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치 가문의 창조 경영 리더십

메디치 효과: 다른 것을 융합해 시너지 빅뱅!

61호 (2010년 7월 Issue 2)

 
피클이 타이어를 만났을 때
햄버거는 손으로 집어 먹어야 하는 다소 불편한 음식이다. 한국에서 파는 햄버거는 그래도 사이즈가 작아서 먹을 만하지만 외국에서 파는 햄버거를 먹는 일은 곤혹스럽다. 한 입에 넣기엔 빵이 너무 크고 케첩과 마요네즈가 옆으로 줄줄 흘러내리기도 한다. 가장 당혹스러운 것은 내용물이 빵 사이를 이탈해 밖으로 삐져나오는 현상이다.
 
햄버거에 들어가는 내용물은 저민 고기, 양배추, 토마토, 양파, 피클(pickle)이라 불리는 오이다. 이 햄버거용 피클(오이)을 생산, 판매하는 블라식(Vlasic)의 직원들은 햄버거용 피클이 빵 사이로 삐져나오는 불편을 해소하기 위한 새로운 아이디어가 필요했다. 이 회사의 창의적인 직원들은 이른바 ‘생각의 융합’을 통해 이 문제를 단숨에 해결했다. 그들은 피클이 빵 사이로 삐져나오는 현상을 미끄러지는 현상으로 보고, 차량용 타이어 바퀴에 노면 미끄러짐 방지를 위해 규칙적으로 홈을 파는 것을 피클에 응용했다. 피클을 타이어로 생각하고 표면에 홈을 파서 빵으로부터의 미끄러짐을 방지하는 아이디어였다. 이 아이디어는 특허로도 출현될 만큼 대박이었다. 타이어와 오이를 결합시킨 생각의 융합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더 이상 피클은 빵 사이로 미끄러지지 않았다.
 
프란스 요한슨이란 전문 경영 컨설턴트가 있다. 이 사람이 집필하고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이 출간한 <메디치 효과>는 바로 이런 생각의 융합을 글로벌 시대의 새로운 경영 기법으로 소개하는 책이다. 다양한 생각과 상이한 분야가 만나서 완전히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현상을 그는 ‘메디치 효과(Medici Effect)’라고 불렀다. 동질적인 것보다 이질적인 것에 희망을 두고 기존의 생각에 다른 생각을 융합시키고자 노력했던 메디치 가문의 노력을 주목했다는 점에서 그의 책은 일독(一讀)의 가치가 있다. 실제로 메디치 가문은 다양한 생각, 상이한 분야가 서로 만나서 충돌을 일으키도록 유도함으로써 새로운 시대의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동서 사상의 빅뱅을 유도했던 메디치 가문의 융합 리더십 덕분에 이른바 전성기 르네상스(High Renaissance)의 찬란한 예술적 결과물들이 탄생할 수 있었다.
 
동서양 사상의 대 융합을 주도하다
1434년, 코시모는 유배지였던 베네치아에서 고향 피렌체로 귀환했다. 코시모를 도시의 반역자로 모함하고 유배시켰던 알비찌 가문의 사람들은 이제 자신들이 유배자 신세가 되었다. 피렌체 시민들은 유배지에서 귀환한 코시모를 도시의 통치자인 ‘제1시민’으로 인정한다. 1436년은 피렌체 시민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 해였다. 오랜 세월, 미완성으로 남아있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거대한 돔이 브루넬레스키의 설계와 공사로 완공된 해이기 때문이다. 코시모는 이 역사적인 준공식 행사를 주도하면서 피렌체의 실질적인 리더로 부상했다.
 
코시모는 신중하고 사려가 깊은 사람이었다. 개인의 알량한 도덕성으로는 자신에게 맡겨진 지도자의 책무를 감당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려운 결단, 남들이 쉽게 하지 못하는 결단을 내려야하는 것이 리더의 책무다. 그는 피렌체의 외교정책을 친() 밀라노(스포르차) 정책으로 수정하고 이탈리아의 평화를 위해 ‘힘의 균형’ 정책을 펼친다. 15세기 중반, 전운이 감돌던 이탈리아에 일시적인 평화가 도래한 것은 코시모의 현명하고 냉철한 외교정책 때문이었다.
 
코시모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일시적인 평화는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일반 시민들의 정치적 자유와 권익에 대해 남다른 자부심과 열정을 가진 피렌체에서 언제까지 메디치 가문의 독점적인 리더십이 유지될지도 의문이었다. 실제로 그는 “50년 내에 우리 메디치 가문은 다시 피렌체에서 축출 당하게 될 것이다”고 예측하곤 했다.1
 
무엇인가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했다. 코시모는 시대의 평화나 기업의 발전, 가문의 보존은 모두 현상의 문제라고 보았다. 이런 현상은 지엽적인 것으로 모두 어떤 정신의 표면적 결과일 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문제라고 여겼다.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바로 정립된다면 정치적 평화와 경제적 발전, 가문의 지속가능은 자연스러운 결과로 나타날 것이라고 보았다. 새로운 시대를 경륜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대를 이끌 수 있는 새로운 정신이 필요하다. 옛 시대의 논리로는 새 시대를 견인해 낼 수 없다.
 
코시모는 사상의 대융합, 새로운 정신의 빅뱅을 추진한다. 중세 유럽의 1000년 역사를 지탱해 왔던 철학기조에 새로운 사상의 자양분을 공급하여 사람과 생각의 충돌을 유도하기로 한 것이다. 코시모는 평소 친분이 있던 교황 유제니우스 4세(Eugenius IV)를 설득하여 페라라에서 지지부진하고 있던 종교회의 장소를 피렌체로 옮길 것을 제안한다. 당시 페라라에서는 동방 비잔틴 교회(Eastern Byzantine Church)와 서방 가톨릭 교회 간의 종교 회담이 열리고 있었다. 이 두 교회는 11세기 이래로 분열되어 거의 원수처럼 지내던 사이였다. 제3차 십자군 전쟁 때 유럽의 십자군들이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 많은 사람을 죽이고 엄청난 재물을 노략질해 갔다. 유럽의 가톨릭교회는 동방 비잔틴 교회를 이단이라고 몰아붙였고, 동방 비잔틴 교회는 유럽 가톨릭교회를 권력의 시녀라고 비난해 왔다.
 
 
이러한 동서방 교회의 극단적인 대립과 반목은 15세기에 들어서면서 조금씩 완화됐다. 공동의 적이 생겼기 때문이다. 공동의 적은 지금의 터키 지방을 차지하고 있던 이슬람 세력인 오스만튀르크 왕국이었다. 이 무슬림 세력은 동방 비잔틴 제국이 차지하고 있던 지중해 동부 지역 무역거래로 인한 이익에 눈독을 들이며 서진(西進)을 계속했다. 이들의 공세로 인해 1000년의 영광을 지켜온 동방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였다. 다급해진 동방 비잔틴 제국의 황제(요한 팔레오로구스 8세)와 총대주교(요셉 2세)는 서방 가톨릭교회의 지원과 유럽 군주들의 군사적인 지원이 필요했다. 그래서 소집된 동서방교회의 화해 협상이 바로 카라라 종교회의였던 것이다. 그러나 마침 그 도시에 흑사병이 창궐하고 종교 회담에 뚜렷한 성과가 나타나지 않자 코시모는 직접 나서서 종교회담 장소를 피렌체로 바꿔버렸다. 당시 교황청은 재정적으로 열악한 상태였기 때문에 장소를 바꿔가면서 종교회의를 계속할 여유가 없었다. 코시모는 총 700명에 달하는 동방 비잔틴교회의 대표단에게 지불할 여비와 생활비, 회담에 드는 모든 비용을 본인이 부담하겠다고 약속한다.2  그래서 열린 것이 1439년의 피렌체 공의회(Council of Firenze). 회담 장소는 피렌체 도심 북서쪽에 있는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이었다. 이곳에서 동서교회 화합과 일치를 모색하는 역사적인 피렌체 공의회가 열렸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이 만나다
1439년, 코시모의 재정적인 후원에 힘입어 그리스어를 사용하고 플라톤 철학이 주도하던 동방 비잔틴 교회와 라틴어를 사용하고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사상적 주류를 형성하고 있던 유럽의 서방 가톨릭교회가 피렌체에서 역사적인 종교회담을 개최했다.
 
공식적으로는 피렌체의 일개 시민에 불과하고 한 기업의 경영자로도 분주한 시간을 보냈던 코시모가 왜 이런 종교회담을 유치하고 막대한 경비를 스스로 부담했던 것일까? 1439년 7월 6일에 막을 내린 피렌체 종교회의는 참석자들이 의도했던 동서방 교회의 제도적 화합과 일치를 이루지는 못했다. 그러나 회의를 유치하고 막대한 재정 부담을 떠안았던 코시모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자신이 명실상부한 피렌체의 리더라는 사실을 동서방의 모든 국가에 알렸을 뿐 아니라 동서방의 상이한 생각의 충돌을 유도해낼 지적 기반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그는 피렌체 종교회의를 통해 중세 유럽 1000년의 역사를 지켜오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그동안 동방 비잔틴 제국에서만 보존돼 오던 플라톤주의가 서로 충돌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플라톤주의가 피렌체에서 다시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함으로써 세상을 새롭게 볼 수 있는 새로운 사고의 틀을 제시한 것이다.
 
비잔틴 제국에서 파견된 700여 명의 대규모 대표단은 피렌체 사람들에게 큰 문화적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들의 이국적인 복장, 상이한 언어(그리스어), 신기한 물건들은 피렌체 사람들에게 화제의 대상이 됐다. 피렌체의 요리사들은 비잔틴 제국의 사람들이 계란을 요리하는 법을 관찰했다. 당시 유럽 사람들은 계란을 삶아서 먹거나 후라이팬에 계란을 깨트려 요리하는 방식이 전부였다. 그러나 동방에서 온 사람들은 계란을 여러 개 깬 다음 각종 채소를 썬 것을 집어넣고 휘저어서 요리하는 스크램블 에그(scrambled eggs)를 선보였다. 이때부터 이탈리아 요리에서 오믈렛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물론 코시모가 의도했던 것은 새로운 계란요리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주도하고 경비를 부담한 동서방교회의 종교회담에서 새로운 사상이 충돌하기를 원했다. 중세 가톨릭교회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사상적 기반을 두고 있었다.3  세상에 나타나고 있는 개별적 현상에는 모두 일정한 법칙과 원리가 존재한다고 보았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피렌체 종교회의를 통해 큰 도전을 받게 된다. 바로 동방비잔틴 제국과 교회에서 보존돼 오던 플라톤주의가 처음으로 유럽 세계에 소개됐기 때문이다. 각각의 개별적 현상 가운데 나타나고 있는 법칙이나 원리에 선행하는 어떤 원형(이데아, The One)이 존재한다는 플라톤주의 사상은 중세 유럽인들에게 새로운 지적 충격을 주었다. 피렌체 공의회를 계기로 유입된 동방 비잔틴의 사상, 특히 플라톤 사상은 유럽인들에게 새로운 생각의 가능성을 열어주게 된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설명이 가능하다고 보았던 유럽인들에게 플라톤 사상은 새로운 차원이 존재함을 알렸다. 모든 개별자 가운데에 보편성이 존재하고 그 궁극적인 보편성을 추구하는 노력을 통해 신과의 합일이 가능하다는 새로운 지적 도전이 허용된 것이다. 신비로운 이데아(Idea)를 향한 열망을 통해 인간의 새로운 가능성이 제기된 것이다. 플라톤주의는 인간의 가능성을 긍정했던 르네상스와 인문주의 운동에 새로운 지적 활력소가 됐다. 비잔틴 교회 대표단의 일원이었던 철학자 게미스토스 플레톤의 출중했던 플라톤 사상은 코시모와 피렌체 인문학자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했다. 밤마다 메디치 가문의 저택에서는 플라톤 철학 특강이 열렸다. 여기에 자극받은 코시모는 피렌체 인근에 플라톤 아카데미(Academia Platonica)를 개설해 새로운 사상을 서방 세계에 흡수시켰다. 인문학자이자 신학자였던 마르실리오 피치노를 등용해 플라톤 전집을 라틴어로 번역토록 지원했다. 유럽 역사상 최초로 플라톤의 전집이 라틴어로 번역됨으로써 서방 유럽 세계는 처음으로 플라톤 사상의 전모를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메디치 효과’의 역사적 배경이다. 이질적인 것(동방과 서방,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플라톤주의)을 뒤섞음으로써 코시모와 플라톤 아카데미는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생각의 융합을 시도한 것이다.  

 

베노초 고촐리의 <동방박사의 행진>
피렌체 공의회의 역사적 의미를 돌아보기 위해서 우리는 베노초 고촐리(Beno zzo Gozzoli, 1420∼1497)가 그린 <동방박사의 행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피렌체의 메디치-리카르디 저택 2층 가족 예배당에 전시돼 있는 <동방박사의 행진>은 피렌체 공의회의 주인공인 동방 비잔틴 제국과 서방 유럽의 대표단이 위용을 뽐내며 행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동방박사의 행진>은 코시모 데 메디치의 아들이자 위대한 자 로렌초 데 메디치의 아버지였던 피에로 데 메디치가 주문한 작품으로 1459∼1461년에 제작됐다. 이 작품은 메디치 가문의 가족 예배당에 전시됐기 때문에 종교적 의미와 함께 정치적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피렌체 종교회의를 성공적으로 후원함으로써 동방의 박사들을 서방의 세계로 행진시킨 메디치 가문의 위업을 찬양하는 것이다. 물론 작품의 직접적인 무대가 되는 것은 피렌체에서 가장 엄숙하게 지켜지는 종교축제 중의 하나인 ‘동방박사의 행진(Compagnia de’Re Magi)’ 재연 의식이다. 실제로 이 행사에는 피렌체의 각 종교단체들이 화려하고 장엄하게 동방박사 차림을 하고 거리를 행진한다. 그러나 이 작품 속에는 1439년 피렌체 종교회담에 참석했던 비잔틴 제국 대표단의 모습이 반영돼 있다. 서방교회를 대표하는 사람들은 메디치 가문의 리더들이다. 피렌체 공의회를 통해 동서방 사상의 융합을 시도했던 코시모와 그의 아들 피에로, 장차 서방 세계의 리더가 될 ‘위대한 자’ 로렌초 데 메디치가 흰색 말을 타고 행진하고 있다. 상이한 사상의 융합을 시도했던 메디치 가문의 창조적인 리더십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동질적인 것에는 희망이 없다
르네상스 시대의 탁월함(Arete)을 추구하던 메디치 가문의 리더들은 동질적인 것에 희망이 없다는 것을 확신했다. 오히려 그들은 다른 것, 생소한 것, 이질적인 것에 희망을 두었다. 메디치 가문의 사람들도 1000년동안 지속되었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방식에 따라 생각하도록 훈련받았다. 현상의 세계는 관찰의 대상이라고 교육받았으며 눈에 보이는 세계를 중시여기는 태도를 가졌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객관적으로 해명할 수 있다고 배웠다. 그러나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통해 처음으로 전모를 드러낸 플라톤 철학은 세상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새롭게 드러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개별자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초월적인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플라톤 철학에서는 이데아(Idea)로 부른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개별자는 이데아와의 완벽한 합일을 위해 존재한다. 개별적인 존재(현상)와 보편적인 이상(초월)을 만나게 하는 것, 바로 이것이 코시모 데 메디치가 막대한 비용을 부담하면서 이룩하고자 했던 상이한 생각의 빅뱅이었던 것이다.
 
 
코시모는 동질적인 것에 희망이 없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이미 570여 년 전에 글로벌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시대의 리더들에게 유효한 교훈을 남겼다. 이질적인 것, 상이한 것, 다른 것에 희망이 있다. 서방과 동방이 만나고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이 만나고 현상과 초월이 만났을 때 코시모가 이끌던 피렌체와 이탈리아, 유럽이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됐다.
 
수능시험에서 남과 똑 같은 모범답안을 써내야 대학에 합격할 수 있는 나라, 기업 문화란 이름으로 획일적 사고를 강요하는 회사 분위기, 특정 지역출신 사람이나 특정 대학 졸업생들만 출세할 수 있는 폐쇄적인 사회, 글로벌 경영을 비전으로 내세우면서도 외국계 임원이 극소수에 불과한 한국 기업에 코시모 데 메디치는 사람과 생각을 뒤섞으라고 조언한다. 상이한 것에 희망을 두고 이질적인 것의 결합을 통해 새로운 창조의 세계를 열어가는 것. 이것이 바로 ‘메디치 효과’의 빅뱅을 실현하는 길이다.
 
편집자주 15∼17세기 약 300여 년간 이탈리아 피렌체 경제를 주름잡았던 메디치 가문은 르네상스의 탄생과 발전을 이끌어 인류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놓았습니다. 르네상스 시대를 연구해온 연세대 김상근 교수가 메디치 가문의 창조 경영 코드를 집중 분석합니다. 메디치 가문의 스토리는 창조 혁신을 추구하는 현대 경영자들에게 깊은 교훈을 줍니다.
동아비즈니스리뷰 283호 Future Food Business 2019년 10월 Issue 2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