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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d Management

혁신가가 관료주의를 이기는 법

정현천 | 112호 (2012년 9월 Issue 1)

 




1900년 전후 미 해군 전함에서 실시하는 사격은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부정확했다. 평균적으로 9500발을 쏘면 겨우 121발만이 표적에 맞았다고 한다. 그래도 미 해군은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막 승리를 한 참이었고 사격 명중률이 낮다는 것은 해전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로 받아들여졌다. 그 즈음 영국 해군의 Percy Scott 제독은 휘하 병사 가운데 한 명이 소총을 지지대에 받치고 망원경을 장착한 상태에서 연속조준사격을 하면 다른 병사들보다 무려 30배가 넘는 명중률을 보인다는 것을 발견했다. 당시 남중국해에 배치된 순양함에 근무하던 미 해군의 William Sims 중위는 이 내용을 전해 듣고 이것이야말로 미 해군의 전투력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릴 중요한 혁신 방안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데이터를 끌어모아 보고서를 만든 다음 이를 워싱턴에 있는 해군 본부에 보냈다. 결과는 완벽한 침묵이었다. Sims 중위는 좌절하지 않고 더 많은 데이터를 모으고 보고서를 보완해서 다시 해군본부에 보냈다. 여전히 아무런 답이 없었다. 그래도 Sims 중위는 포기하지 않고 보고서를 동료 장교들과 사령관들에게 두루 보냈다. 말이 많아지자 해군본부는 실험을 해서 Sims 중위의 제안을 검증하기로 했다. 결과는 연속조준사격을 실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기존 명중률을 개선시키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해군본부가 한 실험은 출렁거리는 함정 위가 아니라 맨땅에서 실시됐으며 Sims 중위가 제안한 장치를 사용하지도 않은 채 진행됐다. 그래도 Sims 중위의 끈기는 끝나지 않았다. 해군본부의 관료주의와 현장을 소홀히 하는 것에 분개한 그는 그동안의 경과를 정리해서 백악관에 보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Theodore Roosevelt였다. 그는 해군장관을 지낸 적이 있었으며 <1812년의 해전>이라는 책까지 저술한 전문가였다. 정치인의 시각에서 해군본부의 문제점을 숱하게 느꼈지만 해결할 수 없었던 Roosevelt 대통령은 Sims 중위를 이해했다. 그는 Sims 중위를 연속조준사격을 위한 장치개발과 명중률 개선을 위한 프로젝트의 책임자로 임명했다. 6년 동안 그 자리에서 일한 Sims 중위는 나중에 미 해군으로부터어떻게 쏘는지 가르쳐준 사람(the man who taught us how to shoot)’이라는 칭호를 얻었고 그가 개발한 연속조준사격장치는 미 해군 병참 역사상 가장 위대한 혁신으로 기록됐다.

 

이 사례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여러 가지다. 우선 그의 혁신은 Percy Scott 제독에 대한 모방에서 비롯됐고, Roosevelt 대통령의 리더십도 아주 뛰어났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우리가 놓치지 않아야 할 점은 왜 해군본부가 Sims 중위의 제안을 묵살하고 거들떠보지도 않으려 했느냐는 점이다. 혁신과 발전을 저해하는 개인적, 조직적 문제점의 대부분이 바로 이 지점에 숨어 있다.

 

미 해군의 위대한 혁신

Sims 중위는 본부에서 7500㎞나 떨어진 남중국해의 함상에서 일하는 하급장교였다. 해군 병기의 개선을 책임지는 곳은 본부의 병참국이었으며 그곳에서는 이미 증기터빈과 전기동력의 사용 같은 혁신이 이뤄지고 있었다. 충성심과 복종은 해군의 중요한 덕목이자 위대한 전통이었다. 미국 해군본부의 입장에서 볼 때 해군의 전투력을 결정하는 것은 함장들의 항해기술과 지휘능력이었다. 함장들이야말로 해군의 핵심이자 본질이었다. 그 핵심과 본질을 훼손하고 위협하는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기술적인 변화와 혁신은 해군의 핵심과 본질이 유지되는 범위 내에서만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병사들의 사격 능력은 훈련으로만 끌어올릴 수 있는데 쓸데없이 이상한 장치를 만들어주면 병사들이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을까, 함장들에 대해 존경과 충성심이 없어지지 않을까 걱정부터 했던 것이다.

 

사실 어느 집단에나 관료주의나 위계질서가 있게 마련이다. 특히 자부심이 강하고 자기동일성이 제대로 확립된 집단일수록 빠른 보고체계와 상명하복, 전통과 상징이 중시된다는 특징이 있다. 개인에게 있어서 자기동일성(Identity)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집단에 있어서도 이런 특징들은 그 자체로 좋다, 나쁘다 판단할 수 없다. 그런 특징들이 제대로 기능하면 좋은 것이고 변화하는 환경 앞에서 제대로 기능하지 않으면 나쁜 것이다. Sims 중위는 연속조준사격장치를 끊임없이 개량해 나가는 한편 그것들이 미 해군 안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함정들 간 사격대회를 개최했다. 그가 개발한 장치를 사용하도록 강제하는 대신 정보를 제공하고 장치의 사용과 함장들의 항해지휘가 조화를 이루는 길을 스스로 찾도록 했다. 그의 장치를 사용한 함정들이 기존 방법을 고수한 함정들에 비해 훨씬 나은 결과를 냈고 이는 미 해군 내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그가 개발한 장치는 함장들의 지휘능력을 훼손하지 않았고 병사들이 훈련을 게을리하도록 만들지도 않았으며 충성심이 흐려지도록 하지도 않았다. 결국 그의 혁신은 미 해군의 표준장비로 정착될 수 있었다.

 

만약 Sims 중위가 자신이 개발한 장치를 무조건 사용하도록 강제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도 해군본부와 함장들과 병사들의 저항이 훨씬 심했을 것이다. 소총만으로 사격한 결과가 그의 장치를 사용할 때보다 더 잘 나오도록 온갖 공모와 조작이 이뤄졌을지도 모른다. 그의 혁신이 미 해군 안에서 완전히 자리를 잡기까지는 훨씬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P&G의 오픈 이노베이션

생활용품의 글로벌 기업으로 유명한 P&G에서 오픈 이노베이션의 효시인 Connect & Develop 정책이 시작될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P&G는 원래 혁신기업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런데 R&D를 통해 개발되는 제품의 대부분이 상품화되지 못하거나 상품화 되더라도 곧바로 이익을 내지 못한 채 사장되는 형편이었다. A.G. Lafley는 급작스런 상황에서 제대로 준비도 갖추지 못한 채 신임 CEO의 자리에 올랐다. 매출 증가속도의 감소세를 되돌리기 위해서는 R&D에 집중 투자하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전임 CEO 지지그룹과 R&D보다는 마케팅과 브랜드 구축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반대그룹이 충돌을 일으키는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Lafley는 혁신과 비용절감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대신 그 둘을 조화시킬 방안을 찾기로 했다. 그가 눈을 돌린 곳은 회사 내부의 연구소가 아니라 회사 밖이었다. 개인 발명가나 학계, 중소기업의 발명능력을 대기업이 가지고 있는 제조와 마케팅, 유통능력과 연결하면 승산이 있다고 봤다. 그래서 다양한 외부 혁신가들과 연계해 P&G 혁신 가운데 50%를 아웃소싱으로 해결한다는 목표를 수립했다. 그러나 이 정책은 회사 내부의 R&D 조직으로부터 엄청난 반발을 샀다. 이때 Lafley가 내걸었던 캐치프레이즈가 ‘proudly found elsewhere’였다. 전략은 바뀌었지만 P&G의 핵심이었던 R&D 조직의 고집과 자부심을 꺾지 않았으며 구조조정의 대상으로 삼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적극적인 역할을 주문했다. R&D의 생산성은 60% 이상 증가했고 브랜드 가치는 엄청나게 증가했다.

 

자기동일성과 혁신

원래 심리학에서 사용되는 용어인 자기동일성은 한 개인이 타인과는 구별되는 어떤 고유한 의미를 갖는 존재인지 아닌지를 다룰 때 기초가 되는 개념이다. 개인에게 있어서 자기동일성은 주로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역할, 표지, 소속이 그것들이다. 집단이나 조직에서도 자기동일성은 때로는 사명이나 역할에 대한 뚜렷한 인식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비본질적이거나 외형적인 어떤 것에 대한 집착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미 해군과 P&G의 예에서 본 것처럼 전통과 연결된 강한 자기동일성은 그 자체로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어느 조직에나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일 뿐이다. 자기동일성은 빠른 변화와 혁신이 요구되는 때 저항하는 힘이나 덫으로 작용할 수 있다. 또 한편 자기동일성은 변화와 혁신의 속도를 빠르게 하고, 결과를 튼튼하게 만들며,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게 하는 촉매가 될 수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충분히 존중되어야 하고, 비본질적이고 외형적인 것에 대한 집착에서는 신속하게 빠져나올 수 있도록 옳은 방향으로 잘 안내돼야 한다. 자기동일성이 사명이나 역할에 대한 인식의 형태로 나타나고 새로운 변화와 혁신이 그것을 더욱 강화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방향일 것이다.

 

 

 

정현천 SK에너지 상무 hughcj@lycos.co.kr

필자는 서울대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1986 SK그룹에 입사해 회계, 국제금융, 투자가 관리, 구조조정, 해외사업, 전략수립 등의 업무를 담당했다. 현재는 SK에너지 상무로 근무 중이다. 경영학, 경제학, 심리학, 생물학, 인류학, 역사 등 여러 분야의 책을 가리지 않고 읽는 다독가(多讀家)이며 변화 추진을 위한 강사로도 활약하고 있다. 포용을 주제로 한 <나는 왜 사라지고 있을까> 라는 저서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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