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을 60번 치러도, 노새는 노새일뿐...

53호 (2010년 3월 Issue 2)

 

킹 오브 프로이센
1757년 영국에서 여러 술집들이 간판을 고쳐 달았다. 새로운 가게 이름은 ‘킹 오브 프로이센’. 그 술집에는 새로이 등장한 전쟁 영웅에 대한 찬사와 그의 승리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찼다. 이 프로이센의 왕이 바로 프리드리히 2세이다.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침공한 이래 게르만족과 독일은 군사력과 국가적 잠재력에 관한 한 언제나 주변국에게 긴장감을 주는 존재였다. 그러나 18세기 중반까지 독일은 한 번도 유럽의 강국이 되지 못했다. 현재에도 프랑스 외인부대 하사관으로는 반드시 독일인을 고용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게르만족은 군인으로서 최고 자질을 지닌 민족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최고 용사들은 2000년간 유럽 용병으로 팔려 다녔다. 그들은 언제나 강했지만, 한 번도 승리자 위치에 있지는 못했다.
이 독일을 마침내 유럽의 강국으로 키우고, 군사력만이 아니라 경제력으로도 유럽 최고 국가로 자리 잡는 기틀을 만든 사람이 프리드리히 2세였다.
 
그러나 그 시작은 결코 쉽지 않았다. 유럽의 두 거인인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독일의 용트림을 그냥 두고 볼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1756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전쟁을 시작하자 유럽의 모든 강국들이 프로이센을 향해 덤벼들었다. 오스트리아, 프랑스, 지금은 독일이 된 작센과 바이에른, 영국, 스웨덴에 거대한 러시아까지 가세했다. 오늘날의 독일도 아닌 한 개의 영주국에 불과했던 프로이센이 전 유럽의 강국을 상대로 싸우는 유래가 없는 일이 시작됐다. 이것이 7년 전쟁이다. 대륙의 거의 모든 강국이 반 프로이센 동맹을 형성했는데 그나마 영국이 발을 뺀 게 다행이었다.
 
애처로운 왕자의 운명
프리드리히는 군대를 진두지휘하며 전쟁터를 누볐다. 유럽 사람들 특히 이 전쟁이 강 건너 불구경이었던 영국인들은 흥미롭게 전쟁터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프리드리히의 이미지는 전쟁터의 지휘관과는 거리가 멀었다. 젊은 시절 프리드리히는 이지적인 외모, 프로급의 플루트 실력, 학문과 예술을 사랑하는 미소년 왕자로 이름을 날렸다. 7년 전쟁 중에도 프리드리히는 플루트를 지니고 다니며 야전 텐트에서 플루트를 연주를 하곤 했다. 투박한 프로이센의 군사 문화가 싫었던 왕자는 그가 소망하는 문화적인 삶을 위해 왕위조차도 내팽개치고 영국으로 탈출하려 했던 적도 있었다. 아버지는 왕자를 탑에 가두고 함께 탈출하려고 했던 친구를 프리드리히의 눈앞에서 처형했다. 정말인지는 조금 의심스럽지만 친구의 처형 장면을 보고 기절했던 왕자가 깨어나자 테이블에 친구의 목이 놓여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수많은 영국인들이 이 애처로운 왕의 운명을 반은 흥미, 반은 동정심을 지니고 지켜보고 있었다. 누구도 프로이센이 전쟁에서 배겨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프리드리히의 이야기는 니베룽겐의 이야기와 같은 처절하고도 애처로운 비극적 서사시가 되기에 충분한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위대한 비극이 탄생하는 순간을 지켜보고 있었다.
 
로이텐의 수렁
1757년 11월 로스밧하 전투에서 프리드리히는 3만 명의 군사로 5만 명의 프랑스군을 궤멸시켰다. 프로이센군의 손상은 경미했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도 잠깐, 프로이센이 프랑스를 상대하는 틈을 노려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의 실레지엔 지방을 침공했다. 프리드리히는 서둘러 실레지엔으로 회군했다. 먼저 장군을 부른 쪽은 오스트리아였기 때문에 전황은 오스트리아에게 더할 나위 없이 유리하게 돌아갔다. 그들은 프로이센의 회군을 예측하고 프로이센군을 요격하기 유리한 곳에 자리를 잡고 기다렸다. 그 장소가 로이텐이었다. 프로이센은 선수를 놓친 데다 사방이 적이었기 때문에 시간도 없었다. 속전속결로 전투를 끝내고 실레지엔을 탈환해야 했다. 보통 공격에는 수비군의 5배의 병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상대가 유리한 지형을 장악하고, 충분히 진지를 구축하고 있으면 필요 인원은 10배로 늘어난다. 그런데 겨우 3만의 프로이센군이 강과 소택지와 구릉을 끼고 전술학의 교범대로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8만 명의 오스트리아군을 공격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오스트리아군의 진형 배치는 완벽했다. 좌익의 끝은 고지와 강으로 보호되었다. 고지는 공격이 어렵고, 강이 있어서 측면을 우회해서 기습하기도 불가능했다. 우익은 소택과 삼림이었다. 당시 전투는 긴 횡대의 밀집 대형을 이루고, 총구를 겨누고 있는 적들 앞으로 곧바로 서서 걸어서 전진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삼림 지역을 이용하기도 곤란했다. 유일한 방법은 소택지를 횡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택도 보행이 쉽지 않아 프로이센군은 전진에 애를 먹을 것이고, 오스트리아군은 수렁에 빠진 그들을 향해 총알 세례를 퍼부을 것이다.
 
하지만 오스트리아군도 약점이 하나 있었다. 프로이센군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공격 지점을 하나 선정한 뒤 희생을 각오하고 병력을 집중 투입해서 승부를 거는 것이다. 그런데 오스트리아군은 지형을 완벽하게 선점하려다 보니 진이 너무 길어져 8km나 되었다. 즉 대형이 너무 얇아졌다. 프로이센을 궤멸시키려면 공격 예상 지점에 병력을 집중시켜야만 했다. 오스트리아군은 프로이센의 공격 지점이 우익이라고 예측하고 예비대를 그쪽으로 옮겼다.

그런데 우익의 오스트리아군 눈앞에 나타나 법석을 떨고 있는 프로이센 기병은 양동 작전을 위한 속임수였다. 프로이센은 전 병력을 좌익으로 몰아갔다. 그들을 보면서도 오스트리아군은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프로이센의 긴 횡대는 고지 전면을 향하고 있었고, 그 방향으로 진군해오면 엄청난 희생을 치룰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스트리아군의 눈앞에서 프로이센의 횡대가 카드섹션을 하듯이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종대를 형성해서 오스트리아군의 왼쪽 끝 지점으로 몰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군이 미처 진지 배치를 재편하기 전에 왼쪽 끝에서부터 프로이센군이 먹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긴 직사각형의 형태를 띤 오스트리아군은 가로 길이로 보면 프로이센군의 세 배에 가까웠지만, 세로 길이는 얇아서 병력의 우위는 의미가 없었다.
 
오스트리아군은 대패하고 2만여 명이 전사했다. 프로이센의 사상은 겨우 6400명이었다.

 
결론을 외우지 말고 전제를 생각하라
프로이센군의 비밀 병기는 횡대에서 종대로의 전환이었다. 우향우나 좌향좌를 해서 횡대에서 종대로 전환한 것이 아니고 여러 횡대로 구성된 대형이 행진하면서 분해-결합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제식 훈련 중에서도 제일 고난도 기술이다. 프로이센군은 평소에 이 훈련을 엄청나게 해두었기 때문에 로이텐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속이고 측면을 때릴 수 있었다. 그렇다 해도 오스트리아와 다른 유럽군대는 왜 이런 공격 방식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적과 근접 대치한 상태에서 횡대와 종대를 전환하는 기동은 수천 년간 전쟁터의 금기 중 금기였다. 이 전환 기동은 적에게 측면을 노출하기 때문이다.
 
고대로부터 중장보병들은 밀집 대형을 형성해서 적과 백병전을 벌였다. 이 방식은 적과 정면충돌해서 한 겹씩 적을 해치우는 것이 아니다. 한 명을 해치우면 쐐기처럼 그곳을 파고들어서 적의 측면과 후면을 쳐야 했다. 중장보병의 약점은 측면과 후면이다. 갑옷과 모든 보호구가 정면만 향하기 때문이다. 측면과 후면까지 갑옷을 두르면 무거워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기동도 매우 신중해야 했다. 중장갑으로 움직임이 둔했기 때문이다.
 
총이 등장하면서 방패를 든 중장보병이 사라졌다. 하지만 갑옷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 총의 성능이 떨어져서 사격이 끝나면 백병전으로 승부를 내야 하므로 별도로 창병을 육성해야 했다. 그런데 이 무렵 총검이 발명되면서 마침내 총병이 창병을 겸할 수 있게 되었고 갑옷은 사격을 저해하므로 갑옷을 완전히 버렸다.
 
갑옷과 함께 전투기동에서 대형 전환 불가라는 원칙도 사라졌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대형 전환 불가라는 원칙이 왜 생겼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전술 교리만을 외우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훗날 한 대위가 프리드리히 2세에게 “폐하처럼 훌륭한 전략가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왕은 전쟁사를 열심히 공부하라고 말했다. 대위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자신은 그런 이론보다는 실전 경험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왕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부대에 전투를 60회나 치룬 노새가 두 마리가 있다. 그러나 걔들은 아직도 노새다” 프리드리히가 전쟁사를 추천한 이유는 전술의 역사 속에 숨어 있는 원칙과 전제를 찾으라는 의미다. 그래야 변화에 대응하고 창조적 대책을 창출하는 능력이 생겨난다. 전쟁사든 경영사든 어떤 전술이나 방법이 승리할 수 있었던 원리와 배경을 생각하지 않고 ‘이 전술은 좋은 전술이고, 이 전술은 나쁜 전술이다, 누구는 이 방식으로 성공했다더라, 이것이 최신 경영 기법이다’라는 식으로 외형만을 취한다면 또다시 노새가 되는 실수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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