사적 영역의 손실을 감당하고 위기를 헤쳐나갈 용기가 없으면 아예 리더로 나서지 않는 게 좋다. 자신에게 초래될 희생을 감당할 자신이 없으면서 무리하게 리더의 자리에 오르면 많은 사람을 힘들게 한다. 당신의 가족을 외롭게 만들고, 당신의 직원들을 괴롭게 만들고, 당신의 고객들을 외면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잘못된 선택의 결과는 고스란히 당신 몫으로 남는다. 즐겁지 않은 일을 하면서 웃어야 하고, 능력에 미치지 못하는 일을 맡아도 할 수 있는 척을 해야 한다. 한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 있고 많은 사람을 잠시 속일 수는 있지만,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 따라서 리더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야 한다.

피에로 데 메디치(1416∼1469)는 위대한 아버지의 큰 그림자 밑에서 태어난 메디치 가문의 후계자였다. 이탈리아의 국부(國父)로 불리며 피렌체 시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코시모 데 메디치의 맏아들이다. 피에로는 슬픈 표정으로 기억될 만한 인물이다. 너무 위대한 아버지(코시모)를 두었고, 아버지의 명성에 버금가는 아들(위대한 자 로렌초)을 두었기 때문에 완전한 샌드위치 세대의 리더에 불과했다.

메디치 가문의 역사를 다룰 때 피에로는 국부 코시모와 위대한 자 로렌초를 연결하는 혈통의 연결고리로만 소개한다. 아버지 코시모의 임종(1464) 후 약 5년 정도 밖에 더 살지 못했기 때문에, 본인이 가진 리더십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시간도 충분치 않았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가 늘 병약(病弱)했고, 거의 모든 시간을 침대에 누워 환자처럼 지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메디치 가문의 고질병이었던 통풍(痛風)병에 걸린 중증환자였다.



피에로가 흘린 눈물
가수 김완선의피에로(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란 추억의 노래를 기억하시는지. 경쾌한 그 노래 가사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빨간 모자를 눌러쓴 난, 항상 웃음 간직한 피에로. 파란 웃음 뒤에는, 아무도 모르는 눈물.” 바로 코시모의 뒤를 이어 가문과 피렌체의 리더 자리에 올랐던 피에로의 마음일 것이다. 그는 아버지를 잘 둔 덕분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리더의 자리에 올랐다. 피렌체를 쥐락펴락하던 명문가의 장남으로 태어나 거대한 재산과 기업을 물려받았다. 아버지 코시모는 언제나 붉은 색 모자를 쓰고 다녔는데, 피에로도 그런 빨간 모자를 눌러 쓴 위치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메디치 가문과 피렌체를 이끌어갈 만한 충분한 카리스마의 리더십을 가지지 못했다. 무엇보다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침대에 누워서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할 만큼 그의 몸은 날로 쇠약해져 갔다. 그는 침대에서 빨간 모자를 눌러쓴 채 누워있어야만 하는 불쌍한 피에로였다. 그렇다면 그는 시대가 요구했던 리더십을 어떻게 수행했을까?

 



관용의 리더십 피에로는 아버지로부터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워낙 약골인데다 고질병까지 가졌으니 아버지 코시모는 장남인 피에로를 아예 처음부터 포기하고, 동생인 조반니를 가문의 후계자로 지목했다. 장남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아버지가 동생을 더 예뻐하고, 일찍부터 후계자 교육을 시키고 있을 때 그것을 바라보는 장남의 마음은 퍼렇게 멍들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동생이 요절했다. 예상치 않았던 후계자의 죽음 앞에 코시모는 큰 슬픔에 빠진다. 가문의 미래를 맡길 아들이 갑자기 죽자 코시모는 다시 한 번 피에로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길 만한 냉정한 결정을 내린다. 한 세대를 건너뛰는 것이었다. 통풍병자인 장남 피에로에게 가업을 넘겨주는 것이 아니라, 손자인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 1449∼1492)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당시 로렌초는 14살의 어린 소년이었다. 침대에 누워서 이 모든 과정을 조용히 지켜보아야 했던 피에로의 마음은 어땠을까?

피에로는 마음의 상처를 입을 만한 환경 속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남아 있는 어떤 기록에도 피에로가 분노하거나 질투의 격정에 휘둘렸다는 평가가 없다. 오히려 그는 온화한 성품을 가진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메디치 가문을 둘러싸고 있는 친구와 적들은 각기 다른 입장에서 평가를 내렸다. 사실 코시모나 로렌초는 긍정적인 평가도 받았지만 부정적인 평가도 많이 받았다. 다른 나라의 외교관들이나 스파이들이 남긴 보고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대내외의 수많은 문헌 기록은 한 목소리로 피에로의 온화한 품성을 칭찬하고 있다.

마키아벨리도 지적했지만 온화한 품성을 가진 사람은 리더십의 도전을 받기 마련이다. 착한 사람은 나쁜 사람을 당해내기 어렵다. 착한 사람은 갈등을 초래하는 대결 국면의 긴장감을 회피하는 경향을 가진 반면, 나쁜 사람은 오히려 그런 상태를 의도적으로 만들어가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습관적으로 갈등을 회피하는 착한 사람은 대결 국면에서 패배하기 쉽고 결국 성격이 모질고 품성이 나쁜 사람이 주도권을 잡는 사례가 많다. 온화한 품성을 가진 피에로에게 심각한 리더십의 도전이 발생했다. 아버지 코시모가 임종하고 겨우 2 년이 지난 시점(1466)에 발생한 메디치 반란 사건이다. 착한 성품과 신체적 한계를 가진 메디치 가문의 임시 수장인 피에로를 제거하려는 암살 음모가 추진된 것이다.

이 음모의 주동자는 루카 피티(Luca Pitti, 1398∼1472)였다.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으며 피렌체의 서기장을 역임하던 피티는 피렌체의 명문가였던 니콜로 소데리니(Niccolò Soderini) 등과 규합하여 피에로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카레지 별장에서 요양하고 있던 피에로를 살해하기 위해 반란군을 규합하고 인근 도시국가인 페라라의 지원군까지 확보했다. 피티가 반란군을 이끌고 피에로를 암살하면, 페라라의 군대가 피렌체를 무력으로 접수해 쿠데타를 완성한다는 복안이었다. 비열한 배신행위였다. 그러나 암살과 반란 음모는 사전에 포착됐고, 카레지 별장의 침상에 누워있던 피에로는 아픈 몸을 이끌고 급히 피렌체로 귀환한다. 반란군은 피에로의 이동을 눈치 채고 카레지와 피렌체 중간 지점에 매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17살이었던 로렌초는 반란군의 매복을 예상하고 교란작전을 펴서 반란군의 시선을 잡아 놓는다. 대신 아버지와 일행은 다른 경로를 통해 피렌체로 이동하도록 조치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로렌초는 지혜와 용맹으로 아버지를 위기에서 구했다. 무사히 피렌체로 귀환한 피에로는 정부군을 동원해 반란군을 제압한다. 반란은 단숨에 진압됐고 주동자인 피티와 소데리니는 피렌체의 시뇨리아(정부)에 의해 사형이 언도되었다.

피에로가 보여준 관용의 리더십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온화한 품성과 탁월한 인격을 발휘해 모든 반란자들의 즉각적인 사면을 결정했다. 그는 메디치 가문을 중심으로 피렌체 사회가 통합되는 게 모두의 이익에 유익한 것임을 강조하면서, 자신을 죽이려고 한 적을 모두 용서했다. 피에로의 관용의 리더십에 충격을 받은 피티는 자신의 잘못된 판단에 용서를 구하고 평생 메디치 가문의 충성스러운 신하가 되겠다고 맹세했다. 피에로는 통치의 기본을 알았다. 피는 또 다른 피를 부르고, 보복은 또 다른 보복을 낳는다. 그리고 피의 원한과 보복의 악순환은 자신의 아들과 손자의 미래에 엄청난 시련을 안겨 줄 것이라고 판단했다. 관용과 화합을 베푸는 길만이 메디치 가문과 피렌체에 미래의 평화를 가져다 줄 것으로 판단했다. 피에로가 선택했던 관용의 리더십을 가장 정확하게 이해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아들 로렌초였던 모양이다. 그는 아버지 피에로의 결정이 가진 미래적 의미를 간파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내린 사면 조치에 대해 친구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용서할 줄 아는 사람만이 정복할 줄 안다.”

보티첼리의 <동방박사의 경배> 당시의 긴박했던 암살 음모 사건을 재조명해 볼 수 있는 예술작품이 있다. 보티첼리의 작품인 <동방박사의 경배>로 현재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원래 이 작품을 주문했던 사람은 피렌체의 은행업자였던 가스파레 디 자노비 델라 라마(Gaspare di Zanobi della Lama)였다. 그는 메디치 가문의 재정적인 후원과 정치적 배려에 힘입어 은행업으로 큰돈을 벌었다. 그는 1468년의 암살 음모 사건과 피에로의 관용의 리더십을 지켜보면서 큰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 라마 채플을 기증하면서, 그곳을 장식할 예술 작품을 보티첼리에게 의뢰했다. 메디치 가문을 위해 일하던 보티첼리는 이 작품을 통해 지혜와 용기로 암살의 위기를 극복한 로렌초를 찬양하고, 관용의 정신으로 피렌체의 평화와 미래를 기약했던 피에로의 후덕함을 찬양했다. 우측을 보면 이 작품을 주문했던 가스파레 델라 라마(뒷줄에 서서 관람객을 응시하고 있는 노인)와 작가인 보티첼리(앞줄 오른쪽에 서서 관람객을 응시하는 청년)가 보인다.

작품의 상단에서 아기 예수의 발을 잡고 있는 노인은 이미 1464년 임종한 코시모다. 아래 중앙에 붉은 색 옷을 입고 관객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인물이 바로 관용의 리더십을 보여준 피에로다. 작품의 주인공이므로 정 중앙을 차지하고 있다. 왼쪽을 보면 한 늠름한 젊은이가 칼을 들고 시선을 주인공 피에로에게 향하고 있다. 아버지의 암살 위험을 지혜와 용기로 극복한 아들 로렌초의 당찬 모습이다. 화면 오른쪽 중앙에 검은 색 옷을 입고 옆얼굴을 보여주고 있는 인물은 젊은 나이에 요절한 피에로의 동생 줄리아노일 것이다. 이미 사망한 뒤였기 때문에, 죽은 사람처럼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다. 피에로와 줄리아노 사이에 있는 청년은 또 다른 이름의 줄리아노로, 로렌초의 동생이며 1478파치가의 음모사건 때 암살당하는 인물이다. 보티첼리는 이 작품을 통해 위기의 순간에 용맹을 발휘했던 로렌초와 관용의 리더십을 보여주었던 피에로를 마음껏 찬양하고 있다.

진정한 용기란 무엇인가? 아버지 코시모가 조각가 도나텔로, 화가 프라 안젤리코, 건축가 미켈로초를 후원했다면 아들 피에로는 화가인 베노초 고촐리와 보티첼리를 후원함으로써 르네상스 예술의 후원자라는 가문의 명성을 이어갔다. 지금도 피렌체 관광의 필수 코스인 메디치 저택의 가문 기도실에 베노초 고촐리가 그린 <동방박사의 행진>이 전시돼 있다. 고촐리에게 이 작품을 주문한 사람이 바로 피에로다. 피에로가 보여준 관용의 리더십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보티첼리의 또 다른 작품이 있다. 바로 우피치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불굴의 용기 Fortitude>란 작품이다.

불굴의 용기와 같은 그림을 알레고리(Allegory)화라고 한다. 작품의 주제를 상징적인 인물이나 도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 그림은 피에로가 직접 주문했다. 그는 1469 12, 임종을 맞이하면서 보티첼리에게 이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한다. 원래 이 작품은 상공인 조합 사무실에 걸릴 덕(Virtue)을 상징하는 알레고리 연작 중의 하나였다. 덕성의 요소인 현명, 절제, 공의, 자비, 믿음, 용기 등을 여성의 모습으로 전시할 계획이었고, 다른 화가가 나머지 주제를 모두 완성시켰다. 보티첼리는 <불굴의 용기>만을 그렸는데, 이 주제를 보티첼리가 맡도록 주선한 사람은 피에로의 심복이었던 토마소 소데리니(Tommaso Soderini)였다.2  작품의 주문을 받았던 보티첼리는 피에로가 임종한 이듬해에 이 작품을 완성했다. 자신의 변함없는 후원자였고, 분열과 위기의 피렌체를 관용의 리더십으로 슬기롭게 통치했던 피에로를 추모하면서, 보티첼리는 미술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불굴의 용기>를 완성했다. 일반적으로 <불굴의 용기>를 나타내는 알레고리는 단호한 인상과 날렵한 몸매를 가진 여장군이 용맹스러움을 과시하기 위해 거만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칼을 휘두르는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때로는 적의 목을 잘라낸 승리자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피에로의 <불굴의 용기>를 드러낸 보티첼리의 그림은 공상에 잠겨 있는 섬세한 여인이 등장한다. 용맹을 드러내야 할 여장군은 문학소녀처럼 의자에 조용히 앉아 있다. 그녀의 손에는 칼이 들려져 있지만, 차라리 펜을 잡고 있는 편이 나을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날카로운 칼을 화려하게 장식된 칼집에 넣어 두고 살육의 가능성을 드러내지 않는다. 칼자루를 쥐고 있는 그녀의 손동작은 전투를 앞두고 무기를 손아귀에 쥐고 있는 투사의 모습이 아니다. 앞으로 전개될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경멸이라도 하듯이, 공연히 칼자루만 만지작거리고 있다. 용맹을 드러내야 할 그녀의 시선은 적을 응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색의 표정으로 먼 미래의 평화를 상상하는 것만 같다.

이것이 바로 피에로가 보여준 리더십이었다. 진정한 용기, <불굴의 용기>였던 것이다. 리더로서 피에로는 마음고생이 심했다. 동생에게 후계자 자리가 물려진다는 사실을 알았고, 동생이 죽었을 때는 자기 아들에게 모든 재산과 권력이 넘어간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심각한 고질병으로 침대에서 일어서지도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면서도 마음의 분노를 품지 않았던 사람이다. 자기 목숨을 노리던 부하들의 배신을 겪으면서도 관용의 마음을 잃지 않았던 리더였다. 먼 미래를 바라보면서 피렌체의 정치적 안정과 사회 통합만이 메디치 가문의 미래를 보존할 것이란 사실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그는 증오와 폭력을 물리치고 관용의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그것이 바로 피에로가 보여주었던 <불굴의 용기>였다.

미래를 준비하는 리더 피에로가 취했던 관용의 리더십은 메디치 가문의 미래를 준비하는 통찰력으로 더욱 빛나게 된다. 그는 메디치 가문의 미래가 어린 아들 로렌초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우선 피에로는 아들 로렌초에게 최고의 교육을 시켜 미래를 준비한다. 아버지 코시모의 총애를 받았고 인근 마을 카레지에서 플라톤 아카데미(Academia Platonica)를 이끌고 있던 마르실리오 피치노를 로렌초의 개인교사로 임명했다. 로렌초는 당대 최고의 인문학자에게 교육을 받았다. 로렌초는 메디치 가문을 대표하는 리더로 성장하면서 놀라운 정치적 감각을 보여주게 되지만, 개인적으로는 탁월한 문학가이자 사상가로 성장한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인문 경영의 중요성을 절감했던 피에로의 미래 계획에 의해 가문의 위대한 미래가 준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피에로는 장남 로렌초를 로마 명문가의 규수인 클라리체 오르시니(Clarice Orsini, 1453∼1487)와 결혼시킴으로써 한 세대를 앞서 미래를 준비하는 놀라운 예지력을 보여준다. 오르시니 가문은 중세시대부터 총 3명의 교황과 무려 34명의 추기경을 배출한 바 있는 명실상부한 로마의 최고 가문이었다.3  반면에 메디치 가문은 평범한 중산층 출신으로 작은 도시국가였던 피렌체의 간접적인 통치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피에로는 당시로서는 비교할 수 없는 권력과 영향력을 가진 오르시니 가문으로부터 며느리를 받아들이면서, 메디치 가문의 미래를 조용히 준비하게 된다. 이것은 놀라운 예지력이다. 메디치 가문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만약 피에로의 이 같은 결정이 없었다면, 메디치 가문은 15세기에 사라지는 운명에 처하게 됐을 것이다. 1494년 폭동이 일어나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에서 축출당하는 운명을 겪는다. 모든 재산은 공화정 폭도에 의해 강탈당해 빈털터리가 된다. 이런 위기를 극복한 인물이 바로 조반니 데 메디치(Giovanni de Medici, 1475∼1521), 1513년에 레오 10세의 법명으로 교황으로 등극함으로써 위기의 메디치를 다시 구하게 된다. 그 뒤를 이어 교황으로 취임한 클레멘트 7(Clement VII, 1478∼1534) 역시 메디치 가문의 사람이었다. 메디치 가문이 이처럼 교황을 배출한 종교 명문가로 거듭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로 수십년 전에 이 가능성을 혼사를 통해 열어 놓았던 피에로의 예지력에 기인한다. 아들 로렌초를 교황을 배출한 로마 명문가 오르시니 가문과 결혼시킴으로써,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를 벗어나 이탈리아 전역에서 주목을 받는 명문가로 성장하게 된다. 관용의 리더십과 미래를 예지하는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주었던 피에로 데 메디치에 대해, 냉정하기로 소문난 역사가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선한 사람이었다. 폭력과 과시를 싫어했다. 하지만 동족들은 그의 선량함과 덕성을 제대로 평가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된 주 원인은 아버지 코시모가 죽은 뒤 몇 년 동안 정치 불안과 끊임없는 병에 시달린 데 있었다. 폭력을 혐오하던 그는 자신을 제거하려는 음모가 불거져 나왔을 때 폭력을 조금도 쓰지 않은 채 즉각 반란을 진압했고, 정적들을 친구로 돌려놓으려고 노력했다. 국내 정치와 파벌 경쟁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대외 정치에는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으며, 자기 도시보다 외국 궁정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4

리더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에게 리더의 덕성이 충분하지 못하다면 관용의 리더십을 발휘하면서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용서할 수 있는 사람만이 통치할 수 있고, 피에로처럼 때가 아닐 때는 조용히 미래를 준비하는 <불굴의 용기>가 필요하다.

 

 

필자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립대 및 에모리대에서 석사 학위,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 신과대학 부교수로 재직 중이며 ㈜SK케미칼 고문도 맡고 있다. <르네상스 창조 경영>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 14권의 책을 냈다. 르네상스 시대의 창조적 영감을 현대적 언어로 재해석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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