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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와이번스

막강한 지도력과 전폭적 지원…野神 김성근, 인천야구를 살리다

김홍석 | 120호 (2013년 1월 Issue 1)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한 김응룡 당시 삼성 라이온즈 감독은 인터뷰에서 상대였던 LG트윈스의 사령탑 김성근 감독에 대한 질문을 받자마치 야구의 신과 경기하는 줄 알았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감독생활 20년 만에 개인 통산 10번째 우승을 확정한 당대 최고 프로야구 감독이 남긴 이 말은 지금까지도 야구계에서 회자된다. 그때부터 김성근 감독의 별명은야신이 됐다.

 

하지만 2002년을 끝으로 김성근 감독은 프로야구계에서 한동안 자취를 감춰야만 했다. 구단 프런트와의 불편한 관계 때문에 준우승을 차지하고도 재계약에 실패한 탓이다. 심지어 불러주는 다른 구단도 없었다. 김성근 감독이 다시 야구계로 돌아오는 데는 5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그를 영입한 팀은 인천을 연고로 하는 SK 와이번스였다. 김성근의 복귀는 인천야구의 부흥을 알리는 신호탄이 됐다. 이후 4년간 그는 자신이야구의 신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다는 것을 결과로 증명했다. 이 같은 성과 뒤에는 김성근 감독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보고 현장에 복귀시킨 것은 물론 인천 야구팬들의 응원을 이끌어내기 위해 다양한 아이디어로 노력한 와이번스 구단이 있었다.

 

인천 야구의 암흑기와 유목민이 된 야구팬들

인천은 우리나라에서 야구를 처음 받아들인 도시다. 아마 야구가 유행하던 시절에도 인천은 그 열기의 선봉에 있었다. 하지만 프로야구 시대가 열린 후 인천의 야구팬들은 유독 가슴 아픈 일들을 많이 겪어야만 했다.

 

1982년 프로야구가 개막할 당시 인천을 연고로 창단된 팀은 그 이름도 유명한삼미 슈퍼스타즈였다. 프로 원년에 188리라는, 아직도 깨지지 않은 굴욕적인 승률을 남긴 삼미는 3년 동안 꼴찌만 2번 기록한 후청보 핀토스로 이름이 바뀌었다. 성적만 놓고 보면 청보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삼미와 마찬가지로 3년 내내 최하위권을 전전했고 결국 3년 만에 팀이 매각됐다. 1988년부터태평양 돌핀스가 인천을 대표하는 팀이 됐다. 창단 첫해, 태평양은 당연하다는 듯 최하위에 머물렀다. 프로야구 개막 후 7년 동안 인천을 연고로 한 팀이 무려 5번이나 꼴찌를 기록한 것이다.

 

3번째 팀도 별 수 없다고 느낀 인천 야구팬들의 실망이 이만저만 아니었던 그때, 김성근 감독이 태평양의 신임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리고 1989년 태평양은 7개 팀 중 3위를 차지하며 인천 연고팀으로는 사상 처음으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준플레이오프에서도 삼성을 상대로 2승 무패로 승리하는 등 전년도 최하위 팀답지 않은 경기력으로 돌풍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듬해 다시 5위로 떨어지면서 김성근 감독이 팀을 떠났다. 그리고 모 기업의 재정난으로 태평양은 1995년을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96년 현대그룹이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해서현대 유니콘스를 창단했다. 현대는 그룹 차원에서 야구단에 엄청나게 투자했고 인천 팬들의 기대감도 고조됐다. 현대는 창단하자마자 첫 시즌에 정규시즌 4위를 차지했다. 2년 후인 1998년에는 정규시즌과 한국시리즈를 모두 석권하며 인천 야구팬들에게 사상 첫 우승의 기쁨과 감격을 선물했다. 인천 야구팬들은 삼미-청보-태평양의 전통을 이으며 강팀으로 거듭난 현대 유니콘스를 사랑했고 이제는 강팀의 팬이 됐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졌다. 그러나 행복한 순간은 잠시였다. 2000 1, 현대 유니콘스가 서울로의 연고지 이전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야구위원회(KBO)는 재정난에 시달리던 쌍방울 대신 SK그룹을 프로야구에 끌어들이려 하고 있었는데 SK가 내건 조건이서울 연고지였다. 현대 구단이 강하게 반발했다. 현대는 프로야구에 참여할 때부터 KBO가 향후 서울로의 연고지 이전을 약속했다고 주장했다. 오랜 협상 끝에 SK가 인천을 연고지로 받고 현대는 서울로 이전하기로 결론이 났다(서울로 이전하기까지 수원을 임시 연고지로 했다). 인천을 연고지로 하는 새로운 프로야구팀 ‘SK 와이번스는 이런 산고를 겪고 탄생했다.

 

인천 팬들은 현대 측 계획에 강하게 반발하며 연고지 이전 반대에 나섰지만 끝내 외면당했다. 팬들의 실망은 매우 컸다. 자신들을 버리고 간 현대를 응원할 수도 없었고 새로 만들어진 SK를 응원하고 싶지도 않았다. SK는 삼미-청보-태평양의 계보를 잇지 않은 정체성이 모호한 팀이었다. 인천 팬들은 새로운 팀에 정을 주지 못하며 야구와 멀어졌고 이는 SK 구단이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았다.

 

이런 이유로 창단 당시 SK팬 없는 팀으로 유명했다. 신생 팀답게 성적도 나빴다. 2000년 당시 인천의 야구팬들은 응원하던 팀이 수원으로 떠나는 모습과 새롭게 둥지를 튼 팀이 꼴찌로 내려앉는 모습을 동시에 지켜봐야 했다. 게다가 현대 유니콘스는 그해 가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거머쥐며 인천 야구팬들을 한층 더 서럽게 했다.

 

그래도 SK구단은 실망하지 않고 끊임없는 투자에 나서며 도약을 꾀했다. 2002년 지금의 문학구장이 문을 열었다. 2003년에는 인천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포수 박경완이 FA(Free Agent) 계약을 통해 현대에서 SK로 이적했다. 현대의 상징과도 같았던 박재홍도 트레이드를 통해 2005년부터 SK 유니폼을 입었다. 팀 성적도 조금씩 나아졌다. 2001 7, 2002 6위를 거쳐 2003년에는 정규시즌 4위를 차지하며 창단 이후 처음으로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했다. 2005년에도 3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성과를 냈다.

 

하지만 이런 선전에도 불구하고 3만 명이 관람할 수 있는 문학구장은 경기마다 70% 이상 텅텅 비어 있었다. 창단 첫해였던 2000년 당시 SK의 홈경기 한 해 총관중은 84000여 명에 불과했다. 경기당 평균 관중은 1281명뿐이었다. 이는 전년도 현대가 동원했던 관중보다 64%나 적은 숫자였다. 한번 돌아선 팬들의 발길은 좀처럼 야구장으로 향하지 않았다. 인천을 품기 위한 SK구단의 노력은 번번이 허사로 끝났다.

 

그래도 SK구단은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변화를 시도했다. 특히 2006 시즌이 끝난 후 SK구단은 대대적으로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며 전면적 개혁에 나섰다. 구체적 움직임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다른 구단에서 은근히 꺼려했던 김성근 감독을 신임 감독으로 영입해 선수단 운영에 대한 전권을 위임하기로 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스포테인먼트(Sportainment)’라고 불리는 새로운 팬 밀착형 마케팅을 도입하기로 한 것이었다. 이 두 가지가 합쳐지면서 인천에야구 르네상스 시대가 활짝 열렸다. SK 와이번스 구단과 인천 야구의터닝포인트(Turning Point)’가 마침내 찾아온 것이다.

 

변화와 개혁의 시작

사실 김성근 감독의 영입은 SK구단 입장에서도 일종의 모험에 가까웠다. 당시 김성근 감독에 대한 평가는 긍정과 부정이 공존했다. 지옥훈련과 탁월한 투수교체 타이밍으로 팀의 성적을 끌어올려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작 14년 동안 프로 1군팀을 지휘하면서 단 한번도 우승을 차지하지는 못했다는 것이 약점으로 지적됐다. 최하위권팀을 중위권으로, 중위권 팀을 상위권으로 올려놓는 능력은 인정받았으나 1등을 차지할 만한 실력은 아니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무엇보다도 여러 구단들이 그를 고용하는 일을 망설이게 했던 것은 김성근 감독의 고집이었다. 조직적으로 보면 구단 사장과 감독은 수직적 관계다. 하지만 김성근 감독은 사장을 비롯한 구단 프런트가 현장에 일절 관여하지 않기를 바랐고 사장과 감독 사이의 관계는 수직적이 아니라 수평적이어야 한다고 여겼다. 감독이 선수단 운영에 전권을 가져야만 현장에서 최고의 성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SK는 김성근 감독의 요구를 100% 받아들였다. 2006년 말 김성근 감독과 계약하면서 선수단 운영과 관련해 모든 권한을 위임하겠노라고 약속했다. 이는 SK구단의 수뇌부가 당시 팀 상황을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데서 비롯됐다. 성적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지만 강한 모멘텀이 부족했고 팬들의 응원은 좀처럼 늘지 않았다. 또한 LG나 롯데 등 프런트 압력이 강한 구단이 좀처럼 우승하지 못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프런트와 현장이 분리돼야 한다는 김 감독 생각에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당시 SK는 우승을 노리는 팀이 아니었다. 일단 중하위권을 오르내리는 팀 전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사령탑이 필요했다. SK구단 수뇌부는 김성근 감독이 그 역할의 적임자라고 판단했다. 이런 이유들이 모여 현장에 일절 간섭하지 않고 선수 개개인에게 접촉하는 일도 최소화하겠다는 파격적인 약속으로 이어졌다. 그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김성근 감독은 부임 첫해인 2007년 곧바로 SK를 정규시즌 1위로 이끌었다. 한국시리즈에서도 치열한 접전 끝에 두산 베어스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인천을 연고로 한 팀으로는 1998년 현대 이후 두 번째였다. 팀을 바라보는 팬들의 시선이 달라졌다. SK의 변화는 한 해로 끝나지 않았다. 2008년에도 정규시즌과 한국시리즈 정상을 차지하며 2연패를 달성했다. 2010년 통산 3번째 우승을 거머쥐었다. 한동안 시선을 돌렸던 인천의 야구팬들이 다시 야구장을 찾기 시작했다. 자존심을 되찾아준 SK구단에 대한 사랑도 시간이 갈수록 커졌다. SK 와이번스는 마침내 명실상부한인천의 팀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라운드의 혁신 - 땀은 배신하지 않는다

‘흘린 땀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노력을 게을리하는 자는 1등이 될 수 없다. 김성근 감독은 그 어떤 감독보다 훈련을 중요시하는 인물이었다. 그만큼 선수들의 훈련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다. 환갑이 훨씬 넘은 노() 감독이 직접 펑고(야수들의 수비 연습을 위해 코치들이 공을 쳐주는 것)를 치는 모습은 SK 야구단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야구계에는타격과 피칭에는 슬럼프가 있지만 발과 수비에는 슬럼프가 없다는 격언이 있다. 타자들의 타격 페이스에는 기복이 있고 아무리 잘 던지는 투수라도 두들겨 맞는 날이 있지만 기동력과 수비력은 그렇지 않다는 뜻이다. 타격과 피칭에는 타고난 재능이 필요하지만 기동력과 수비력은 꾸준한 훈련과 반복학습을 통해 얼마든지 성장시킬 수 있다는 특징도 있다. 김성근 감독은 이점에 착안했다. 공격도 수비도 부족했던 SK를 주루 플레이가 가장 뛰어나며 수비를 잘하는 팀으로 만드는 데 초점을 뒀다. 이렇게 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선수들이 흘린 땀도 엄청났다. 다른 팀들은 보통 시즌 중에는 경기가 시작되기 전에만 몸을 푸는 정도로 가볍게 훈련하지만 김성근 감독은 선수들의 경기력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땐 경기가 끝난 후 야간 훈련도 마다하지 않았다. 어지간해서는 선수들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았다. 매일 강도 높은 훈련이 이어졌다. SK 선수들이여태껏 훈련한 것이 아까워서라도 시합에서 질 수 없다고 할 정도로 김성근 감독의 훈련은 고되고 힘들었다. 선수들은 이를 묵묵히 따랐다. 거듭되는 훈련이 좋은 성적으로 나타나면서 그 혜택이 고스란히 선수들에게 돌아왔기 때문이다. 김성근 감독이 마지막으로 지휘봉을 잡았던 2011년 개막 엔트리 기준으로 SK 와이번스 선수단의 총연봉은 47억여 원으로 8개 구단 중 단연 1위였다. 전체 평균보다 42%나 많은 액수였다. 두 번째로 연봉 총액이 많았던 LG 트윈스와 연봉 차이가 11억 원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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