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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경영

마라톤 전투: 그들은 달렸을까 뛰었을까?

임용한 | 54호 (2010년 4월 Issue 1)


기원전 490년 마라톤 평원에서 치러진 그리스군과 페르시아군과의 전투는 세상에서 제일 과장된 전투인지도 모른다. 그리스군은 약 1만 명, 페르시아군은 1만 5000∼2만 5000명이었다고 보기도 하고 6000명 미만이었다는 설도 있다. 당시 세계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소규모 지역 분쟁에 불과했던 이 전투가 이처럼 중요해진 이유는 이것이 ‘서구’라는 승자의 역사에 속한 덕분이다.
 
페르시아 지휘관의 졸렬한 리더십
그리스군의 승리는 수백 년, 아니 수천 년간 수많은 연설의 소재가 됐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당시부터 2차 세계대전 때까지 민주주의자들은 마라톤 전투가 민주주의의 힘을 보여줬다고 강조했다. 그들은 이 전투를 독재 체제 또는 파시즘에 대한 민주주의의 승리, 타율적이며 경직된 인간으로 구성된 조직에 대한 자발적 시민 정신의 승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 전투의 승패를 가른 진정한 원인은 페르시아 지휘관의 졸렬한 리더십이었다. 그는 백병전에 대한 자신감이 결여된 경무장 군대를 끌고, 승리를 위한 준비나 계획 없이 전투에 돌입했다. 당시 보병은 그리스군이, 기병은 페르시아군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페르시아군은 기병이 유리한 평원에, 그리스군은 기병이 돌입할 수 없는 계곡 또는 산비탈에 각각 진을 쳤다. 이후 양쪽 군대는 대책 없이 대치를 계속했다. 대치가 계속되면 시간은 홈그라운드인 그리스 편이 된다. 페르시아군이 승기를 잡을 수 있는 길은 그리스군이 자발적으로 페르시아 기병이 기다리고 있는 평원에 뛰어들어와 주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리스군에서 그럴 낌새가 보이지 않자, 페르시아 지휘관은 그리스 중장 보병대(호플라이트)와의 승부를 포기하고, 비무장 상태인 아테네를 공격해 거저먹는 방법을 택했다.
 
페르시아군은 아테네 공격을 위해 주력 부대를 빼돌렸다. 빈 도시를 공격하면서도 겁이 나서인지 기병까지 차출했다. 마라톤 평원에는 경무장 보병만 남았다. 그날 밤 수많은 페르시아군 탈영병들이 그리스 진지로 뛰어들어 “기병대가 떠났다”고 소리쳤다. 일반 사병들도 양군의 장단점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는 증거다. 그리스 역사가는 이들이 페르시아군에 미리 심어놓은 그리스군의 스파이들이라고 했지만, 기병도 없이 그리스 중장 보병대 앞에 홀로 남겨진 경무장 보병 부대원들의 공포감과 배신감이 탈영병을 양산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좀 더 인종주의적이거나 서구 문명에 굉장한 애착을 가진 사람들은 이 사건을 두고 ‘동양에 대한 서양의 승리’, ‘서양의 인종과 문명의 몰락을 막아낸 전투’라며 감동스러워했다. 그러나 페르시아가 승리했어도 페르시아는 이미 과도하게 팽창해 있던 상태여서 더 이상 영토 정복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크로폴리스에 서 있는 파르테논 신전 모양이 조금 바뀌었을지는 모르겠다. 설령 그렇더라도 서양 문명은 몰락하기보다 더 발전했을 가능성이 높다. 파르테논 신전 자체가 결코 서양 세계의 순수한 혈통이 아닐 뿐더러 - 그런 혈통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 우리가 알고 있는 빛나는 문명은 고립보다는 교류와 혼혈을 통해서 더 크게 발전해왔기 때문이다.
 
중장 보병 운용 전술의 혁신
이 전투에서 건질 수 있는 진정한 교훈은 이런 거창한 결론이 아니라 사실적이고 세부적인 부분에 있다. 일단 그리스군의 지휘관 밀키아데스의 창의적 태도는 정말 칭찬할 만하다. 그는 중장 보병대의 불문율인 ‘반드시 밀집 대형을 유지하고 대형과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천천히 전진한다’는 원칙을 과감히 깨트렸다. 페르시아군 진영에 맞추기 위해 보병 간격을 넓혔고, 마라톤 평원에 조금 남아 있던 페르시아 기병의 돌격과 화살 공격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그리스 중장 보병들로 하여금 1500미터 거리를 달리게 했다. 이 창조적 변형은 대성공을 거뒀다. 페르시아 기병과 궁수는 넋이 나갔다. 중무장한 그리스 보병은 굳이 밀집 대형으로 부딪히지 않아도 나무 방패를 들고, 몸에 쇳조각이라고는 걸치지 않은 페르시아 보병을 압도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바로 이 내용을 두고 군사사 연구자들 사이에 대단한 논쟁이 발생했다. 그리스 중장 보병의 청동 갑옷과 방패는 20킬로그램이 넘는다. 팔다리가 움직이기 편하게 몸에 잘 맞는 디자인도 아니었다. 마치 금속 조각들이 머리, 몸통, 손과 정강이에 더덕더덕 붙어 있는 형태였다. 이런 상태로 1500미터를 단숨에 뛰어 백병전을 벌인다는 것이 가능할까? 옛날의 백병전은 절반이 체력전이다. 1.5킬로미터는 맨몸으로 조깅을 해도 온몸이 땀에 젖고 호흡 곤란을 느끼기에 충분한 거리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그리스군이 이 거리를 단숨에 내달리지 않고 중간에 쉬면서 호흡을 조절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혹은 조깅하듯이 천천히 뛰다가 마지막에 스퍼트를 했다고 보기도 한다. 물론 둘을 섞을 수도 있다. 호흡 고르기 효과는 역사에도 남아 있다. 로마군의 전투 기록을 보면, 쉽게 흥분하는 신병들은 적을 향해 가는 도중에 벌써 혈압과 호흡이 최고치로 올라가버린다. 그러나 노련한 고참병들은 적과 부딪히기 전에 침착하게 거리를 측정하고 충돌 전에 호흡을 가다듬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도 단거리를 걸어서 또는 아주 짧은 거리를 달려 부딪칠 때 이야기다. 1500미터를 이런 방법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뛰다가 쉬면 더 빨리 지칠 수도 있다. 한마디로 쉬었다가 달리기라는 것은 황당무계한 자멸의 지름길이다. 경험 없는 군대가 적을 향해 과도하게 흥분해서 만세를 부르며 무모하게 돌격하다가 커다란 피해를 입었던 사례는 전쟁사에 무수히 많이 등장한다. 게다가 밀집 부대가 달리는 것은 개인이 달리는 것보다 더욱 어렵다.
실증적 분석에서 정보의 중요성
실증적 군사사가였던 독일의 델브뤼크는 좀 더 과학적이고 분석적인 해답을 제시했다. 1500미터는 그리스군이 달린 거리가 아니라 처음 그리스군과 페르시아군의 진지 간격이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마라톤 전투를 기록한 후대 역사가들 또는 현지 주민들이 이 거리를 그리스군이 뛴 것으로 착각했다는 얘기다. 그는 그리스군이 그렇게 먼 거리를 뛸 필요가 없었다고 강조했다. 그리스군이 달려야 했던 때는 페르시아 궁수들의 사정권 안에 들어갔을 때였고, 당시 활의 사정권은 150미터 정도여서 그리스군은 이때부터 뛰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누구 말이 정답이든 이 논쟁의 핵심은 중장 보병이 1500미터를 달린 후 숨이 차서 쓰러지지 않고 자기 컨디션을 유지하며 전투를 벌이는 것이 가능한지에 모아져 있다. 이후 더욱 실증적인 가설이 제기되었다. 19세기 후반 라울이라는 이름의 독일 포병 대위가 자기 소대를 가혹하게 훈련시켰다. 이 소대원들은 완전 무장을 하고 15킬로미터를 뛰었다. 그렇다면 호플라이트가 1500미터를 달리는 것도 가능하지 않았겠는가?
 
구보에 관한 한 세계 최강의 훈련을 받아온 한국군 출신들에게 이 논쟁에 대해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 같다. “15킬로미터는 구보 축에 들지도 않는다. 1.5킬로미터는 말할 것도 없다. 밀집 대형 달리기? 델브뤼크가 군에 있던 19세기 후반에만 해도 군대가 구보를 별로 안 해본 모양이다. 실제 구보는 열과 오를 맞추어 뛰는 것이 혼자 달리는 것보다 훨씬 쉽다.”
 
델브뤼크는 그리스군이 1500미터를 달리지 못했을 것이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또 다른 근거를 들이댔다. “1.5킬로미터의 뜀박질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라울 대위 병사들은 특별히 단련됐다. 마라톤 평원에서 싸웠던 호플라이트는 운동장에서 단련된 병사들이 아니라 시민, 농부, 숯쟁이, 어부들 중에서 징집된 부대였다.”
 
델브뤼크는 군사사 연구에 실증적, 과학적 분석을 도입한 근대 군사학의 대부이다. 그는 기병은 빠르다는 식의 추상적 인식을 거부했다. 장갑 기병을 태운 말이 지형에 따라 실제 몇 킬로미터 속도로 달리는지, 어디에서 어디로 진군한다면 행군 속도는 얼마나 되는지 실제로 측정을 해보고 전쟁을 분석했다. 경영 이론으로 말하면 현장을 직접 확인하고, 분석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마라톤 전투에 대한 논쟁에서는 델브뤼크는 치명적 실수를 저질렀다. 호플라이트를 구성한 그리스 시민들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시민이 아니다.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오히려 귀족, 부유한 지주층, 유한계급에 가깝다. 그들은 폴리스의 유일한 군대였고, 기사 계급이었다. 폴리스를 지키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들 집단의 권익과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그들은 쉴 새 없이 스포츠와 훈련으로 군사적 기능을 단련해야만 했다. 그래서 마라톤의 달리기도 충분히 가능했다.
 
델브뤼크의 과학적, 분석적 자세는 나무랄 데가 없고, 오늘날까지 모든 군사사 연구에서 기본적 태도가 되어 있다. 그럼에도 그의 판단이 잘못된 이유는 기본적 사실에 대한 정보와 이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경영 전략, 전술, 리더십, 자기계발에 대해 언급하다 보면 아무래도 분석, 성찰, 통찰력, 사고방식과 방법론, 발상의 전환 등에 관심이 쏠리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통찰력과 논리, 사고력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분석과 판단의 재료가 되는 사실과 정보가 잘못되면 방법이 없다. 그리고 사실과 진리는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과거의 지식과 정보의 무덤 위에서 논리와 사고력만 개발해서는 아무런 효과를 거둘 수 없다. 지식의 습득과 점검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전쟁이든 경영이든 땀 흘리지 않고 거둘 수 있는 승리는 없다.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과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 등 다수의 책과 논문을 저술했다.
  • 임용한 임용한 | - (현)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의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저술
    yhkmy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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