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검색버튼 메뉴버튼

SK 와이번스

막강한 지도력과 전폭적 지원…野神 김성근, 인천야구를 살리다

김홍석 | 120호 (2013년 1월 Issue 1)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한 김응룡 당시 삼성 라이온즈 감독은 인터뷰에서 상대였던 LG트윈스의 사령탑 김성근 감독에 대한 질문을 받자마치 야구의 신과 경기하는 줄 알았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감독생활 20년 만에 개인 통산 10번째 우승을 확정한 당대 최고 프로야구 감독이 남긴 이 말은 지금까지도 야구계에서 회자된다. 그때부터 김성근 감독의 별명은야신이 됐다.

 

하지만 2002년을 끝으로 김성근 감독은 프로야구계에서 한동안 자취를 감춰야만 했다. 구단 프런트와의 불편한 관계 때문에 준우승을 차지하고도 재계약에 실패한 탓이다. 심지어 불러주는 다른 구단도 없었다. 김성근 감독이 다시 야구계로 돌아오는 데는 5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그를 영입한 팀은 인천을 연고로 하는 SK 와이번스였다. 김성근의 복귀는 인천야구의 부흥을 알리는 신호탄이 됐다. 이후 4년간 그는 자신이야구의 신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다는 것을 결과로 증명했다. 이 같은 성과 뒤에는 김성근 감독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보고 현장에 복귀시킨 것은 물론 인천 야구팬들의 응원을 이끌어내기 위해 다양한 아이디어로 노력한 와이번스 구단이 있었다.

 

인천 야구의 암흑기와 유목민이 된 야구팬들

인천은 우리나라에서 야구를 처음 받아들인 도시다. 아마 야구가 유행하던 시절에도 인천은 그 열기의 선봉에 있었다. 하지만 프로야구 시대가 열린 후 인천의 야구팬들은 유독 가슴 아픈 일들을 많이 겪어야만 했다.

 

1982년 프로야구가 개막할 당시 인천을 연고로 창단된 팀은 그 이름도 유명한삼미 슈퍼스타즈였다. 프로 원년에 188리라는, 아직도 깨지지 않은 굴욕적인 승률을 남긴 삼미는 3년 동안 꼴찌만 2번 기록한 후청보 핀토스로 이름이 바뀌었다. 성적만 놓고 보면 청보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삼미와 마찬가지로 3년 내내 최하위권을 전전했고 결국 3년 만에 팀이 매각됐다. 1988년부터태평양 돌핀스가 인천을 대표하는 팀이 됐다. 창단 첫해, 태평양은 당연하다는 듯 최하위에 머물렀다. 프로야구 개막 후 7년 동안 인천을 연고로 한 팀이 무려 5번이나 꼴찌를 기록한 것이다.

 

3번째 팀도 별 수 없다고 느낀 인천 야구팬들의 실망이 이만저만 아니었던 그때, 김성근 감독이 태평양의 신임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리고 1989년 태평양은 7개 팀 중 3위를 차지하며 인천 연고팀으로는 사상 처음으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준플레이오프에서도 삼성을 상대로 2승 무패로 승리하는 등 전년도 최하위 팀답지 않은 경기력으로 돌풍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듬해 다시 5위로 떨어지면서 김성근 감독이 팀을 떠났다. 그리고 모 기업의 재정난으로 태평양은 1995년을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96년 현대그룹이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해서현대 유니콘스를 창단했다. 현대는 그룹 차원에서 야구단에 엄청나게 투자했고 인천 팬들의 기대감도 고조됐다. 현대는 창단하자마자 첫 시즌에 정규시즌 4위를 차지했다. 2년 후인 1998년에는 정규시즌과 한국시리즈를 모두 석권하며 인천 야구팬들에게 사상 첫 우승의 기쁨과 감격을 선물했다. 인천 야구팬들은 삼미-청보-태평양의 전통을 이으며 강팀으로 거듭난 현대 유니콘스를 사랑했고 이제는 강팀의 팬이 됐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졌다. 그러나 행복한 순간은 잠시였다. 2000 1, 현대 유니콘스가 서울로의 연고지 이전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야구위원회(KBO)는 재정난에 시달리던 쌍방울 대신 SK그룹을 프로야구에 끌어들이려 하고 있었는데 SK가 내건 조건이서울 연고지였다. 현대 구단이 강하게 반발했다. 현대는 프로야구에 참여할 때부터 KBO가 향후 서울로의 연고지 이전을 약속했다고 주장했다. 오랜 협상 끝에 SK가 인천을 연고지로 받고 현대는 서울로 이전하기로 결론이 났다(서울로 이전하기까지 수원을 임시 연고지로 했다). 인천을 연고지로 하는 새로운 프로야구팀 ‘SK 와이번스는 이런 산고를 겪고 탄생했다.

 

인천 팬들은 현대 측 계획에 강하게 반발하며 연고지 이전 반대에 나섰지만 끝내 외면당했다. 팬들의 실망은 매우 컸다. 자신들을 버리고 간 현대를 응원할 수도 없었고 새로 만들어진 SK를 응원하고 싶지도 않았다. SK는 삼미-청보-태평양의 계보를 잇지 않은 정체성이 모호한 팀이었다. 인천 팬들은 새로운 팀에 정을 주지 못하며 야구와 멀어졌고 이는 SK 구단이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았다.

 

이런 이유로 창단 당시 SK팬 없는 팀으로 유명했다. 신생 팀답게 성적도 나빴다. 2000년 당시 인천의 야구팬들은 응원하던 팀이 수원으로 떠나는 모습과 새롭게 둥지를 튼 팀이 꼴찌로 내려앉는 모습을 동시에 지켜봐야 했다. 게다가 현대 유니콘스는 그해 가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거머쥐며 인천 야구팬들을 한층 더 서럽게 했다.

 

그래도 SK구단은 실망하지 않고 끊임없는 투자에 나서며 도약을 꾀했다. 2002년 지금의 문학구장이 문을 열었다. 2003년에는 인천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포수 박경완이 FA(Free Agent) 계약을 통해 현대에서 SK로 이적했다. 현대의 상징과도 같았던 박재홍도 트레이드를 통해 2005년부터 SK 유니폼을 입었다. 팀 성적도 조금씩 나아졌다. 2001 7, 2002 6위를 거쳐 2003년에는 정규시즌 4위를 차지하며 창단 이후 처음으로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했다. 2005년에도 3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성과를 냈다.

 

하지만 이런 선전에도 불구하고 3만 명이 관람할 수 있는 문학구장은 경기마다 70% 이상 텅텅 비어 있었다. 창단 첫해였던 2000년 당시 SK의 홈경기 한 해 총관중은 84000여 명에 불과했다. 경기당 평균 관중은 1281명뿐이었다. 이는 전년도 현대가 동원했던 관중보다 64%나 적은 숫자였다. 한번 돌아선 팬들의 발길은 좀처럼 야구장으로 향하지 않았다. 인천을 품기 위한 SK구단의 노력은 번번이 허사로 끝났다.

 

그래도 SK구단은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변화를 시도했다. 특히 2006 시즌이 끝난 후 SK구단은 대대적으로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며 전면적 개혁에 나섰다. 구체적 움직임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다른 구단에서 은근히 꺼려했던 김성근 감독을 신임 감독으로 영입해 선수단 운영에 대한 전권을 위임하기로 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스포테인먼트(Sportainment)’라고 불리는 새로운 팬 밀착형 마케팅을 도입하기로 한 것이었다. 이 두 가지가 합쳐지면서 인천에야구 르네상스 시대가 활짝 열렸다. SK 와이번스 구단과 인천 야구의터닝포인트(Turning Point)’가 마침내 찾아온 것이다.

 

변화와 개혁의 시작

사실 김성근 감독의 영입은 SK구단 입장에서도 일종의 모험에 가까웠다. 당시 김성근 감독에 대한 평가는 긍정과 부정이 공존했다. 지옥훈련과 탁월한 투수교체 타이밍으로 팀의 성적을 끌어올려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작 14년 동안 프로 1군팀을 지휘하면서 단 한번도 우승을 차지하지는 못했다는 것이 약점으로 지적됐다. 최하위권팀을 중위권으로, 중위권 팀을 상위권으로 올려놓는 능력은 인정받았으나 1등을 차지할 만한 실력은 아니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무엇보다도 여러 구단들이 그를 고용하는 일을 망설이게 했던 것은 김성근 감독의 고집이었다. 조직적으로 보면 구단 사장과 감독은 수직적 관계다. 하지만 김성근 감독은 사장을 비롯한 구단 프런트가 현장에 일절 관여하지 않기를 바랐고 사장과 감독 사이의 관계는 수직적이 아니라 수평적이어야 한다고 여겼다. 감독이 선수단 운영에 전권을 가져야만 현장에서 최고의 성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SK는 김성근 감독의 요구를 100% 받아들였다. 2006년 말 김성근 감독과 계약하면서 선수단 운영과 관련해 모든 권한을 위임하겠노라고 약속했다. 이는 SK구단의 수뇌부가 당시 팀 상황을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데서 비롯됐다. 성적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지만 강한 모멘텀이 부족했고 팬들의 응원은 좀처럼 늘지 않았다. 또한 LG나 롯데 등 프런트 압력이 강한 구단이 좀처럼 우승하지 못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프런트와 현장이 분리돼야 한다는 김 감독 생각에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당시 SK는 우승을 노리는 팀이 아니었다. 일단 중하위권을 오르내리는 팀 전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사령탑이 필요했다. SK구단 수뇌부는 김성근 감독이 그 역할의 적임자라고 판단했다. 이런 이유들이 모여 현장에 일절 간섭하지 않고 선수 개개인에게 접촉하는 일도 최소화하겠다는 파격적인 약속으로 이어졌다. 그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김성근 감독은 부임 첫해인 2007년 곧바로 SK를 정규시즌 1위로 이끌었다. 한국시리즈에서도 치열한 접전 끝에 두산 베어스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인천을 연고로 한 팀으로는 1998년 현대 이후 두 번째였다. 팀을 바라보는 팬들의 시선이 달라졌다. SK의 변화는 한 해로 끝나지 않았다. 2008년에도 정규시즌과 한국시리즈 정상을 차지하며 2연패를 달성했다. 2010년 통산 3번째 우승을 거머쥐었다. 한동안 시선을 돌렸던 인천의 야구팬들이 다시 야구장을 찾기 시작했다. 자존심을 되찾아준 SK구단에 대한 사랑도 시간이 갈수록 커졌다. SK 와이번스는 마침내 명실상부한인천의 팀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라운드의 혁신 - 땀은 배신하지 않는다

‘흘린 땀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노력을 게을리하는 자는 1등이 될 수 없다. 김성근 감독은 그 어떤 감독보다 훈련을 중요시하는 인물이었다. 그만큼 선수들의 훈련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다. 환갑이 훨씬 넘은 노() 감독이 직접 펑고(야수들의 수비 연습을 위해 코치들이 공을 쳐주는 것)를 치는 모습은 SK 야구단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야구계에는타격과 피칭에는 슬럼프가 있지만 발과 수비에는 슬럼프가 없다는 격언이 있다. 타자들의 타격 페이스에는 기복이 있고 아무리 잘 던지는 투수라도 두들겨 맞는 날이 있지만 기동력과 수비력은 그렇지 않다는 뜻이다. 타격과 피칭에는 타고난 재능이 필요하지만 기동력과 수비력은 꾸준한 훈련과 반복학습을 통해 얼마든지 성장시킬 수 있다는 특징도 있다. 김성근 감독은 이점에 착안했다. 공격도 수비도 부족했던 SK를 주루 플레이가 가장 뛰어나며 수비를 잘하는 팀으로 만드는 데 초점을 뒀다. 이렇게 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선수들이 흘린 땀도 엄청났다. 다른 팀들은 보통 시즌 중에는 경기가 시작되기 전에만 몸을 푸는 정도로 가볍게 훈련하지만 김성근 감독은 선수들의 경기력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땐 경기가 끝난 후 야간 훈련도 마다하지 않았다. 어지간해서는 선수들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았다. 매일 강도 높은 훈련이 이어졌다. SK 선수들이여태껏 훈련한 것이 아까워서라도 시합에서 질 수 없다고 할 정도로 김성근 감독의 훈련은 고되고 힘들었다. 선수들은 이를 묵묵히 따랐다. 거듭되는 훈련이 좋은 성적으로 나타나면서 그 혜택이 고스란히 선수들에게 돌아왔기 때문이다. 김성근 감독이 마지막으로 지휘봉을 잡았던 2011년 개막 엔트리 기준으로 SK 와이번스 선수단의 총연봉은 47억여 원으로 8개 구단 중 단연 1위였다. 전체 평균보다 42%나 많은 액수였다. 두 번째로 연봉 총액이 많았던 LG 트윈스와 연봉 차이가 11억 원에 달했다.

 

 

훈련을 많이 시킨다고 해서 김성근 감독이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인물인 것은 아니다. SK는 김성근 감독이 재임하던 시절 구단에 상당히 많은 투자를 했지만 외부로부터의 선수 영입에는 돈을 별로 안 썼다. 이는 김성근 감독의 철학과 맞물린다. SK가 창단한 후 FA 계약을 통한 외부 영입은 2002년 김민재, 2003년 박경완, 2005년 김재현이 전부였다. 김성근 감독 부임 이후에는 외부 FA가 거의 없다. 유일한 예외가 2011 시즌 시작 전 영입한 박진만이다. 한때 국가대표 유격수로 이름이 높았던 박진만은 나이가 들면서 기량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당시 소속팀 삼성에서는 어린 선수와의 주전 경쟁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삼성이 자유계약 선수로 풀어주자 가장 먼저 손을 내민 사람이 김성근 감독이었다. 김성근 감독은 박진만의 능력과 경험을 높이 샀고 팀의 주전 유격수 자리를 맡기며 노장 선수의 부활에 힘을 실어줬다. 재임 기간 내내 김성근 감독은 다른 팀에서 방출당해 은퇴 기로에 서있는 선수들을 선뜻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만의 방법으로 무섭게 훈련시켰다. 박진만이 실전에서 연거푸 실책을 저지르자 경기가 끝난 후 김성근 감독이 손수 500개의 펑고를 치면서 수비 훈련을 시켰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박진만은 그날 두 발로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김성근 감독은 2군 경기를 가장 많이 지켜보는 사령탑 중 한 명이었다. 틈만 나면 2군 경기를 관중석에 앉아서 관람했다. 2군 선수단에게 알리지도 않고 더그아웃에 내려가지도 않았지만 선수들이 그를 몰라볼 리 없다. 감독의 그런 모습이 2군 선수들에게 얼마나 큰 동기부여가 됐을지는 말하지 않아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김성근 감독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차별하지 않았고 2군에 있다고 해서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감독은 선수들에게 또 한 명의 아버지나 마찬가지라는 것이 김성근 감독의 지론이었다. ‘엄한 아버지김성근 감독의 카리스마는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했다.

 

김 감독의 지도 아래 선수들은 주루 플레이와 수비력에서 리그 최고 수준의 기량을 발휘했다. 김광현, 박정권, 정근우, 최정, 정우람, 정대현 등이 김성근 감독의 지휘를 받으며 리그 최정상급 선수로 성장했고 박경완, 박재홍, 김재현, 이호준 같은 노장 선수들은 젊은 선수들과 어우러지며 못 다 펼친 꿈을 마음껏 그려낼 수 있었다.

 

프런트의 혁신 - 그라운드와 프런트의 분리

김성근 감독은 팬들 사이에서나 현장에서나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인물이다. 특히 각 구단 프런트에서 일하는 사람 중에는 아직도 김성근 감독에게 거부감을 갖는 사람이 많다. 김성근 감독은 철저하리만큼 현장과 프런트의 분리를 강조했다. 현장 운영에 전권을 행사하길 원했고 구단 프런트의 간섭을 용납하지 않았다. 코치 인사권은 물론 훈련 일정과 장소 등 팀 운영에 대한 모든 권한을 요구했다. 현장은 철저하게 자신이 책임질 테니 구단은 후방 지원만 열심히 해달라는 식이다. 김성근 감독이 한국시리즈 준우승이라는 업적을 세웠는데도 2002 시즌 종료 후 LG와 재계약에 실패한 것도 이런 부분에서 프런트와 갈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5년이나 야인 생활을 해야 했던 것도 같은 이유다. 각 구단 수뇌부들이 김성근 감독의 영입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구단 운영을 책임지는 경영자들이 현장 운영에 일정 수준 관여하는 것은 프로야구계의 관행이나 다름없었다. 감독 역시 연봉을 받는 피고용인의 입장에서 구단의 간섭을 거부할 수만은 없었다. 하지만 김성근 감독은 그런 간섭에서 자유롭기를 원했다.

 

김성근 감독은 또한돈이 많이 드는 사령탑이었다. 김성근 감독을 영입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상당한 투자를 의미한다. 몸값이 프로야구 최고 수준이기도 했지만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프로야구에서 어느 정도 경력을 쌓은 감독들은 보통 자신과 손발이 잘맞는 코치들을 2∼3명씩 데리고 다닌다. 따라서 한 팀의 감독이 바뀌면 수석코치 등 핵심 보직의 얼굴도 함께 바뀌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한 명의 감독과 그를 보좌하는 일부 코치들을 보통 ‘○○○사단이라고 부른다. 그런데김성근 사단은 그 규모가 달랐다. 다른 감독들이 2∼3명의자기 사람을 요구할 때 김성근 감독은 6∼7명과 함께 움직였다. 김성근 감독이 사령탑으로 있는 팀은 다른 팀보다 항상 코치진 숫자가 많았다. 다른 팀에는 1∼2명 있을까 말까 한 일본인 코치가 SK에는 5∼6명씩 있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김성근 감독이 직접 초빙한 인사들이었다. 이들의 연봉이 한국인 코치보다 높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코치 수가 많고 그중 일본인 코치 비중이 크다는 것은 구단의 연간 운영비용이 대폭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훈련 시간도 돈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프로야구단의 훈련은 크게 3가지로 나뉜다. 시즌 시작 전인 1∼2월에 실시하는 해외 전지훈련, 시즌 중 매일 실시되는 경기 전 훈련, 시즌 종료 후 몸을 풀기 위해 실시하는 마무리 훈련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해외 전지훈련에 상당히 많은 비용이 필요하다. 수십 명의 선수단이 해외에서 체류하는 만큼 프런트에서는 전지훈련에 참여하는 선수들의 숫자나 일정 등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각 구단은 전력에 보탬이 될 만한 선수들만 선발해 50일 안팎으로 일정을 짜서 해외 전지훈련을 갖는다. 하지만 김성근 감독팀은 모든 훈련의 일정 자체가 다른 구단보다 일주일 이상 길었고 출국하는 인원도 훨씬 많았다. 코칭 스태프만 15∼18, 선수들 중에는 매년 50명 이상이 해외로 훈련을 떠났다. 구단의 살림살이를 책임지는 프런트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운 운영방식이 아닐 수 없다. 김성근 감독을 영입한 SK는 다른 구단에 비해 1년에 20∼30억 원의 비용을 더 지출해야 했다. 하지만 SK 구단은 이런 비용을 아끼지 않았다. 현장 운영에 대한 전권을 위임한 것은 물론 김성근 감독이 요구하는 대로 야구단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마케팅의 혁신 - 야구를 모두가 즐기는 엔터테인먼트로

SK 구단 프론트는 현장에서 손을 떼는 대신 마케팅에 심혈을 기울였다. 마음이 떠나 있던 인천 팬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다양한 각도에서 새로운 접근을 시도했다. 김성근 감독 체제가 시작된 2007 SK 구단 프런트는 ‘Fan First! Happy Baseball!’을 팀의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팬 친화적인 마케팅을 선언했다. 지금은 야구가 남녀노소 누구나 즐기는 국민 스포츠로 자리 잡았지만 당시만 해도 야구장은 남성 팬들의 전유물이었다. SK 구단 프런트는 홈구장인 문학구장을팬들이 찾아와 즐겁게 놀고먹을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 대형 놀이공원이나 테마파크와 경쟁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유명 외식업체와 계약을 맺어 야구장을 찾은 팬들에게 다양한 먹거리를 제공했다. 구장 내바비큐 존을 비롯해패밀리 존’ ‘프렌들리 존’ ‘테마 존등을 만들어 다양한 구성원이 함께 야구장을 찾을 수 있도록 기획했다. 여자 연예인을 구단을 대표하는 모델로 선정해와이번스 걸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게 했다. 해당 연예인은 팀의 마스코트가 돼서 각종 행사와 방송에 와이번스 이름을 알렸다. 와이번스 걸이 입는 원피스형 유니폼은 여성 팬들을 대상으로 판매되며 인기를 끌었다. 토요일 홈경기에서는 선수들이 등번호 대신팬사랑이라는 문구가 찍혀 있는 유니폼을 입고 뛰었다. 친환경적 스포츠 문화를 선도하겠다며 때로는 녹색 유니폼을 입고그린 스포츠(Green Sports)’를 외치기도 했다. 이 모든 시도의 중심에 스포테인먼트가 있었다. 스포츠가 단순히 경기와 선수들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즐기는 엔터테인먼트로 거듭나도록 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목표였다.

 

이런 노력은 서서히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문학구장을 찾는 팬들이 점점 증가했다. 2000년 창단 당시 경기당 평균 1281명에 불과했던 홈경기 평균 관중 수는 2007년 들어 사상 처음으로 1만 명을 돌파했다. 2007 526일에는 만원 관중을 자축하는 뜻으로 이만수 당시 수석코치가 속옷 바람으로 그라운드를 돌며 팬들의 박수를 받았다. SK 와이번스가 표방한 스포테인먼트가 실효를 거두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는 그해 팀의 우승으로 한층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2007년을 기점으로 SK의 홈경기 관중은 꾸준히 증가했다. 올해는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100만 관중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6년 전에 비해 223%, 창단 당시인 12년 전과 비교하면 무려 1165%나 늘어난 수치다.

 

새로운 트렌드가 된김성근식 야구와 ‘SK식 마케팅

아쉽게도 2011 8, 계약 만료를 앞두고 김성근 감독과 SK구단은 끝내 이별 수순을 밟고 말았다. 이전 4년 동안 최고의 궁합을 자랑했던 이들의 조합도 영원하지는 못했다. SK구단은 본래 우승까지 기대한 것이 아니었다. 목적은 약팀을 강팀 대열에 올려놓는 것까지였다. 목적을 달성한 구단에서는 더 이상 김성근 감독의 요구를 전부 받아주면서까지 그를 계속 기용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전적인 신뢰와 지원, 그에 부응하는 우수한 성적으로 긴밀함을 유지하던 양자 간 관계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약해지던 차였다. SK구단과 김성근 감독은 2011년을 끝으로 재계약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남긴 업적은 현재 한국 프로야구를 주도하는 트렌드가 돼서 그 명목을 이어가고 있다. 오늘날 프로야구의 각 팀들은김성근식 야구 ‘SK식 마케팅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12년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키워드는투고타저불펜 중심의 야구. 타자들에 비해 투수들의 성적이 월등히 좋아지면서 많은 점수가 나지 않게 됐고 이때문에 각 팀들은 선발투수만큼이나 기량이 우수한 투수들을 불펜에 배치해 경기 후반의 전술 운용에 중점을 둔다. 이처럼 공격보다 수비를 중시하고 투수 운용의 중심을 경기 후반에 두는 것은 모두 김성근 감독 특유의 야구다.

 

와이번스 구단의 적극적인 마케팅 전략도 타 구단에 작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SK의 스포테인먼트 마케팅은 2010그린스포츠 2011에듀 스포테인먼트(Edu Sportainment)’ 등 후속 전략이 등장하며 꾸준히 발전했다. 문학구장의 관중이 점점 늘어나자 다른 구장에서도 이를 모방하는 사례가 속출했다. 사직구장에서는익사이팅 존등 각종 존을 설치했고 롯데 구단은자이언츠 걸을 선정했다. 현재 프로야구계는 그 어느 때보다 각 구단 프런트의 마케팅 전략이 주목받는데 이는 모두 SK의 성공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SK의 스포테인먼트 전략은 21세기 들어 가장 성공한 스포츠 마케팅 사례로 인정받으며 이를 연구하는 학계의 움직임도 활발하다.

 

SK 와이번스의 도약은 세 가지로 압축된다. 능력 있는 감독 및 그 감독이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도록 권한을 확실히 위임하고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은 구단 프런트, 그리고 프로야구를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하며 팬심 잡기에 나선 적극적인 마케팅이다. 이런 요소들이 결합되면서 김성근 감독은야신이라는 별명에 어울리는 경력을 쌓았고 SK 와이번스는 명문 구단으로 도약했으며 유목민 신세였던 인천 팬들은 자부심을 회복했다. 그리고 그들은 한국 프로야구의 새로운 트렌드가 됐다.

 

 

 

김홍석 야구 칼럼니스트 pride-khs@hanmail.net

필자는 부산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2007년부터 야구 전문 블로그(MLBspecial.net)를 운영하고 있다. <프로야구 감열전>이라는 저서에 공동 저자로 참여했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