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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택

워크아웃 5년간 R&D 1조원…‘벤처신화’ 팬택, 부활의 신화 썼다

최한나 | 120호 (2013년 1월 Issue 1)

 

편집자주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김정수(서강대 영미어문학과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한국 벤처기업의 신화로 불리던 팬택의 승승가도에 제동이 걸린 것은 지난 2006년이다. 모토로라에서 선보인 레이저(RAZR)폰이 전 세계 핸드폰 시장을 휩쓸면서 해외 매출 비중이 높았던 팬택에 큰 타격을 줬다. 매출이 급락하고 국내 자금줄이 끊기면서 팬택은 결국 기업재무구조개선작업(이하 워크아웃·Workout)을 신청하는 신세가 됐다. ‘신화는 끝났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그러나 팬택은 워크아웃에 들어간 직후 곧바로 흑자를 내기 시작했다. 워크아웃 기간 내내 단 한 차례도 빼놓지 않고 흑자 행진을 지속하면서 국내외 시장점유율 및 투자자 신뢰를 회복했고 작년 말에는 5년 만에 워크아웃을 졸업하는 데 성공했다. 팬택의 턴어라운드 스토리를 분석했다.

 

워크아웃에 처하기까지

팬택은 1991년 당시 29세였던 박병엽 부회장이 직원 6명과 함께 만든 회사다. 처음에는 무선호출기(삐삐)를 만들었다. 창업 3년 만에 매출이 300억 원 규모로 늘었다. 2001년 현대큐리텔, 2005 SK텔레텍을 인수하면서 몸집을 키웠다. 이어 시장 변화에 발맞춰 핸드폰 사업으로 전환했다. 무선호출기보다 핸드폰에서 더 수익을 낼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창업한 지 10년이 지나자 직원이 2000여 명으로 늘었다. 매출은 연간 1조 원으로 불어났다. 1990년대 이후 창업을 통해 매출을 조 단위까지 키운 제조업체는 팬택이 유일하다. 삼성전자가 창업 후 매출 1조 원을 달성하기까지 15년이 걸렸다는 점을 생각하면 팬택의 성장 속도는 놀랄 만한 것이다. 그렇게 신화를 써내려가고 있던 팬택에 위기가 닥쳤다. 2005년 말부터 불기 시작한 모토로라 레이저 열풍이 매서웠다. 모토로라는 출시 2년 만에 전 세계적으로 5000만 대 넘게 팔렸다. 누적 판매대수는 1억 대가 넘는다. 2001 10%대에 불과하던 모토로라의 세계 핸드폰 시장 점유율은 2006 20%를 넘어섰다. 레이저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전 세계 핸드폰 강자들이 모두 휘청거렸다. 해외시장에서 자리를 잡아가며 인지도를 높여가던 팬택 역시 뚝뚝 떨어지는 매출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내 시장에 여파가 몰아쳤다. 중소업체로는 유일하게 자체 브랜드를 내걸고 핸드폰을 생산하던 VK가 부도를 맞았다. VK가 텃밭으로 삼던 중국 시장에 노키아와 모토로라 등 글로벌 업체들의 저가 공세가 거세지면서 채산성이 악화된 영향이 컸다. VK가 최종 부도처리 되면서 국내 핸드폰 브랜드 업체로 삼성과 LG, 팬택만 남았다.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팬택에 국내 금융권의 견제가 심해졌다. 위기 때 모기업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그룹 계열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일찌감치 자금을 돌려받아야겠다는 은행이 늘었다. 자금 공급 한도가 줄거나 아예 끊어졌다. 당시 팬택은 무역금융 한도 축소 및 여신자금 회수 등으로 최소 4000억 원 이상의 운전자금을 은행에 돌려줘야 했다. 해외시장 매출 급감과 자금사정 악화로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팬택은 결국 2006년 말 워크아웃을 신청했다.

 

“워크아웃이어야 했다

워크아웃을 결정하는 일도 쉽지 않았지만 더 큰 문제는 채권단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당시 팬택의 주채권 은행이었던 산업은행을 포함해 전체 채권의 절반가량을 들고 있던 은행권에서는 법정관리를 종용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나머지 절반을 보유한 2금융권 채권자들을 설득하는 일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논리였다.

당시 상황은 팬택에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워크아웃의 근거법이었던 기업구조조정촉진법(이하 기촉법) 2005년 말 시효가 만료됐다. 기촉법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자금난에 빠져 어려움을 겪는 기업들이 좀 더 쉽고 빠르게 구조조정을 진행할 수 있도록 도입된 한시법이다. 이 법에 따르면 전체 채권자의 75% 동의만 얻으면 워크아웃을 개시할 수 있다. 하지만 기촉법이 시효를 다하면서 워크아웃을 원하는 기업은 채권자 100% 동의를 얻어야 했다. 산업은행을 비롯한 1금융권에서 법정관리를 제안한 것은 팬택 채권자의 절반을 차지하는 소액 채권자들의 동의를 100% 받아내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팬택은 워크아웃을 원했다. 일반적으로 법정관리는 비즈니스를 포기할 확률이 높은 상황의 기업이 신청하는 것으로, 워크아웃은 회생 가능성이 있는 기업이 시행하는 것이란 시장의 인식이 있었다. 이준우 부사장은해외매출 비중이 컸던 팬택에서는 대외적 이미지와 비즈니스 파트너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우리로서는 반드시 워크아웃을 성사시켜야만 했다고 설명했다.

 

팬택은 채권단을 설득했다. 일정 기간 시간을 주면 소액 채권자들을 만나 워크아웃 동의를 이끌어내겠다고 강조했다. 산업은행을 중심으로 한 1금융권 채권자들은 2금융권 및 개인 채권자들로부터 채무조정안에 대한 동의를 받아내는 기간으로 3개월을 결정했다. 채무조정안은 팬택에 대한 201, 팬택앤큐리텔에 대한 301 감자안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지분가치가 크게 줄어드는 소액 채권자들의 반발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

 

2006 12월 말 소액 채권자 설득 작업이 시작됐다. 박병엽 부회장이 직접 나섰다. 박 부회장은 먼저 자신이 보유한 4000억 원대 지분을 전부 내놨다. 8000억 원대 회사 부채에 보증도 섰다. 회사를 반드시 살려내겠다며 전국에 흩어져 있는 채권자들을 만났다. 2금융권 관계자들과 개인 채권자들을 합해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소액 채권자들은 수천 명에 달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그날도 어느 지방에 있는 채권자들을 만나 설명회를 갖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밤낮 없이 계속된 일정에 모두 지친 상황이었다. 박병엽 부회장 핸드폰이 울렸다. 인천 어느 노래방에 채권자 6명이 모여 당장 박병엽을 불러오라며 회사 관계자를 상대로 호통치고 있다는 내용이 전달됐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박 부회장은 당장 차를 돌리라고 지시했다. 곧장 인천으로 향했다. 노래방에서 채권자들과 얼싸안고 노래를 부르며 밤을 새웠다. 결국 그 6명의 동의를 받아냈다. 3개월간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매일 링거를 맞아가며 전국을 돌아다닌 결과, 소재 불명의 약간 명을 제외한 99.96%의 동의를 얻는 데 성공했다. 87개 단위 신용협동조합과 288개 새마을금고 등 2금융권 전체가 채무조정안에 동의한 것은 사상 초유의 일로 기촉법의 공백기에 남겨진기록으로 평가된다. 이렇게 해서 총 4558억 원의 출자전환과 1200억 원의 신규 자금 투입을 골자로 하는 채무조정안이 확정됐다. 그리고 2007 419일 워크아웃이 공식적으로 시작됐다.

왜 여기까지 왔는가

워크아웃 초기, 팬택은 위기에 빠지게 된 원인부터 분석했다. 일단 비대한 마케팅 비용이 눈에 들어왔다. 팬택은 1997년 핸드폰 사업을 시작한 이후 모토로라, 노키아 등 글로벌업체의 ODM(Original Development Manufacturing·제조업자 개발 생산) 물량을 수주하며 규모를 키워왔다. 자가 브랜드 사업에 나선 것은 2004, 그후 해마다 1000억 원이 넘는 금액을 마케팅에 쏟아부었다. 레이저폰을 대대적으로 히트시킨 모토로라 말고도 노키아와 삼성전자, 소니에릭슨, LG전자 등 빅5의 시장점유율이 80%를 넘던 때였다. 몸집 큰 글로벌업체들에 맞서 대응하면서 마케팅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세계 각지로 전선을 넓힌 점도 부담으로 작용했다. 팬택은 핸드폰 사업 초기부터 해외 시장을 중요시했다. 중국을 시작으로 미국과 일본, 유럽 등에 잇따라 진출했다. 하지만 국가별 또는 시장별로 차별화된 전략이나 주력 모델 없이 무조건 뛰어들어 팬택 브랜드부터 밀고 나선 것이 마케팅의 비효율을 불렀다. 해외 소비자들에게 팬택은 익숙하지 않은 브랜드였고 다른 제조사 제품과 차별 없는 핸드폰은 흥미를 불러오지 못했다.

 

인력과 조직의 비효율도 문제였다. 현대큐리텔과 SK텔레텍 등 비슷한 구조와 기능을 가진 기업을 잇따라 M&A했으나 인력 구조조정이나 조직 재편, 부서 재배치 등이 뒤따르지 않았다. 중복된 조직과 기능은 비용을 늘려 수익성을 갉아먹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선택과 집중, 그리고 차별화

팬택은 큰 그림부터 다시 그렸다. 우선 타깃 마켓을 분명히 했다. 핸드폰 시장은 크게 오픈마켓과 사업자마켓으로 구분된다. 오픈마켓은 통신사와 무관하게 제조업체들이 자유롭게 기기를 들고 들어가 장사할 수 있는 시장이다. 이 시장에서는 기업 브랜드와 주력 모델이 가장 중요한 요소다. 브랜드와 모델 인지도를 높이는 과정에서 제조사가 주도적으로 나서기 때문에 마케팅 능력과 동원할 수 있는 자금 규모가 관건이다. 유럽이나 중국 시장이 여기에 해당한다. 사업자마켓은 통신사를 매개로 핸드폰을 판매하는 시장이다. 통신사가 제품 출시 수개월 전부터 제조사와 협의해 제품 라인업 구성에 나서는 등 통신사 입김이 강하다. 시장에 바로 물건을 내놓지 않고 통신사를 끼고 들어가기 때문에 어떤 통신사와 얼마나 효율적으로 손을 잡느냐가 마케팅의 핵심이다. 스피드와 전략, 통신사 요구 대응력 및 협상력 등이 중요하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미국과 일본 시장이 대표적이다. 팬택은 동원할 수 있는 자금 규모에 한계가 있고 팬택 브랜드만으로 경쟁하기에 무리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를 반영해 오픈마켓을 줄이고 사업자마켓에 주력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50여 개 국에 달하던 진출 국가를 절반으로 줄이고 수출 모델 수도 30여 개에서 15개 정도로 손질했다. 전 세계에 걸쳐 다양했던 시장을 사업자마켓으로 구성된 국내와 미국, 일본, 멕시코를 중심으로 한 중남미로 재편했다.

 

국가별 전략도 새롭게 짰다. 국내에서는 스카이(SKY)를 주력 브랜드로 삼았다. 스카이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지도가 높고 젊은 층을 중심으로 고객 충성도가 우수하다는 점에서 강점을 지닌 브랜드였다. 하지만 마니아층만 사용한다는 인식이 강했다. ‘쓰는 사람만 쓰는 브랜드라고 불렸다. 이를 타파하기 위해 팬택은매스티지(masstige) 전략을 세웠다. 보다 많은 소비자가 스카이를 사용할 수 있도록 대중성 높은 모델을 개발하는 데 주력했다. 고급 기능의 비싼 핸드폰을 주로 취급하던 기존 전략에서 벗어나 가격이 저렴하면서도 간결하고 세련된 디자인을 지닌 제품 개발에 힘을 모았다. 슬라이드를 위로 올렸을 때 돌고래가 뛰어오르는 모습을 닮아 돌핀폰이라는 애칭을 얻은 IM-U220 모델과 빗줄기가 내리는 무늬를 응용한 레인폰(IM-S240K)이 여기서 나왔다. 감각적인 디자인으로 관심을 모으며 이 두 모델은 출시 후 하루에 4000∼5000대씩 팔려나갔다. 5개월 만에 합산 100만 대를 돌파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북미와 일본에서는 해외사업자와의 전략적 관계를 강화하는 데 노력했다. 북미에서는 AT&T와 버라이존(Verizon)과 협력을 강화해 제품 출시 전부터 함께 라인업 구성에 나섰다. 북미 소비자들이 감각적인 디자인과 신속한 메시징 기능을 선호한다는 점에 착안해 듀얼 슬라이드팬택 매트릭스와 당시 가장 얇은 쿼티바를 지닌팬택 슬라이트등 독특하면서도 소비자 감성에 어필할 수 있는 모델을 개발했다. 일본 시장에서는 특히 까다로운 일본 소비자들의 눈높이를 충족시키는 일에 신경 썼다. 품질관리 사항 숫자를 대폭 늘려 출시 전 20만 건 이상의 품질검사를 시행하도록 했다. 복잡함을 싫어하고 간단하면서도 심플한 스타일 및 기능을 좋아하는 일본인 성향을 반영해 간단 모드를 채택한 모델을 개발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au-w62PT’ 등의 모델은 밀리언셀러를 기록하기도 했다.

남보다 빠르게, 더 빠르게

워크아웃 개시 후 2년여가 지났을 때 핸드폰 시장에 스마트폰이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만 사용하는 복잡한 기기라는 인식이 강해 대중화 가능성을 낮게 보는 의견이 많았다. 그런데 그때 팬택은 아예 피처폰을 접고 스마트폰에 집중하겠다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결정되기까지 사내 반발이 적지 않았다. 피처폰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는데다 스마트폰이 확산되는 데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피처폰을 제품 포트폴리오에서 제외해야 하는 마케팅부서에서 특히 거세게 반발했다. 당장 매출이 급감할 것이라는 우려가 컸다. 하지만 팬택은 스마트폰에 올인하겠다는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이 같은 의사 결정 뒤에는 피처폰을 병행해야 한다는 측과 스마트폰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측의 장시간 토론이 있었다. 피처폰을 배제하면 매출이 크게 줄어들 것이라는 우려가 작지 않았지만 자원이 한정된 워크아웃 기업에서 두 가지 사양 모두를 제조하면 그만큼 힘이 분산될 것이라는 시각이 설득력을 얻기 시작했다. 얼리어답터(early adopter)적 기질이 강한 한국 사람의 특성상 예상보다 빠르게 스마트폰이 확산될 것이라는 전망도 스마트폰으로의 전환을 지지했다. 이왕 방향이 결정돼 있다면 당장 손실이 크더라도 일찌감치 그쪽으로 움직이는 편이 현명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결국 팬택은 피처폰을 완전히 접고 스마트폰만 생산하는 것으로 결단을 내렸다.

 

스마트폰 초기 무렵, 당시까지만 해도 어떤 운영체제(OS)도 분명한 우위를 점하고 있지 않았다. 마이크로소프트(MS)의 윈도 모바일, 구글의 안드로이드, 리눅스 기반의 리모 등이 패권을 두고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다만 인터넷 인터페이스를 주름 잡고 있는 MS의 윈도 모바일이 다소 우세했다. 소비자들이 MS 시스템에 익숙할뿐더러 인터넷과 연결되는 스마트폰의 특성상 호환성을 높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컸다.

 

스마트폰으로 방향을 정한 팬택의 다음 과제는 OS 선택이었다. 팬택연구소의 OS 분과에서는 어떤 시스템이 좋을지 고민을 시작했다. 소비자 인지도가 높은 MS의 윈도 모바일을 택해야 한다는 의견이 적지 않았으나 팬택은 편의성을 우선순위로 고려했다. 윈도 모바일을 핸드폰에 적용했을 때는 상대적으로 무겁고 기기가 잘 돌아가지 않았던 반면 구글의 안드로이드는 가볍고 모바일 기능을 구현하기가 용이했다. 팬택은 구글의 안드로이드로 최종 결론을 내렸다.

 

2010 4, 팬택은 국내 최초의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시리우스를 출시했다. 같은 해 7월에는 안드로이드 스마트폰 가운데 가장 사양이 높은 프리미엄 스마트폰베가를 선보였다. 스마트폰으로의 전략적 집중이 빠른 결실로 이어진 것이다. 이는 팬택의 기술력을 세계 시장에 알리는 것은 물론 소비자들에게 신속한 기업으로 인식시키는 데 크게 도움을 줬다. 이처럼 경쟁사보다 발 빠르게 움직이며 사양 높은 제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팬택은 워크아웃 기간 중에도 매출의 10% R&D에 투자한다는 원칙을 지켰다. 워크아웃 기간 5년 동안 R&D에 투자한 금액은 1조 원을 넘는다.

 

인사는 원칙대로

인력 구조조정도 빼놓을 수 없는 과제였다. 여러 사업체를 인수합병하면서 중복된 기능과 조직을 정리해야 했다. 반발과 마찰이 없을 수 없었다. 팬택은 구조조정의 목표와 원칙을 분명히 해서 설득력을 높이고 갈등을 최소화했다.

첫째, PRM(Product Road Map)을 전략 시장 위주로 재편하고 이에 해당하는 인력과 그렇지 않은 인력을 구분했다. 앞서 설명했듯 팬택은 전 세계 50곳에 달하는 진출 시장을 절반으로 줄이면서 사업자 마켓에 집중하겠다는 목표를 세운 바 있다. 팬택은 먼저 전략적으로 세운 목표를 기준으로 해당 시장을 공략하는 데 필요한 인력과 그렇지 않은 인력을 나눴다. 그리고 축소한 시장을 담당하던 인력 위주로 구조조정 계획을 짰다. 둘째, 인사평가 결과를 철저하게 반영했다. 워크아웃 이전부터 수년치 인사고과 기록을 모두 살폈다. 지속적으로 좋지 않은 평가를 받은 직원과 면담을 통해 우선 조정 대상으로 삼았다. 셋째, 직급과 관련 없이 전체 임직원을 대상으로 진행했다. 직원들에게만 구조조정의 칼날을 들이대지 않고 임원급에도 동일한 원칙을 적용했다. 그 결과 한때 4500여 명에 달했던 직원 숫자가 3000명 아래로 떨어지며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다.

 

조직도 재편했다. 기존 11부문41본부를 3부문29본부로 통폐합했다. 인수합병을 거치며 중첩됐던 업무를 정리하고 명확히 재정립했다. 기능에 맞게 부분 단위로 조직을 새로 짠 점이 특징이다. 기능별 조직은 업무 성격을 명확히 하고 필요에 따라 소규모 조직의 이합집산을 용이하게 했다. 덕분에 상하부 간 커뮤니케이션 통로가 단축됐고 전략적 의사결정을 신속히 이끌어내는 데 도움이 됐다.

남은 사람들과는 커뮤니케이션을 크게 늘려 목표 공유 및 자신감 회복을 추구했다. 과장급 이상 전 직원을 대상으로 3개월에 한번씩 경영설명회를 열었다. 회사 사정을 솔직하게 공개하고 정보를 공유했다. 이는 구성원 개개인의 목표와 회사의 목표를 일치시키는 효과를 냈다. 박병엽 부회장은 ‘e메일 경영에 나섰다. 임원부터 사원에 이르기까지 격의 없이 의견을 공유하고 토론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직원들과 하루에 통상 100통 이상 e메일을 주고받았다. 비록 지금은 워크아웃에 처해 있지만 언젠가는 다시 글로벌 업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일류 핸드폰 제조업체가 돼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불어넣었다. 워크아웃 개시 전후 2∼3%대였던 직원 이탈률은 2007년 말 1% 이하로 떨어졌다. 박 부회장은 물론 전 직원이 주말을 반납하며 일할 정도로 회생을 위해 한마음으로 노력했다.

 

협력체와의 관계를 두텁게 하기 위한 노력도 이어졌다. 팬택은 워크아웃 초기부터 졸업을 위해 협력사와 함께 노력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제작이 까다롭거나 업그레이드 작업이 지속적으로 필요한 부품에 대해 개발 초기부터 팬택이 직접 관여했다. 노하우를 전수하고 제품에 대한 적용 결과를 함께 분석하며 부품 품질을 개선했다. 매년 1월 초에는 협력사들을 모두 초청해 회사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하며 회사가 어떻게 나아지고 있는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지 등 경영 실적과 상황을 설명하는 자리를 가졌다.

 

새로운 시대와 도전 과제

2011 1231, 팬택은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장장 5년간 지속된워크아웃 기업이라는 이름표를 떼고 정상 기업으로 글로벌 핸드폰 제조업체들과 맞붙게 됐다. 워크아웃 기간 중에도 팬택은 크고 작은 기록을 남기며 앞서가는 핸드폰 업체라는 인지도를 쌓았다. 먼저 실적이다. 팬택은 워크아웃 기간 내내 흑자를 유지하며 20분기 연속 흑자라는 기록을 세웠다. 누구보다 빨리스마트폰 시대를 전망하고 준비했던 팬택은 2011 3G 스마트폰을 배제하고 LTE급만 생산하기로 결정했다. 더 빠른 속도를 내는 데 역량을 집중하겠다는 계획이다. 올해는 10년 넘게 유지했던 스카이 브랜드를 버리고 베가로 통합하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피처폰 이미지가 강한 브랜드 대신 스마트폰 브랜드를 전면에 내세워 스마트폰 전문업체로 거듭나겠다는 취지다.

상황이 만만치는 않다. 핸드폰 업계 경쟁은 날로 치열해지고 있다. 삼성전자에서 갤럭시S3와 갤럭시노트2, 애플에서 아이폰5를 내놓으며 스마트폰 시장을 절반가량 차지하고 있다. 스마트폰 시장은 삼성 아니면 애플로 대변되는 분위기다. 대형사들과 겨루려면 그만한 자금력과 마케팅 역량이 필요하다. 매출을 통한 자체적인 자금 조달이 어렵다면 외부에서라도 쉽게 끌어올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팬택은 올 3분기 170억 원 이상의 영업손실을 내면서 21분기 연속 흑자를 내는 데 실패했다. 6월 워크아웃 이후 처음으로 시도한 자금 유치도 예상보다 부진했다. 채권은행들을 대상으로 800억 원 규모의 자금을 기대했으나 결과는 627억 원을 모집하는 데 그쳤다. 베가 브랜드가 소비자들에게 얼마나 먹혀들어갈지도 미지수다. 회사 이름 대신 활용됐을 만큼 장기간 사랑받았던 스카이의 빈자리를 얼마나 빠르고 효과적으로 채울지가 관건이다. 이준우 부사장은이제까지 과감하게 결단을 내리고 신속하게 움직여 살아남을 수 있었던 만큼 앞으로도 뒤처지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라며베가가 하이티어(high tier) 브랜드로 국내 시장에 제대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전략과 역량을 집중하겠다고 말했다.

 

턴어라운드 성공요인

① 분명한 목표 설정과 신속한 의사 결정

워크아웃 기간 내내 팬택은 시장 및 회사 상황에 맞춰 목표를 분명히 세웠다. 큰 그림을 그리고 그에 맞춰 전략을 짰다. 우선 오픈마켓을 버리고 사업자마켓을 타깃으로 삼았다. 전 세계에 걸쳐 광범위하게 펼쳤던 전선을 사업자마켓으로 축소했다. 그리고 각 시장을 철저히 분석해 맞춤화된 제품을 내놨다. 이는 워크아웃에 처한 회사 상황상 마케팅에 쓸 수 있는 비용이 제한적이고 선택과 집중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라는 점을 제대로 인식한 데서 비롯됐다. 피처폰을 버리고 스마트폰으로 옮겨 탄 과감한 선택도 마찬가지다. 피처폰에서 내는 매출이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언젠가는 스마트폰만 살아남을 것이라는 예상과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위기의식에 힘입어 신속한 패러다임 전환을 선택했다. 비록 워크아웃에 돌입하기는 했지만 최신 기기로 인정받는 IT회사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마케팅 비용은 대폭 줄이면서도 R&D에 투자하는 금액만큼은 지키려고 노력했으며 피처폰에서 스마트폰으로, 3G폰에서 LTE폰으로의 전환을 누구보다 빠르게 받아들이고 적응한 점에서 이를 찾아볼 수 있다.

 

② 종업원 및 협력사와 긴밀한 관계 구축

인력 및 조직 구조조정이 불가피했지만 팬택은 최대한 동의를 확보할 수 있는 원칙을 앞세워 잡음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했다. 구조조정 후에는 잔여 인력과의 커뮤니케이션을 강화해 직원들이 한마음으로 회생에 나설 수 있도록 독려했다. 특히 회사와 관련한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해 이해도를 높이고 직원과 회사의 목표를 일치시키려고 한 점에 주목할 만하다. 회사 경영정보에 대한 설명회는 회사가 현재 어떤 상황인지, 어떻게 나아가고 있는지, 어떤 점에 더 힘을 쏟아야 하는지를 공유할 수 있게 했고 직원들의 충성도와 업무 효율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팬택은 각종 부품을 대는 협력사도 어려움을 함께 헤쳐가야 할 파트너로 봤다. 협력사에도 회사 경영 실적을 설명하고 진행되는 각종 프로젝트나 추진하고 있는 일들을 공개해 목표의식을 공유할 수 있도록 했다. 기업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처해 있는 상황을 솔직히 공개하고 협력해 줄 것을 요청한 팬택의 이 같은 행동은 여러 주체들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 데 도움이 됐다.

 

③ 강력한 리더십

박병엽 부회장을 거론하지 않고 팬택을 논하기는 어렵다. 팬택의 창업주이자 워크아웃을 진두지휘한 사령탑으로 박 부회장의 존재감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다. 그는 팬택의 실질적인 최고경영자이면서도 회사를 워크아웃에 빠지게 만들었다는 미안함과 조기 정상화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의지를 담아회장이 아닌부회장이라는 직함을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워크아웃을 성사시키기 위해 3개월간 전국을 돌아다닌 일이나 스마트폰으로의 전환 등 전략적 판단을 과감히 내린 점, 밤낮은 물론 주말을 반납하며 직원들과 함께 기업 회생을 위해 노력한 점 등이 그의 의지와 추진력을 보여준다. 또한 그는 어려운 일에 몸소 나서며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 직원들의 단합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2011 12, 워크아웃 졸업을 앞두고 채권단과 마찰을 빚었을 때 돌연 내던진 박 부회장의 사의 표명은 채권단을 단번에 돌려놓은 기막힌 승부수로 해석된다. 워크아웃 졸업을 한 달도 채 남겨두지 않았을 때 채권단은 시장 상황을 이유로 졸업 연기를 종용했다. 당시 애플의 아이폰이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었고 유럽 재정 위기 등 글로벌 경제 불안이 계속되고 있었다. 노키아와 소니 등 덩치 큰 업체들도 어려움에 처해 생존을 위협받고 있었다. 하지만 졸업만 바라보고 5년간 밤낮 없이 뛰어온 팬택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박 부회장의 결단은 채권단을 압박하기 위한 카드였다. 박병엽 없는 팬택을 상상하기 어려웠던 채권단은 워크아웃을 예정대로 종료시키는 데 합의했다. 이는 박병엽 부회장이 워크아웃 기간 내내 보여준 사즉생(死卽生) 리더십을 잘 보여주는 일화다.

 

 

 

최한나 기자 h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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