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독한 비판이 오히려 자신감 키웠어요”

40호 (2009년 9월 Issue 1)

 “박사 과정 첫 학기 때 이번 논문 주제로 발표를 했다가 톡톡히 망신을 당했습니다. 그때 오기를 갖고 ‘반드시 이 주제로 좋은 논문을 쓰겠다’며 노력한 게 좋은 결과로 이어진 듯합니다.”
 
공기업 성과평가 지표의 차별화 정도가 피평가자의 인센티브에 미치는 영향’을 주제로 국내 대학 박사 과정 학생으로는 최초로 세계 최고 회계학 저널인 <어카운팅 리뷰(Accounting Review)>에 논문 게재를 확정한 김명인 박사(38)의 말이다. 2004년 3월 서울대 경영대학 박사 과정에 입학한 그녀는 5년 내내 쉬지 않고 이 주제를 연구해왔다. 지난달 <어카운팅 리뷰>로부터 논문을 싣기로 확정했다는 최종 연락을 받았으며, 내년 5월 정식 발표를 앞두고 있다.
 
이 논문은 여러 면에서 국내 경영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사회과학 분야의 박사 과정 학생이 세계 최고 저널에 논문을 실은 일 자체가 매우 이례적이다. 특히 논문 공저자인 안태식 서울대 경영대학장도 테뉴어(정년 보장)를 받은 지 한참 지났을 뿐 아니라, 학장직을 수행하면서도 논문 집필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학계의 모범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어카운팅 리뷰>는 미국 회계학회(AA A)에서 발행하는 회계학 분야의 최고 저널로, 국내 대학 교수들 중에서도 논문을 게재한 사람은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다. 1년에 전 세계에서 5000편이 넘는 논문이 들어오지만 1%에 불과한 50여 편만 실린다.
 
김명인 박사는 서른넷의 늦은 나이로 박사 과정에 들어갔다. 소위 말하는 명문대 출신도 아니었고, 가정을 돌봐야 할 주부이기도 했다. 하지만 누구 못지않은 성실성과 열정으로 장애물을 극복해 눈에 띄는 연구 성과를 이뤄냈다. 7월에 졸업논문 심사를 통과했고, 8월에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공부를 부담이나 과제로 여기지 말고 자신을 시험할 기회라 생각하면 의무감이 즐거움으로 변할 때가 온다’는 김 박사의 자기 관리 비법을 들어봤다.


 
회계학을 전공으로 선택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1990년 덕성여대 회계학과에 입학했습니다. 학력고사 점수에 맞춰 전공을 선택했을 뿐인데, 의외로 적성에 잘 맞아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졸업 무렵 학교에서 해외 유학 장학금을 빌려주는 기회가 있다는 걸 알고 지원했는데 바로 떨어졌어요. 다음 해 또 지원을 했더니 사무처에서 ‘연속 2년 지원하는 사람은 당신뿐’이라며 난색을 표하더군요. ‘2년 연속 지원하지 말라는 법이라도 있냐’고 밀어붙였죠. 결국 1996년 9월 미국 버팔로 뉴욕주립대 MBA 과정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MBA를 졸업하고 미국 공인회계사(AI CPA) 자격증을 딴 후, 1999년 8월에 귀국했습니다. 삼정회계법인에서 3년 반 정도 일했는데, 업무 강도도 세고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생각도 자꾸 들더군요. 사표를 내고 2004년 3월 서울대 박사 과정에 들어갔습니다.”
 
직장 생활을 하다 학생이 됐는데 새롭게 시작한 공부가 힘들지는 않으셨나요?
“4년 가까이 회계법인에 있다 학교에 오니 회계학을 학문으로 접근하는 게 굉장히 낯설었어요. 적은 나이도 아니었고, 석사를 마치고 바로 박사 과정에 진학한 동기생들과 비교하면 제가 뒤처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사실 저는 박사 과정에 진학하고 나서야 처음 논문을 제대로 읽었어요. 학부나 석사를 서울대에서 한 것도 아니어서 아는 사람도 전혀 없었죠.
 
모든 걸 처음부터 새롭게 시작하자고 마음을 가다듬었습니다. <수학의 정석> 시리즈를 사서 미적분부터 공부했고,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는 걸 주저하지 않았죠. ‘내가 나이가 더 많은데…’ ‘이런 거 물어보면 나를 업신여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물어보는 일을 주저하기 시작하면 공부를 제대로 할 수가 없어요. 계량경제학처럼 까다로운 과목은 경제학 석사 과정 후배에게 방과 후 별도 강의를 요청해 열심히 복습했습니다.”
 
주부라 공부와 가정 생활을 함께 하기도 쉽지 않았을 듯한데요.
제일 힘들었던 문제죠. 시댁 가풍이 좀 엄격해요. 제사가 있을 때 늦거나 빠지는 걸 달가워하지 않으시는 편입니다. 공부를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제사에 늦거나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잖아요. 굳이 뭐라 하진 않으셨지만 ‘회사에 다니는 것도 아니고 학교에 있으면서 좀 일찍 오는 게 뭐 그리 힘드냐’고 생각하실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공부 기간이 길어지면서 점점 집안일에는 참여하기 힘들어졌으니까요.
 
게다가 제가 학교에 온 지 얼마 안 돼 남편이 해외 주재원으로 뽑혀서 두바이로 혼자 떠났어요. 수년 동안 두 달에 한 번 꼴로 두바이에 갔습니다. 제가 체력이 약한 편이라 열 시간 비행 후 두바이에 도착하면 드러누워야 했어요. 공부는 공부대로 할 시간이 없었고, 정작 남편을 만나도 잘 챙겨주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한 거죠.
 
아직 아이가 없어 그 스트레스도 무척 컸습니다. 아무래도 양가 부모님은 ‘아무리 대단한 공부를 해도 가정이 우선 아니냐. 나이도 있는데 아이가 중요하지 않느냐’고 생각하시는 편이니까요. 이래저래 힘든 일이 많았는데 남편이 묵묵히 참아줘 고마울 따름입니다. 제가 졸업논문을 빨리 마무리하지 못해 졸업이 한 학기 늦어졌어요. 그것마저 잘 이해해줬습니다.”
 
<어카운팅 리뷰> 게재 논문의 주제는 ‘한국 공기업의 성과평가 지표’입니다. 어떻게 이 주제를 선택하셨나요?
논문의 공저자인 안태식 서울대 경영대학장께서 2004년 첫 학기 수업 때 박사 과정 학생들에게 개별 과제를 주셨습니다. 그때 제 과제가 바로 ‘공기업의 성과평가 제도가 본연의 목적을 달성하고 있느냐’를 분석하는 거였습니다. 지금도 제게 그 주제를 주신 학장님께 너무 감사해요. 이후 지속적으로 학장님의 지도를 받으며 논문을 발전시켜 성과를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초기에는 혹독한 평가를 받았습니다. 나름 열심히 준비해서 발표를 했는데 많이 깨졌습니다. 전혀 답할 수 없는 질문을 한 교수님도 계셨어요. 무척 창피하기도 했지만 그 순간 오기가 생기더군요. ‘꼭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겠다’고요.
 
이후 다른 방식으로 데이터를 계속 돌리니 흥미로운 결과가 많이 나왔어요. 새로 분석한 결과들을 모아 2005년 8월 한국 회계학회에서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한국 회계학계를 주름잡는 교수님들로부터 강의 때보다 더 혹독한 비판을 받았어요. ‘이런 거 왜 해? 가치가 없어’라는 말까지 들었죠.
 
이상하게도 그런 비판을 들으면서도 제 마음속 한 켠에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다른 평가를 받고 싶어 결국 그 논문을 미국 관리회계학회에 제출했죠. 큰 기대를 안 했는데 2006년 1월 플로리다에서 열리는 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하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논문을 발표하러 학회에 가보니 박사 과정 2년 차는 저 혼자였어요. 모두 교수들만 계시더군요. 발표 전날 얼마나 떨렸는지 몰라요. 거울을 보면서 20분 정도인 발표문을 거의 다 외울 정도로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런데 발표 당일 제가 큰 실수를 했어요. 저는 한국에서처럼 파워포인트 자료로 발표할 거라 생각했는데 OHP를 사용하더군요. 제가 첫 번째 발표자였으니 얼마나 당황했겠어요. 부랴부랴 발표 순서를 세 번째로 미루고, 파워포인트를 OHP 형태로 바꿨죠. 그런데 그게 오히려 약이 됐어요. 누군가 발표 자료에 대한 유인물을 나눠주는 걸 교수들이 좋아한다고 일러줬거든요. 제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유인물도 만들었죠.
 
발표 시간에 제 첫마디가 뭐였는지 아세요? ‘이제부터 여러분께 선물을 드리겠다’면서 발표 자료를 나눠줬습니다. 그랬더니 강연장 분위기가 몰라보게 부드러워졌어요. 저도 어떻게 그런 기지를 발휘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자신감과 안정을 찾고 차근차근 발표를 시작할 수 있었죠. 아니다 다를까 끝나고 나서 ‘재미있다’ ‘시사점이 많다’는 반응이 많았어요. 심지어 영어를 잘한다는 칭찬도 받았고요. 그때 이 논문을 더 보충하면 해외 톱 저널에도 실을 수 있겠다고 확신했습니다.”
 
공부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였나요?
플로리다에서 논문 발표를 잘하고 돌아온 후 슬럼프가 찾아왔습니다. 공기업 성과평가 지표 논문은 관리회계 분야에 속한 주제인데, 제 졸업논문은 재무회계 쪽으로 써야 했거든요. 두 분야를 모두 다루면서 작업을 진행하고, 남편이 있는 두바이도 오가야 했죠. 정말 몸이 10개라도 모자랐어요.
 
사실 박사 1, 2년 차 때는 수업을 듣고 시험을 쳐야 하니까 좀 답답한 면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나고 보면 시험만큼 쉬운 일이 없어요. 공부해서 보기만 하면 되잖아요. 하지만 논문은 제가 열심히 한다고 해서 반드시 의미 있는 결과가 나오는 게 아닙니다. 완전히 엉뚱한 방향으로 가버릴 때도 많아요. 그야말로 미로에 갇힌 듯한 느낌이죠. ‘과연 이 과정이 끝나기는 할까? 끝을 볼 수는 있는 걸까?’ 하는 마음을 다잡고 공부에 몰두하는 게 너무 힘들었습니다.”
 
<어카운팅 리뷰>는 왜 그 논문에 주목했을까요.
성과 평가의 목적은 기업의 목표와 종업원의 목표를 최대한 일치시켜 양자에게 최대한의 이익이 돌아가게 만드는 거죠. 그러려면 성과 지표를 잘 설정하는 게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문제는 주관적인 성과평가 지표와 객관적인 성과평가 지표의 특성이 다르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책임감이 있는지 아닌지를 평가하라’는 주관적 지표를 보죠. 이 질문의 결과를 분석해보면 관대화 경향(compression bias)이 두드러져요. 즉 평가자가 대부분의 피평가자에게 후한 점수를 주거나, 중간 점수를 줄 때가 많습니다. 점수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야 하는데 특정 지점에 몰려 있는 경향이 뚜렷하면 차별화가 안 되죠. 결국 종업원의 노력을 평가하는 성과평가 지표로의 의미도 상실하고요.
피평가자들도 이를 알기 때문에 주관적 지표보다는 객관적 지표에서 좋은 점수를 받으려고 애씁니다. 그러다 보면 결국 업무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죠. 이를 방지하려면 주관적 성과평가 지표가 의미 있는 차별성을 도출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야 합니다.”
 
졸업논문은 어떤 주제로 쓰셨나요?
회계적 보수주의를 주제로 검증했습니다. 많은 한국 기업들이 해외로 진출하면서 실적을 발표할 때 국내 이익(domestic earning)과 해외 이익(foreign ear-ning)을 동시에 발표합니다. 이때 국내 이익을 계산하는 방법은 매우 보수적인데, 해외 이익은 부풀리는 경향이 두드러져요.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죠. 첫째, 해외 지점은 국내 본사와 멀리 떨어져 있으니 아무래도 감시가 국내보다는 약하죠. 일종의 ‘대리인 문제(agency problem·본인과 대리인의 이해관계가 달라 생기는 도덕적 해이)’라고 할까요? 둘째, 해외 법인에는 생산 설비가 거의 없잖아요. 자산이 없으니 자산을 상각할 수도 없고, 회계 처리를 보수적으로 할 가능성도 적은 셈이죠.”
 
지난달 졸업논문이 통과됐을 때 기분이 어떠셨어요?
박사라는 칭호를 처음 들었을 때 저도 모르게 울었습니다 작년이 특히 힘들었거든요. <어카운팅 리뷰>에 보낼 논문과 졸업논문 모두 끝이 보이는데, 마지막 마무리를 하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언덕 하나만 넘으면 되는데 그게 안 되니까 조바심이 많이 났죠. 결국 졸업도 예정보다 한 학기 늦어졌고요. 당시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 높은 곳을 올라가다 목표 지점 바로 앞에서 미끄러지는 꿈을 꿀 정도였죠.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그 고비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지금 그때 상황을 돌이켜보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겠네요. 태양은 떠 있는데, 단지 구름에 가려져 있어 저만 못 봤을 뿐이었다고요. 저도 박사 과정에 진학하기 전에는 절박할 정도로 공부를 열심히 해본 적이 없어요. 특히 1년 차 때는 별로 재미를 못 느꼈고, 공부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만 가득했죠. 그런데 공부를 하면서 제 자신이 굉장히 겸손해진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모르는 게 많아서 ‘내가 참 부족하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몰랐던 걸 하나하나 깨우쳐 나가는 과정에서 어느 순간 의무감이 즐거움으로 변하기 시작했죠.
 
굳이 공부뿐 아니라 다른 일에서도 ‘될 듯 될 듯 하면서도 안 된다’는 이유로 포기하는 분이 있다면, ‘이미 태양은 떠 있다. 지금 구름에 가려져 있을 뿐이고 곧 떠오를 거다. 스스로 포기하지 않으면 결코 태양을 못 볼 이유가 없다’는 이야기를 꼭 해주고 싶습니다.”
동아비즈니스리뷰 334호 세계관의 세계 2021년 12월 Issue 1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