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론 경영학

“억울하네, 난 권모술수 옹호자가 아니야”

131호 (2013년 6월 Issue 2)

 

 

 

편집자주

많은 사람들은 마키아벨리를권모술수의 대가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억울하게 살고 있는 약자들에게더 이상 당하지 마라고 조언했던 인물입니다. 메디치가문의 창조 경영 리더십과 마키아벨리 연재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김상근 연세대 교수가 <군주론 경영학>을 연재합니다. 글을 읽는 재미를 위해서 김 교수가 일부 허구적인 내용도 가미했습니다. 시대를 뛰어넘는 통찰력을 주는 마키아벨리의 이야기에서 깊은 지혜와 통찰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마키아벨리의 편지 다발이 발견되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도서관 수장고에서 최근 세상을 뒤집어 놓을 만한 문헌이 다발째 발견됐다. 메디치도서관은 미켈란젤로의 빼어난 건축 작품으로 역사적 가치가 다시 평가를 받아야 할 고문헌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 서양 인문학을 연구하는 사람에게 메디치도서관은 성지(聖地)와 같은 곳이다. 이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고문헌은 규모나 중요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메디치도서관의 명성에 필적할 만한 곳은 영화천사와 악마에서 소개된바티칸도서관과 아라비아 사막 한가운데 있는성 카타리나 수도원 도서관정도다.

 

최근 메디치도서관의피오렌티아나 코덱스(Florentine Codex)’ 보관 창고에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고문서 묶음이 발견됐다. 다발로 묶인 채 발견된 16세기 초반의 편지 하단에서 놀랍게도 마키아벨리의 서명이 발견됐다. 그동안 베일에 쌓여 있던 마키아벨리의 생애 마지막 부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 편지들은 마키아벨리가 1527 6월에 썼다. 그는 1527 621일 숨졌다. 이 편지의 내용에서 마키아벨리가 생애 마지막 순간에 어떤 생각을 했는지 추적해 볼 수 있게 됐다. 수신인은 마키아벨리의 친구이자 상관이었던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Francesco Guicciardini, 1483∼1540)였다. 임종을 앞두고 있던 마키아벨리는 친구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자신의 솔직한 생각을 들려줬다. 특별히 마키아벨리는 이 마지막 서신 왕래를 통해 <군주론>의 진짜 의도를 분명히 밝히려고 했다. 이번 호부터 DBR의 지면에 연재될 마키아벨리의 마지막 편지들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외부에 공개된 적이 없는 내용이다.

 

먼저 편지의 내용을 바로 소개하는 것보다 마키아벨리의 생애 말년 이야기와 그 편지의 수신자인 귀차르디니에 대한 배경을 설명하겠다. 그래야만 앞으로 읽게 될 편지의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가 귀차르디니에게 이 편지를 보냈던 1527 6월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1527년은 로마가 함락된 해다. 마키아벨리는 처참한 패전의 모습을 지켜보고 함께 무너졌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겸임하고 있던 스페인의 카를 5(1500∼1558)는 로마 교황청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다. 세속의 정치와 무관해야 할 교황청이 프랑스와 내통했기 때문이다. 유럽의 패권을 노리던 카를 5세는 프랑스의 영향력이 교황청에 미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런데 교황청은 프랑스와 함께 코냑 동맹(1526 5)을 맺었고 스페인의 패권에 도전하는 입장을 취했다. 한 하늘 아래 호랑이 두 마리가 함께 살 수 없는 법이다. 카를 5세는 교황에게 거대한 대포를 들이대면서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다. 이것이 유명한 1527로마 대 함락이다.

 

 

당시 교황은 클레멘스 7(1523∼1534년 재위). 메디치 가문이 두 번째로 배출한 피렌체의 자부심이었다. 전임 교황이었던 레오 10(1513∼1521년 재위)의 뒤를 이어 두 번씩이나 교황을 배출한 피렌체는 원래 무역과 비즈니스의 도시였고 르네상스를 만든 예술의 고향이었다. 이런 도시가 교황을 두 명이나 연달아 배출하자 비즈니스와 예술의 도시에서 성스러운 신의 도시(City of God)로 바뀌고 있었다.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직접 피렌체를 다스렸으니 가히 피렌체는2의 로마로 불릴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교황은 자신의 대리인을 내세워 피렌체를 직접 통치했다. 교황이 가장 총애하던 신하가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다. 바로 마키아벨리 편지의 수신인이다.

 

귀차르디니는 피렌체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피렌체 도심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아르노강 위에 유명한 베키오다리가 걸쳐 있다. 이 다리를 건너 남쪽으로 약 70m쯤 걸어가면 오른쪽에 마키아벨리의 집이 나온다. 지금은 유화나 도자기를 파는 상가가 빽빽하게 들어서서 제법 그럴 듯한 상가 건물로 보이지만 16세기 당시 그곳은 연립주택이 줄지어 붙어 있던 곳이었다. 로마시대에는 이런 연립주택을 인술라(Insula)로 불렀다. 마키아벨리의 집 반대쪽인 대로의 왼쪽에는 지금도 크고 근사한 저택들이 늘어서 있다. 로마시대에 이런 단독 주택은 도무스(Domus)로 불렸다. 마키아벨리의 연립주택을 마주보고 있는 도무스형 저택에 살았던 가문이 바로 귀차르디니였다. 귀차르디니는 마키아벨리의 부자 이웃이었다. 비록 한 사람은 도무스에 살던 귀족이고, 또 다른 한 사람은 허름한 인술라에 살던 별 볼 일 없는 집안의 사람이었지만 같은 동네에서 자랐다. 귀차르디니의 저택과 마키아벨리의 연립주택이 속한 교구는 산타크로체성당 구역이다. 같은 성당에서 세례를 받은 이웃사촌이었다. 마키아벨리가 1469년생이고 귀차르디니가 1483년생이니 나이 차가 14살이다. 그러나 나이와 신분의 차이를 넘어 평생 절친한 친구 사이를 유지했다.

 

귀차르디니의 대부(Godfather)는 학자인 마르실리오 피치노(Marsilio Ficino, 1433∼1499). 그는 코시모 데 메디치가 15세기 후반에 창설한 아카데미아 플라토니카(Academia Platonica)를 이끌던 당대 최고의 철학자였다. 피치노가 귀차르디니의 대부였다는 것은 귀차르디니의 집안이 처음부터 친()메디치 가문으로 출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귀차르디니가 처음부터 끝까지 메디치 가문을 위해 일하던 충복이었다는 점은 마키아벨리와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마키아벨리는 메디치 가문 때문에 공직에서 쫓겨났고 체포를 당해 혹독한 고문까지 받았다. 14년 동안 실업자로 생활하기도 했다.

 

귀차르디니는 법률공부를 시작으로 공직으로 나가는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페라라대와 파도바대에서 법률을 공부한 뒤 고향에 돌아와서 피렌체대에서 법률을 가르치는 교수가 됐다. 23살 때다. 그의 아내는 명문 살비아티 가문의 마리아 살비아티(Maria Salviati)였다. 살비아티와의 결혼(1508)은 귀차르디니의 운명을 최종적으로 결정짓는 계기가 된다. 살비아티 가문은 피렌체에서 친메디치 가문을 대표하는 집안이며 메디치 가문의 사돈이기도 했다. 당시 피렌체는 메디치 가문의 1차 몰락(1494) 이후 공화정 정부가 집권하고 있었고 이 공화정 정부의 외교와 군사업무를 담당하던 제2서기장이 바로 마키아벨리였다. 마키아벨리가 메디치 가문의 눈 밖에 난 것은 자업자득인 측면도 있다. 메디치 가문을 몰아내고 집권한 공화정 정부의 고위관리였으니 메디치 가문이 마키아벨리를 좋게 볼 리 없었다. 그러나 귀차르디니는 달랐다. 처음부터 줄을 잘 섰다고 할까? 명문가에 태어나서 메디치 가문 학자의 가르침을 받았다. 또 메디치 가문의 사돈 집안에 장가를 들었으니 메디치 가문의 사람들은 귀차르디니를 결코 귀찮게 여기지 않았다.

 

1512년은 귀차르디니 생애의 전환점이었다. 젊의 나이에 스페인 대사로 파견됐다. 피렌체의 외교를 실무적으로 총괄하던 마키아벨리와 귀차르디니가 처음으로 이 시기에 만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젊은 외교관 귀차르디니는 아라곤왕국 궁정에서 권력의 속성을 관찰하고 외교적 이익을 위해 속임수를 밥 먹듯이 쓰는 아라곤왕국의 왕 페르디난드의 모습에서 통치술의 이면을 봤다. 귀차르디니의 글을 보면 어떤 구절에서는 마키아벨리보다 더마키아벨리적인 주장을 펼칠 때가 있다. 귀차르디니는 마키아벨리의 <로마사 논고>가 지나치게 낙관적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 세상 어떤 국가나 철학자의 사상이 절대화될 수 없고 로마도 완벽하지 않으니 마키아벨리가 로마에서 역사적 교훈을 얻으려는 것은 유치한 짓이라는 주장이다. 모든 힘의 역학 관계를 상대적으로 보는 것은 마키아벨리의 핵심 사상이다. 그런데 귀차르디니가 오히려 마키아벨리를마키아벨리적으로 공격했다는 사실이 많은 학자에게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마키아벨리의 사상이 귀차르디니에게 영향을 끼쳤는지, 아니면 반대로 귀차르디니의 사상이 마키아벨리에게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학문적 논쟁이 벌어질 정도였다.1

 

한편 스페인 궁정에서 현실 정치에 눈을 뜨고 있던 귀차르디니에게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피렌체 군대가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사주를 받은 스페인 군대에게 함락되고 피렌체 공화정이 붕괴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동안 이탈리아와 유럽을 떠돌던 메디치 가문의 사람들이 피렌체로 귀환해 다시 권력을 잡았다. 이듬해인 1513년 메디치 가문 출신의 조반니 데 메디치가 교황 레오 10세로 취임한다. 갑자기 메디치 천하가 도래했다. 귀차르디니는 급히 피렌체로 귀국했고 바로 메디치 정권의 공직에 등용됐다. 메디치 가문을 도와서 피렌체를 통치할 고급 인력들이 부족한 판에 사돈 집안의 똑똑한 젊은이를 메디치 가문이 그냥 놓아둘 리 없었다. 1515년 귀차르디니는 피렌체의 최고 권력 기관인 시뇨리아(Signoria)의 멤버가 되면서 마침내 출세가도에 들어서게 된다.

 

메디치 가문이 복권되고 귀차르디니가 공직의 탄탄대로에 들어설 즈음 마키아벨리는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공화정 붕괴 이후 공직에서 쫓겨난 마키아벨리는 험악한 고문까지 받은 끝에 산탄드레아의 시골집에서 유폐생활을 시작했다. 가난과 고독 속에서 <군주론> <로마사 논고>를 집필하던 시기다. 친구 한 명은 권력 정점에 서있었고 또 다른 친구 한 명은 권력의 횡포에 신음하며 절망의 나락에서 버둥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행운과 불행의 여신이 두 명의 친구를 다시 만나게 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교황 레오 10세는 사돈인 귀차르디니를 레지오(Reggio)와 모데나(Modena)의 지방 장관으로 임명했다. 교황을 대신해 이 지역을 통치하는 최고 관직에 오른 것이다. 이 시기에 교환된 귀차르디니와 마키아벨리의 서신은 둘 사이가 얼마나 친밀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흉허물 없이 시대의 난제에 대해 의견을 나누다가 뜬금없이 찐한 농담을 주고받는 유쾌한 벗의 관계가 됐다.2

 

레오 10세의 뒤를 이은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역시 메디치 가문 출신이었다. 연이어 두 명의 메디치 교황이 탄생하니 피렌체의 행정관들은 교황령 영토의 행정관을 겸직하는 일이 많았다. 메디치 가문의 신하들은 피렌체뿐만 아니라 교황령인 로마냐(Romagna)의 영토도 관리해야 했다. 이 일을 다시 귀차르디니가 맡았다. 1523년 귀차르디니는 전체 로마냐 지방의 총독으로 부임했다.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최측근 참모였던 귀차르디니는 꾸준히 마키아벨리 사면 운동을 펼쳤다. 클레멘스 7세가 마키아벨리에게 <피렌체사> 집필을 의뢰한 것도 귀차르디니의 끈질긴 설득 때문이었다. 1526 14년 동안 실업자로 살던 마키아벨리에게피렌체 성벽 관리 위원회 위원장의 공직이 부여된 것도 귀차르디니의 끈질긴 구명 운동 덕분이었다. 마키아벨리는 말년에 친구 덕을 톡톡히 봤다. 마키아벨리는 귀차르디니의 군사 고문관이 됐다.(1527) 국제 정세를 파악하고 조약체결 등 외교적 담판이 필요할 때는 모든 가능성을 고려해서 최종문안을 조언해주는 참모의 역할을 맡았다.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최측근 참모가 귀차르디니였다면 귀차르디니의 최측근 참모는 바로 마키아벨리였다. 두 사람은 우유부단한 성격을 가진 교황을 보좌하면서 역사적 시련과 마주하고 있었다. 1527년 봄은 스페인의 카를 5세가 교황과 프랑스를 굴복시키기 위해 독일 용병을 앞세워 이탈리아로 진격하던 위태로운 시기였다.

 

스페인 군대와 독일 용병 부대는 교황의 고향인 피렌체를 공략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로마를 치기 전 제2의 로마인 피렌체를 함락시켜서 교황의 기를 꺾겠다는 의도였다. 귀차르디니와 마키아벨리뿐만 아니라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도 피렌체는 로마보다 소중한 곳이었다. 로마는 성 베드로가 순교당해 묻힌 땅이지만 피렌체는 자신들의 조상이 뼈를 묻은 곳이며 후손들이 대대손손 살아가야 할 미래의 땅이다. 귀차르디니와 군사고문관 마키아벨리는 황급히 로마냐의 군대를 몰아 고향 수호를 위해 진격했다. 그런데 스페인 군대는 갑자기 피렌체 점령 계획을 중단하고 공격의 방향을 남쪽으로 돌렸다. 교황이 있는 로마를 직접 공격하겠다는 대담한 발상을 한 것이다. 로마가 고트족이나 반달족과 같은 이민족에 의해 유린당한 적은 있지만 가톨릭 신앙을 가진 스페인 군대에게 공격을 받으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당황한 귀차르디니와 마키아벨리의 군대는 서둘러 스페인의 군대 뒤를 따라 붙었지만 이미 때를 놓쳤다. 아무런 대비책을 준비하지 않았던 교황청의 군대는 느닷없는 스페인의 공격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산탄젤로성으로 대피한 교황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스위스 출신의 호위병들이 목숨을 걸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마침내 로마는 함락됐고 패전의 책임을 지게 된 군사고문관 마키아벨리의 마음도 함께 무너졌다.

 

한 번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패잔병이 된 귀차르디니의 군대는 자진 해산했고 마키아벨리는 친구 귀차르디니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두 친구는 오랜 포옹을 함께 나누고 이별의 눈물을 훔쳤다. 로마에서 피렌체까지 패잔병의 모습으로 먼 길을 걸어가야 할 마키아벨리는 몸과 마음이 모두 쇠잔해짐을 느꼈다. 급격히 나빠진 건강 때문에 마키아벨리는 기력을 차릴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집으로 돌아온 마키아벨리는 친구 귀차르디니에게 마지막 편지를 쓰기로 결심했다. 마키아벨리는 피렌체로 돌아가는 길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 왜 어떤 사람은 승자가 되고, 또 어떤 사람은 패자가 되며, 행운의 여신은 왜 어떤 사람에게 미소를 보내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싸늘한 냉소를 보내는지 알고 싶었다. 죽음의 문턱에 도달한 마키아벨리가 귀차르디니에게 쓴 마지막 편지는 이렇게 시작된다.

 

 

 

귀차르디니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

 

귀차르디니, 나의 친구여, 자네가 내 편지를 귀찮게 여기지 말기를 바란다네. 전쟁이 끝났다고 우리 관계가 끝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내게 남은 게 뭔가? 지금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인가? 친구인 자네 외에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네. 자네와 눈물의 작별을 하고 난 후 나는 로마에서 피렌체까지 걸어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네. 늘 생각에 잠기는 것은 내가 가진 고약한 습관이기도 하고 자네가 내게 항상생각 좀 그만하라고 다그치던 걸로 봐서 내가 얼마나 골똘히 생각하면서 피렌체까지 걸어 왔는지 자네도 짐작이 될 걸세.

 

패잔병에게 무슨 고향으로 돌아갈 말()이 주어졌겠나? 스페인 놈들이나 무지막지한 독일 놈들이 혹시 해코지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누가 내게 말을 준다고 해도 사양했을 것이네. 전쟁의 끝 무렵이 제일 무서운 법이라네. 전리품을 노리는 스페인 놈들과 독일 놈들이 사소한 시비에도 창칼을 휘두르는데 어찌 말을 타겠는가? 평소 우리가 피렌체와 로마를 오갈 때 이용하던 대로를 피해서 시골 길을 돌아서 왔다네. 카시아 가도(Via Cassia)를 타기에는 너무 위험한 것 같았다네. 우리 이탈리아의 선조들이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 닦아 놓은 대로를 이제 외국 놈들이 차지하고 있으니 정말 분통이 터졌지만 어쩌겠나? 우리는 전쟁에서 졌고 한심한 우리들의 교황 성하께서는 산탄젤로성에서 벌벌 떨고만 계시지 않았나?

 

그 먼 길을 걸어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옛날 생각을 많이 했다네. 한때는 그 길을 멋진 말을 타고 잽싸게 달렸지. 자네가 피렌체 공직에 오르기 전의 일이라네. 난 그때 우리 시대의 영웅이었던 체사레 보르자를 따라다니기도 했고 기도하는 모습보다 칼을 휘두르는 모습이 더 어울렸던 교황 율리우스 2세를 따라 다니기도 했지. 그때가 좋았다네. 그때 사람들은 나의 존재를 감히 무시하지 못했지. 그러나 이제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자네와 난 패잔병이 돼 이별해야만 했고 내가 걸어가야 할 먼 길은 슬픔과 후회로 가득 했을 뿐이라네.

 

내 나이 이제 오십여덟이라네. 자넨 올해 몇인가? 우리가 14살 차이가 나니 자네는 올해 마흔네 살이구먼. 아직도 사십대인 자네의 젊음과 그 젊음의 가능성이 부러울 따름이라네. 내가 자네 나이라면 장가도 한 번 더 들 만큼 기력이 남아 있을 텐데! 아쉽지만 나는 이제 마지막 이별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병든 늙은이가 아닌가. 내가 죽기 전에 자넬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게 되려나?

 

쓸데없는 넋두리를 집어치우고 다시 길 이야기로 돌아가세. 난 힘들게 고향을 향해 길을 걸었다네. 이전에 말을 타고 갈 때는 금방이었는데 처음으로 걸어서 고향으로 가려니 너무 힘이 들었지. 내가 로마냐 총독이자 교황군 사령관인 자네의 직속 참모라는 사실을 숨겨야 했기에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대화도 할 수 없었다네. 자네가 알다시피 나는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타고난 성품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혼자서 고독을 씹으며 먼 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려니 내 신세가 처량하기도 하고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네.

 

그렇다고 지난 58년의 내 인생을 후회만 한 것은 아니라네. 부끄러운 것도 많았고 아쉬운 일도 많았지만 그래도 내가 누군가? 천하의 마키아벨리가 아닌가? 한때는 피렌체의 제2서기장이었고 메디치 가문을 위해 <군주론>도 썼으며 루첼라이 정원의 젊은이들에게 로마시대의 교훈을 가르치던 선생이었지 않은가? 내가 쓴 코미디 <만드라골라> <클레지아>는 또 어떤가? 저 멀리 영국 섬나라에서 셰익스피어란 작가가 비극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던데 이탈리아에서는 내 코미디가 대박을 터트렸던 것을 자네도 기억하지?

 

그런데 말이야, 길을 걸으며 곰곰이 생각한 것인데 말이지 코미디 작가인 나 마키아벨리가 자칫하면 코미디 같은 운명을 겪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네. 사람들이 나를 오해하고 곡해해서 내 생각과 전혀 다른 나의 모습을 마키아벨리라고 착각하는 정말 웃지 못 할 일이 펼쳐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네. 바로 <군주론> 때문이지. 사람들은 내가 심혈을 기울여 쓴 <로마사 논고> <피렌체사>를 읽지 않을 것이 뻔해. 왜냐하면 이 두 책의 내용이 너무 어렵거든. 독자들이란 모름지기 읽기 쉽고 이해하게 쉽고, 그래서 한 번 읽은 뒤에 쓰레기통에 버려도 될 만한 책을 좋아하기 마련이라네. 도통 복잡한 생각을 요구하는 책은 안 팔리기 마련이야. 내가 쓴 <로마사 논고> <피렌체사>는 내용도 어렵거니와 책의 두께도 상당하지 않나. 그렇다 보니 미래의 내 독자들은 내가 단숨에 쓴 한 편의 짧은 에세이에 불과한 <군주론>을 읽고 내 생각을 가늠하겠지. 그러고는 이렇게 큰소리 칠거야. “마키아벨리라는 놈은 정말 위험한 생각을 했군.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권모술수를 부려야 한다고? 이런 비열한 통치술을 가르치다니, 이제부터 이놈을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현자라고 불러야겠군!”

 

귀차르디니, 나의 친구여, 난 정말 억울하다네. 자네가 알다시피 난 그런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내가 언제 자네에게 권모술수를 부리라고 조언했었나? 내가 언제 약자들의 숨통을 조르라고 가르쳤단 말인가? 난 내 힘으로는 쥐새끼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하는 사람이라네. 알다시피 내가 <군주론>을 쓴 이유는 따로 있었지. 그런데 미래의 독자들은 <군주론>의 진짜 의도를 모른 채 내 책으로부터 엉뚱한 교훈을 받게 될 거야.

 

자네가 허락한다면 <군주론>에서 진짜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을 자네에게 솔직히 털어놓겠네. 정말 이제는 말할 수 있다네. 죽음의 그림자가 내 앞까지 다가왔는데 못할 말이 어디 있겠으며 밝히지 못할 비밀이 어디 있겠나? 내가 더 이상 무엇을 주저하겠으며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죽음은 신이 모든 인간에게 부여한 최대의 선물이지. 모든 인간은 죽기 때문에 유한한 존재이고, 그래서 이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다네.

<군주론>의 비밀도 이제는 풀려야 할 때라고 생각하네. 그렇지 않으면 통치술을 연구하는 많은 미래의 학자들이 날 오해하게 될 걸세. 아니면 책을 팔아 생계와 명성을 유지하는 글쟁이들이 내 이름을 도용하게 될 거야. 마키아벨리가 어땠다고 하면서 날 나쁜 놈으로 몰아가겠지? 친구여, 이제부터 나의 솔직한 편지를 고대해 주게나. 내일 아침, 내가 눈을 떴을 때 펜을 잡을 만한 기력이 남아 있기를 바란다네. 그럼 난, 멀리 떨어져 있는 자네에게, 마지막 남아 있는 기력을 모아 <군주론>의 비밀을 풀어 주겠네. 친구여, 부디 내일을 고대해 주게나.

 

 

 

마키아벨리의 추신

 

추신: 로마에서 피렌체로 돌아올 때 잠시 피사(Pisa)엘 들렀다네. 피사! 정말 골치 아픈 곳이었지. 내 공직 생활의 반은 피사 문제 때문에 날아갔고 그 도시와의 전쟁 때문에 정말 골머리를 앓았지. 이 피사 놈들이 반란만 일으키지 않았어도 우리 피렌체가 그렇게 굴욕적으로 프랑스의 힘에 의존할 필요가 없었는데 말이야. 내가 공직에 있을 때 프랑스 출장을 네 번이나 다녀온 것도 다 피사 문제 때문이었다네. 하여튼 피사는 지금도 피렌체의 골칫덩이임에 분명하다네.

 

난 피사에서 그동안 처리하지 못했던 몇 가지 문제를 해결했다네. 내가 고향으로 돌아가면 경제 사정이 나빠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내 돈을 떼어 먹었던 놈들을 찾아가 끈질기게 변제를 요구했다네. 다행이 푼돈이었지만 두 명으로부터 그동안 받지 못했던 채무를 보상받았지. , 기분이 좋아 피사 항구에서 선술집에 들렀다네. 검은 밤이었지만 마침 보름달이 휘영청 밝아 멀리 바다 위에 떠있는 갤리선도 보였다네. 나는 곧 고향 피렌체로 돌아갈 생각을 하면서 밤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네. 방금 마신 포도주 기운 탓인지 온갖 생각이 머리에서 맴돌고 있었지. 그러다가 갑자기 오디세우스 생각이 났다네. 호메로스가 쓴 책 <오디세이아>의 주인공, 오디세우스 말이야. 그도 고향 이타케로 돌아가기 위해 10년 동안이나 거친 파도와 싸우지 않았나? 검은 파도가 넘실대는 밤바다를 보다가 문득 내가 오디세우스가 된 기분이 들더라고. 나도 고향으로 돌아가는 신세였으니 말이야. 그래서 시를 한 수 지었다네. 이것을 자네에게 추신의 내용으로 바치네. 앞으로 당도할 나의 편지를 귀찮게 여기지 말라는 뜻으로 정성스럽게 썼지만 사실은 나와 자네를 위한 격려의 말이기도 하지. 귀차르디니, 나의 친구여. 늙은 벗의 시를 한 번 읽어봐 주게나.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는 늙은 친구 마키아벨리가 오디세우스에 빗대어 쓴 시라네. 늙은 오디세우스의 고백이지만 사실은 자네와 내가 가야할 길이기도 하지.3

 

 

“중지한다는 것, 얼마나 따분하고,

일이 없어 끝난다는 것,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사용하지 않아 녹슬어 빛을 잃어버리는 것,

얼마나 슬픈 일인가?

숨만 쉬는 것이 과연 인생인가?

해야 할 일이 태산인데,

남아 있는 시간이 너무 부족하고,

내게 남아 있는 삶도 너무나 짧구나!

 

저기 항구가 보인다. 돛에 바람이 가득하다!

저 검은 바다를 보라,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보라!

나의 동료 선원들이여,

나와 함께 고난을 견디며, 열심을 다했고,

함께 고뇌했던 동지들이여!

나도, 당신들도, 모두 이제는 늙어가고 있다.

비록 우리 늙어가고 있지만

추구할 명예는 남아 있는 법,

죽음이 우리 모두를 삼켜버릴 테지만,

끝내야 할 고귀한 임무가 아직 우리에게 남겨져 있지.

 

, 나의 벗들이여, 이제 떠나세!

더 늦기 전에, 새로운 세상을 찾기 위해!

육지에 정박된 배를 바다로 끌어내리고

일렬로 앉아 힘차게 노를 저어 앞으로 전진하세.

해가 지는 석양을 향해 배를 저어 가세,

서쪽 하늘에 뜬 별이 바닷물에 잠기는 그곳을 향해,

내 목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그 파도에 우리가 휩쓸려가게 될지도,

혹시 행복의 섬 자락에 닿게 될지도,

많은 것을 잃게 될지도 모르지만,

남아 있는 것도 적지 않으니,

 

하늘과 땅 끝을 뒤흔들던 옛날처럼

비록 우리 기력이 왕성하지 않지만!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아닌가?

영웅의 기개를 가진 우리는 하나,

세월이 흘러 비록 몸은 약해졌지만,

기개만은 아직도 예전처럼 강건하거늘!

힘써 싸우고, 추구하고, 찾아 나서세!

절대로 굴복만은 하지 말고!”

 

 

김상근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 skk@yonsei.ac.kr

필자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립대 및 에모리대에서 석사 학위를,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 ㈜SK케미칼 고문도 맡고 있다. <르네상스 창조 경영>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 10여 권의 책을 냈다. 르네상스 시대의 창조적 영감을 현대적 언어로 재해석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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