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1592∼1598)은 한 쪽의 항복 없이 일종의 정전협정을 맺고 종료됐다. 형식적으로는 승자도 패자도 없는 셈이다. 이 때문에 임진왜란이 우리가 이긴 전쟁이냐 진 전쟁이냐는 논란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런 논란이 일 때마다 씁쓸하기 짝이 없다. 전쟁은 스포츠가 아니다. 승패가 무의미한 경우도 있다. 정확히 말해서 임진왜란은 일본 측 입장에서는 실패한 전쟁이고, 우리에게는 커다란 충격과 피해를 남긴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큰 피해를 보는 부분 중 하나는 바로 민족적 자존심이다. 특히 전쟁 초기 지상전의 양상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왜군은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해서 20일 만인 5월 2일 수도 한양에 입성했다. 당시 서울∼부산이 열흘 일정의 거리였던 점을 감안하면 전투를 벌이고, 수색과 정찰을 하면서 부대를 끌고 행군해야 하는 군대의 진격속도로는 경이적이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이 무참한 패배 원인을 찾아내기 위해서 고심했다. 당쟁, 위정자들의 국방에 대한 소홀, 군사제도의 해이와 군 동원체제(제승방략)의 오류, 조선군의 실전경험 부족 등 여러 이유가 제시됐다. 이 가운데 유력하게 제기된 요인 하나가 일본군의 신무기 조총(鳥銃) 때문이라는 설이다.
이 설은 근대 무기인 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활과 창으로 맞서니 상대가 될 수 있었겠느냐는 논리를 갖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이론이 나왔다. 국내 사학계에 ‘임진왜란 승전론’이 대두되기 시작하면서 조총 역할에 대한 회의적 시각이 등장한 것이다. 필자가 기억하는 최초의 그리고 가장 어처구니없는 반론은 1970년대에 제기됐다. 일본군은 조총을 과신해서 무기가 조총 하나로 단순했지만, 우리는 무기가 다양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었다. 그리고 다양성의 사례로 다음과 같은 무기들을 열거했다. 창, 칼, 활, 몽둥이, 곡괭이, 돌멩이….
조총 회의론 제기
1980년대가 되자 좀 더 논리적인 반론이 나왔다. 조총의 발사 속도는 1분에 3발 정도다. 비가 오면 전혀 사격을 할 수 없고, 총신이 쉽게 가열돼 몇 발 사격한 뒤에는 쉬어야 한다. 무리해서 쏘면 고장도 고장이지만 성능이 뚝 떨어진다. 유효사거리도 겨우 25∼50m에 불과하다. 반면에 조선의 각궁은 10초에 한 발은 쏠 수 있으며 표준사거리가 140m, 원거리는 250m까지 미치기도 했다. 관통력도 조총보다 훨씬 강하다. 처음 전투에서 조선군이 보여 준 조총에 대한 두려움은 굉음과 불꽃, 연기가 주는 심리적 효과에 불과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조총은 전형적인 화승총이다. 요즘 총은 방아쇠를 당기면 공이치기가 총알의 후미를 때려 총알에 들어있는 화약을 폭발시켜 발사한다. 그러나 화승총은 화약과 총알을 따로따로 넣고, 공이치기에 긴 노끈을 끼워 놓은 것이다. 이 노끈 끝에 불을 붙이면 꼭 담뱃불 형태가 되는데, 방아쇠를 당기면 공이치기가 아래로 내려가 노끈의 불로 약실을 가열시켜 화약을 폭발시킨다.
일본에 조총이 도입된 시기는 전국시대의 항쟁이 정점이던 1543년이었다. 당시 일본 가고시마 앞바다에 위치한 섬 다네가시마(種子島)에 표류하던 포르투갈 배가 도착했다. 다네가시마의 영주는 이때 그들이 들고 있는 조총을 보고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몇 십억 원 되는 거금을 주고 사들였다. 그리고 1년 만에 다네가시마의 대장장이가 조총의 복제품을 생산하는데 성공한다. 이 일을 기념해서 현재 일본의 우주선 발사기지가 바로 이 다네가시마에 설치돼 있다.
이때부터 일본은 조총 자체 제작에 돌입한다. 당시 일본의 조총은 서구에서 사용하던 원형보다 성능이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도 임진왜란 발발 다음 해인 1593년에 노획한 조총을 이용, 자체 제작에 성공했기 때문에 일본의 기술 수준을 너무 부러워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조총의 역할은 과장된 것일까? 임진왜란의 패배가 전적으로 조총 때문만은 아니다. 그러나 조총의 위력은 결코 무시할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당시 총은 총구에 강선도 없고, 총알과 총구의 유격이 크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명중률이 형편없었다. 그러나 지금도 막상 실사를 해 보면 훈련된 병사들이 근거리 사격에서 의외로 놀라운 명중률을 기록한다. 위력이 약하다고는 하지만 당시의 낮은 의학 수준도 고려해야 한다. 화살은 화살촉이 박힌 위치를 정확히 알려 주지만, 살 속으로 파고든 탄환은 위치를 파악하기 어렵다. 위력이 같다고 가정해도 부상병이 사망하거나 불구가 될 확률은 총이 훨씬 높았다. 활의 위력은 개인차가 심하게 난다는 약점도 있다. 특별한 궁사가 아닌 일반 병사들이라면 근거리에서의 위력과 정확도, 살상력 등 모든 측면에서 조총이 훨씬 우월했다.
시간 흐를수록 조총역할 폄하
또 일본군이 조총으로만 무장하지도 않았지만, 조총도 한 종류가 아니었다. 조총 중 가장 큰 총은 사거리가 800m 가량 됐다. 이 총은 길고 무거워서 받침대를 사용해야 했으므로 성벽에 고정시켜 놓고, 수비용으로 사격하거나 저격용으로 사용했다. 왜군은 수성전에서 이 총으로 큰 효과를 봤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 장수들은 저격병에게 많이 당했는데, 그것도 이 총에 의한 피해일 가능성이 높다.
조총의 위력에 대한 가장 분명한 증거는 임진왜란 당시 국정 운영자들의 인식과 대응에서 찾을 수 있다. ‘조총에 의한 패배론’은 당시의 실록 기록에도 발견된다. 심지어 일본군이 믿는 것은 오직 조총이기 때문에 조총부대만 제압하면 승리할 수 있다는 기록도 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반증은 임진왜란 후 주력부대인 훈련도감이 총을 기본 화기로 하는 포수를 기간병으로 채용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