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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핸드볼의 ‘훈장’ 임영철 벽산건설 감독

‘끝없는 신뢰+배고픈 느낌’ 강팀의 조건

하정민 | 32호 (2009년 5월 Issue 1)
많은 사람들이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의 최고 감동적인 순간으로 여자 핸드볼 경기를 꼽는다. 아시아 예선전에서도 천신만고 끝에 올라갔다. 준결승전에서는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결승행 티켓을 놓쳤다. 우여곡절 끝에 열린 헝가리와의 동메달 결정전. 임영철 감독은 종료 1분을 남겨두고 작전 타임을 요청했다. 33대 28로 승패가 결정된 상황이었기에 모두가 의아해했다.
 
임 감독이 비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지막 1분은 언니
들의 몫이다. 홍정호, 오성옥, 오영란… 너희들이 경기를 마무리해라.” 그는 다시는 올림픽 무대에 설 수 없는 노장 선수들을 출전시키기 위해 매너가 아닌 줄 알면서도 작전 타임을 썼다. 경기를 중계하던 아나운서는 ‘언니들의 졸업식’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경기를 지켜보던 사람들도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기분이라고 했다.
 
과거 임영철 감독은 혹독한 훈련과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력으로 종종 용장(勇將)이나 맹장(猛將)이라 불렸다. 하지만 베이징 올림픽을 통해 ‘훈훈한 지도자’를 뜻하는 ‘훈장’이라는 수식어를 새로 달았다. 선수들을 훈련시킬 때는 호랑이처럼 무섭다. 하지만 해외 원정 때 음식 문제로 고생하는 선수들을 위해 직접 김치찌개를 끓이고, 10년 넘게 고락을 같이한 노장 선수들을 위해 생애 최고의 선물을 준비하는 따뜻한 감독이 바로 그다. 임영철 감독은 “선수들에 대한 끝없는 신뢰가 없으면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다”며 “선수들의 실력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 그 자체”라고 거듭 강조했다.
 
지도자라면 믿고 기다려야
올림픽이 끝난 지 8개월이 넘었습니다만, 아직도 헝가리전의 감동적인 멘트를 언급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미리 준비하신 내용인가요
솔직히 며칠 전부터 준비했습니다. 은퇴하는 선수들에게 무엇이든 주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제가 줄 수 있는 게 없더군요. 우리 선수들, 정말 고생 많이 했습니다. 얼마나 힘든 훈련을 겪어왔는지 아마 상상도 못하실 겁니다. 선수들에 대한 애정이라도 표현해야겠다 싶어 멘트를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저도 제가 그런 말을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어요. 우리가 1, 2점 차로 박빙의 우위를 보이고 있거나 만에 하나 지고 있다면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몇 번이고 자문해봤습니다. 많이 지고 있는 경기였다면 설사 제가 들어가라고 했어도 고참 선수들이 들어가지 않았을 겁니다.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지는 경기에서 끝내고 싶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하지만 다행히 많이 이기고 있어 그런 걱정을 덜었습니다.
 
일단 선수를 발탁하면 강한 신뢰를 보이는 걸로 유명합니다. 유난히 신뢰를 강조하시는 이유가 있는지요
제가 1983년부터 코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국내 경기에서 저희 팀에게 7m 드로 기회가 왔습니다. 감독님은 A 선수가 던지기를 원했지만, 제가 강력히 추천해 B 선수가 던졌죠. 그런데 골이 안 들어갔습니다. 조금 있다가 7m 드로 기회가 또 생겼습니다. 역시 제가 강력히 주장해 B 선수가 던졌는데 또 안 들어갔어요.(웃음) 그 선수가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남자 핸드볼 팀이 금메달을 따는 데 큰 공을 세운 김재환 선수입니다.
 
당시 김 선수는 그다지 유명한 선수가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그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죠. 어쩌다 한번 준 기회를 완벽하게 살리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고작 한두 번의 기회만 준 후, 그때 선수들이 못한다고 해서 다시는 기용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지도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발탁한 선수를 믿는다면, 그 선수가 잠재력을 발휘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일도 지도자의 임무입니다.
 
주전에 연연하지 않는다
지도자로서 오늘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2001년 유럽에서 감독 생활을 하며 유럽의 선진 핸드볼을 가까이에서 접하게 됐습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이 끝난 후, 몬테네그로의 부두치노스트 클럽에서 코치 제의가 들어왔죠. 그때 유럽 핸드볼의 실상과 훈련 방법들을 익히고 많은 참고 자료들을 갖고 와서 지금도 큰 도움을 얻고 있습니다.
 
사실 옛 유고 연방의 현실을 잘 모르는 상황에서 몬테네그로에 갔는데, 가보니 정말 험악하더군요. 세르비아계와 무슬림의 긴장이 극에 달했습니다. 정치 얘기를 하다 의견이 안 맞는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 직접 목격했을 정도니까요. 사실상 치안 부재 상태였죠.
 
몬테네그로에서의 지도자 생활은 어땠나요
정치적 격변만 빼면 운동 환경 자체는 좋은 편이었습니다. 제가 여자 실업팀을 맡았는데, 실업팀 산하에 주니어-청소년-유소년 팀까지 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체계적으로 훈련시키는 거였죠.
 
처음 도착하니 시니어 선수들이 하루에 딱 1시간만 운동을 한다고 했습니다. 어이가 없어 훈련 시간을 1시간 반으로 늘렸는데, 다음 날 훈련장에 갔더니 주전 선수 중 단 3명만이 나와 있었습니다. 현지인 코치가 와서 선수들이 “이런 감독 밑에서는 선수 생활 못하겠다”며 파업에 들어갔다고 알려주더군요.
 
클럽 회장이 와서 어떻게 수습할 거냐고 하길래 “난 내 식대로 간다. 주니어 선수 중 유망주들을 끌어올려 경기하겠다. 성적으로 판단해달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불과 1주일 후에 몬테네그로 국내 리그가 시작하는 상황이라 저도 속으로는 많이 초조했어요. 다행히 주니어 선수들이 잘 따라와줬습니다.
 
몬테네그로 국내 리그는 1주일에 3번 경기를 치릅니다. 첫 3주 동안 열린 9번의 경기를 모두 이겼습니다. 한 달이 지나니 탈퇴한 선수 중 우두머리 격이었던 주장부터 숙이고 들어오더군요. 그때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좋다. 너희들을 받아주겠다. 대신 훈련은 2시간이다.” 나중에는 그 2시간도 2시간 30분으로 늘렸습니다.(웃음)
 
사실 엉겁결에 발탁된 주니어 선수들의 기량이 그새 많이 늘어 주전들도 경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죠. 제가 맡기 전 부두치노스트 클럽은 유럽 핸드볼 챔피언스리그에서 8강에 오른 게 다였습니다. 하지만 2001년에는 준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유럽 핸드볼은 어떤 점이 달랐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덩치가 좋은 선수들이 체력 훈련에 매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몬테네그로에 있을 때, 우리 선수들의 연습이 끝나면 일부러 남자 클럽 팀 뒤에서 남자 선수들이 어떻게 연습하는지 매일 살펴봤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는 ‘저 패스를 뭐 하러 연습하나’ 싶은 이상한 패스를 하고, 체력 훈련 방식도 매우 독특했습니다. 한 마디로, 훈련 자체가 매우 창의적이고 선수들의 집중력을 끌어올려주는 방식으로 이뤄진 셈이죠.
 
사실 당시 한국 선수들의 체력 훈련은 고작 12분 달리기에서 끝나는 수준이었어요. 하지만 스피드 지구력 훈련(셔틀런)을 보니, 기본 체력을 기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었습니다. 현재 우리 선수들은 셔틀런을 이용한 ‘퀵퀵 댄스’로 체력을 키우고 있습니다. 전술과 슛을 쏘는 능력도 중요하지만, 일단 핸드볼 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내려면 강철 같은 체력이 필요합니다. 유럽 선수보다 덩치가 작은 우리 선수들은 더욱 체력이 중요하죠. 히딩크 감독도 강력한 체력 훈련을 밑바탕으로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뤄낸 것 아닙니까.
 
스타 선수들을 더 몰아붙인다
1995년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은 후에는 여자 선수들만 지도해 오셨습니다. 선수들의 성별 차이가 지도력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나요
솔직히 여자 선수들을 다루는 일이 더 힘듭니다. 일단 감정 변화가 심하고 표현을 잘 안 하니까요. 생각을 가슴속에 담고만 있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감정을 행동으로 나타낼 때가 있습니다. 처음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을 때는 저 역시 초보 지도자의 욕심에 제 색깔을 강하게 표출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선수들이 말도 못 붙일 정도로 강하게 밀고 나간 적도 많았어요.
 
여자 선수들의 특성을 이해하니, 대하는 전략도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이 절로 들더군요. 훈련 때는 혹독하게 밀어붙이더라도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세심한 배려를 표시해줘야 합니다. 예를 들어 여자 선수들은 이성 문제가 생겨도 남자 선수처럼 바로 문제가 있다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일단 불러놓고 “혹시 어디 아프냐. 집에 안 좋은 일 있냐”는 식으로 운을 떼면서 기다려줘야 합니다. 본인이 실토할 때까지요.

선수들의 연애를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사리 판단이 힘든 20대 초반이라면 모를까, 나이가 들면 선수들의 운동 능력에도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합니다. 연애하는 선수들은 금방 표시가 나요. 일단 언어부터 순화되고, 행동거지와 외모가 확 달라지거든요.(웃음) 연애가 자기 관리의 계기를 마련해주는 거죠. 상대가 같은 운동 선수라면 서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도 될 거구요.
 
핸드볼은 단체 경기라 선수들의 실력이 모두 같을 수는 없습니다. 또 감독님 성향에 더 맞는 선수와 그렇지 않은 선수도 있을 텐데요
저는 스타플레이어에게 오히려 엄하게 대합니다. 특히 대성하겠다 싶은 선수는 그야말로 인정사정없이 밀어붙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주목받은 선수는 인터뷰도 제 허락을 받아야 해요. 반면 은퇴 시기가 다가오거나 ‘아, 이 친구는 더 이상 나아질 게 없다’고 판단하면 상당한 재량권을 줍니다. 지도자는 선수들의 잠재력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사람입니다. 조금만 더 하면 저 선수가 어느 경지까지 오를 수 있다는 게 빤히 보이니까 밀어붙이는 겁니다. 운동에는 ‘적당히’가 없어요.
 
올림픽 때 주목받은 김온아 선수가 왜 뛰어난 줄 아십니까. 여자 선수들은 비교적 눈치가 빠릅니다. 특히 고참 선수들은 저랑 10년 이상 함께 운동을 했기 때문에 눈빛만 봐도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압니다. 하지만 어린 선수들 중에서는 제 스타일을 빨리 받아들이지 못하는 친구들도 있죠. 제 요구 사항을 빨리 알아듣는 선수들과 그렇지 못한 선수들의 차이가 꽤 큽니다. 김 선수는 한 마디만 해도 다음 동작이 바로 달라집니다. 흡수 능력이 뛰어난 거죠.
 
선수 시절, ‘나는 이런 지도자가 되지 않겠다’고 했던 유형이 있나요
사실 제가 운동할 때만 해도 운동 선수들의 체벌 관행이 일반화돼 있었습니다. 지도자가 되면 절대 선수들에게 손을 대지 않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죠. 체벌보다 더 큰 문제는 돈입니다. 학부모들에게 돈을 받고 능력 없는 선수들을 입학시키는 이들이 있었거든요. 지도자는 금전 문제도 눈처럼 깨끗해야 합니다. 자기가 번 만큼 반드시 선수들한테 베풀 줄도 알아야 하고요.
 
배고픔의 느낌을 간직하라
지난 2월 핸드볼 큰잔치 개막 경기에서 임오경 감독이 이끄는 서울시청에 승리한 후, 임 감독에게 “지는 법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신 이유가 뭔가요
과거 제 제자이기도 했던 임오경은 대한민국이 다 아는 핸드볼 스타였습니다. 일본으로 건너간 후 선수로도, 감독으로도 승승장구했죠. 더 많이 이기려면 더 많이 져봐야 한다는 뜻에서 일부러 그 말을 했습니다. 배가 부른 사람은 원래부터 배고픔의 느낌을 모릅니다. 하지만 한때 배고팠던 사람이 배부른 느낌을 만끽하면, 배고플 때가 어떤지를 알기 때문에 다시는 배고프지 않으려고 기를 쓰죠. 한국과 일본 핸드볼은 많이 다르므로 절대 만만하게 보지 말고 배고픈 느낌을 간직해야 승리할 수 있다는 뜻에서 조언한 겁니다.
 
핸드볼의 매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핸드볼에는 던지고, 달리고, 받고, 뛰어오르고, 구르는 등 스포츠의 모든 면이 담겨 있습니다. 특히 한국 여성의 강인함과 많이 닮아 있어요. 가난했던 시절, 우리 어머니 세대가 무슨 돈이 있어 자식 뒷바라지를 할 수 있었겠습니까. 산에서 풀뿌리를 캐고, 머리카락까지 팔아가며 집안을 건사한 거죠.
 
마찬가지로 겉으로만 보면 체격이 작은 한국 선수들이 유럽 선수들을 못 이길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이기고야 마는 유일한 팀 스포츠가 핸드볼입니다. 농구나 배구는 신장이 작으면 애초에 경기 자체가 안 되지만, 핸드볼은 다릅니다. 강한 체력에 한국인 특유의 승부 근성, 끈기, 집념이 더해지면 체격의 열세는 문제가 되지 않죠. 설사 무너지더라도 끝까지 갑니다. 이번 야구의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결승 진출도 비슷한 예가 아닐까요.
 
저는 한국의 위상을 드높이는 데 스포츠가 가장 큰 공을 세웠다고 생각합니다. 서울 올림픽 전에 누가 한국을 알았겠습니까. 한국 스포츠가 왜 이렇게 강한가를 연구하는 박사들이 많이 없어서 안타깝습니다. 박사들이 안 쓰면 저라도 논문을 쓰고 싶네요.(웃음)

편집자주 스포츠와 경영은 닮은 점이 많습니다. 탁월한 리더십, 효율적인 팀워크, 치밀한 전략이 모두 어우러져야 치열한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점이 특히 그렇습니다. 미국에서는 미식축구나 메이저리그 우승팀 감독이 기업의 최고 인기 연사로 떠오를 만큼 스포츠에서 경영 화두를 찾는 일이 일반적입니다. 동아비즈니스리뷰(DBR)는 스포츠 분야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리더들을 만나 지혜와 통찰을 들어보는 ‘Management @ Sports’ 코너를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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