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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으로 다시 읽는 역사

백제의 멸망 이유, 승자의 왜곡 아닌가

최중경 | 358호 (2022년 12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역사는 승자의 기록으로 승자에 의한 왜곡 가능성이 있다는 관점에서 봤을 때 계백 신화, 의자왕의 웅진성 몽진, 백제의 항복 등 일반적으로 알려진 백제 멸망을 둘러싼 역사에는 논리적 허점이 많다. 백제는 왕의 실정으로 무너질 정도의 피폐한 나라도, 최후의 결사대가 패전함에 따라 항복할 수밖에 없었던 나라도 아니었다. 나당연합군과 싸울 수 있는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고구려 군대의 응원도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믿었던 부하의 배신으로 허망하게 무너졌다. 백제 멸망의 역사를 전략적 관점에서 재검토하는 것은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고 논리적 사고 능력을 키우는 시발점이 될 것이다.


우리가 교실에서 배운 백제 멸망의 역사를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의자왕의 실정으로 피폐해진 백제는 660년에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다. 백제의 마지막 군사력이었던 계백 장군의 결사대마저 패전하면서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뒤이어 백제부흥군이 일어나 나당연합군을 거세게 압박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이 이야기를 보면 당장 몇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멸망한 백제에서 백제부흥군은 갑자기 어디서, 어떻게 등장한 것일까? 일반 백성이 들고일어나 만든 비정규군이 어떻게 나당연합군을 위협할 정도로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할 수 있었을까? 기존의 역사 서술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점들이 있다. 이번 글에서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에 승자에 의한 왜곡 가능성이 있다는 관점에서 논리적 추론과 사료적 조사, 군사 전략적 분석 등을 통해 백제 멸망의 역사를 재검토해보고자 한다.

1. 계백 신화의 허구성

황산벌싸움에 참가한 계백 장군의 백제군 결사대는 백제가 동원한 최후의 군사력으로 병력 규모에서 절대적 우위에 있는 신라군을 맞아 용감히 싸워 네 번 신라군을 물리쳤지만 화랑 관창의 활약으로 사기가 오른 신라군의 반격에 밀려 결국 패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 계백열전의 기록에 근거한 계백 신화는 상당히 드라마틱한 요소로 구성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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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요소는 계백 장군이 결의를 다지기 위해 출전하기 전에 가족을 모두 자기 손으로 직접 죽인다는 내용이다. 『삼국사기』 계백열전의 기록을 따르면 “처자식이 살아서 적의 노예가 되는 것이 두렵다. 살아서 치욕을 당하느니 죽는 것이 낫다(恐吾妻孥 沒爲奴婢 與其生辱 不如死快).” 가족이 비참한 신세가 되는 것도 싫지만 가족이 살아 있으면 가족의 안위가 걱정돼 전투에서 집중력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설명도 가능하다. 두 번째 요소는 화랑 관창의 무모한 용감성과 계백의 관용이다. 사로잡힌 관창이 너무 어려 보여 살려서 돌려보냈지만 다시 싸움을 걸어와서 또 잡히자 할 수 없이 목을 베어 신라군에게 시신을 보냈고 이를 보고 심기일전한 신라군이 결국 승리한다는 이야기다. 세 번째 요소는 백제 최후의 군사력인 계백 결사대의 규모가 불과 5000명으로 무려 10배에 달하는 신라 군대에 대항해 나름 선전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 극적 요소에는 커다란 논리적 허점이 있다. 첫 번째 요소인 가족 살해 문제는 상식적으로 보면 납득하기 어렵다. 적과 싸우는 이유는 백성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먼저 가족을 죽인다는 것은 근본적인 이유를 부정하는 것이고, 싸우기도 전에 패배를 기정사실화하는 것이 된다. 계백이 가족을 죽인 사실이 백제 장졸들에게 알려지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지휘관이 싸우기도 전에 패배를 예상하고 있으니 백제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을 것이고 탈영병이 속출했을 것이다. 계백이 이런 정황을 모를 리 없다. 계백은 패전 후유증을 생각하고 가족을 죽였지만 휘하 장졸들에게는 “월왕 구천이 5000의 군사로 오나라 왕 부차의 70만 대군을 격파하였다”고 말하면서 승리를 위한 분전을 독려하는 모순된 입장을 보였다. 고려 말 조선 초의 문관으로 동국사략(東國史略)의 편찬을 주도한 권근(權近)도 “출전에 앞서 처자를 모두 죽인 것이 군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려 결국 패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비판한 바 있다.

두 번째 요소인 화랑 관창의 이야기 역시 살벌한 전쟁터에서 존재하기 어려운 일이다. 어리다고 적군을 살려 보낸다는 것도 이상하고, 굳이 죽인 시체를 보내 신라군을 자극하는 것도 전술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계백이 그렇게 감상적이고 온정적인 인물이라면 어떻게 가족을 자기 손으로 죽이겠는가? 계백이 관창의 시신을 보내 신라군의 전의를 북돋을 정도로 병법에 어두운 어리석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중과부적인 신라군을 4차례나 물리칠 수 있었을까?

한편 세 번째 요소인 5000 결사대의 병력 규모는 합리적인 숫자일까? 계백부대가 최후의 보루였다면 계백부대의 규모가 5000명에 불과하다는 얘기는 더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신라를 괴롭힐 정도의 무력을 보유한 백제가 최후에 국운을 걸고 동원한 병력이 5000명에 불과했을 리가 없다. 불과 18년 전인 642년에 난공불락의 요새인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김춘추의 딸과 사위를 죽게 만든 백제가 국가 존망의 위기에 동원한 군대의 규모가 이 정도에 불과하다는 얘기가 설득력이 있는가? 백제 멸망 후 크게 기세를 떨친 백제부흥군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백제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5000명에 불과하다면 신라가 스스로 당나라의 번신임을 자칭하면서 당나라 군대의 도움을 애절하게 요청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신라 자체의 무력만으로도 쉽게 백제를 무너뜨릴 수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계백 신화는 백제가 최후에 박박 긁어모은 전력이 5000명에 불과한, 곧 망할 수밖에 없는 나라라는 프레임을 만들기 위해 왜곡된 것은 아닐까?

2. 계백부대를 둘러싼 논란

황산벌싸움에 나선 백제군의 지휘서열을 보면 또 다른 큰 의문이 제기된다. 3명의 고위 관리가 지휘부에 포함돼 있었는데 계백의 관등이 제일 높지 않다. 지휘부 3명 중 충상의 관직은 좌평, 계백의 관직은 달솔, 상영은 좌평과 달솔이라는 기록이 병존한다. 백제 관직 서열상 좌평은 장관급, 달솔은 차관급이니 당연히 최고사령관은 충상의 차지가 돼야 한다. 그런데 왜 계백이 지휘관이었을까? 현대전의 경우 특수 임무 수행을 위한 전투 서열 편제에 있어 주력 전투 부대인 보병부대를 화력 지원하는 포병부대의 지휘관이나 기갑부대의 지휘관이 보병부대 지휘관보다 계급이 높은 경우가 간혹 있을 수 있다. 대포와 탱크가 보병부대와 멀리 떨어진 거리에 있을 경우 직접 몸으로 부딪히며 싸우는 근접 전투(hand-to-hand battle)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특수 임무를 수행하는 보병부대의 규모가 소대이고 소대장이 소위이지만 소대와 동행하는 포병 관측 장교가 중위이고 포병 중위가 소속된 포대의 포대장이 대위라고 해도 포병화력 운용에 대한 책임은 보병소위에게 있는 것이다. 보병소위가 화력 지원 요청을 하면 포병중위가 포탄을 퍼부을 지점의 좌표를 관측하고 포탄(철갑탄인지, 백린탄인지, 고폭탄인지 등)의 종류를 결정해 포병대위에게 보고하고 포병대위가 발사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사람끼리 부딪히는 고대 전투에서 화살의 유효 사거리가 100m 내외인 것을 감안하면 주력 전투 부대의 지휘관은 계백이고 지원부대의 지휘관은 충상이라는 논리 전개가 의문스럽다. 충상이 계백이 제대로 싸우는지 감독하는 감군으로 참여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그러나 감군은 통상 지휘관보다는 직급이 낮되 왕과 가까운 존재가 담당하는 것이고, 국운을 건 싸움에 장수를 보내며 장수보다 직급이 높은 감군을 보낸다는 것은 지극히 어색한 조합이 아닐 수 없다. 직급이 높으면 바로 지휘관으로 임명하면 된다. 게다가 감군은 제3자적 관점에 있는 직책으로 직접 전투를 이끄는 지휘관이 될 수 없다. 계백이 사실은 왕족인 부여 씨(扶餘氏, 계백은 일종의 호이고 실제 이름은 부여 승이라는 주장)여서 지휘권이 계백에게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1 그러나 무소불위의 왕권을 고려하면 굳이 계백의 직급을 달솔에 묶어놓고 지휘권을 부여할 이유가 없으므로 궁색한 설명이다. 왕족이라면 바로 좌평으로 임명하면 된다.

만일 계백 신화가 지휘관도 아닌 계백을 지휘관으로 둔갑시킨 것이라면 왜 그랬을까? 충상은 신라군에게 항복해 신라에서 6두품 귀족에 편입돼 벼슬살이를 하고 잘살았지만 계백은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했기 때문은 아닐까? 여기에는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닐까?

기록에 따르면 의자왕은 사비성을 버리고 웅진으로 몽진했다. 의자왕은 일단 나당연합군의 예봉을 피하고 백제의 지방군을 모아 대항한다는 전략을 세웠기 때문이다. 고대 전투, 특히 방어전에서의 전략은 거점 방어와 청야 작전을 조합한 것이다. 적군이 침입하면 인원, 물자, 가축을 성곽 안으로 집결하고 성곽 밖에서 식량을 조달할 수 없게 수확하지 못한 농작물은 태워버렸다. 이렇게 되면 수송로가 긴 적군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굶주림에 허덕이고 전투력과 사기가 떨어지게 돼 방어에 성공할 확률이 높아진다. 고구려가 막강한 수나라, 당나라와 싸워 이길 수 있었던 근본적 이유도 거점 방어와 청야 작전을 잘 활용하면서 중국 군대의 병참선을 무력화시켜 중국 군대를 굶주리게 만드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멸망한 이유는 백제의 멸망과 신라의 협조로 더 이상 병참선 유지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지 않게 돼 고구려의 필승전략인 청야작전이 유효하지 않게 됐기 때문이다.2

계백 장군의 부대는 웅진성으로 몽진하는 의자왕 행렬의 측면을 엄호하면서 신라군이 의자왕 행렬을 추격하지 못하도록 시간을 벌어주는 지연작전을 수행했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해 보인다. 지연작전을 수행하는 부대는 통상 규모가 훨씬 큰 적군을 맞아 싸우기 때문에 피해가 커서 거의 결사대나 마찬가지다. 6•25 전쟁 때 오산 죽미령전투, 천안전투, 대전전투를 치르면서 사단장 딘(William F. Dean) 소장이 포로로 잡히고 제34연대장 보챔프(Charles E. Beauchamp) 대령이 전사해 부대가 거의 와해된 미 육군 제24보병사단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당시 제24보병사단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미 육군 제8군이 낙동강 방어선에 전개해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고 반격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3. 의자왕을 위한 변론

의자왕은 말년에 총기를 잃고 실정을 거듭했으며 나당연합군이 침공했을 때 ‘개전 초기에 백강(또는 기벌포)에서 당군과 싸우고 탄현(또는 침현)에서 신라군과 싸워야 한다’는 충언을 받아들이지 않아 패배했다고 알려져 있다.3 하지만 개전 초기에는 적군의 사기가 높고 보급 상태도 좋기 때문에 수비 거점에서 병력을 빼내 백강과 탄현에서 승부를 건 싸움을 한다는 것은 압도적으로 우위인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지 않은 한 옳은 선택이라고 보기 어렵다. 7세기의 방어 전략인 성곽 위주의 거점 방어 개념에도 맞지 않고 고구려가 중국 침략군을 상대할 때 쓰던 청야 작전과도 거리가 있는 선택이다. 게다가 백제의 지방군이 동원되지 않은 상태에서 숫자가 부족한 중앙군을 둘로 분리해서 백강과 탄현으로 보낸다는 것도 군사 상식에 어긋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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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전 초기에 싸우기로 결정했다고 쳐도 나폴레옹이 창안한 중앙 배치 전략(The Strategy of Central Position)에 따라 당군과 신라군이 합류하기 전에 약한 쪽으로 판단되는 쪽으로 중앙군 전체를 보내 격파하고 이어서 남은 한쪽을 공격하여 섬멸하는, 이른바 ‘병력 집중을 통한 각개 격파’ 전술을 택한다면 그나마 옳은 선택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병력을 분산한다는 발상은 현대 전술 관점에서 보면 비상식적이다.

이에 백강, 탄현 운운하는 이야기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허구일 가능성이 다분하며 허구가 아니더라도 백강과 탄현에서 싸우지 않기로 결정한 의자왕의 결정은 옳은 결정이라고 보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백강과 탄현은 지형 측면에서 볼 때 나름 전술적 가치가 있지만 지형적으로 유리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전장으로 선택될 수는 없다. 적군과 아군의 전력 비교, 식량과 무기의 보급 상황 등 다른 전술적 요인도 함께 고려돼야 한다. 의자왕의 총기는 시퍼렇게 살아 있었는데 왜 역사는 정반대로 의자왕을 묘사하고 있을까?4

4. 웅진의 변(熊津의 變): 내부 반란의 증거

웅진성에서 지방군을 규합해 후일을 도모하려던 의자왕의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됐다면 나당연합군이 큰 곤경에 처했을 것이다. 하지만 의자왕의 계획은 싱겁게 끝났다. 웅진성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주류 역사는 이 내부 반란에 대해 함구하고 있지만 문헌, 유물, 논리 등의 증거가 충분하다. 여러 증거에 의하면 웅진 성주 예식(또는 예식진)이 반란을 일으켜 의자왕을 포박하고 당군 사령관 소정방에게 끌고 가는 천인공노할 패륜을 저질렀다. 첫째, 문헌 증거는 『구당서』 소정방전에 나오는 구절이다. 일찍이 단재 신채호 선생이 『조선상고사』에서 의자왕이 신하의 배신으로 포로가 됐다고 주장한 근거이기도 하다. 『구당서』에 의하면 “기대장예식 우장의자래항(其大將禰植 又將義慈來降)”5 즉, “(웅진성 수비사령관) 예식이 의자(왕)를 묶어 와서 항복했다”는 내용이다. 문장의 구성을 볼 때 항복의 주체가 의자왕이 아닌 예식이라는 점(예식 래항, 禰植 來降, 예식이 와서 항복했다)에서 볼 때 배신 말고는 달리 해석할 여지가 없다.

둘째, 유물 증거도 차고 넘친다. 2006년과 2010년에 중국에서 발견된 2개의 묘비명에서 『구당서』의 기록을 보강하는 증거가 나온 것이다. 김영관 제주대 교수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백제 유민으로서 당나라 대장군에 오른 예식진(禰寔進)의 묘지명(2006년 발견)에서 예식진이 당나라에 크게 기여한 공이 언급돼 있으며 예식진의 손자인 예인수(禰仁秀)의 묘지명에서 “할아버지가 사비성에 있지 않은 의자왕을 붙잡아 중국 황제에게 바쳤고 그 공으로 당나라 좌위위대장군에 임명되고 내원군 개국공에 봉해졌다(有唐受命東討不庭 卽引其王歸義于高宗皇帝 由是拜左威衛大將軍封來遠郡開國公)”는 내용6 이 있는데 예인수의 묘지명에는 예식진과 예식이 동일한 인물임을 알려주는 내용도 있었다. 『삼국사기』에서 “의자왕이 태자와 웅진성 방령군을 데리고 웅진성으로부터 사비성으로 와서 항복(義慈率太子及熊津方領軍等 自熊津城來降)”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과 크게 대비된다.

셋째, 논리적으로도 웅진의 변이 있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다. 대규모 전투가 있었고 백제군이 패했다면 나당연합군을 위협할 정도로 강성한 백제부흥군이 일어날 가능성은 없었을 것이다. 이미 군사력이 모두 소진됐기 때문이다. 백제 멸망 과정에서 이렇다 할 전투는 황산벌싸움이 유일하다. 장기 항전을 결심하고 웅진성에 갔던 의자왕이 당나라 군대가 상륙하고 불과 10일 남짓 지나서 큰 전투 한번 치르지 않고 사비성으로 돌아와 항복 의식을 치렀다는 사실도 웅진의 변을 암시하기에 충분하다. 웅진성주 예식(진)이 당나라에서 이렇다 할 전공을 세우지도 않았는데도 대장군에 봉해지고7 죽어서는 특수층만 갈 수 있는 고양원(高陽原)에 안장되는 등 극진한 예우를 받은 사실도 예식(진)이 백제 정벌 전쟁에서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는 방증이 된다. 즉, 백제는 망할 수밖에 없는 피폐한 나라였다기 보다는 상당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예식(진)의 배신으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허망하게 무너진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5. 계백 신화가 생긴 이유

그렇다면 『삼국사기』 같은 국내 사료가 황산벌싸움을 설명하면서 백제군 지휘관도 아닌 계백을 가족까지 죽이는 무시무시한 지휘관으로 둔갑시키고 어린 관창의 화랑도 정신을 강조하면서 4전5기 시나리오를 동원해 황산벌 싸움을 극적으로 미화한 이유는 무엇일까?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 신라 역할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 신라가 백제의 명장이 버티고 있는 어려운 싸움터에서 화랑도 정신을 발휘해 극적으로 승리했다고 해야 삼국을 아우르는 주인 역할을 할 수 있기에 뭔가 가슴에 와닿는 무용담이 필요했을 것이다. 당군이 의자왕을 사로잡아 백제 정벌 전쟁이 싱겁게 끝났고, 당군이 고구려의 평양성을 함락시키는 과정에서 신라군이 조연 역할밖에 못한 것으로 역사에 기록된다고 하면 신라가 한반도의 주인 역할을 할 정당성이 크게 부족하지 않을지 우려한 것은 아닐까? 고구려가 무너진 다음 신라는 당군이 물러나길 바랐으나 당군이 주저앉아 고구려, 백제의 옛 영토에는 도호부를 세웠고, 신라 영토에도 도호부보다 격이 낮은 대도독부를 세우고 직접 통치하려고 시도하자 그에 반발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나라 조정에 지원군 파병을 애원하면서 번신(藩臣)임을 자칭해 중국의 일부가 된 신라로서는 스스로 불러들인 굴욕이었으므로 실제로 반발했는지 여부는 확인이 필요해 보인다.8 신라가 당군을 상대로 무력 투쟁을 시작했다고 하지만 신라가 당군의 상대가 되기는 힘들었고, 냉정하게 볼 때 당군의 정복전쟁에서 도우미 역할을 한 신라로서는 투쟁의 명분도 적었고 고구려, 백제의 유민들에게 손을 내밀기도 멋쩍은 상황이었다.

이런 절체절명의 어려운 상황에서 신라에 천운이 따랐다. 당나라가 토번(지금의 티베트) 군대의 침략을 받아 실크로드 통제권을 상실할 위기를 맞이한 것이다. 당나라 조정이 부족한 전력을 메워야 할 상황에 처했기 때문에 동방원정군을 토번과의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본국으로 철수시켰다. 고구려 정복에 큰 공을 세운 안동도호부의 설인귀가 이끈 당군이 670년 7월 칭하이성(靑海省) 대비천(大非川)전투에서 명장 가르 친링(티베트식 발음: 까르 치링짼뽀)이 이끈 토번군에게 전멸당하면서 동서무역을 잇는 실크로드의 통제권이 크게 흔들린 당나라는 더 이상 만주와 한반도에 신경을 쓸 수 없게 됐다. 그래서 고구려 유민들이 발해를 건국할 수 있는 여유 공간이 마련됐으며 당군이 철수하면서 포기하고 간 한반도의 일부(대동강과 원산을 잇는 선 이남의 한반도)를 신라가 차지할 수 있었다. 이렇게 간신히 한반도의 일부를 확보하는 데 그친 신라로서는 신라의 정통성과 지배권을 주장할 근거가 절실하게 필요했을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백제 유민을 심정적으로 승복시키는 효과를 노렸다고 볼 수 있다. ‘너희들의 영웅인 계백 장군이 최후결전에서 훌륭히 싸우다 패전했으니 이제 체념하고 신라의 통치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논리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부하 장수의 배신으로 의자왕이 사로잡혀서 항복한 사실이 백제 백성에게 알려지면 저항의 기운이 퍼져나갈 수 있다. 이에 제대로 된 싸움과 그 싸움을 이끈 백제의 영웅이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황산벌싸움에서 다른 장수들과 달리 투항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다 전사한 계백을 실제보다 부풀려서 크게 부각시킬 필요가 현실적으로 존재했을 수 있다.

6. 의자왕의 기로: 웅진성인가, 임존성인가

의자왕은 당군이 밀어닥치자 태자와 중신을 보내 음식을 바치고 잘못을 빌지만 소정방은 확고히 정벌 의지를 밝혔다. 백제를 제압하면 눈엣가시인 고구려 정벌의 숙원을 이룰 수 있기 때문에 하늘이 준 기회를 날릴 이유가 없었다. 당나라의 뜻을 읽은 의자왕은 지방군이 결집할 시간을 벌기 위해 몽진 길에 올랐는데 선택지는 2개였다. 현재의 예산군에 속한 지역의 산성 임존성으로 가느냐, 아니면 현재의 공주인 웅진성으로 가느냐의 갈림길이다. 여기서 의자왕은 웅진성을 택했다. 과거의 수도였고 육로와 수로가 모두 갖춰진 곳이어서 인구와 물산이 풍부했을 것이니 하드웨어 측면만 본다면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결과론적으로 볼 때 웅진을 선택한 것은 치명적 실수였다. 웅진성주 예식의 집안이 본래 한족 출신으로서 백제에 귀화한 가문이었기에 배신을 할 잠재적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임존성은 후에 백제 부흥 운동의 중심 역할을 한 난공불락의 산성으로서 추측건대 백제 부흥 운동을 이끈 흑치상지가 성주였거나 흑치상지와 뜻을 같이하는 백제 귀족이 성주였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자왕이 임존성으로 몽진했다면 자기 군주를 적군에게 팔아먹는 배신행위는 없었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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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은 본인과 백제의 운명을 맡길 곳을 선택하는 데 있어 하드웨어적 요소만 감안했는데 성주의 충성도와 배신 가능성도 우선적으로 고려했어야 했다. 조상이 중국인이었던 예식의 입장에서 보면 성 밖에 휘날리는 당나라 대군의 깃발과 어마어마한 공성무기를 보고 겁에 질렸을 것이고 당나라 군대에 협조해 목숨과 가문을 보존할 궁리를 했을 것이다. 옛 수도이고 인원과 물자가 풍부하니 방어에 더 유리할 것이라는 의자왕의 단순한 사고가 본인과 백제, 그리고 우리 민족 전체에게 천추의 한을 남긴 것이다.

그렇다면 의자왕이 추진했어야 할 최선의 실행 계획은 무엇이었을까? 우선, 임존성으로 몽진 목적지를 정하고 황산벌에 결사대를 보내 몽진하는 의자왕 행렬의 측면을 방어하게 하고, 배신 가능성이 있는 웅진성에 군대를 보내 성주를 중앙의 믿을 만한 장군으로 교체한 후 지방 영주들에게 군대를 임존성으로 집결시키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백제부흥군의 활약상에 비춰 생각해 볼 때 의자왕이 위의 계획대로 움직였다면 아마도 당나라 군대가 철군할 수밖에 없는 위기로 몰렸을 것이고 백제는 보존됐을지 모른다.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 역사의 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국가나 조직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결정은 결코 타성과 관성에 의해 쉽게 이뤄지면 안 된다. 최고의사결정자가 혼자 결정해서도 안 된다. 위험 요소를 식별하고 평가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하고 현명한 자들이 모여 토론을 통해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

7. 승자의 왜곡

백제 멸망의 역사는 승자에 의해 왜곡돼 있다. 백제는 왕의 실정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을 정도의 피폐한 나라도, 최후의 결사대가 패전함에 따라 항복할 수밖에 없었던 나라도 아니었다. 멀쩡한 나라였고, 나당연합군과 싸울 수 있는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고구려 군대의 응원도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믿었던 부하의 배신으로 허망하게 무너졌다. 이처럼 역사의 중요한 장면인 백제 멸망은 교실에서 배운 내용과 전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현재의 역사가 오히려 승자가 멋대로 왜곡한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도 있다. 계백은 분명히 실존 인물이었고, 나라를 위해 끝까지 싸우다 죽은 충절의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는 황산벌싸움의 백제 지휘관이 아니며, 가족을 죽였다는 이야기는 꾸며진 내용일 가능성이 크다. 또 계백이 속한 황산벌 백제군의 성격이 백제 최후의 결사대가 아닐 수 있다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후손들이 우리 역사의 중요한 장면을 제대로 이해하고 교훈을 얻으며 논리적이면서 전략적인 사고 능력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최중경 한미협회장 choijk195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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