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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경영

힘 분산한 日, 미드웨이에 침몰하다

임용한 | 57호 (2010년 5월 Issue 2)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미드웨이해전 당시 일본군은 미군에 비해 항공모함의 수와 항공 전력에서 확실한 우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미군에 참패를 당했다. 미군 측에 일본군 암호가 해독돼 사전에 계획이 노출된데다 미군 급강하 폭격기대의 급습을 배겨내지 못한 게 표면적 이유다. 그러나 근본적 패인은 미드웨이해전 자체가 장기적 계획하에 세워진 게 아니라 1941년 진주만 공습 이후 급조된 전략이라는 데 있다. 태평양전쟁 내내 일본군은 이상한 모순을 보였다. 그들의 작전은 용의주도하고 기발하며 혁신적이었다. 그러나 다음 국면에 대한 준비나 장기적 전략은 부실했다. 일본군의 형식주의, 경직되고 융통성 없는 조직 문화가 원인으로 지목된다. 여기에 보신주의, 관료적 책임회피까지 가미되면 장기 계획은 구체성과 방법론이 결여된다. 규정과 형식주의, 경직된 조직문화의 폐단은 이렇게 크고 무섭다.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했을 때 미국을 침공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일본도 자원이 전혀 없는 나라라 태평양의 석유와 고무, 구리 등의 자원이 꼭 필요했다. 그들의 목적은 미국이 태평양에서 손을 떼게 하거나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협상을 맺는 것이었다. 미군이 태평양에서 물러나게 하려면 항공모함을 파괴해야 했다. 미군의 산업력으로 볼 때 1년이나 1년 반이면 항모를 새로 건조하겠지만 그 시간이면 일본은 태평양을 점령하고 요새화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불안한 승리
1941년 12월7일 진주만 공습으로 미군은 10여 척의 함선이 피해를 입거나 침몰했고 180여 대의 비행기가 격추되거나 손상됐다. 미군 사상자 수는 무려 2400여 명에 달했다. 반면 일본군이 이 작전에서 입은 피해는 60여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일본의 진주만 공격은 겉보기와 달리 완전한 실패였다. 원래 파괴를 목표로 했던 항공모함은 정작 항구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단 한 척도 격침하지 못했다. 비행단의 장교들은 항모 격침을 위해 3차 출격을 요청했으나 사령관 나구모 제독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공격을 중단시켰다. 그 바람에 미국 태평양 함대의 항모는 고스란히 살아남았다.
 
다음 단계에서 일본군은 두 가지 실수를 저지른다. 진주만 공격이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은 그들은 승자의 자만심에 빠졌다. 게다가 그들은 다음 단계에 대한 전략이 전혀 준비돼 있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우왕좌왕 논의를 거듭하며 이런저런 전략을 서둘러 계획하게 됐다. 여기에 육군과 해군의 이해관계까지 충돌했다. 병력 부족에 시달리는 육군은 육군병력이 필요한 작전을 무조건 반대했다. 그들이 미드웨이해전을 승인한 이유도 육군이 전혀 필요 없는 작전이었기 때문이다.
 
너무나 교묘한 작전

1942년 6월 일본군이 미드웨이를 침공한 목적은 미국 태평양 함대의 항모를 격멸한다는 오직 한 가지였다. 항모의 수와 항공 전력에서 일본군은 확실한 우세였다. 그런데 여기서 일본군은 이 우세를 전혀 활용하지 못했다. 최신예 항모인 쇼카쿠와 즈이카쿠에 소형 항모인 소호를 뉴기니의 일본군을 지원하기 위해 태평양에 투입했다. 이 항모들은 1942년 5월 미군 함대와 산호해에서 격돌했다. 미군 항모 렉싱턴이 침몰했고 요크타운과 사라토가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일본군은 소호가 침몰했고 나머지 두 척이 손상을 입었다. 이로써 일본 최고 항모 두 척이 미드웨이해전에 참가할 수 없게 됐다. 애초에 항모를 집중 투입했더라면 미군 항모는 전멸했겠지만 일본군은 자신들이 유리하게 됐다고 생각했다. 이제 미군에게 남은 항모는 호넷과 엔터프라이즈 2척뿐이었다. 일본군에게는 7척의 항모가 남아 있었다.
 
일본군은 함대를 둘로 분할했다. 항모 준요와 경함모 소류를 주축으로 하는 5함대는 알류샨 열도를 침공해서 미군의 주의를 분산시킨다. 주력인 1함대와 2함대는 미드웨이로 진행한다. 미드웨이를 함락시키면 하와이에 주둔 중인 미 항모들이 출동할 것이다. 이것을 기다렸다가 요격한다는 것이었다.
 
일본군이 왜 이렇게 힘을 분산시키고 복잡한 작전을 구사했는지는 미스터리다. 알류샨 열도의 미군 전력은 있으나 마나한 수준이었고 다른 곳으로 분산시킬 전력도 없었다. 그런데도 일본군은 쓸데없이 항모 전력 두 척을 북방으로 보냈다.
 
미드웨이 공략작전도 너무 복잡했다. 주력인 나구모의 1함대에는 4척의 항모가 배치됐는데 이 항모의 함재기들은 먼저 미드웨이를 폭격하고 2일 후에 있을 2함대의 상륙작전을 지원한 후 마지막으로 하와이에서 올 미군 항모를 상대하도록 돼 있었다. 그런데 항공모함은 모든 함재기를 동시에 띄울 수가 없다. 작전에 따라 출격시키는 함재기의 종류와 무장도 다르다. 하지만 일본군의 작전은 너무 빡빡했고 여유가 없었다. 만약 미 항모가 하와이에 있지 않고 미드웨이 근처에 있거나 순항 중 우연히 조우하게 된다면 순간 대응력이 크게 떨어질 터였다.
 
그럼에도 일본군은 걱정하지 않았다. 그들이 미군 항모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대책이 있었던 탓이다. 그것은 세계 최대의 전함 야마토였다. 극비리에 제작돼 아무도 정체를 몰랐던 야마토는 한 방에 항공모함을 격침시킬 수 있는 거대한 주포를 가지고 있었다. 미군 항모가 미드웨이에 도착해 양쪽 함재기들이 벌떼처럼 서로 격침 경쟁을 벌이고 있을 때 야마토가 홀연히 등장해 항모를 날려버린다는 복안이었다. 이를 위해 야마토는 주력 함대보다도 뒤에 처져서 몰래 따라오고 있었으며 일본 해군 사령관 야마모토 제독은 이 야마토에 승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바람에 전쟁 지도는 더 복잡해졌다. 드넓은 태평양에서 4개의 함대가 수천 ㎞를 항해해서 시간차 공격을 감행해야 했다.
 
역사를 바꾼 해전
일본군의 계획은 처음부터 어긋났다. 미군은 일본군 암호를 감청해서 미드웨이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항해가 불가능할 줄 알았던 요크타운은 1400명의 기술자들이 철야로 작업을 해 기적처럼 바다에 띄웠다. 항모가 3척이 된 미군은 주력인 나구모의 함대를 노렸다.
 
그래도 아직 승산은 일본군에게 있었다. 일본군 항공기들의 성능은 미군기를 압도했다. 느리고 둔한 미군 폭격기들이 제로기의 호위를 뚫고 항모로 접근하기란 불가능했다. 여기서 다시 몇 개의 운이 미군에게 작용한다.
 
일본군은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함재기에 어뢰를 탑재한 후 미군 함대를 찾기 위해 수색기를 발진시켰다. 그러나 마침 수색기 한 대가 고장이 나서 30분 늦게 출발하게 됐다. 먼저 출격한 수색기가 정찰한 방향에는 미군 함대가 없었다. 미군 함대는 30분 늦게 출발한 수색기의 정찰 지역에 있었다. 일본군은 30분 늦은 정찰기만 빼고 나머지 정찰기들이 미군 함대가 없다고 보고하자 미군이 없다고 단정해버리고 항모 대신 미드웨이 공격을 위해 함재기의 어뢰를 폭탄으로 바꾸게 했다. 이 교체 작업에는 1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30분 뒤 마침내 고장 때문에 뒤늦게 출발했던 정찰기로부터 미군 함대를 발견했다는 연락이 왔다. 그러나 미군 함대라고만 하고 항모가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애매한 보고 탓에 나구모는 폭탄을 다시 어뢰로 교체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를 주저한다.
 
그 사이에 상황이 매우 복잡하게 전개됐다. 소규모 미군 폭격대가 공격을 해왔지만 미군 항공기 성능이 워낙 형편없어서 일본군은 가볍게 격퇴했다. 하지만 서서히 미군 항모가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그때 미드웨이 공습을 위해 출격했던 일본군 공격부대가 돌아왔다. 이들을 착륙시키면서 나구모는 그제야 앞서 폭탄을 달았던 비행기도 어뢰로 다시 교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일본군 항모는 그야말로 난장판이 됐다. 갑판에는 교체하는 폭탄과 어뢰가 수북하게 쌓였다. 안전규정대로면 이렇게 폭탄을 쌓아놓고 하는 작업은 금지였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이때 미군 항모에서 출격한 공격부대가 대대적으로 몰려왔다. 일본군 항모는 어수선했고 호위 항공기를 충분히 발진시킬 수가 없었다. 미군은 결정적 순간을 잡았다. 그러나 아직 승패는 불확실했다. 미군의 뇌격기는 어뢰를 발사하려면 해면으로 낮게 날며 전함으로 접근해야 한다. 둔하고 느려터진데다가 항로예측이 가능해서 제로기와 대공포의 밥이었다. 행여나 사선을 뚫고 항모에 접근해도 어뢰는 불량에 어뢰의 분리스위치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간단히 정리하면 미군의 초반 공세는 완전 실패였다. 뇌격기 조종사들은 성공률 0%의 상황에서 자살공격이나 다름없는 용감한 공격을 감행했지만 모조리 실패했다. 하지만 이 저고도 공격으로 일본군 호위 전투기를 밑으로 끌어내리는 데는 성공했다. 이것이 우연이었는지, 뇌격기 조종사들의 희생을 전제로 한 의도된 작전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의 희생은 보답을 받았다. 일본군이 미군의 공세가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고공에서 던트리스라고 불리는 미군의 급강하 폭격기가 나타났다. 던트리스도 한물간 비행기이긴 했지만 그래도 제대로 공격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비행기였다. 해면으로 수평 비행을 해야 하는 뇌격기와 달리 던트리스는 고공에서 고속으로 급강하했다. 이들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제로기뿐이었다. 그런데 상당수의 호위기들은 재급유를 위해 착륙한 상태였다. 하늘에 떠 있는 제로기들도 뇌격기에 유인돼 낮은 고도에 있었다. 이 시대의 항공기는 출력이 약해 급상승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던트리스 폭격대의 앞길이 무방비 상태로 열려 있었다.
 
미군 조종사들은 신참들이어서 실력이 뛰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항모 갑판에 커다랗게 그려놓은 붉은 일장기가 조종사들에게 표적 역할을 했다. 게다가 갑판에는 연료를 가득채운 항공기와 폭탄, 어뢰로 가득 차 있었다. 단 한 발로도 어마어마한 폭발이 일어났다. 3대의 항모가 침몰했고 일본군 정예 조종사들이 몰살당했다.
 
미군은 요크타운 1척을 잃었다. 살아남은 1척 히류의 함재기들의 공이었다. 히류의 함재기들은 복수심에 불탔고, 요크타운은 비상조치로 끌고 나온 배라 격벽과 장갑은 제대로 복구를 못해 폭격을 배겨내지 못했다.
 
불운에도 원인이 있다
미군이 암호를 탐지하지 못했다면, 나구모의 함대에 그렇게 복잡한 작전을 요구하지 않고 미군 항모 격침에만 주력하게 했어도, 수색기가 고장만 나지 않았어도, 미군 항모가 몇 척인지만 알았어도 항모에 함재기가 가득한 상황에서 공격을 당하는 불운은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우연이었을까? 전쟁에서 예기치 못한 상황과 우연은 일상적으로 발생한다. 즉 우연과 불운은 일상적으로 발생한다. 그래서 항상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한 대응책을 갖춰야 한다. 전력이 앞서는 상황에서 일본군은 그런 가정을 전혀 하지 않고 오히려 앞서는 전력을 너무나 복잡하게 구상했다. 결정적 이유는 힘의 분산이었다. 일본군이 함대를 분산시키지만 않았어도 이 모든 불운보다 더한 불운이 발생했어도 일본군이 승리했을 것이다.
 
약자가 강자와 싸울 때는 다른 방법이 없다. 필사의 각오로 팔, 다리 하나를 잃는다고 하더라도 개의치 않고 오직 상대를 쓰러트린다는 목적 하나에 집중해야 한다. 그런데 아군이 적당히 강하다면 이런 각오로 전략을 짜기가 쉽지 않다. 기왕이면 힘의 우위를 이용해서 희생을 줄이고 좀 더 쉬운 승리를 얻고 싶어 한다. 이 유혹을 이기기란 쉽지 않다. 병사들의 목숨과 피가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승부는 언제나 절체절명의 위기의식을 갖고 설령 내가 우위에 있더라도 4대6으로 밀린다는 각오로 임해야 한다. 알고 보면 그것이 희생을 줄이는 방법이다. 하지만 일본군도 이 함정을 극복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전략을 급조했다는 점이다. 미드웨이해전 자체가 장기적 계획하에 세워진 게 아니라 1941년 진주만 공습 이후 급조됐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지적했다. 태평양전쟁 내내 일본군은 이상한 모순을 보인다. 그들의 작전은 용의주도하고 기발하고 혁신적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꼼꼼한 그들이었지만 다음 국면에 대한 준비, 장기적인 전략은 부실했다. 그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일본군의 형식주의, 경직되고 융통성 없는 조직문화가 원흉일 가능성이 높다. 장기 전략일수록 전망이 불확실하고 단서가 많아진다. 여기에 단기 계획과 같은 기준, 형식을 획일적으로 강요하면 제대로 된 계획을 세우기는 불가능하다. 보신주의, 관료적 책임회피까지 가미되면 장기계획은 ‘태평양 확보’처럼 구체성과 방법론이 결여된 구호로 남게 된다. 규정과 형식주의, 경직된 조직문화의 폐단은 이렇게 크고 무섭다.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과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 등 다수의 책과 논문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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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용한

    임용한yhkmyy@hanmail.net

    - (현)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의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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