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의 삶
혼혈아로서 정체성 혼란 겪은 청소년기
케냐 루오족 출신인 버락 오바마의 아버지는 23살에 미국 하와이대 역사상 첫 아프리카 출신 학생으로 입학했다. 서구 기술을 배워 현대 아프리카 건설에 기여하게 한다는 프로그램에 따라 미국 후원자들에게 선발된 것이다. 그는 그곳에서 러시아어 강의를 듣던 18살의 미국 백인 소녀 앤을 만나 결혼해 1961년에 버락 오바마를 낳았다.
오바마의 부모가 결혼한 1960년 당시 미국의 전체 주 가운데 약 절반은 흑인과 백인의 결혼을 중죄로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 연방에 새로 편입된 하와이주가 인종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용적이어서 그들의 결혼은 가능했다. 오바마의 외조부모들이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었다는 점도 그들의 결혼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어머니는 세상의 차별로부터 아들을 철저히 차단하고자 항상 흑인의 장점과 우수성을 강조했다. 오바마가 2살 때 남편과 이혼하고 혼자가 된 뒤에도 아들이 자신감을 갖고 성장할 수 있도록 교육에 최선을 다했다. 백인 외조부모 역시 오바마를 몹시 사랑했다. 이 때문에 오바마는 어린 시절에 항상 자신감과 희망으로 가득했다.
그의 어머니는 인도네시아인 새 아버지 롤로와 재혼해 여동생 마야를 낳았다. 어머니가 인도네시아 대사관에서 영어를 가르칠 때 오바마는 도서관에서 ‘라이프’ 잡지를 보다가 ‘검은 안경을 끼고 레인코트를 입은 남자가 텅 빈 거리를 걸어가는 모습’의 사진을 접한다. 피부색을 하얗게 만들려고 화학수술을 받다가 얼굴이 망가진 사람의 사진이었다. 아홉 살 소년은 “피부색이 희면 행복이 보장된다는 광고를 믿고 화학수술을 받은 사람이 수천 명”이라는 사진설명을 읽고 피부가 검다는 것이 이렇게 큰 문제가 된다는 점에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오바마는 청소년기에 접어들어 점차 인종 차별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술과 담배에 빠져 살았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마약에까지 손을 댔다. 차별 때문에 ‘백인 녀석들’이라고 욕을 하면서도 사랑하는 어머니와 외조부모 역시 백인이라는 점에서 정체성 혼란에 직면했다.
인종 차별과 정체성 혼란으로 힘들었지만 그는 무사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로스앤젤레스(LA)에 있는 옥시덴털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 집회에서 ‘누군가 투쟁하고 있습니다’라는 제목의 1분짜리 연설을 했으며, 청중은 그의 연설에 뜨거운 반응을 보냈다. 그날을 계기로 오바마는 크게 깨달았다. 자신의 상처에만 골몰한 어리석음을 인식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의 불씨도 발견했다.
더 높은 꿈과 이상을 향해
그때부터 오바마는 공부에 집중하는 모범생으로 변하고, 명문 컬럼비아대에 진학한다. 졸업 후 그는 컨설팅 회사에 취직해 짧은 기간에 간부로 승진했다. 그러나 좋은 직장과 대우에 안주하지 않고 무언가 쓸모 있는 일에 야망을 펼치기 위해 지역사회 활동가라는 새로운 길로 들어선다. 왜 그 좋은 자리를 포기하느냐는 주위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역사회 활동가의 길로 들어선 그는 당시 이렇게 말했다. “돈을 버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돈을 버는 데에만 삶을 집중하는 것은 야망의 빈곤함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 후 그는 미국 사회의 견고한 권력구조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지역사회 활동가라는 위치에 한계가 있음을 절감하고 하버드대 로스쿨에 진학한다. 그리고 ‘하버드 로 리뷰’ 역사상 최초로 흑인 편집장으로 선출됐다. 학교에서 유명인사가 된 그는 신문에도 나고 저서 출간 제의도 받으며 학교에서 거물로 통했다. 그러나 항상 겸손하고 친화력이 좋았다. 그는 학문적으로도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헌법학 교수인 로렌스 트라이브는 그를 연구보조원으로 선택하면서 이렇게 평가했다. “내가 37년 동안 가르친 학생 가운데 가장 유능한 학생 2명을 꼽으라면 자네가 그 가운데 1명일세.”
1991년에 하버드대 로스쿨을 우등으로 졸업한 오바마는 원하면 대형 로펌이나 대기업에서 일할 수 있었다. 유명세를 떨치고 있던 그에게 실제 수많은 러브 콜이 쏟아졌다. 그러나 고액 연봉과 편안한 삶이 보장되는 모든 기회를 마다하고 그는 자신이 지역사회 활동가로 일하던 시카고로 돌아왔다. 그는 마이너 반힐앤드갤런드사의 인권변호사로 자리 잡은 뒤 출세 앞에서 굴복하지 않고 꿈과 이상을 향해 매진한다. 한층 성숙해진 오바마에게 이제 흑인의 열등감이나 자폐적인 자의식 따위는 없었다. 그는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며 미셸을 만나 결혼했고, 함께 시카고대 로스쿨의 헌법학 강의를 맡으며 교수 생활도 시작했다.
그는 더욱 정의로운 미국 사회로의 변화를 끊임없이 열망했다. 미국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더 영향력 있는 위치가 필요했다. 이러한 절실함이 그를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연방 상원의원, 민주당 대통령 후보, 미국 대통령 당선자의 자리로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