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畵中有訓

가을 깊은 갈대 화폭, 비파소리 흘러나온다

고연희 | 165호 (2014년 11월 Issue 2)

자기계발, 인문학

 

편집자주

미술사와 문학, 두 분야의 전문가인 고연희 박사가 옛 그림이 주는 지혜를 설명하는 코너畵中有訓(그림 속 교훈)’을 연재합니다. 옛 그림의 내면을 문학적으로 풍부하게 해설해주는 글을 통해 현인들의 지혜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풍엽로화(楓葉蘆花, 단풍잎과 갈대꽃)

‘풍엽로화’라. 울긋불긋 물든 나뭇잎과 하얗게 터진 갈대꽃이다. 그림의 제목이풍엽로화로 시작한다. 조선의 문인들은풍엽로화네 글자에 숨을 몰아 탄식했다. “풍엽로화추슬슬(楓葉蘆花秋瑟瑟)” 단풍든 잎 갈대꽃에 가을이 쓸쓸하다란 시구가 입에 맴돌면서 그것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인생행로의 눈물이 기억처럼 아련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 시구는 중국 당나라의 시인 백거이(白居易, 772∼846)가 쓴비파행(琵琶行)’의 한 구절이다. 낙엽이 물들고 갈대꽃 흔들리는 가을날, 백거이는 손님을 배웅하느라 심양의 외딴 물가로 갔다. 그림 제목풍엽로화공객주(楓葉蘆花共客舟)’는 백거이보다 20년 정도 후배인 허혼(許渾, 791∼854)이 친구에게 보내는 시에서 사용한 구절이다. 허혼은 친구와의 이별을 회상하며 읊었다. “단풍 들고 갈꽃 필 때 객선에 함께 타고 이별했지(楓葉蘆花客舟).”

 

‘비파행’을 지은 백거이는 당나라 시인이다. 그는 낙양 근처 가난한 지방관 출신으로 태어났는데 어릴 때부터 유난히 총명했다. 10세부터 장안에서 유학하며 과거시험에 차례로 합격했고 30대에 이미 황제의 국서를 대신 쓸 정도로 실력이 출중했다. 그의 문집에 실린 그 벗의 서문에 따르면 계림의 사람들, 즉 한반도 신라인들이 장안의 시장에 와서 백거이의 글을 사가려 했다. 백거이의 문명(文名)이 얼마나 높았는지 알려주는 말이다. 백거이의장한가(長恨歌)’는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읊은 서사시로 웅장하고 유려하며 감정이 곡진해 귀족부터 기생까지 읊조릴 정도였다. 오늘날 중국의 서안에서 장한가가 뮤지컬로 공연되면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든다.

 

그 이름이 하늘처럼 솟았던 백거이가 어찌하여 쓸쓸하게 심양의 물가에서 홀로 손을 배웅하는가. 소신껏 올린 상소문이 화근이 돼 그는 지방으로 좌천된 상태였다. ‘비파행을 읊을 당시는 좌천된 첫 임지 강주사마(江州司馬)로 머물 때였고 그의 나이 45세였다. 이후로 그는 장안의 중앙정부에 들지 못하고 지방관으로 떠돌았다. 외지에서 몸이 늙고 병들어 가는데 추운 계절이 다가오고 손님이 떠나간다. 떠나는 손님과 배에서 술잔치나 해보려 나왔지만 음악 연주 하나 없는 적적한 벽지, 낙엽 들고 갈대꽃 쓸쓸한 데서 풍류의 취기가 오르기나 할까 염려가 되던 참이다.

 

비파 타는 여인의 정체

그때였다. 홀연히 비파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가 처연하고 몹시 아름다워 바삐 돌아가는 배들마저 소리를 죽이고 손님도 떠나지 못한다. 비파 소리 울리고 달이 떠오르자 사람들은 하염없이 물 위에 흔들이는 달빛만 바라보더라고 백거이는 묘사한다. 비파소리는 저쪽 어딘가 배에서 울리고 있었다. 장안을 떠나온 후로 오랫동안 들어보지 못한 세련된 연주솜씨에, 백거이는 매료됐다.

 

비파 타는 사람이 누구신가? 백거이는 몹시 궁금해 재차 물었으나 연주의 주인공은 도무지 배에서 나오려 하지 않았다. 한참 후 부채로 얼굴을 반쯤 가린 여성이 불빛 아래 등장한다. 노파였다. 그녀는 머뭇거리다 말하기를저는 본래 장안의 여자로, 제 이름은 교방의 제1부에 속해 있었지요. 한 곡조를 마치면 스승들이 탄복했고 몸치장을 하면 기녀들이 질투했지요. 오릉의 청년들이 다투어 저를 찾았고 곡이 끝나면 붉은 비단이 쏟아졌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얼굴이 시들었고 어느 장사치에게 몸을 맡겼으나 그마저 떠나갔기에 빈 배를 지키고 사노라 한다. 말을 마친 늙은 기녀가 다시 비파를 뜯으니 그 소리 간절하여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는데, 가장 많이 울어 적삼을 다 적신 이는 강주사마 백거이였다.

 

백거이는 아마도 아른거리는 기억 속에 무언가를 떠올렸을 것이다. 머리터럭 푸르도록 검던 때 장안의 한 시절을 누리던 기녀와 황실의 총애를 받던 명사가 심양의 물가에서 다시 만났다. 백거이가 기녀에게 말을 건넨다. “너와 나는 같은 하늘 아래 떠도는 처지인 것을 우리가 이전에 아는 사이였던 것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내가 너를 위해 비파행을 짓고자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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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연희

    고연희lotus126@daum.net

    - (현) 서울대 연구교수
    -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 연구교수로 활동
    -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활동
    - 시카고대 동아시아미술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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