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화와 혁신

생산 → 관리 → 제품 → 전략 현지화 수준 단계별로 높여 혁신기지 구축하라

178호 (2015년 6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경영전략

 

 

최근 선진 시장이 성장의 한계에 이르고 신흥시장은 급속히 커지면서 중국, 인도, 브라질, 인도네시아, 베트남, 터키 등 신흥국의 내수시장이 급격히 주목받고 있다. 수많은 기업들의 현지화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현지화의 발전단계는생산의 현지화’ ‘관리의 현지화’ ‘제품의 현지화’ ‘전략의 현지화의 순서로 심화된다. 아직 국내 기업 중 전략의 현지화를 정착시켜 해외 자회사에서 혁신을 주도한 기업이 많지 않다. 현지화를 활용해 글로벌 혁신에 성공하려면글로벌 학습 네트워크로서의 현지 자회사’ ‘역혁신 선도자로서의 현지 자회사가 필요하다.

 

필자는 최근 한 일본계 기업의 한국 지사를 방문한 적이 있다. 지사장이 일본인이었고, 부임한 지 몇 년 됐다. 그런데도 그는 항상 통역을 대동하고 다녔다. 경영회의 같은 주요 회의체는 물론이고 회사의 공식, 비공식 행사에도 통역과 함께 움직인다고 한다. 한국에 온 지 꽤 오래 됐는데도 우리말을 거의 못한다. 그러다 보니 소통에 크고 작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다. 간부들은 실적이나 주요 프로젝트 진행사항 같은 공식적인 업무에 대해서만 지사장에게 보고했다. 어느 조직이나 우두머리의 스타일은 조직 구석구석에 각인되는 법이다. 최고경영자의 이런 소통 방식은 하위 조직으로 그대로 퍼져나갔다. 대부분의 팀에서 공식 업무나 매뉴얼에 나와 있는 일에 대해서만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지고 있었다. 현장에서 일하는 직원은 장차 커다란 문제로 변할 잠재적인 위험의 낌새를 눈치채는 일이 많다. 이 회사에서는 이런 잠재적인 위험을 인지해도 경영진에게 알리지 않았다. 커다란 문제로 드러나야공식적으로해결책 수립에 나섰다. 또 직원들은 업무 수행 과정에서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떠올라도 술자리에서 동료들하고만 이야기할 따름이고 회사에는 이런 아이디어를 내놓지 않았다. 어차피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례를 접하고 나니 예전에 어떤 기업의 인도네시아 지사에 갔을 때 일본인 주재원에 대해서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우리 한국인들은 해외 법인에 나오면 그 나라 언어를 금방 익혀서 현지인들과 대화하는데, 일본인 주재원들은 끝까지 일본말만 씁니다. 우리가 일본 기업보다 실행력이 높은 게 다 이유가 있어요.”

 

 

글로벌 전략 vs. 현지화 전략

앞서 언급한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물론 매뉴얼을 좋아하는 일본인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본 기업의 현지화 전략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 특유의 현지화 전략에 따라 글로벌 기업의 현지 법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이라는 얘기다. 일본 기업에서 이런 모습을 자주 보이는 것은 주재원을 통해 해외 자회사를 관리하는 방식을 많이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해외에 진출한 일본 기업 대부분이 제조업체인데, 이들은 글로벌 시장에 내놓을 표준화된 제품의 대량 생산과 우수한 품질관리로 현지 내수시장보다는 수출에 집중하는 전략을 택하고 있다. 국제경영 전략 중에서글로벌 전략(Global Strategy)’을 활용한다는 뜻이다. (DBR minibox ‘국제경영 전략의 종류참조.) 따라서 이런 전략을 따르는 일본 기업은 현지인 직원과 주재원을 따로 관리하며 주로 주재원에 대한 동기부여를 통해 해외 자회사를 운영한다.

 

 

 

DBR Mini Box

국제경영 전략의 종류

국제경영 전략의 기반: 비용 절감과 현지 대응

경영의 원리는 판매하는 상품의 생산비용을 줄이고 가치를 높이는 것이다. 국제경영은 이 두 가지 원리를 세계적 관점에서 실행하는 활동이다.

 

국제경영 관점에서 특정 경영활동을 한 지역으로 몰아 최적화시키면 가치 창출을 극대화하면서도 두 가지 측면에서 비용이 절감된다. 첫째, 전 세계에서 가장 효과적인 장소에서 제품을 개발해서 가장 값싼 곳에서 제품을 생산할 수 있다. 하이테크 제품의 경우 엔지니어 역량이 제일 탁월한 미국에서 디자인한 후 노동력과 생산비용이 싼 중국에서 생산하고 인건비가 싼 인도에서 고객 응대를 하는 것이다. 둘째, 몰아 놓아서 생산량이 증가하면 학습효과가 나타나 단위당 개발비용이나 생산비용이 절감된다. 사람은 반복과 경험에 의해서 숙련되기 때문에 생산성이 증가하고, 생산량이 늘어나면 협상력이 증가해 제반 비용을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비용 절감을 위해서는 경영활동을 글로벌 최적지에서 통합하는 게 바람직하다.

 

안타깝게도 비용 절감의 관점과 상충하는 요인이 상존한다. 가치를 높인다는 것은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제공한다는 의미다. 글로벌 시장에서 최고의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저마다 다른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모두 충족시켜줘야 한다. 즉 다른 지역의 시장에 각기 달리 대응해야 한다. 네 가지가 다르다. 첫째, 나라와 지역마다 소비자의 취향과 기호가 다르다. 둘째, 상품을 사용하는 인프라와 전통이 다르다. 셋째, 상품을 판매하는 유통 구조와 채널이 다르다. 넷째, 나라마다 그 정부의 규제나 법규가 다르다. 글로벌 기업은 이처럼 각기 다른 현지 시장의 요구에 대응해야 한다. 이른바 현지화를 통한 적응이 요구된다. 요컨대 글로벌 기업에는 비용 절감의 압력과 현지 대응의 압력이 동시에 존재한다. 각각의 압력 정도에 따라 네 가지 국제경영 전략을 취할 수 있다.

 

국제화 전략(International Strategy)

비용 절감과 현지 대응 압력이 둘 다 없으면 국제화 전략을 채택할 수 있다. 사실 이는 수십 년 전 이야기다. 경쟁이 약하고 소비자들도 기업이 제공하는 제품을 불평 없이 쓰던 시절에나 가능한 전략이다. 국제화 전략을 택한 기업은 자국 시장에서 판매하던 제품을 그대로 해외에 수출한다. 제품 개발은 자국에서 하지만 비용 절감의 압력이 없으므로 현지에 생산시설과 마케팅 조직을 만드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모든 권한은 본사에서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서구 글로벌 기업들이 국제화 전략을 통해 해외 시장을 개척했다.

 

글로벌 전략(Global Strategy)

비용 절감 압력에 직면한 기업은 글로벌 전략을 선택한다. 글로벌 전략 기업은 본사의 기획하에 최적의 지역에서 생산, 마케팅, R&D 활동을 집중해서 표준화된 제품을 내놓는다. 주로 비용 상승을 유발하는 현지 대응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반도체 등의 산업재 분야에서 적합한 전략이다. 인텔, 텍사스인스트루먼트, 퀄컴, 삼성전자의 반도체 부문 등은 산업 특성상 글로벌 전략을 추구해왔고 여전히 유용하다.

 

다국가적 전략(Multidomestic Strategy)

현지 시장으로부터 대응 압력을 받는 기업은 다국가적 전략을 선택한다. 사업을 하는 국가별로 R&D, 생산, 마케팅 등 완결된 기능을 모두 가지고 있으며 나라마다 중복 투자된다. 이 전략을 취하면 생산 비용이 증가되므로 가격 경쟁이 심한 분야에서는 적용이 쉽지 않다. 국가별 자회사가 현지 사정에 맞는 전략을 수립해서 대응하므로 자회사의 권한이 강하다. 따라서 다국가적 전략을 취하는 기업의 경우 본사의 정책을 거스르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고, 심지어 해외 자회사가 본사를 인수하기도 한다.

 

초국적 전략(Transnational Strategy)

최근에는 많은 산업에서 경쟁이 격화되고 소비자들이 까다로워져서 비용 절감 압력과 현지 대응 요구를 동시에 받고 있다. 이 경우 초국적 전략을 선택해야 한다. 초국적 전략은 지역 효과 및 규모의 경제를 활용해 비용을 낮추면서도 현지 시장의 요구에 대응하는 것이다. 일견 모순돼 보이지만 글로벌 통합의 효율성은 극대화하면서도 현지 대응을 잘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중 한 방법이 제품 생산을 모듈화해서 부품을 표준화한 후에 현지 요구에 맞게 재조합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사례로 미국의 건설기계 업체 캐터필러가 일본 업체 고마츠의 저가격 제품에 이렇게 대응했다. 부품을 표준화해 최적 지역에서 생산한 후 소비 지역에 간단한 조립 공장을 짓고 이를 현지의 요구에 맞게 조립했다. 캐터필러는 이렇게 비용 절감과 현지 대응을 모두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전략을 추구하다가 관리가 복잡해져서 오히려 비효율이 증가해 부작용이 나타나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초국적 전략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경영 역량과 글로벌 조직 간 커뮤니케이션 역량이 뒷받침돼야 한다.

 

 

 

반면 미국이나 유럽 등 서구 기업은 주재원과 현지인을 구분하지 않고 동일한 규정을 적용하면서 관리에 차등을 두지 않는다. 당연히 현지의 유능한 인재 확보가 유리하고 해외 자회사 조직의 커뮤니케이션도 원활하다. 이런 방식을 택한 서구 기업의 전략적 의도는 현지 내수시장을 공략하기 위함이다. 서구의 소비자와 다른 현지 소비자의 특성을 제품에 반영하기 위해서 진입하는 국가마다 현지화된다국가적 전략(Multidomestic Strategy)’을 선택한 것이다.

 

 

실제로 인도에서 활동하는 글로벌 기업의 이사회나 경영진 구성을 살펴보면 일본 기업과 서구 기업의 전략 차이를 단적으로 알 수 있다. ( 1, 2, 3, 4) 인도 정부와 일본 자동차회사인 스즈키의 투자로 1981년 설립된 마루티스즈키 이사회를 보면 이사회 의장과 사외이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일본인 경영진에 의해 운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대부분 일본에 있는 본사에서 임명돼 내려왔다. 본사의 글로벌 전략과 연계된 구체적 정책이 실행되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일본의 도요타자동차와 인도의 중장비업체인 키를로스카 그룹의 제휴로 만들어진 도요타-키를로스카 자동차의 경영진을 살펴보면 재미있는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이 회사는 상장기업이 아니라서 이사회 정보를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경영진을 보면 일본인과 인도인이 정확히 반반씩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실제 경영에 참여하지 않는 키를로스카 그룹의 부회장을 제외하면 일본인 경영진은 생산 쪽을 담당하고, 인도인 경영진은 마케팅 분야를 맡고 있다. 거대한 인도 시장을 감안할 때 글로벌 전략에서 현지화 전략을 어느 정도 가미할 수밖에 없던 도요타의 고민이 느껴진다.

 

반면 서구 기업은 상당히 다르다. 영국-네덜란드계 유니레버의 자회사인 힌두스탄유니레버의 경영진과 사외이사는 모두 현지 인도인으로 구성돼 있다. 이런 경우 본사에서 수익률 등 최소한의 실적 지표를 제외한 대부분의 전략적 의사결정을 자회사에 일임하고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힌두스탄유니레버는 인도에 진입한 지도 오래됐고 제품과 이미지가 워낙 인도인들의 삶에 깊숙이 침투해 있기 때문에 실제로 인도인들은 이 회사를 로컬기업으로 인식하고 있다. 반면 과거 정부와의 마찰로 한 차례 철수했다가 1993년 인도 시장에 다시 진출한 코카콜라의 경우를 살펴봐도 비슷하다. 코카콜라 인도법인은 상장돼 있지 않기 때문에 사외이사가 필요 없으나 시장과 지역사회의 의견을 듣기 위해 자문위원회를 구성해서 경영에 조언을 얻고 있다. 이들은 모두 인도인으로 현지의 상황을 적극 반영하는 전략을 실행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서구 기업도 해외 진출 초기에는 본사에서 파견된 주재원을 통해 자회사를 관리했다. 그러나 미국 등 서구 기업의 직원들이 현지에 적응하지 못하고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문화적인 차이가 큰 아시아권의 개발도상국으로 파견될 때 실패가 많았다. 게다가 직원 가족들이 옮겨가는 것을 싫어하고 이를 무마시키기 위해 다양한 혜택을 주다 보니 주재원 파견 비용이 크게 상승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현지인 채용으로 방향을 틀게 됐다. 이들을 대체하기 위해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현지인, 미국에서 공부한 현지인 등을 시작으로 현지 엘리트 인재를 채용하면서 현재에 이르게 됐다. 즉 많은 서구 기업은 처음부터 다국가적 전략(Multidomestic Strategy)을 택한 게 아니라 글로벌 전략을 한번 경험한 후 내부 사정으로 인해 현지화로 이행했다고 볼 수 있다.

 

최근 선진시장이 성장의 한계에 이르고 신흥시장이 급속히 커지면서 중국, 인도, 브라질, 인도네시아, 베트남, 터키 등 신흥국의 내수시장이 급격히 주목받자 기업들의 현지화 고민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포천> 글로벌 500대 기업 순위를 보면 지난 10년간 신흥국 기업의 약진이 눈에 띈다. 2014년 현재 글로벌 500대 기업에서 신흥국 기업의 비율은 10년 전보다 20%p가량 늘어나 전체의 31%를 차지하고 있다. 어떤 기업도 신흥시장을 무시할 수 없게 됐다는 얘기다. 실제로 많은 일본 기업들이 글로벌 표준 제품을 현지 시장에서 판매하려다 현지 소비자에게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커다란 실패를 경험했다. 앞서 한국인 주재원은 현지 언어를 배워 현지인과 잘 소통하고 있다고 했지만 그건 한국인 특유의 끈끈한 조직 친화력 때문이고, 현지화에 탁월한 소수 기업을 제외하면 우리 기업도 현지화에서 일본 기업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우리의 현지화 수준을 점검하고, 현지화 개선 방안, 나아가 현지화를 활용한 글로벌 혁신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 이를 위해 먼저 한국 기업에 있어 현지화의 발전 단계를 생각해 보자.

 

현지화의 발전 단계

현지화란 글로벌 사업을 수행하는 기업이 경쟁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진출 지역의 특성에 적응해가는 과정이다. 경영학자들은 현지화를 다양한 측정 기준으로 분류하고 있다. 첫째, 부가가치 활동(기능)의 이전 정도에 따라, 둘째, 해외 자회사의 의사결정 권한 확대 정도에 따라, 셋째, 현지 인력의 확대 정도에 따라, 넷째, 경영관리 방식이 현지 기업과 유사해지는 정도에 따라 현지화를 측정한다. 이런 견해를 바탕으로 해외에 진출하는 한국 기업이 대부분 경험하는 현지화의 내용 변화에 따라 발전 단계를 나눠본다.

 

1) 생산의 현지화

과거 해외시장에서 가격 경쟁을 해온 한국 기업은 성장의 어느 지점이 되면 항상 비용 절감의 압박을 받았다. 어쩔 수 없이 값싼 생산기지를 찾기 위해 해외로 나가게 됐다. 즉 한국 기업의 해외 진출은 글로벌 전략의 일환으로 비용 절감이 목적이었다. 많은 기업이 초기에는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등 신흥국으로 향했다. 우리가 중국과의 무역수지가 항상 흑자인 데는 이런 이유가 숨어 있다. 규모가 점점 커져 이제는 한 달에만도 수백억 달러의 흑자를 보기도 하는데 중국 내수 시장에 수출하는 것보다 중국에 나가 있는 한국 기업의 공장에 부품을 납품하는 거래액이 상당하다.

 

이처럼 첫 단계는 생산의 현지화다. 이때의 전략적 목표는 내수시장을 공략하는 게 아니라 수출이다. 그러므로 현지화의 목표도 명확하게 원가 절감이다. 그러나 생산의 현지화를 수행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제반 생산비용이 저렴하기 때문에 원가 절감에는 어느 정도 성공하지만 여전히 몇몇 문제가 남는다. 우선 한국의 공장과 비교해 생산성 차이가 크다. 부품업체 기술력이나 노동력 수준이 낮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로 고성능 제품은 여전히 한국에 남아 있고 범용 제품이나 기술적 복잡성이 적은 제품 위주로 중국에서 생산한다. 그러나 저가격 제품도 현지 기업 수준으로까지 가격을 낮출 수는 없어서 결국에는 현지 기업과 가격 경쟁에서 밀리게 된다. 현지 기업의 제품력이 소비자가 원하는 수준에 이르면 한국 기업의 제품은 결국 시장에서 퇴출된다. 생산의 현지화로 진출한 제품 대부분이 이런 시한부 운명이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높은 가치를 지니면서도 원가가 획기적으로 개선되는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혁신 압력을 받게 된다. 이때 현지화 수준을 한 단계 도약시키려는 필요가 생기는 것이다.

 

 

2) 관리의 현지화

중국 등 신흥국에 생산기지를 건설한 기업들은 생각만큼 현지 경영이 쉽지 않다고 토로한다. 본사에서 파견된 관리자들과 현지 인력 사이에서 소통이 잘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원활한 소통으로 조직 내 결속이 잘돼야 생산성 혁신이 가능하다. 따라서 생산의 현지화가 정착되면 현지 인력들과 화학적 결합을 위해 힘쓰게 된다. 이른바 관리의 현지화 단계로 나아간다. 현지인을 상위직책에 보다 많이 채용하고, 현지의 문화를 반영한 프랙티스를 실행하면서 경영이 현지 기업에 점차 가까워지게 된다.

 

인도 시장에 진출한 도요타가 최근 이런 쪽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도요타는 1983년 인도에 합작 투자 형태로 진출했지만 현지 부품 의무 사용과 관련한 정부와의 이견으로 1994년 철수했다. 그러다 인도 시장이 예상보다 빠르게 성장하자 도요타는 1997년 키를로스카 그룹과 제휴를 통해 또다시 합작회사를 설립했다. 인도 자동차 시장은 대부분 소형차 시장이었는데, 이미 마루티스즈키와 현대자동차 등 기존 기업들이 지배력을 확보한 상태였다. 이에 따라 도요타는 틈새시장인 SUV와 고급 차 시장을 공략하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도요타는 법인을 운영하면서부터 줄곧 노사 갈등을 겪었다. 인도의 현지 인력들이 도요타 경영진에게 신뢰를 갖지 않았다. 2001년과 2002년에는 2개월간 파업으로 정상적인 조업을 하지 못했으며 그 이후에도 파업을 막기 위해 높은 임금 인상으로 갈등을 겨우 무마시키는 일이 지속됐다. 도요타는 지속적인 노사 갈등이 현지 직원들의 애사심이 모자라고 유능한 인재가 부족하기 때문이라 판단하고 자체 교육기관을 설립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2007년 도요타기술훈련원을 설립해 청소년에게 3년 과정의 교육을 시작했다. 기술뿐 아니라 역사, 영어, 가정의학 등을 수강하도록 했으며 인성 교육을 병행했다. 교육생들은 방학기간에 도요타 유니폼을 입고 본사를 방문해 도요타의 일원이라는 자부심을 불러일으키도록 만들었다. 교육기간이 끝나도 도요타에 취직해야 하는 강제조항은 없지만 많은 졸업생들이 도요타에 취직하고 있다. 도요타는 앞으로 이들이 도요타-키를로스카 자동차의 기존 인력을 어느 정도 교체하면 생산성이 급격히 증가할 것으로 보고 있다.

 

도요타 사례는 한국의 대기업들에게 큰 시사점을 준다. 한국 기업의 현지화를 오랜 기간 연구해온 학자들(백권호, 안종석, 2007)에 의하면 유독 대기업에서 관리의 현지화가 더딘 것으로 나타났다. 해외 진출 경험이 많지 않고 경영역량이 부족한 중소기업들은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학습과정을 거쳐 경영관리 방식을 현지 환경에 적응시켜 나가는 데 반해 대기업들은 한국에서 성공한 경영관리 방식을 현지에서도 고수하려 하기 때문이다. 대기업의 풍부한 경험과 역량이 관리의 현지화를 앞당기는 데 장애물이 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3) 제품의 현지화

관리의 현지화가 정착됐다면 이제는 질적인 변화를 할 시점이다. 많은 한국 기업들이 생산기지 확보 차원에서 중국이나 인도에 진출하지만 결국에는 내수시장을 공략해야 한다. 선진시장의 성장이 정체됨에 따라 신흥시장의 매력은 더욱 커지고 있다. 그래서 제품의 현지화로 내수시장을 공략해야 한다. 그러나 신흥국의 현지 고객들이 원하는 제품을 만족스럽게 만들어내기가 상당히 어렵다. 소비 성향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대부분 글로벌 기업들의 실패 사례는 제품의 현지화에 실패해서 발생했다.

 

1999년 르노자동차는 루마니아의 국영 자동차 회사 다치아를 인수하고, 2004 6500달러짜리 저가 세단 로간(Logan)을 출시했다. 로간은 동유럽뿐 아니라 불경기였던 서유럽 소비자 사이에서도 커다란 인기를 끌었다. 르노는 로간을 인도 시장에 내놓기로 했다. 2005년 인도 자동차 회사 마힌드라와 합작으로 마힌드라르노를 설립하고 곧바로 로간 생산에 나섰다. 그러나 2007 5월 인도 시장에 처음 나온 로간은 처참히 실패했다. 유럽에서는 저가 차량이었지만 인도에서는 이보다 싼 차량이 넘쳐났다. 로간은 엔진과 같은 주요 부품을 프랑스에서 직접 조달했기 때문에 가격을 더 이상 낮출 수도 없었다. 또 세금을 많이 물어 가격이 더욱 비싸졌다. 인도는 4m 이하의 소형차에는 10%, 그 이상에는 22%의 특별소비세가 부과됐는데, 로간은 4.24m였다. 게다가 동유럽에서 성공한 디자인이 인도인의 취향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마힌드라와 제휴를 종결하고 르노는 2010년 다치아에서 생산된 SUV 더스터(Duster)로 인도 시장에 재차 들어갔다. 이번에는 인도 5개 도시의 30개 가정에 개발자들을 두 달간 투숙시켜 인도 고객들의 취향을 조사했다. 소비자 조사 결과 무려 40여 가지 니즈를 뽑아냈다. 외부 디자인이나 독서등, 팔걸이 같은 내부 편의기구뿐만 아니라 인도인들이 문짝을 세게 닫는다는 점을 고려해 문짝을 보강했다. 또 인도의 도로 사정을 감안해 서스펜션을 보강했다. 가격대도 로컬 자동차와 외제 자동차의 중간대로 출시했다. 이런 노력으로 2012 7월 출시된 더스터는 시장에 나오자마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제품의 현지화는 내수시장 공략이 목표다. 이처럼 전략적 목표가 이전과 확연히 달라지기 때문에 경영에서 질적인 변화를 겪어야 한다. 자회사 자체적으로 현지인 상품개발 인력을 구성하고 의사결정 권한을 대폭 이양해서 현지 소비자 관점에서 제품을 개발해야 한다.

 

 

4) 전략의 현지화

제품의 현지화에서 머무르는 기업들이 많다. 그러나 제품 혁신을 넘어 제품과 서비스를 연계한다거나 다른 해외 자회사들의 상품과 결합하는 등 전략적인 혁신을 꾀할 수 있는 단계로 발전할 수도 있다. 이를 위해 경영진을 현지인이 맡아야 한다. 해외 자회사가 현지 기업처럼 스스로를 중심에 두고 사업을 고민할 때 새로운 혁신이 나온다. 오너십이 증가해 절실함이 생기고 본사가 쳐 놓은 생각의 한계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앞서 살펴본 네 종류의 국제경영 전략도 가장 큰 취약점은 본사 관점에서 세운 전략이라는 점이다. 해외 자회사의 사업을 본사 관점에서 보느냐, 현지 자회사 자신의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혁신 방향이 완전히 달라진다.

 

 

현지화가 정착되면

역혁신의 가능성이 올라간다.

역혁신은 가난한 국가에서 혁신을 한 뒤

선진국으로 이 제품을 가져가 판매하는 것이다.

 

인도 시장에서 소비재 부문 브랜드 신뢰도 1위를 차지한 기업은 LG전자다. LG전자 인도법인의 매출액은 30억 달러 정도인데 주요 가전 제품이 모두 판매량 1위를 하고 있다. 냉장고, TV, 에어컨, 세탁기 등 한국의 LG전자와 제품 종류가 같지만 비슷한 모델은 하나도 없다. 모두 인도 소비자에게 특화된 혁신적인 제품들이다. 가령 다양한 향신료를 즐기는 인도인을 겨냥해 향신료 냄새가 섞이지 않는 냉장고를 개발했고, 인도의 열악한 전기 공급 사정을 감안해서 전원이 끊겨도 7시간 동안 냉장실의 냉기를 유지할 수 있는 냉장고를 비롯해 정전에도 버틸 수 있는 에어컨과 세탁기를 출시했다. 1997년 한국 기업으로는 처음 인도에 현지 법인을 설립한 LG전자는 본사가 수익률만 관리하고 모든 경영 의사결정을 인도법인이 알아서 하고 있다. 이후 점차적으로 법인장을 제외한 대부분의 주요 관리직을 인도인이 맡고 있어 사실상 인도 기업이라고 할 수 있다. 본사에서 파견한 주재원이 20명 정도인데, 이들은 모두 관리자가 아니라 현지인 간부를 돕는 후원자 겸 촉진자(facilitator) 역할을 하고 있다. 이에 따라 LG전자 인도법인은 자율적인 결정으로 내수시장뿐만 아니라 인도 주변국 시장을 개척해 전략 제품을 수출하기도 한다. 제품의 현지화를 거쳐 전략의 현지화로 나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략의 현지화에 가장 가까운 기업은 아마도 가장 인도화된 서구 기업인 힌두스탄유니레버일 것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회사의 경영진은 모두 인도인이다. 저가 비누와 샴푸, 인도인의 생활습관을 간파한 세탁 겸용 세수비누 등 히트상품은 수없이 많지만 여기서는 성격이 다른 사례를 살펴보자. 힌두스탄유니레버는 인도의 취약한 위생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사회공헌활동을 꾸준히 펼치고 있다. 정기적으로 광고와 홍보에 예산을 투입하는 것은 물론 위생교육프로그램을 만들어 위생이 취약한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손 씻기 운동을 펼쳤다. 재미있는 것은 주민들의 위생의식이 높아지자 힌두스탄유니레버의 비누를 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사회공헌활동이 매출로 자연스럽게 연결된 것이다. 이런 사회공헌활동과 상품 매출의 연계 전략은 인도를 사랑하는 인도인 경영진이 아니면 쉽게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아직 전략의 현지화를 정착시켜 해외 자회사에서 혁신을 주도한 기업이 많지 않다. 현지화를 활용해 글로벌 혁신에 성공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살펴보자.

 

현지화를 넘어 혁신으로

● 글로벌 학습 네트워크로서의 현지 자회사

현지화가 높은 수준으로 정착되면 글로벌 차원에서 쓸모 있는 지식과 프랙티스를 제공받을 수 있다. 국가마다 다른 소비자 취향과 상이한 인프라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생긴 독특한 프랙티스가 해외의 다른 시장에도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글로벌 학습 네트워크의 일부분으로 현지화된 자회사가 혁신적인 지식의 생산에 참여하는 것이다.

 

맥도날드는 어느 매장을 가나 똑같은 맛을 내는 표준화로 유명하다. 그래서 해외 점포를 낼 때도 표준화된 매뉴얼을 통해서 품질관리를 철저히 한다. 미국과 똑같은 메뉴와 스타일을 세계에 퍼뜨린다고 해서 세계화의 상징으로 몰려 반미 운동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실제로 전 세계에 36000개가 넘는 매장을 보유한 맥도날드의 해외 매출 비중은 70% 가까이 된다. 이런 세계화와 미국식 표준화의 상징인 맥도날드도 지역마다 현지화에 힘쓰고 있다. 브라질에서는 오래 전부터 아마존에서 나는 과라나로 만든 음료를 판매하고 있으며, 동남아시아에서는 지역 특산물로 셰이크를 만들어 메뉴를 구성했다. 그런가 하면 종교적인 이유로 쇠고기와 돼지고기를 즐기지 않는 인도에서는 닭고기나 생선으로 햄버거를 만들었고, 채식주의자를 위한 햄버거를 따로 개발해 미국과 전혀 다른 메뉴를 내놓고 있다. 심지어 맥주의 나라 독일에서는 매장 내에서 세계 최초로 맥주를 팔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팔리는 불고기버거도 같은 맥락에서 만든 메뉴다. 이렇게 현지화에 힘쓰다 보니 자연스레 미국 본사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게 됐다. 맥도날드는 이런 아이디어를 현지 지점에만 내버려두지 않고 글로벌 조직 전체로 공유, 확산시켰다. 가령 네덜란드의 한 지점에서 조립식 점포를 만들어 주말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으로 옮겨 다니며 영업을 했다. 이 아이디어를 본사에서 받아들여 지금은 전 세계 지사에서 활용하고 있다. 공연 같은 커다란 행사가 있는 곳이면 이 설비를 활용해서 들어갔다. 또 스웨덴의 한 점포에서 우연히 성능이 훨씬 좋은 냉동고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전 세계 매장에서 다 이것을 사용한다. 또 인구가 많고 도시 건물이 밀집한 싱가포르에서 건물 내에 들어가는 미니 점포가 발명됐는데, 지금은 전 세계의 병원이나 스포츠 경기장 내에서 널리 활용되고 있다.

 

로레알도 맥도날드 못지 않게 현지에서 발생한 아이디어를 슬기롭게 활용하는 회사다. 우리나라에서 재미있는 사례가 있다. 자연스러운 화장을 원하는 한국 소비자를 대상으로 2000년대 초반 로레알코리아에서 BB크림을 개발해 히트시켰다. 서양에서 이 시장은 없었지만 로레알은 이 제품의 잠재력을 알아 보고 전 세계에 유통했고 이제는 유럽시장에서 가장 잘 팔리는 품목이 됐다. 로레알은 제품뿐만 아니라 한국 백화점의 독특한 서비스를 전 세계에 확산시키기도 했다. 한국의 백화점에는 뷰티 전문가가 상주하며 피부 진단과 상담, 메이크업 서비스 등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화장품 사업의 경쟁이 심해지고 성형 등 뷰티 산업의 발달로 인해서 우리나라에서는 자연스럽게 탄생한 서비스다. 해외에서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모습을 전혀 볼 수 없었다. 이에 로레알은리테일 아카데미를 만들어 이 서비스를 전 세계로 확산시키기 시작했다. 이를 담당하는 상하이에 있는 팀에는 절반이 한국인 직원이다. 한국의 서비스를 통째로 전수하기 위해 한국의 팀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이와 같이 글로벌 학습 네트워크가 돌아가려면 몇 가지 전제조건이 마련돼야 한다. 첫째, 해외 자회사의 현지화 수준이제품의 현지화단계까지는 진행돼야 한다. 그래야 현지인 핵심인재가 현지 소비자를 대상으로 제품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글로벌 본사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아이디어가 나오게 된다. 둘째, 글로벌 조직 전체적으로 인적 교류가 활발히 이뤄져야 한다. 맥도날드의 메뉴처럼 겉으로 분명히 드러나는 지식도 있지만 비즈니스에 결정적으로 도움이 되는 지식이나 프랙티스는 로레알의 뷰티 서비스처럼 암묵적인 지식이 많다. 이는 인적 교류를 통해 지식을 가진 사람이 직접 접촉해서 전수할 수밖에 없다. 셋째, 자회사에 높은 권한과 자율성을 줘야 한다. 글로벌 기업의 본사와 해외 자회사 간의 지식 이전과 교류를 분석한 학자들(Yang, Mudambi, Meyer, 2008)의 연구에 의하면, 자회사에서 본사로 이전되는 지식은 주로 본사가 가진 것과 같은 종류다. 즉 본사가 보유한 지식과 같은 종류로 본사의 지식을 개선할 때 교류가 활발해진다는 것이다. 이는 자회사로부터의 학습은 본사의 역량을 강화하는 방향으로만 이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건 혁신이 아니라 개선이다. 혁신은 항상 예외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자회사가 자율성을 가지고 있어야 본사의 역량과 관계없는 영역에서 본사가 보유한 것과 전혀 다른 종류의 혁신적인 지식이나 프랙티스가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역혁신(Reverse Innovation)이다.

 

 

● 역혁신의 선도자로서 현지 자회사

현지화가 정착되면 역혁신의 가능성이 올라간다. 역혁신은 가난한 국가에서 혁신을 한 뒤 선진국으로 이 제품을 가져가 판매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선진국에서 혁신이 일어난 후 그 제품을 후진국으로 가지고 가서 판매하는데, 역혁신은 이 과정을 반대로 하는 것이다.

 

역혁신은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교수의 와해성 혁신(Disruptive Innovation) 이론의 관점을 바꾼 것이다. 와해성 혁신은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기업이 저급한 기술로 틈새시장에 진입한 후발기업에게 시장을 빼앗기는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이론이다. 주류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기업이 뛰어난 기술로 주류 소비자에 대응하고 있을 때, 당장에는 저급해 보이는 와해성 기술을 개발한 기업이 값싼 제품을 원하는 틈새시장에 진입한다. 기존 기업은 이런 작은 업체를 경쟁자로 생각하지 않아 대응을 하지 않는다. 문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술이 급격히 발전하면서 나타난다. 저급한 기술이 개선을 거듭해 주류 시장의 소비자도 불만 없이 사용할 수 있게 되면 드디어 기존 기업이 쇠락하게 된다. 물론 이 순간 기존 기업의 기술도 계속 발전해왔을 테지만 소비자들 입장에서 보면 값만 비싸고 과한 성능을 자랑하는 기술인 것이다. 후발기업이 선도기업을 쓰러뜨린 대부분의 이야기에는 와해성 혁신 메커니즘이 작용한다. 일본 자동차와 미국 자동차, 소형 복사기와 대형 복사기, 소형 컴퓨터와 대형 컴퓨터, 할인점과 백화점, 중국 전자업체와 한국 업체 등이 그 예다.

 

와해성 혁신은 주류 기업 입장에서 왜 후발기업의 공격에 속수무책인지 설명하고 있는데 역혁신은 관점을 바꿔 후발기업 입장에서 이러한 산업의 변화를 바라보는 것이다. 왜 신흥국의 저급한 시장을 공략하는 게 효과적인지 설명하고 있다. 먼저 역혁신을 창시한 고빈다라잔 교수가 GE에 컨설팅을 해주며 직접 경험한 사례를 살펴보자.

 

1980년대 후반부터 GE헬스케어는 선진 의료시장을 대상으로 초음파기기를 개발해 높은 성장을 이룩했다. 그러나 소비 특성이 다른 신흥시장의 성과는 좋지 않았다. 선진시장은 선명한 이미지, 정확한 진단 등 성능이 가장 중요했지만 신흥시장은 가격이 더 중요했다. 심지어 인도 같은 신흥국은 의료 인프라가 부족해 모든 병원에서 초음파기기를 구비하고 있지도 않았다. 그래서 위급한 환자가 생기면 초음파기기가 환자가 있는 곳으로 찾아가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래서 GE헬스케어는 2002년 처음으로 소형 초음파기기를 개발해 3만 달러에 판매하기 시작했고, 2007년에는 15000달러로 가격을 인하했다. 그래도 비싸서 팔리지 않자 GE헬스케어 인도법인에서 직접 제품 개발을 시작했다. 부품도 값싼 것으로 바꾸고 인도에서 활용되는 다른 전자제품과 결합해 혁신한 결과 1500달러짜리 초음파기기를 개발할 수 있었다. 이 제품은 성능이 개선되면서 선진국의 앰뷸런스에서 응급환자를 대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앞으로 기술이 더 발전한다면 선진국의 병원에 있는 커다란 초음파기기가 이 소형 기기로 대부분 대체될 것이다. 데스크톱 컴퓨터가 노트북으로 대체됐듯이 말이다.

 

이처럼 역혁신은 신흥국에 들어가야만 가능하다. 현지화가 완전히 진행된 상태에서 추진해야 한다는 말이다. 미국 농기계회사인 디어앤컴퍼니가 좋은 사례다. 이 회사가 인도에 진출했을 때 시장점유율은 2%였고 마힌드라가 75%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회사는 인도에 별도의 법인을 꾸려 수천 명의 소비자와 접촉해서 그들의 특성을 파악했다. 그랬더니 인도 농부는 미국 농부보다 트랙터를 10배 이상 사용하고, 15년 정도 쓰길 바라며, 연비도 기존 제품의 3∼4배인 12㎞ 이상 되길 원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훨씬 값싼 가격에 오히려 성능 좋은 제품을 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디어앤컴퍼니는 가격을 대폭 낮추고 인도 소비자가 원하는 초소형 35마력짜리 제품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결국 3년 만에 제품 개발에 성공해 인도 시장을 파고들었고 후속 모델을 지속적으로 개량해서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값싸고 성능 좋은 트랙터를 수출하고 있다. 디어앤컴퍼니가 성공한 이유는 인도 시장에 직접 들어갔기 때문이다. 현지 소비자의 독특한 취향과 선호는 이들 옆에서 하루 종일 붙어 있어야 알 수 있고, 또 이들의 터무니없는 요구에 부응하는 과정에서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싹튼 것이다. 아이디어는 절대로 그냥 나오지 않는다. 요구사항이 가혹할수록 상자 밖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고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나오게 된다. 한 경영자의 유명한 말처럼 5%는 불가능해도 30%는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역혁신이 가능하려면 반드시 전략의 현지화가 이뤄져야 한다. 자회사가 의사결정의 권한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현지 제품 개발이나 전략에 본사가 개입하거나 가이드라인을 주면 생각에 한계가 생겨 획기적인 생각을 할 수 없다. 현지 자회사에 권한을 주고 현지 시장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라고 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혁신적인 제품을 만들어내고야 말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이중적일 때가 많다. 부모 말을 잘 듣기를 바라면서도, 독립적으로 성장해 나가길 바란다. 그러나 말 잘 듣는 아이는 커서도 부모에게 의존할 가능성이 크다. 독립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아이들은 부모 말을 안 듣는 경향이 있어서 키우기 힘들다. 그러나 자식의 미래를 생각하면 키우기 힘든 아이가 나을 수도 있다. 본사에서 현지 자회사를 바라보는 시각도 이와 비슷하다. 본사의 관리와 통제를 받으면서도 스스로 혁신하길 바란다. 현지화를 넘어서 해외 자회사에서 혁신이 일어나기를 바란다면 본사 중심의 관점을 버리고 자회사에 더 많은 권한을 줘야 할 것이다.

 

 

이병주 생생경영연구소장 capomaru@gmail.com

이병주 소장은 연세대 경영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LG경제연구원에 재직하면서 창의성, 변화관리, 리더십 등을 연구했다. 저서로 <애플 콤플렉스> <> <3불 전략> 등이 있다.

동아비즈니스리뷰 292호 Hyper-personalization 2020년 3월 Issue 1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