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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경영

로마 흉내낸 무솔리니軍, 영국에 무너지다

임용한 | 112호 (2012년 9월 Issue 1)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1940년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갖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의 영향력이 제2차 세계대전 와중에 약화된 틈을 타 아프리카를 집어삼킬 계획을 세웠다. 그해 9, 로돌포 그라치아니 원수가 이끄는 이탈리아군은 영국의 식민지였던 이집트를 침공했다. 당시 영국군의 전력은 이탈리아군의 4분의 1에 불과했다. 이탈리아군은 고대 로마의 방진대형을 연상시키듯 모터사이클 부대, 전차 대열, 자동차 부대 등을 연이어 배치했다. 처음 영국군은 이탈리아군의 압도적 수와 기세에 눌려 후퇴했다. 하지만 이탈리아군은 겉만 번지르르할 뿐 전쟁을 치를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항공기와 차량 및 기계화 부대는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기본적인 전술 훈련조차 돼 있지 않았다. 결국 이탈리아군은 영국군의 반격에 무너졌다. 이집트 외곽 도시인 시디 바라니에 방어진지를 구축했지만 단 이틀 만에 7개 캠프가 떨어져 나갔고 이탈리아군 39000명이 항복했다. 영국군 사망자는 500명이었다. 세계 대전의 전황이 아프리카에서 이탈리아에 공짜와 다름없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는 무솔리니의 판단은 옳았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그걸 주울 능력이 없었다.

 

1940년 독일군의 기세는 욱일승천 그 자체였다. 프랑스를 단박에 떨어뜨리고 거대한 러시아를 향해 거침없는 진격을 시작했다. 독일의 영국 침공 시도는 끝내 무산되기는 했지만 적어도 1940년 내내 영국 역시 함락 일보직전의 공포에 떨어야 했다.

 

아프리카에 감도는 전운

그레이트브리튼(Great Britain)섬 바깥에서도 공포와 당혹감에 떨어야 했던 영국인들이 잔뜩 있었다. 영국은 히틀러가 정복한 서유럽보다 더 넓은 식민지를 전 세계에 보유하고 있었다. 식민지가 너무 많아서 각 나라에 주둔 중인 영국군은 비참할 정도로 소수였다. 케냐와 수단, 소말리아에 있는 영국군은 현지인 부대를 포함해도 4만 명밖에 되지 않았다. 이집트에도 겨우 36000명의 병력뿐이었다.

 

프랑스는 북아프리카의 중심부인 튀니지와 알제리, 중동의 시리아를 식민지로 소유하고 있었다. 식민지 군단은 외인부대를 포함해 프랑스군 최강의 부대였다. 그러나 프랑스가 항복하고 비시 정권(Regime de Vichy·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의 점령하에 있던 북부를 제외한 남부 프랑스를 다스린 임시 정권으로 사실상 나치 독일이 세운 허수아비 정권)이 성립하면서 아프리카의 프랑스군은 졸지에 추축국(樞軸國) 소속이 돼 버렸다. 일부는 연합군에 가담했지만 대부분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현지에 머무르는 엉거주춤한 상태가 됐다.

 

이런 와중에 어부지리로 갑작스레 아프리카의 최강자가 된 나라가 있었다. 바로 이탈리아였다.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와 리비아라는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다. 에티오피아 일대에만 이탈리아군 9만 명에 현지인 부대 25만 명이 있었다. 리비아에는 무려 25만 명의 이탈리아군이 주둔 중이었다. 무솔리니가 아프리카에 군침을 흘린 건 당연한 일이었다. 같은 동맹국인 독일은 아프리카에 신경을 쓸 여력도 필요도 없었다. 독일의 아프리카 식민지는 토고와 동아프리카에 불과했고 설령 식민지가 침공되더라도 방치할 셈이었다.

 

무솔리니는 1940 620일 연합국을 향해 선전포고를 하고 케냐와 수단, 소말리아 침공을 시작했다. 중동의 시리아도 침공했다. 그러나 최대의 전쟁이 예견된 곳은 무솔리니가아프리카의 빛나는 전리품이라고 말한 이집트였다.

 

현대판 로마군단

1940 9월 로돌포 그라치아니 원수가 지휘하는 이탈리아군 12개 사단이 이집트 침공을 개시했다. 침공 직전에 영국은 급하게 병력을 이집트에 모았다. 본국은 고립돼 있었지만 영국의 저력은 만만치 않았다. 침공을 예견한 영국은 인도 사단, 남아프리카, 호주군 사단을 신속하게 이집트로 집결시켰다. 덕분에 이집트 주둔군 사령관 아치볼드 웨이벌 장군은 6만의 병력을 거느릴 수 있었다. 그러나 전력은 여전히 이탈리아군의 4분의 1에 불과했다.

 

913일 보병 5개 사단과 탱크 7개 대대로 구성된 8만의 이탈리아군이 리비아-이집트 국경을 넘었다. 그들은 소수의 국경 수비대를 격파하고 파죽지세로 진격했다. 이 최초의 진격은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을 연출했다. 이탈리아군은 소수의 국경 수비대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드넓은 사막에 거대한 퍼레이드를 펼치며 진격해 왔다. 맨 앞줄에는 모터사이클 부대, 그 다음에 전차 대열, 그 뒤에는 자동차 부대가 뒤따랐다. 트럭들은 질서정연하게 사각형으로 정렬한 병력을 빽빽하게 태우고 있었다. 트럭들 역시 열과 오를 맞춰 빽빽하고 거대한 밀집대형을 이뤘다. 마치 고대 로마의 방진대형을 재현한 것 같았다. 맨 뒤의 트럭에는 승전비로 세울 대리석이 실려 있었다. 그 뒤로 긴 보병대열이 도보로 뒤따르고 있었지만 그들이 나타날 필요도 없었다. 압도적 수와 기세에 눌린 영국군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후퇴했다.

 

이탈리아군은 지중해 연안을 따라 100㎞를 전진해 이집트 외곽 도시인 시디 바라니까지 진격했다. 여기서 이탈리아군은 진격을 멈춘 후 참호를 파고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영국군도 시디 바라니에서 130㎞ 떨어진 어촌인 메르사 마트루에 진지를 구축하고 장기전 태세를 갖췄다.

 

무려 3개월 동안 이탈리아군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탈리아군은 전쟁을 치를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았다. 탱크와 장갑차는 1차 대전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경전차 수준도 못됐다. 총과 기관총도 19세기 수준에 불과한 게 대부분이어서 파괴력이 형편없고 장사정포와 고사포는 없다시피했다.

 

훈련 역시 전혀 돼 있지 않았다. 그들은 전술훈련이 전혀 돼 있지 않아 전투를 할 줄 몰랐다. 포병은 포를 쏠 줄만 알았지 포격지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와 같은 세부적인 포병전술에 대해서는 문외한에 가까웠다.

 

로마군단을 방불케 하는 퍼레이드는 허세에 불과했다. 도대체 퍼레이드 대형으로 공격을 감행한 것부터가 그들의 무지와 무능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허세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이탈리아군은 항공기와 차량 및 기계화 부대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항공 전력은 간신히 정찰이나 하는 수준이었다. 차량 부족은 병참 능력의 부족을 야기했다. 전쟁을 개시할 때 이탈리아군의 수송능력은 4개 대대를 수송할 능력밖에 없었다. 그러나 리비아에서 이집트까지의 거리는 4300㎞에 달했다. 게다가 해상은 영국 해군에게 완벽히 제압당했다. 시칠리섬 바로 아래가 리비아의 튀니지 항구지만 지중해는 영국군의 연못이었다. 수송선 운용이 원활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북아프리카의 해안도로를 달리는 이탈리아군 보급 트럭조차 해상에 포진한 영국 군함으로부터 포격을 당했다.

 

 

무너지는 무솔리니의 허상

129일 영국군이 반격을 시작했다. 하늘과 바다에서 항공기와 전함이 이탈리아군 진지와 병참도로를 맹폭했다. 이어 완전 차량화 부대로 편성된 전차부대와 보병부대가 진군했다. 사막전에서 차량화는 대단히 중요했다. 평지의 사막은 도로가 없어도 운행이 가능했으므로 아무리 방어진지를 단단하게 구축해도 차량화된 부대는 적의 진지를 가볍게 우회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비차량화 부대였던 이탈리아군은 영국군의 우회기동에 속수무책이었다. 수적인 우세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탈리아군은 병력에서 몇 배나 우세였지만 기동력과 보급, 운송능력에서 완벽한 열세였기 때문이다.

 

이탈리아군은 시디 바라니 방어선에 7개의 캠프를 설치했다. 이 중 내륙 쪽에 위치한 2개 캠프 사이 26㎞의 공간에는 경계병도 세우지 않고 순찰도 하지 않으면서 무방비 상태로 방치했다. 영국군은 이 사실을 탐지하고 이곳으로 약 3만 명, 2개 기계화 사단(영국군과 인도군)을 밀어 넣었다.

 

영국군은 무인지경으로 진격해 방어선을 돌파하는 동시에 여기에서 우회해 나머지 5개 캠프를 뒤에서 습격했다. 완벽한 기습을 당한 이탈리아군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일부 부대는 군단장이 전사할 정도로 용감하게 싸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부대도 몇 시간을 버티지 못했다. 대부분은 싸울 의지도 없었다. 심지어 7개 캠프 중 지중해 쪽 끝에 위치한 이탈리아 캠프에서는 영국군이 기관총 몇 발을 쏘자 곧바로 항복을 했다. 기관총 사수가 영국군 대대장에게 백기가 올라왔다고 보고하자 단 몇 발에 적군이 항복을 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던 대대장은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느냐며 기관총 사수에게 화를 냈다고 한다. 그러나 항복은 정말이었다.

 

어떤 곳에서는 이탈리아군이 자진해서 영국군의 진지공사를 도와주기도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포로가 된 이탈리아군을 탈출시키기 위해 독일군이 영국군에게 사격을 가하자 이탈리아군이 자진해서 영국군 진지로 달려가는 사건도 있었다. 시디 바라니 전투에서 단 2일 만에 7개 캠프가 떨어져 나갔고 이탈리아군 39000명이 항복했다. 영국군 사망자는 500명이었다.

 

기세를 올린 영국군은 때를 놓치지 않고 계속 진격했다. 시디 바라니 뒤에는 강력한 요새 진지인 바르디아가 있었다. 무솔리니는 이곳이라면 영국군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공격에 나선 호주군 사단은 단 하루 만에 전체 29㎞의 방어선 중 11㎞의 방어선을 함락하고 2.7㎞나 진격했다. 난공불락이라고 믿었던 포대와 참호는 영국군 포격에 순식간에 파괴됐다. 49000명의 수비대 중 45000명이 항복했다.

 

그 다음은 리비아 북쪽의 토브룩이었다. 나중에 북아프리카 전쟁에서 최대의 격전장이 되며 요새의 대명사처럼 불리게 되는 토브룩은 훗날 천하의 롬멜에게도 좌절을 안겨줄 강력한 요새였다. 이 요새를 설계한 나라가 바로 이탈리아군이었다. 하지만 이탈리아군은 단 2일 만에 토브룩을 영국에 내줬다. 토브룩에서 3만 명에 달하는 이탈리아군이 영국군에게 투항했다. 포로가 한꺼번에 너무 많이 밀려오자 한 영국군 지휘관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 친구들에게 말해서 내일 다시 오라고 해!” 이후 영국군은 벵가지와 베다 폼에서도 3만 명의 포로를 얻었다. 2개월 동안 영국군은 800㎞를 진격했고 이탈리아군 13만 명이 포로가 됐다.

 

블루오션도 공짜는 없다

영국군의 승리는 대단한 전과였다. 이 공세를 주도한 영국의 오코너 장군은 롬멜 못지않은 독창적 전술과 기동전의 진수를 보여줬다. 나중에 롬멜이 북아프리카로 오지만 않았더라도 오코너가 전쟁영웅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전술도 상대의 실수나 도움이 없다면 완벽한 승리를 거둘 수 없다.

 

세계대전의 전황이 아프리카에서 이탈리아에 공짜와 다름없는 기회를 제공했다고 본 무솔리니의 판단은 옳았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그걸 주울 능력이 없었다. 영국군이 반격하자 이탈리아군은 영화에나 나올 듯한 장면들을 연출하며 허무하게 무너졌다. 이는 형편없는 장비, 무솔리니 체제에 대한 혐오감, 장교들의 형편없는 리더십이 합쳐져 나온 결과였다. 58세의 그라치아니 원수는 아프리카 원주민과 싸워본 경험밖에 없었고 극도로 무능했지만 그조차도 자기 군대가 현대 전쟁을 치를 능력이 없다는 사실은 잘 알았다. 애초에 그는 이집트 침공을 반대했지만 무솔리니의 명령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라치아니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이탈리아군은 3개월간의 대치기간에도 전혀 전술적 훈련과 대비를 하지 않았다. 그 사실은 누구보다도 병사들이 가장 잘 알았고, 그것이 전투의지 상실로 이어졌다. 나중에 이탈리아군을 조련한 롬멜은 그들에게 전술을 가르치고 열정 있는 장교가 지휘하게 되자 병사들도 용감하고 투지 있는 전사로 변했다고 회고했다.

 

시장과 이윤이 줄어들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블루오션을 동경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 그러나 블루오션이 우연한 발견과 공짜로 주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허블망원경을 만들자 이전에 보지 못하던 새로운 우주가 펼쳐졌다. 블루오션은 차라리 이런 것에 가깝다. 더 높고 멀리, 더 빠르게 나는 사람과 조직에 먼저 모습을 드러낸다. 설사 공짜로 획득할 기회가 주어져도 이탈리아군처럼 대비가 돼 있지 않다면 그 땅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임용한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yhkmyy@hanmail.net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과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 등 다수의 책과 논문을 저술했다.

 

  • 임용한 임용한 | - (현)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의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저술
    yhkmy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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