畵中有訓

그림 속 곽분양의 미소 장수의 비결이자 인격

219호 (2017년 2월 Issue 2)

편집자주

미술사와 문학, 두 분야의 전문가인 고연희 박사가 옛 그림이 주는 지혜를 설명하는 코너 ‘畵中有訓(그림 속 교훈)’을 연재합니다. 옛 그림의 내면을 문학적으로 풍부하게 해설해주는 글을 통해 현인들의 지혜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가장 복 많은 노인이 잔치를 벌였다. 최고의 파티를 보여주는 이 그림은 조선후기 급작스럽게 유행한 주제로, 오늘날 전하는 병풍만 수십 틀이다. 그림의 제목은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 주인공 곽분양은 장수한 노인이며 그의 여덟 아들과 일곱 사위가 모두 높은 지위에 올랐다. 손자가 수십 명이라 몰려와 인사를 하면 곽분양은 하나하나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턱만 끄덕였다고 한다. 그림의 중앙을 보면 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만면미소의 노인, 곽분양이 있다. 그의 주변을 둘러보라. 대궐보다 화려한 건축물이 즐비하고 선녀처럼 치장한 여인들이 가득하다. 곽분양의 딸과 며느리, 혹은 처첩들이리라. 여인들은 단장을 하거나, 놀이를 하거나 춤을 춘다. 정원에는 꽃나무 사이로 진귀한 새들이 거닐고, 값비싼 태호석 곁으로 명품 도자기와 골동품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그 시절 상상하던 최상급의 풍족(豐足)이다. ‘곽분양행락도’는 왕실의 혼인식 같은 행사장에 펼쳐졌고, 왕실 밖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왕실의 화원이 그린 ‘곽분양행락도’는 고가로 거래됐다. 장수와 만복을 축복하는 그림으로 더할 나위 없이 좋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8폭 병풍 중 중앙의 4폭을 소개한다. 그림의 세로만 1m 규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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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분양이 누구인가

곽분양은 중국 당나라의 실존 인물 곽자의(郭子儀697∼781)다. 역사서에는 곽자의가 어떻게 기록돼 있을까. 곽자의는 안록산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이 커서 중흥제일의 일등공신이 됐고 ‘분양왕(汾陽王)’에 봉해졌다. 곽분양(郭汾陽)이라 불리는 이유다. 그러나 만약 곽자의의 경력이 여기서 끝났다면 제아무리 장수하고 부귀하고 자손이 많았기로 조선후기 한반도에서 ‘곽분양행락도’로 지극한 인기를 누리는 데는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분양왕 곽자의는 이후에 주어진 불가능의 미션을 훌륭하게 감당했다. 토번족이 북방민족들을 연합해 장안까지 함락시키는 상황, 즉 당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에 흔들리는 촛불과 다름없을 때 곽분양은 겨우 4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북방연합군 20만 명에 맞서야 했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다. 그러나 승리하지 못하면 나라가 망한다. 곽분양은 외교적 방법을 궁리했다. 토번족과 북방민족을 흩어서 당나라에게 유리하도록 전세를 바꾸어야 한다. 그렇다면 북방의 거두 회흘(回紇)과 타협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적진 속의 회흘을 어떻게 만날 수 있나. 곽분양 스스로 홀로 적진으로 들어가면 가능하다. 결심한 곽분양이 말에 올랐을 때 곽분양의 아들이 말고삐를 붙들었다. 적진에 홀로 드는 것은 죽으러 가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곽분양은 말고삐를 잡은 아들의 손을 말채찍으로 내려치고 말을 호령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적진으로 향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물론 곽분양은 알고 있었다. 이 모험에서 실패하면 적소에서 죽을 것이고 아들에게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그러나 곽분양이 더 중시한 것이 있었다. 설령 죽더라도 역사 속에 가족의 명예는 영원히 살릴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곽분양이 적진에 들었을 때 적군의 병사들은 일제히 그에게 활을 겨누었다. 곽분양은 투구와 창을 내려놓고 회흘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회흘에게 토번족과 갈라서고 당나라와 힘을 합칠 것을 건의했다. 결국 회흘은 곽분양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북방민족과 당나라 연합군은 토번족을 격파해 대승을 거두었다.



만복(萬福)의 출처

나라를 구한 공보다 큰 공이 있을까. <신당서>는 곽분양의 충성심이 해와 달을 뚫었다고 칭송했다. 그리하여 곽분양이 누리는 복록과 부귀에 대해 그 당시 사람들도 뒷말이 없었다고 한다. 특히 곽분양이 회흘을 만나러 간 이야기는 한 사람의 용기와 실천이 거대한 공동체를 구해낸 역사적 사례로 인구에 회자됐으며 곽분양과 회흘의 면담 장면은 중국에서 거듭 그림으로 그려졌다. 조선의 명장 이순신 장군은 곽분양을 그리워하는 시를 남겼고 조선후기 학자 이이첨은 곽분양의 업적을 기리는 글을 해하여 장원급제하기도 했다.

곽분양의 아들들은 잘 자라서 높은 관직에 올랐다. 말채찍으로 아들의 손을 내리치며 적진을 향했던 부친의 행동보다 더 훌륭한 교육이 있겠는가.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들도 있다. 시인 이백이 역모 막하에 있다가 들통이 나면서 죽을 위험에 처했을 때 곽분양이 어렵게 그를 구해준 일이다. 곽분양의 아들 중 한 명은 안록산의 난을 진압할 때 전사했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시련은 더 말할 것이 없겠다. 회휼이 당나라와 연합을 결심할 때, 회휼이 만난 것은 곽분양 한 사람이었다. 그의 충성심과 인격에 대한 감복이 없었다면 회휼의 마음이 움직였겠는가. 곽분양이 병들어 누웠을 때 문무백관이 문병을 갔는데 어느 날 간신 노기(盧杞)가 문병을 오자 곽분양은 시중드는 사람들을 물리치고 홀로 노기를 맞았다고 <노기열전>에 전한다. 곽분양은 설명했다. 노기의 내면이 음험하고 해괴해 시중드는 가족들이 노기를 보면 반드시 웃을텐데 훗날 노기가 권력을 잡는다면 우리 가족들이 살아남겠는가. 병석에 누워서도 사려가 그러했다. 곽분양의 자손들이 잘된 데는 많은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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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福) 중의 복, 화목(和睦)

조선후기 정조(正祖)가 신하들에게 축복의 메시지를 전할 때 곽분양의 복을 누리시라고 했다. 국왕의 거론 덕분인지 ‘곽분양행락도’는 왕실이나 민가에서 당당하고 화려하게 펼쳐졌다. ‘곽분양행락도’가 중국에서보다 한국에서 특별한 인기를 누리면서 우리 선조들이 생각했던 복(福)의 실체를 보여주는 이미지로 정착됐다. 당시에 상상한 건축과 장식의 최고 수준 및 가장 값비싼 물건들이 망라돼 있으니 전통 건축과 공예의 연구자들이 이 그림에 유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다 보노라면 이 그림을 다복(多福)의 표상으로 만드는 핵심 요소는 ‘화목한 사람들’인 것을 알 수 있다.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뛰어놀고 여성들이 행복하다. 그림 속 화목한 사람들이 있기에 물질적 풍요로움은 빛을 발한다. <곽분양행락도>를 그린 화가들은 행복한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는 데 심혈을 기울였을 것이고, 끝으로 곽분양의 미소를 그리는 데 정성을 다했을 것이다. “아둔하고(癡) 귀먹지(聾) 않으면 가장 노릇을 할 수 없다”고 당 대종(代宗)이 곽분양에게 한 말을, 그림을 펼쳐보던 우리 선조들은 알고 있었다. 아랫사람의 자잘한 과오는 잊은 양 모르는 양 웃어주는 포용력이다. 그 스스로의 공이 높을 만큼 관대한 미소에 힘이 더해진다. 그림 속 곽분양의 미소는 누구나 바라는 미소다. 그것은 인격이며, 장수의 비결이며, 화목을 격려하는 힘이다. 선조들이 바라봤던 곽분양의 모습. 조선후기에 꿈꾼 행복의 표상을 그린 그림 앞에서 오늘날 우리는 용기를 배울 수 있다.



고연희 서울대 연구교수 lotus126@daum.net

필자는 한국한문학과 한국미술사로 각각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과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에서 연구 교수로, 시카고대 동아시아미술연구소의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조선시대 회화문화에 대한 문화사상적 접근으로 옛 시각문화의 풍부한 내면을 해석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조선후기 산수기행예술 연구> <조선시대 산수화, 필묵의 정신사> <꽃과 새, 선비의 마음> <그림, 문학에 취하다> <선비의 생각, 산수로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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