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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으로 다시 읽는 역사

再造之恩?… 되레, 조선이 명나라를 구했다

최중경 | 366호 (2023년 04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중국의 한국에 대한 우월 의식의 근간에는 중국이 임진왜란에 개입한 역사가 있다. 선조 또한 명나라가 군대를 보내 조선을 구한 은혜를 강조하며 ‘재조지은’을 내세웠다. 하지만 당시 명나라의 지원군이 갖는 군사적 의미를 논리적으로 따져봤을 때 오히려 임진왜란은 명나라가 조선을 구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조선이 뛰어난 전술과 화약 무기를 기반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나라 정벌 야욕에서 명나라를 구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시진핑 중국 주석은 중국과 한국의 전통적 관계에 대해 공식 석상에서 두 가지 관점을 제시했다. 2014년 7월 한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조선을 도와서 일본의 침략을 함께 물리친 역사를 강조하면서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과 명나라 수군 부총병 등자룡(鄧子龍)이 함께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사실을 부각했다. 이는 한국과 일본 간의 간극을 넓히려는 전략적 발언임과 동시에 이순신과 등자룡을 의도적으로 동렬에 놓고 조명연합수군의 지휘관이 진린 제독임을 간접적으로 이야기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나 추측한다. 그리고 2017년 4월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의 공식 만찬 테이블에서 ‘역사적으로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고 10분간에 걸쳐 역설했다. 이는 만찬이 끝난 후 트럼프 대통령이 시진핑 주석의 발언을 기자들에게 공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중국의 조공국이었던 조선의 위치를 재확인함으로써 한중 관계를 동격의 국가 간 관계가 아닌 중국 우월주의 세계관에서 바라보고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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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중국이 조선에 대해 갖는 우월 의식의 근간에는 중국이 임진왜란에 개입한 역사를 기반으로 한국과 한국인에게 느끼는 채권자 의식이 존재한다. 당시 선조 임금은 명나라가 천자의 군대를 보내 조선을 구한 은혜를 강조하며 나라를 다시 세워준 은혜, 소위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내세웠다. 그런데 현대 전술 전략 측면에서 당시 명나라의 지원군이 갖는 군사적 의미, 즉 명나라 군대가 어떤 군사적 기여를 했는지를 논리적으로 따져볼 여지가 많다. 국제 관계에 있어 일방적 시혜는 있을 수 없으며 명나라 군대가 개입한 배경에는 명나라가 얻게 될 이익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중국에 필요 이상으로 관대하게 대접하고 허물을 접어주는 경향이 없지 않다. 한 예로 문재인 대통령의 중국 국빈 방문 과정에서 한국 수행 기자단의 일부가 중국 공안원들에게 폭행을 당한 적이 있다. 그때 우리 정부는 제대로 된 항의도 하지 못했고 국민들이나 언론 역시 중국을 크게 질타하지 않고 두루뭉술 넘어갔다. 만약 일본에서 유사한 일이 터졌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 아마도 광화문 일대가 함성으로 가득 찼을 것이고 일본대사관 건물이 온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에 대한 이런 이해하기 어려운 태도의 기저에도 임진왜란 때 중국이 우리를 도와줬으니 그 정도는 덮어줄 수 있다는 심리가 존재하는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작전 목표, 일본의 군사력, 조선 군대와 명나라 군대의 군사 역량과 역할을 자세하게 분석하면 정반대의 해석도 가능하다. 즉, 명나라가 조선을 구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조선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나라 정벌 야욕에서 명나라를 구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번 글은 임진왜란을 조선이 명나라를 구했다고 보는 관점에서 새롭게 재해석하려는 시도에서 다음과 같은 근거를 제시한다.

1.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망과 일본의 군사력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쟁 목표는 한반도 정벌이 아니라 명이 지배하는 중국 대륙 정벌이었다. 조선에 보낸 국서에서도 ‘정명향도 가도입명(征明嚮導 假道入明)’이라고 명시해 조선으로의 진군 목적이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함임을 분명히 했다. 1 명나라를 공격하는 데 조선이 길을 내어주고 또 앞장서라고 요구한 것이다. 조선을 거의 신하국 수준으로 내려다보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에도 자신의 중국 대륙 정벌 계획을 사전에 통보했다. 2 그렇다면 그 당시 일본의 군사력으로 중국 대륙 평정이 가능했을까? 가능했다고 볼 수도 있는데 그 근거는 일본 육군은 전국시대를 거치며 총포를 이용하는 전술의 완성도를 높였고, 세계 최고 수준의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실전 경험이 풍부했다. 일부 군사학자는 그 당시 일본 육군이 무장과 전투 경험에서 볼 때 세계 최강의 육군이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훗날 만주족이 10만 명 수준의 철갑 기병을 이끌고 중국 대륙을 평정한 것을 보면 소총으로 무장한 15만 명 수준의 일본 육군이 선전하리라는 관측에 큰 무리는 없어 보인다.

물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산악 지형으로 군대의 진군과 보급로 확보가 쉽지 않은 조선을 공격 루트로 선택한 것은 검토의 여지가 있다. 일본군은 과거 왜구들이 했던 것처럼 중국 동남해안 지역으로 상륙하거나 산동반도, 요동 해안으로 상륙 작전을 펴는 전술을 채택할 수 있었는데 굳이 험난한 조선의 산악 지형을 통과하고자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명나라의 조공국인 조선이 순순히 길을 내줄 리 없는데도 조선이 쉽게 길을 내줄 것으로 본 이유가 분명치 않다. 중간에서 메신저 역할을 한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와 그의 장인인 고니시 유키나가가 조선의 입장을 정확히 전하지 않은데서 온 오해일 수 있다. 조선의 입장을 정확하게 전하면 도요토미의 분노를 살 것을 우려해 모호하게 보고했을 가능성이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의욕 과잉으로 조선 군대를 너무 쉽게 본데다 의병의 활약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일본군의 진격 속도는 작전 계획보다 느려져서 명나라 군대가 조선에 도착하기 전에 두만강을 건너지 못하기도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서신을 본 필리핀의 스페인 총독은 조선의 산악 지형을 통과하기 어려움을 들어 일본의 국서가 필리핀을 공격하기 위한 기만전술일 가능성이 있다고까지 생각했다.3

2. 명나라 군대의 소극적 전술

선조 임금은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몽진을 하고4 명나라로의 망명을 시도했다. 명나라 입장에서는 조공국인 조선이 한반도에서 일본군을 막아서는 것이 조선의 의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일본군이 충주 탄금대에서 조선의 정예 기병부대를 격파하고 한양을 점령한 후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계속 북상해 조명 국경의 돌파가 가시권 안에 들어오게 됐다. 명나라가 직접 피해를 입을지 모르는 급박한 상황이 되니까 명나라 조정은 요동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를 파견해 평양성 탈환 작전에 나섰다. 조승훈이 시도한 1차 공격에서는 실패하고 이여송의 2차 공격에서는 명나라 군대의 대구경화포가 파괴력을 과시하며 평양성을 탈환했다.

평양성 탈환 이후 일본군이 황해도 이남으로 철수하자 명나라 군대는 일본군을 몰아붙일 수 있었는데도 적극적이지 않았고 안일하게 대처하다가 벽제관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퇴했다. 일본군을 가볍게 보고 포병부대를 뒤에 남기고 경기병과 보병만으로 일본군을 추격하다가 한 방 크게 얻어맞고 사기가 꺾였다. 벽제관 전투 이후에도 일본군의 전투력이 보급 부족으로 인해 현저하게 감소했지만 명군 지휘부는 조선 장수들의 공격 건의를 묵살했다. 특히 이순신 제독의 활약으로 제해권을 장악한 이후 일본군들이 남해안까지 밀려 내려가 성을 쌓고 웅거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명나라 군대는 적극적인 공격을 가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쩌다 있는 합동 작전에서 명나라 군대는 늘 제1선에 있는 조선군의 뒤에서 군세를 과시하며 대구경화포로 조선군을 지원하다가 전투의 양상이 불리해지면 먼저 군사를 빼서 퇴각해 조선군의 피해가 커지는 모습을 보였다.5

어느 경우에도 명군의 전투력을 보존해 후일의 사태에 대비하고자 하는 작전 의도가 아닌가 싶다. 명나라 군대의 목표는 일본군의 격파가 아니라 일본군이 조선에 발이 묶여 명나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데 있었다. 아울러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공격 루트를 바꿔 중국의 동남해안으로 상륙할 가능성도 염두에 둔 작전 의도로 보인다. 만약 조선에 원정한 일본군이 조명연합군에 의해 전멸되면 분기탱천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육로에서 해로로 명나라 공격 루트를 바꿀 가능성이 컸다. 소극적 전술의 극치를 보여준 전투가 바로 제2차 진주성 전투이다. 정유재란 때 다시 진용을 갖춘 일본군이 제1차 진주성 전투의 빚을 갚고자 재차 진주성을 공격해 함락시키기 직전에 진주성 주변에 있던 명나라 군대가 철수해 버려 진주성이 고립됐다. 강화협상을 하러 일본에 가 있던 명군 장수 심유경이 일본군의 진주성 공격 계획을 미리 알려주고 피하라고 권유했기 때문이었다.

3. 조선 육군의 명품 화약 무기

조선 육군은 병력의 동원과 훈련 등 기본적인 전쟁 준비를 소홀히 한데다 일본군의 조총과 같은 강력한 개인 화기가 없어서 전투 초반에 어려움을 겪었다. 6 그러나 고려 말 때부터 화약 무기를 개발해 사용한 저력을 발휘해 임진왜란 중에 세계 수준의 공용화기를 개발해 사용함으로써 점차 전투의 양상을 바꾸고 주도권을 빼앗을 수 있었다. 먼저 세계 최초의 기관총이라고 할 수 있는 화차(火車)를 발명해 실전에 배치했다. 변이중(邊以中)이 고안한 화차는 수레 속에 40군데의 총구멍을 내 승자총통(勝字銃筒)을 장전하고 심지를 서로 이어놓아 한 번 심지에 불을 붙이면 차례로 포가 연속으로 발사되는 구조였다. 한 사람이 화차 한 대를 끌고 다닐 수 있어서 적군의 접근 방향에 따라 기동성이 있는 사격이 가능했다. 변이중이 화차 300대를 제작해 행주산성의 권율 장군에게 보냄으로써 행주대첩에서 크게 활약했다. 7 박진 장군이 경주를 탈환하는 전투에서도 화차가 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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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명품 화약 무기로는 세계 최초로 신관 개념을 실용화한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들 수 있다. 이장손(李長孫)이 발명한 비격진천뢰는 원시적 형태의 신관을 이용해 폭발 시간을 조절할 수 있어서 개인이 성 아래에 밀집한 적군에게 던질 수도 있고 대완구에 장전해 멀리 쏠 수도 있어서 왜군 공격에 큰 효력을 발휘했다. 경주성 탈환 전투에서 비격진천뢰가 적진에 처음 떨어졌을 때 호기심에 적군이 주변에 몰려들었다가 시간이 꽤 지난 후 폭발해 수십 명이 죽고 다치자 귀신의 무기라고 하면서 크게 두려워했다고 전해진다. 대완구에 장전해 발사하는 비격진천뢰는 600m 이상을 날아가서 한꺼번에 30명 이상을 살상하는 위력을 보였는데 세계 최초의 박격포 내지는 곡사포라고 할 수 있는 무기로서 당시로서는 최첨단 공용화기였다. 개인이 성 아래에 던지는 비격진천뢰는 현대의 수류탄과 유사한 개념이었다. 비격진천뢰는 경주성 탈환 전투, 진주성 전투, 금성 전투, 웅포 전투 등 여러 전투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이처럼 화차와 비격진천뢰는 대량 살상이 가능한 효율적인 공용화기로서 세계 최초의 기관총, 세계 최초의 박격포 개념을 실전에 응용한 놀라운 무기였으며 임진왜란의 전투 양상을 조선군에게 유리하게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조선군의 화약 무기는 명군 지휘관에게도 깊은 인상을 심어줬다. 1619년 3월 사르후 전투는 명나라 조정이 만주족의 숨통을 끊기 위해 기획한 전투였으나 명군이 만주 철갑기병대에게 참담하게 무너져 만주족이 오히려 강력한 국가 기반을 구축하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특기할 사항은 사르후 전투를 지휘한 명군 사령관 양호(楊鎬)가 명나라 조정을 움직여 조선의 총포부대 파병을 요청한 사실이다. 양호는 임진왜란 때 참전한 명군 고위 장수로서 조선 군대의 높은 화약 무기 수준과 운용 실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파병을 요청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4. 조선 해군의 해상 보급로 차단

이순신 제독이 이끄는 조선 해군은 전술이나 무기 체계, 전함의 기능에서 볼 때 세계 최강의 해군이었다. 당시 일반화된 해전 전술인 월선 공격에 의한 단병접전을 피하고 원거리 포격을 통한 선체 파괴로 전술을 혁신해 단병접전을 추구하는 일본 해군에 대해 전술적인 우위를 점했다. 당시 일본군은 오랜 내전으로 실전 경험이 많았고 사무라이들이 칼을 잘 썼기 때문에 단병접전을 할 경우 조선 해군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두 나라 해군 전함의 선박 구조가 다른 점도 최대한 활용했다. 조선 전함은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이라 제자리에서 360도 회전할 수 있었다. 한산도 해전에서 360도 회전 능력을 활용한 기동전을 통해 적을 사지로 몰아넣는 전술을 구사해 성과를 냈다. 철갑으로 덮여 있는 거북선을 돌격선8 으로 운용해 적의 월선 공격을 차단하는 동시에 근거리 화력전을 전개해 적을 공포에 떨게 했다. 선체 파괴 전술 실행을 위해 함포 사격에 많은 비중을 뒀기 때문에 포격 능력에서 일본 해군을 압도했다. 이순신 제독은 세계 최초의 산탄대포(Canister Fire)라고 할 수 있는 조란탄을 실전에 사용했는데 둥근 포탄 대신 새알만 한 구슬 60개 정도를 포신에 넣고 쏘면 일정 면적에 탄막이 형성돼 인마를 대량 살상하는 신무기였다. 12척의 전함을 갖고 일본 해군의 대함대를 격파한 명량해전에서 조란탄이 게임체인저 역할을 톡톡히 했다.

조선 해군이 제해권을 장악한데다 조선 육군이 곳곳에 포진함으로써 한반도에 상륙한 일본 육군이 북상할 경우 제대로 된 보급을 받기 어려웠다. 제해권을 빼앗긴 일본 육군은 남해안을 벗어난 지역에서 장기간 공세 작전을 펼 능력이 없었다. 이순신 제독은 일본군이 서해를 통해 보급로를 운용하는 것을 차단하는 것이 전쟁 승리를 위한 핵심 요소임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한산도에 3도 수군통제영을 설치한 것도 서해 보급로 차단을 위한 전략적 지점이 한산도였기 때문이다. 서해를 통한 병참선 차단은 한반도 전역에서도 중요한 핵심 전략이지만 만약 일본군이 대륙의 산동반도나 요동 지역에 상륙한다고 가정할 때도 여전히 전략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조선 해군의 막강한 전투력은 일본에서 산동반도와 요동에 이르는 해상 루트를 통제하는 데 있어 명나라 해군의 부담을 크게 줄여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부담을 줄이는 차원을 넘어 명나라 해군 승리의 핵심 전력 역할을 충분히 하고도 남을 정도로 당시 이순신 제독이 이끄는 조선 해군은 전함의 기동성, 화력, 전술 측면에서 종합적으로 볼 때 세계 최강의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조정은 진린(陳璘) 제독이 지휘하는 해군 5000명을 파병했다. 진린 제독이 이끄는 명나라 해군이 파병된 것은 명나라 조정이 일본군이 산동이나 요동으로 상륙할 가능성을 염려하고 있었다는 얘기이다. 일본 육군이 남해안에서 묶여 있을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수로에 의한 명나라 침공 작전을 구상할 가능성은 충분했다. 명나라 조정은 막강한 조선 해군의 힘을 빌려 일본군의 상륙 작전을 견제하고자 한 것이다. 조명연합해군의 명목상 지휘관은 명나라 제독 진린이었지만 실질적으로 전투를 지휘한 장수는 이순신 제독이었다. 통상 전투력이 우위인 쪽에서 지휘를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5000명 수준인 명나라 해군의 전투력이 3만 명 수준의 조선 해군에 크게 못 미쳤다는 방증이다.

5. 한반도 분할론

역사상 한반도 분할론이 최초로 거론된 것은 임진왜란 중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 협상 테이블이었다. 당시 거론됐던 강화 조건 중 하나가 조선의 하삼도 충청, 전라, 경상을 일본에 할양하는 것이었다. 명나라 군대의 조선 지원 의도가 명명백백하게 드러나는 근거가 바로 한반도 분할을 통한 강화 아이디어이다. 명나라가 진정 조선의 안위만을 위해 출병했다면 ‘한반도 분할론’을 입 밖에도 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명나라의 안전만 확보할 수 있으면 조선이 두 동강 나든 말든 상관할 일이 못 된다는 것이 명나라의 입장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조선 출병은 명나라의 영토와 백성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지 조선의 영토와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조선의 군관민이 분투함으로써 일본군의 조명 국경 돌파를 저지해 명나라 방위에 보탬을 준 것이다. 전쟁의 국면이 조선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을 때 명나라 주도로 강화 협상이 이뤄진 사실도 이런 관측에 힘을 실어준다. 명나라는 조선 남해안에서 힘겹게 웅거하고 있는 일본군을 보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어떤 반응과 대책을 내놓을지 불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혹시라도 수로를 따라 명나라에 상륙해 공격하려 들면 어려워지니까 그래서 강화 협상을 제안하고 떠보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만약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수로로 중국 동해안에 상륙하고자 하는 의도가 명백해지면 한반도의 일부를 떼어 주면서 회유하려고 했을 것이라는 합리적 의심이 든다.

명나라 입장에서 보면 조선은 포커판의 칩에 불과했다. 일본과의 게임에 쓸 수 있는 칩 정도로 조선을 푸대접한 명나라에 큰 은혜를 입었다며 재조지은 운운하며 법석을 떤 선조 임금과 그 신하들, 그리고 한술 더 떠서 조선이 명나라의 명맥을 잇는다는 소중화론을 창작해낸 조선 후기 지배 세력의 정체는 무엇일까? 임진왜란 이후 40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조선을 제물로 삼아 자신의 안위를 지키려 했던 명나라를 인자한 어버이나 되는 양 섬기게 하고 명나라가 망한 지 200년이 훨씬 지났는데도 명나라 마지막 연호인 숭정을 연호로 쓰길 고집한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국가와 백성은 어떻게 정의되고 있는 것이었을까? 그들은 소중화론을 진정으로 신봉했던 것일까? 아니면 어리석게 보는 백성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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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설번(薛藩)의 보고서 : 명이 조선의 힘을 빌려야 한다

명나라 신종 만력제는 조선 조정에 지원군 파병 방침을 통보하기 위해 사신으로 예부 소속으로 외교 문서를 다루는 조직인 행인사(行人司)의 행인(行人) 설번을 보냈다. 설번은 의주에 하루만 머무르고 급히 귀국해 병부에 보고서를 냈다. 보고서는 크게 보아 두 파트로 나뉘어져 있는데 명나라의 파병 결정이 조선을 위해서라기보다 명나라를 지키기 위해 조선 땅의 지정학적 이점을 활용하고 조선 관민의 힘을 빌리려는 데 있음을 명백히 하고 있다.

첫 번째 파트는 조선 조정의 태도에 대한 관찰과 평가이다. 사실 개국 이래 북로남왜(北虜南倭)의 침략9 에 시달려온 명나라로서는 일본과 조선의 관계에 대해 의심을 갖고 있었다. 조선이 일본을 도와 함께 명나라를 칠 가능성이 있다고 본 것이다. 사실 7세기에 당나라 군대가 백제를 공격했을 때 왜의 지원군이 파병됐던 역사가 있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국서에서도 ‘정명향도(征明嚮導)’라는 글귀가 나오듯이 조선이 일본의 향도 역할을 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설번은 보고서에서 “… 황제의 파병 방침을 듣고 감격하여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보고해 의심을 풀게 했다. 두 번째 파트는 파병의 필요성과 당위성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 왜구가 저장성과 광동성을 유린했지만 북경이 온전했던 것은 조선이 울타리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명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조선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설번은 “… 걱정거리는 조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강역에 있고 … 내지(內地)까지 진동될 것이 두렵다.…”고 하며 일본군이 조선에 침입한 것이 명나라에 화급한 사안임을 상기시키고 있다. 설번은 또 “… 지원군을 빨리 보내면 우리가 조선의 힘을 빌릴 수 있지만 늦어지면 일본이 조선 사람들을 거느리고 우리와 싸울 것…”이라고 주장하며 명나라 방어에 조선의 힘을 빌리려면 파병을 빨리 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설번 보고서의 두 번째 파트는 설번 개인의 의견이라기보다 명나라 조정이 열띤 토론 끝에 얻은 콘센서스라고 봐도 크게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이미 파병 방침이 확정된 이후에 쓴 보고서이고 파병 방침을 알려주러 온 사신인 설번의 입장에서는 콘센서스에 입각해 무난한 보고서를 쓰고자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설번의 임무는 파병에 앞서 최종적으로 조선 조정의 태도를 관찰해 보고하는 것이었지 파병 여부에 관한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첫 번째 파트에는 개인 의견이 들어 있지만 두 번째 파트는 개인 의견이 아니라고 보아도 무방하다는 얘기다.

이처럼 명나라 관리가 쓴 보고서에서도 볼 수 있듯이 명나라는 조선의 힘을 빌려서 일본군을 조선 땅에서 물리쳐 전란의 화가 명나라 땅과 명나라 백성에 미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조선 지원군 파병을 결정한 것이다.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명나라 병부 상서로서 조선 지원군 사령관을 겸했던 형개(邢玠)도 설번과 유사한 논리를 펴며 명나라 지원군의 조속한 파병을 주장했다. 설번의 보고서를 보면 앞서 의문을 제기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공격 루트 선택에 관한 답을 얻을 수도 있다. 즉,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공격 루트로 선택한 이유는 조선의 인적자원과 물적 자원을 징발해 명나라 공격에 동원하려는 깊은 뜻이 숨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군이었다가 조선에 귀순해 조선을 위해 싸운 항왜(降倭)가 많았지만 일본군에게 협조한 조선인을 지칭하는 순왜(順倭)도 존재했던 사실을 감안하면 조선 조정이 일본에 항복해서 조선의 인력과 물자를 동원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게 보고 조선을 공격 루트로 선택했을 가능성도 있다. 가토 기요마사(加藤 淸正)가 정문부 장군이 지휘하는 의병에 밀려 함경도에서 퇴각할 때 조선군의 추격을 저지하려고 순왜 수천 명을 후위로 배치했다는 기록을 볼 때 순왜의 규모가 상당했음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정명향도(征明嚮導)의 의미는 조선이 알아서 일본에 협조하면 좋고, 저항하면 무력으로 눌러서라도 명나라 정벌에 앞세우겠다는 뜻을 표명한 것이 아닐까? 즉, 일본도 조선의 힘을 빌리고자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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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조선이 명나라를 구했다

임진왜란 개전 초기 저항 의지를 상실한 선조 임금의 무조건 도주로 인한 지휘 공백과 제승방략이라는 다소 실행 가능성이 떨어지는 허술한 동원 체제로 인해 조선군이 체제를 갖추지 못하고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명군이 평양성을 탈환해 숨통을 터주는 역할을 한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전쟁 전반의 진행 양상을 평가해 볼 때 조선을 위한 출병이 아니라 명나라를 지키는 데 조선군을 활용하고자 하는 의도가 더 컸다. 명나라에 고마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아니나 냉정하게 보면 명나라가 조선에 진 빚이 더 크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명나라 정복을 기치로 내세운 일본군과의 전투가 조선 땅에서 이뤄졌기에 명나라의 신민과 강토가 온전히 보존됐다. 벽제관 전투 이후에 명나라 군대의 활약이 미미해 조선 군관민의 분투로 일본군의 조명 국경 돌파를 저지했다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물론 명나라 군대가 함께한다는 것이 조총이라는 신식 개인화기로 무장한 전투력 있는 일본군을 마주한 조선 군관민의 사기를 올려주는 효과가 특히 개전 초반에 분명히 존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소극적 태도로 일관하는데다 조선 관료와 조선 장수들에게 군림하며 패악질을 하는 명나라 군대의 행태가 조선 군관민의 사기를 오히려 떨어트렸을 가능성이 크다. 10 명나라 군대의 수탈이 일본군보다 심해 조선 백성을 피곤하게 했다는 점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보급로가 길어서 명나라로부터 출발해 조선으로 이어지는 보급이 원활하지 못하자 명군 수뇌부는 양곡 현지 조달 정책을 채택했는데 이 과정에서 가뜩이나 식량 부족에 허덕이고 있던 조선 백성들에게 부담을 줄 수밖에 없었다. 조선 백성들 사이에 ‘일본군은 얼레빗이고 명군은 참빗이다’라는 평가가 있었다. 명나라가 조선원정군 때문에 많은 국가 예산을 사용하고 국력이 약화되는 계기가 됐다는 주장이 있으나 일본군이 조선 땅에 묶여 있지 않고 조명 국경을 돌파해 중국 깊숙이 전진했다면 몇 배의 예산이 더 들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재조지은을 강조한 선조의 입장에 동조하기 어렵다. 선조가 재조지은을 강조한 것은 백성을 버린 군주라는 오명에서 벗어나고 전란이 끝난 후 전쟁 영웅에 의해 왕위가 찬탈될 가능성을 경계하기 위해 전란 극복의 공이 명나라 군대에 있으니 명나라 군대를 불러들인 자신이 전란 극복의 중심에 있다는 궤변을 합리화하기 위한 억지 구호일 뿐이다. 의병장은 단 한 명도 공신 목록에 올리지 않고 선무공신으로 봉해진 18명의 무관보다 많은 24명의 내시를 호성공신으로 봉한 선조는 일본인들까지 인정하고 있는 이순신 제독의 전공도 부인하며 조선 사람은 전란 극복의 공이 없다는 폭탄 발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문제는 재조지은이라는 허망하고 허황된 구호가 조선 후반기를 지배하는 강력한 독트린이었다는 사실이다. 재조지은은 조선이 명나라의 뒤를 잇는 한족의 나라라는 해괴망측한 사관(小中華論)으로 진화했다. 열강이 한반도 지배권을 두고 각축할 때 조선 식자층이 내세운 구국의 구호가 존한양이(尊韓攘夷)가 아니라 존화양이(尊華攘夷)였다는 사실을 가볍게 지나쳐서는 안 된다.
  • 최중경 | 한미협회장

    필자는 33년간 고위 관료와 외교관을 지냈고 동국대 석좌교수, 고려대 석좌교수, 미국 헤리티지재단 방문연구원, 한국공인회계사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미 협력을 증진하는 민간 단체인 한미협회 회장과 자선단체 평가 업무를 수행하는 NGO인 한국가이드스타 이사장을 맡고 있다. 서울대에서 경영학 석사를, 미국 하와이대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았다. 저서로는 『청개구리 성공신화』 『워싱턴에서는 한국이 보이지 않는다』 『역사가 당신을 강하게 만든다』가 있다.
    choijk195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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