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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7년 가상현실 콩트

"아 잘잤다, VR안대벗고 출근해야지" 광화문 사무실, HMD 쓰고 업무 시작!

박찬용 | 207호 (2016년 8월 lssue 2)

Article at a Glance

2027, 서울의 직장인들은 이제 모니터를 보지 않고 HMD 기기를 쓰고 일한다. 손동작을 인식하는 키넥트, 사물인터넷, 3D 스캐닝 기술들과 함께 진화한 VR 기술 덕분에 사무공간을 획기적으로 줄였다.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점점 흐려지는 미래의 모습을 그렸다.

 

편집자주

SF 단편소설의 형태를 빌려 VR을 사용하는 2031년 직장인의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필자는 남성 월간지 <에스콰이어>에서 피처 에디터로 일하며 IT 웹진 <더 기어>에도 글을 쓰고 있습니다. 미래의 가능성을 엿보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허 대리는 파도 소리에 잠에서 깼다. 눈을 반쯤 뜨고 고개를 살짝 들자 바로 눈앞에 펼쳐진 바다가 보였다. 이런 광경을 볼 수 있다니 태어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멋진 바다였다. 질 좋은 바닐라 아이스크림 색 같은 모래톱 뒤로 연한 푸른색의 투명한 바다가 아침의 햇살을 받아 눈부신 반사광을 내뿜고 있었다. 가까운 바다 뒤로는 검은색에 가까울 정도로 어두운 바다가 내려다보였다. 산호초 섬의 바다 빛깔이 이런 색을 띤다. 지금 여기가 어디지? 오키나와? 몰디브? 허 대리는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채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따뜻한 밀가루 반죽 같은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귀에는 아침에 잘 어울리는 싱거운 퓨전 재즈가 흘렀다. 그러다 “730분이에요라는 음성이 들려왔다.

 

 

, 이제 일어나야지. 허 대리는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하고 VR 기기를 벗었다. 그러자 허 대리의 현실이 펼쳐졌다. 이곳은 오키나와도, 몰디브의 리조트도 아닌 보증금 1000만 원에 월세 60만 원짜리 초소형 오피스텔이다. 2031년의 서울 시내권에서 이 정도 가격에 구할 수 있는 오피스텔은 거의 없다. 이곳을 찾아내기 위해 허 대리는 꼬박 6개월 동안 퇴근 후 온 서울을 다 돌아다녀야 했다. 겨우 구한 오피스텔은 아주 나쁘지는 않은 수준이었다. ‘풀옵션 원룸이라곤 하지만 냉장고는 터치스크린도 달려 있지 않은 아주 오래된 물건이었다.

 

 

 

 

 

 

소형 드럼세탁기에는 구형 무선통신 기술인 블루투스 기능밖에 없어서 섬유유연제를 넣으려면 귀찮게 세탁기 앞까지 가야 했다. 방이 워낙 좁아서 세탁기 앞에 가는 건 큰 문제가 없었지만 TV 광고에 나오는 신형 세탁기를 볼 때마다 허 대리는 기분이 나빠졌다. 요즘 나오는 신형 세탁기에는 자동 세제 구입 기능과 음성 인식은 물론 현대인의 불안을 해소하는 음성 인생상담 소프트웨어까지 들어 있다.

 

 

방금 벗은 건 잘 때 쓰는 수면용 VR이다. 허 대리의 집은 4평 정도밖에 안 되는데 창문을 열어봤자 옆 오피스텔의 창문 밖에 안 보였다. 옛날 오피스텔이라 도저히 끌 수 없는 빌딩 공조기 소리도 계속 들렸다. 하필 월세가 싼 방이어서 공조기가 너무 가까웠다. 허 대리는 스스로 무던한 성격이라고 생각했지만 조금이라도 신경이 곤두선 날이면 공조기와 냉장고 소리가 거슬려서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래서 두 달 전 야근하며 짜증을 참을 수 없던 어떤 날에 5개월 무이자 카드 할부로 맞춤 VR 안대를 하나 지른 것이었다.

 

 

VR 안대는 일반 수면용 안대보다 조금 두껍게 생겼고 귀 쪽 부분도 좀 두껍다. 뒤쪽에 신축성이 있는 스펀지를 끼워 얼굴에 딱 맞는다. 앞부분도 얼굴형에 완전히 밀착돼서 일단 쓰면 눈앞의 빛이 모두 차단된다. 맞춤형 VR이라는 건 그 회사에서 아주 강하게 내세우는 마케팅 포인트이기도 했다. 눈앞의 빛을 모두 차단시키면 진짜 실감나는 VR 영상을 즐길 수 있다고. 허 대리가 이 맞춤형 VR을 산 가장 큰 이유 역시 이것이었다. 잘 때만이라도 마음에 드는 현실 - 아니, 현실 비슷한 것과 마주하고 싶었다.

 

 

결제를 마치자마자 라인카카오 메신저를 통해 바로 HTQTR VR(오트쿠튀르 VR, 회사 이름이다) 고객센터에서 연락이 왔다. 라인카카오 메신저는 라인과 카카오가 2020년에 전략적 제휴를 목적으로 합병해 나온 서비스다. 둘은 누구의 이름을 앞에 둘까를 놓고 5개월 동안 싸우다가 홀수 해엔 라인카카오, 짝수 해엔 카카오라인으로 쓰기로 했다. 아무튼 아무리 기술이 발달했어도 HTQTR VR을 수령하기 위해서 최소 1회의 오프라인 미팅이 필요했다. 안대가 감기는 얼굴 앞부분의 골상을 파악하려면 실제로 만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허 대리는 오트쿠튀르라는 이름에 걸맞은 대단한 서비스를 기대했다. 이탈리아 장인이 올까? 아니면 이를 테면 몇 년 전 ‘007’ 영화에서 벤 위쇼가 연기한 Q처럼 최신 트렌드에 밝은 느낌의 천재형 청년이 올까?

 

 

둘 다 아니었다. 회사 근처 커피숍에서 점심시간에 만난 HTQTR VR 3D 페이스 스캐너는 뭔가를 몰래 팔러 나온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그 젊은이는 가방도 없이 와서는 트레이닝복 주머니에서 소형 헤어스프레이같이 생긴 걸 꺼내고 2025년판 갤럭시 XYZ 14에 끼웠다. 스마트폰에 연결하는 3D 스캐너였다. 그는 허 대리의 얼굴에 모기약을 뿌리는 듯한 포즈로 3D 스캐너를 허 대리의 얼굴에 1분쯤 이리저리 갖다 대더니다 됐어요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HTQTR VR은 얼굴을 측정한 지 이틀 후에 로젠택배로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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