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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with the Maestro

“혁신은 가능하지 않은 일을 하는 것… 불가능한 것이야 말로 매력적이다”

신수정 | 120호 (2013년 1월 Issue 1)

 

편집자주

※이 기사의 작성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이지은(숙명여대 영어영문학과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가야금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바로 황병기(76) 이화여대 명예교수다. 그에게는가야금의 명인’ ‘국악의 선구자’ ‘국악 세계화의 주역이라는 다양한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그의 삶이 한국 현대 국악사 그 자체라고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황병기 교수가 가장 좋아하는 수식어는 그냥 담백하게가야금 작곡가 겸 연주자. 경기고와 서울법대를 졸업한 그는 6·25 전쟁 중 피난처인 부산에서 우연히 들은 가야금 소리에 매료돼 평생의 인연을 맺었다. 연주와 함께 50년 넘게 해오고 있는 작곡에 대한 애정도 대단하다. ‘미궁은 탁월한 현대음악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쉬지 않고 새로운 음악을 선보인 그는 지난해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 임기를 마친 후에도 여전히 바쁘다. 지난 9월에는가야금 명인 황병기와 국립발레단의 아름다운 만남이라는 창작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올해의 마지막 날은 국립극장에서 열리는 제야음악회에 참석해 연주한다. 74년부터 한번도 이사를 가지 않고 살아온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자택 2층 서재에서 거장이 걸어온 음악 및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중학교 3학년에 가야금을 접한 뒤 그 매력에 빠지셨다고들었습니다. 황 교수님 인생에서 가야금은 무엇인지요.

가야금이 좋아서 했지 아무런 목적이 없었어요. 알기 쉽게 이야기하자면 가야금과 연애를 한 셈이지요. 대학 진학 때는 가야금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법대에 갔어요. 처음에 법대를 지원할 당시에는(1955) 전국에 국악과가 있지도 않았고요. 또 국악을 해서 그것을 내 직업으로, 생업으로 삼는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지요. 그런데 법대를 졸업한 해인 59년에 우리나라 최초로 서울대 음악대학에 국악과가 생겼어요. 당시 음악대 학장인 현제명 선생이 국악과 강사를 맡아달라고 부탁해서 강사활동을 시작했어요. 강사를 하면서도 이것이 내 직업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어요. 63년에 음악대학 강사를 그만두고 생계를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했어요. 한동안 음악과 관련 없는 일을 하다가 74년에 이화여대에서 국악과 전임교수를 맡아달라고 요청했어요. 곰곰이 생각한 끝에 음악인으로 살아야겠다고 결심했고 가야금이 내 전공이라는 프로의식을 가지게 됐죠. 당시 내 나이 서른여덟살 때입니다. 고등학교 때 한번, 대학교 때 한번 전국국악콩쿠르에서 1위한 경력은 있었지만 74년 이전에 나는 그저 좋아서, 아무 목적 없이 가야금을 했어요. 하지만 74년 이후부터 가야금이 내 직업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지요. 나와 가야금은 숙명적인 인연이 있는 것 같아요.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직업과 결혼인데 나의 직업은 가야금 작곡가 및 연주자이며 국립국악원에서 아내를 만나 결혼을 했어요. 2001년 이화여대에서 정년퇴직을 한 뒤 지금까지도 가야금과 관련한 일을 하고 있고 61년 동안 매일 가야금을 연주하면서 살고 있어요. 요새는 연습을 많이 못해도 매일 3∼4시간은 하고 있어요. 악기를 한다는 사람이연습을 많이 한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선 최소 하루에 일곱 시간 정도는 연습을 해야 해요. 나도 한창 많이 했을 때는 하루 종일 가야금만 하다시피했지요.

 

가야금은 어떤 매력이 있는가요.

그것은 모를 일이지요. 연애하는 사람에게 상대방의 어떤 점이 좋아서 연애를 하냐고 물어보면 대답할 수 없을 겁니다. 만약 대답을 한다면 그것은 전부 거짓말이지요. 연애는 상대방의 키, 얼굴 등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도 모르는 이유로 인해 하는 것이에요. 나에게 가야금도 이와 마찬가지죠. 그저 좋아서 했어요. 연애할 때 상대방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지 못해서 연애를 하는 건 아니잖아요. 꽃도 마찬가지죠. 어떤 사람이 장미를 좋아하면 그저 장미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 꽃을 좋아하는 것이지 장미보다 더 아름다운 꽃이 없기 때문에 그 꽃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에요. 좋아하는 것에는 이유가 필요 없는 것이지요.

  

황병기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겸임교수,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을 역임했다.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가야금 명인으로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며 대한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음악대표와 연세대 특별초빙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1936년 서울에서 태어나 1951년 부산 피난 중에 가야금을 배우기 시작해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하자마자 동 대학교의 국악과 강사가 됐다. 첫 가야금곡인 <>을 작곡한 이래 수많은 작품을 창작했고 이화여대 한국음악과 교수, 하버드대 객원교수 등으로 후학들을 가르쳤다. 백남준, 윤이상, 존 케이지 등과 음악적 교류와 친분을 갖기도 한 그는 국악을 전 세계에 알리고 국악의 음악적 영역을 확장하는 데 공로를 쌓아은관문화훈장’ ‘방일영 국악상’ ‘호암상’ ‘에밀레 대상등을 수상했다. 대표적 가야금 작곡집으로 <침향무>(1974) <미궁>(1979) <달하 노피곰>(1997) 등이 있고 저서로는 <깊은 밤, 그 가야금 소리>(1994)가 있다.

 

지금도 매일 가야금을 연주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교수님께서 평생에 걸쳐 예술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예술의 좋은 점, 음악의 좋은 점은 무엇인가요.

음악에 내 평생을 거는 셈이 돼버렸는데 음악에는 여러 가지 기능이 있지요. 쉽게 이야기하자면 음악에는 오락적인 기능도 있고 영혼을 쓰다듬어주는 기능도 있어요. 그런데 나는 오락적인 기능의 음악을 위해서는 내 평생을 걸 수가 없어요. 그래서 내 음악은 전부가 명상적이고 나는 영혼을 어루만져주는 그런 음악을 하려고 노력했어요. 어떻게 보면 내 음악은 재미가 없죠. 난 재미있는 음악을 싫어합니다. 재미가 있는 것은 재미가 없어요. 이유는 나도 몰라요. 나는 운동도 유도와 철봉만 했어요. 보통 재미가 없어서 잘 하지 않는 운동이죠. 싸이의강남스타일이 굉장히 인기를 끌고 나도 그 음악을 좋아합니다. 그렇지만 내가 그런 재미있는 음악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교수님께서 생각하시는 좋은 음악이란 어떤 음악인지요.

가령 우리는 주로 코카콜라 같은 청량음료를 사서 마시지만 결국 사람들이 제일 많이 마시는 것은 생수예요. 물은 아무 맛이 없지만 그것을 제일 많이 마셔요. 또 누구든지 물을 제일 먹고 싶어하고요. 다른 음료는 마시지 않아도 되지만 맹물은 안 마실 수가 없어요. 생명수 같은 것이지요. 그리고 똑같은 생수를 마시더라도 가능하다면 깊은 산속의 약수를 마시는 것이 더 좋겠지요. 이처럼 대중들은 새콤달콤한 것을 좋아하는 것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나는생수’ 같은 음악을 만들고 싶어요.

 

최근에 <논어>를 매우 즐겨 읽으신다고 들었습니다.

<논어> 좋아하지요. 왜냐면 <논어>는 말이 쉽고 평범해요. 특히 시대를 넘어선 말들이 많아요. 제일 좋아하는 구절은 나뿐만 아니라 <논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대게 좋아하는 구절인데 첫 번째 시작하는 말이에요. ‘배우고 배운 바를 때때로 익히면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不亦悅乎)’. 이는 아주 기가 막힌 말이에요. 내가 칠십 평생을 살면서 깨닫는 것은 가장 즐거울 때가 배울 때라는 겁니다. 아무리 노인이 되고 죽을 때가 가까워져도 배우지 않으면 못 살죠. 매일 신문을 읽고 텔레비전을 보는 것도 배우는 것이에요. 어린아이들은 더 말할 것도 없지요. 아이들은 줄곧 이게 무엇이냐고 물어보잖아요. 모르는 걸 배우는 것처럼 즐거운 것은 사실 없어요. 그리고 공자는 배운 바를 열심히 익힌다고 안하고때때로라고 했어요.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했죠. 다른 재미있는 것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것도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말이죠. 얼마나 민주적이에요. 그것도 아니한가라고 물어봤지그렇다라고 안 했어요. 말하는 방식이 참 민주적이고 독단적이지 않아서 좋아요.남이 나를 몰라줘도 내가 노여워하지 않으니 이 또한 군자답지 아니한가(人不知而不慍不亦君子乎).’ 이 구절도 좋아해요. 직장이나 가정이나 친구 사이에서나 분쟁, 고민 등 모든 문제의 근원은 결국 남이 나를 몰라준다는 생각 때문이에요. 특히 직장에서는 심하지요. 상사는 부하가 자신을 몰라준다고 하고, 부하는 상사가 자신을 몰라준다고 서운해하고 미워하죠. 그런데 공자는 여기에 이렇게 말해요. ‘남이 나를 몰라주는 것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내가 남을 몰라주는 것을 걱정해라(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정말 기가 막힌 조언이죠. 이처럼 시대를 넘어선 말에서 많은 교훈을 얻어요. 이런 구절도 생각나네요. 어느 날 제자가 공자한테 죽음 이후에 대해서 물어보니까나는 살아서 내가 무엇을 할지도 모르는데 내가 죽은 다음까지 어떻게 아느냐(生未知死焉知)’고 해요. 다 맞는 말이지요. <논어> 중에서 좋은 말을 뽑아서 내 나름대로 A4 용지 다섯 장 정도의 명언집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그것을 외워버렸어요.

 

요즘 세상이 피곤해서인지 힐링, 치유에 대한 사람들의 니즈가 매우 높습니다.

실제로 음악요법 하는 사람들이 내 음악에서 많은 효과를 받았다라고 하더라고요. 어떤 분은 잠 안 올 적에 내 음악을 들으면 잠이 잘 온다는 말도 하고(웃음). 나는 요즘 자기 전에 한두 시간 정도 음악을 듣습니다.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곡, 파르티타 같은 것도 듣고 비발디의 첼로 협주곡 전집도 듣죠. 어떤 때는 재즈도 들어요. 모든 걸 다 내려놓고 음악만 듣고 마음을 가라앉히는데 나한테는 그게 힐링의 시간이에요. 가령 내가 원고를 쓰다가도 밤 11시가 됐다 하면 무조건 놓아버려요. 내가 원래 불면증이 있었는데 음악으로 치유했어요.

 

평생 가야금을 연구하고 작곡하시면서 기쁨 못지 않게 어떨 때는 슬럼프에도 빠지고 남들이 모르는 고통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인생의 고통의 시기는 언제였고, 그 순간을 어떻게 넘기셨는지요.

작곡을 하다가 잘 안 될 수도 있고, 사업을 하다가 잘 안 될 수도 있죠. 사업이 잘 안 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무엇을 만들었는데 잘 안 팔린다는 것을 의미하죠. 그러면 그것이 실패지요. 그런데 어떻게 팔아야 하는가만 집중해서 생각해야 되지 그 외의 다른 고민을 할 필요가 없어요. 나는 고민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리고 고민은 할 필요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자기 있는 힘을 다해서 일을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일을 하다가 실패할 수 있겠지만 실패해도 반드시 얻는 바가 있어요. 고민만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어요. 인생을 뒤돌아보면서 몸과 마음이 힘들었을 때는 1999년 대장암 수술을 받았을 때입니다. 그런데 그때 입원실에 있을 동안에도 작곡을 했어요. 굉장한 고통 속에서요. 수술이 다 끝나고 나면 걸어 다니는 운동을 해야 해요. 걷는 동안 서울대 병원의 시계탑을 봤어요. 그 탑이 고종황제 때 지은 것이지요. 그 탑이 조명이 잘돼 있어서 밤에 보면 굉장히 아름다워요. 그걸 보면서 병원에서 입원만 하고 있으니깐 억울하다는 생각이 듭디다. 그때 내가 60대 초반( 63)이었어요. 몸이 고통스럽고 혹시나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비참하거나 슬픈 곡을 쓸 것 같은데 그렇지가 않아요. 굉장히 아름다운 곡을 쓰고 싶어져요. 그래서 아주 아름다운 곡을 썼는데 그게시계탑이라는 곡이에요. 소녀풍의 예쁜 곡이지요.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깐 순간순간이 더 소중하고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거죠. 그해에 퇴원하자마자 기저귀도 차고 다니고 그랬는데 영산아트홀에서 가야금 독주회도 했어요. 1월에 수술했는데 그해 여름에는 독일 가서 연주도 했고요. 수술하기 전보다 더 활발히 연주를 했던 것 같아요.

 

 

 

<황병기의 단상>

“좋아서 하는 것이 제일 좋은 것 같아요. 좋아서 하면 거기에서 무시무시한 힘이 나와요. 그야말로 초인적인 힘이 나온다고 생각해요.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것은 몽둥이로 때려도 담 넘어서 도망가서라도 해요. 그런 무서운 힘이 나와서 일이 되는 것이지 내가 뭐를 하기 위해서 한다고 그러면 의무감에 이를 악물면서 한다 해도 한계가 있다고 봐요.”

 

“음악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일도 불가능한 것을 해결할 정도가 돼야 사람을 감동시키지 그냥 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거는 별로 재미가 없죠. 그래서 누구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해야 합니다. 가장 쉬운 예 중 하나가 물방울로 바위에 구멍을 뚫는 것입니다. 바위 위에 물방울이 처음으로 떨어질 때에는 그것이 바위와 아무 관계없는 일 같지만 결국 구멍이 뚫리거든요. 이처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 같아도 관계가 있게끔 만들어놓는 것. 그런 정도의 작품을 써야 되지 않을까 항상 마음은 먹고 있어요.”

 

“작곡은 배우고 가르치는 게 거의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연주는 가르칠 수 있지만 창작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작곡 제자가 없습니다. 가령 선생과 제자 또는 친구끼리 앉아서 작품에 대한 얘기를 하잖아요. 작품이 어쩌고저쩌고. 그 선배나 선생님한테 듣는 것에서 끝나면 창작이 안 나옵니다. 선생하고 얘기하면서 제자가 전혀 딴 궁리를 해야 해요. 그 정도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야 창작을 하지 배운 것을 그냥 써먹으려면 어려워요. 꼭 음악뿐 아니라 시를 쓰든, 소설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창작이라는 건 참가르치고 배우기 어려운 뭔가가 있어요.”

 

- 서울대 기초교육원 관악초청강연 중에서

 

 

“아이들을 어떻게 키웠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우리 부부는 서로의 일에도 간섭을 않지만 아이들 크는 데도 간섭을 안 했다. 각자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도록 내버려뒀다. 큰아들은 물리학으로 시작해 수학이 더 좋다며 바꿨다. 둘째 아들이 음악을 취미로 삼고 등산에 푹 빠졌지만 우리 부부는 그냥 아이들 하는 대로 지켜만 봤다. 아이들이 모두 자기가 좋아하는 일과 연애를 하면서 살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다.”

 

“나는 그를백형이라고 불렀고, 그는 나를미스터 황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나는 미스터 황이 부러워. 1500여 년의 전통이 있는 음악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좋아. 내가 하는 일은 전통이라고는 없어라고 말했다. 유머와 재기가 넘치면서도 진지했던 예술가 백남준. 우리가 처음 만난 지 40년이 돼가고 그는 이제 내 곁에 없다. 요즘도 내 귀에는 이 기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요즘 아이디어가 빈곤해. 알프스 산속에 들어가 <삼국지> 좀 읽고 와야 겠어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 말이다.”

 

- 오동 천년, 탄금 60(가야금 명인 황병기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 중에서

 

 <아프니까 청춘이다> 같은 책들이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 청춘들에게 해주고 싶으신 이야기가 있는지요.

내가 볼 때 청춘 시절에는 자기한테 주어진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인생의 절정은 대학시절이에요. 그러니까 대학시절을 대학 후를 위한 무엇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보내기보다 대학시절 그 자체를 즐기라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그래서 나는 강의를 할 때도 학생들이 내 강의를 듣는 순간이 가장 즐겁기를 바랐어요. 내 강의를 듣고 나서 이것을 어디에 써 먹을까라고 고민하기보다는 강의 그 자체를 즐기기를 원했어요. <논어>에 배우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자세가 잘 나와 있어요. ‘네가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네가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그것이 아는 것이다라고요. 학생들이 제일 먼저 알아야 될 것은안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예요. 강의를 해보면 학생들은 자신이 모르는 것도 안다고 하고 사실은 아는 데도 모른다고 하는 경우가 꽤 있어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열심히 하다가 보면 무언가가 나오기 마련이에요. 나이 먹어서 제일 나쁜 것이 젊은 사람들한테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 같아요. 나는 강연할 때 음악 외적인 이야기는 잘 안 해요. 내가 제일 잘하는 것만 얘기하려고 하죠. 한국 사람들이 우수한데 약간 흠이 있다면 모든 사람이 모든 것에 다 관여하려고 한다는 것 같아요. 각자 자기 전공을 하면 되는데 남의 분야까지 아는 척을 하면 혼란스러워지죠.

 

DBR은 경영자들이 많이 보는 매체입니다. 매일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기업의 리더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는지요.

나도 젊었을 때 63년부터 74년까지 사업을 했어요. 첫 직업은 명동극장의 지배인이었죠. 또 화학공장의 기획관리실장으로도 일하고 영화를 수입하는 일도 했어요. 영화제작도 했는데 큰 영화가 아니고 기록영화나 문화영화를 주로 제작했어요. 출판사 일도 했었네요. 내 자신이 이렇게 다양한 사업을 해본 결과 인생에서 무엇을 하든올인(All-in)’을 해야 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24시간 동안 그 생각만 해야 되는 시기가 있어요. 그래서 나는 서른여덟살 때 모든 것을 정리하고 음악만 하게 됐어요. 리더의 마음가짐에 대해서는 <논어>에 잘 나와 있어요. ‘부드러우면서도 엄격해야 한다(子溫而厲 威而不猛 恭而安子).’ 반대로 이야기하면 엄격하면서도 부드러워야 한다는 말이겠죠. 또 지도자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밑에 있는 사람들이 볼 때 진실되고 사심이 없는 사람처럼 보여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저 사람이 나(부하직원)를 사랑한다는 생각이 들게 해줘야죠. 저 사람이 진정으로 나를 배려하는 마음이 있다고 느끼면 자연스럽게 따르게 될 겁니다.

 

인생에서 롤모델은 있으신지요.

나는 가야금을 하는 사람이니까 가야금을 가르쳐주신 내 스승이 있어요. 음악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은 고전적인 작곡가 중에는 베토벤, 현대에서는 스트라빈스키예요. 그 사람의봄의 제전이라는 곡은 지금도 정월 초하룻날 아침에 차례 지내고 나면 제일 먼저 듣고 있어요. 그 에너지가 1년을 버티게 해주는 것 같아요. 스트라빈스키를 너무 좋아해서 60년대 만나려고도 노력했고 만날 뻔한 기회도 있었는데 결국 못 만났어요. 그때는 아쉬웠는데 지금 생각하면 안 만난 것이 잘한 일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내가 스트라빈스키를 만난들 뭐하겠어요.(웃음) 연주는 스승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반면 작곡은 창작이어서 못 가르쳐요. 연주는 일종의 스포츠로, 육체로 하는 것이지요. 지금도 내가 연주를 놓지 않는 이유예요. 육체로 무언가를 하는 것은 참 매력 있는 일이지요. 왜냐면 육체처럼 정직한 것이 없어요. 김연아 같은 선수도 한 달만 스케이트 안 타면 못 탈 거예요. 육체로 하는 일은 정신만 갖고서는 안 되죠. 그리고 어느 정도의 냉정함도 필요해요. 권투 선수가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때려잡을까 하는 마음만 앞서면 이기기 힘들어요. 상대방을 냉철하게 파악한 뒤 규칙에 맞게 때려야 이기죠. 코미디언도 마찬가지예요. 자신이 웃으면 아무도 안 웃어요. 자기는 웃는 마음이 없이 남을 웃겨야 해요. 연주자 역시 자신의 감정에 빠지면 안 돼요. 나는 제자들에게 연주를 할 때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빼라고 얘기합니다.

 

창작 활동인 작곡은 그 기쁨 못지 않게 고통스러움도 많을 것 같습니다.

고통스럽죠. 잘 안 될 때는 매우 고통스럽지만 또 그런 만큼 더욱 재밌습니다. 테니스 선수가 테니스 칠 적에 온 몸에 땀을 흘리며 하죠. 축구선수도 다리가 부러질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하잖아요. 박지성 선수가 얼마나 힘들게 운동을 하겠어요. 그런데 박지성 선수한테축구 싫으냐고 물으면 정반대의 대답을 하죠. 그런 것이 진짜 즐기는 자세죠. 쉽지만은 않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계속 해나갈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침향무’라는 작품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교수님은 과거의 것을 답습하지 않고 계속 새로운 것을 시도하셨습니다. 새로운 것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나요.

‘혁신’이 제대로 되려면 그것이 불가능한 것이어야 합니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야 감동적인 것이 나올 수 있어요. 20세기 프랑스 작곡가로 메시앙이 있는데 그가불가능성의 매력이란 말을 했어요. ‘불가능한 것이야말로 매력이다, 해볼 만하다라고 했어요. 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지요. 아무도 감동을 못 받아요. 작곡은 굉장한 정신력을 필요로 하는 창작활동이에요. 내가 해온 작곡 활동을 보면 비슷한 것이 거의 없어요. 작품마다 매우 달라요. 작품마다 전부 새로운 세계로 자기모방을 안 하려고 철저히 애썼어요. 60년대, 70년대 작곡한 곡을 지금 들으면저걸 내가 어떻게 썼을까라고 스스로 신기할 때도 있어요.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내가 젊었을 적에 싫어했던 말이 ‘Boys, be ambitious’였어요. 난 야망도 필요 없고 그다지 유명해지고 싶은 생각도 없었어요. 내 가야금 연주도 아무도 안 들어도 상관 없다고 생각했어요. 문 닫고 혼자 하면 되니까요. 그래서 평생토록 내 음악회를 내가 주최해본 적이 없어요. 음악회를 해도 제자들한테 잘 알리지 않아요. 74년부터 지금까지 같은 집에 산 이유도 물적인 욕심이 없어서죠. 남들 보면 이사를 다니는 주요 이유 중 하나가 이재를 위해서인데 나는 (이재에) 취미도 없고 소질도 없어요. 차도 오래된 SM3를 타고 다니는데 비 오는 밤에 운전해도 전혀 문제 없이 괜찮아요. 좋은 차에 대한 욕심도 없어요. 내 젊었을 적 꿈이 평범하게 사는 것이었어요. ‘평범한 시민으로 살면 제일 좋겠다라고 생각했지요. 유일한 욕심이라고 한다면 가야금을 좀 더 잘 켜고 싶다는 것과 죽기 전에 마음에 드는 곡을 더 작곡하고 싶다 정도겠네요.

 

 

신수정 기자 cryst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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