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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력 앞서고도 VHS에 참패한 베타맥스 소니는 정말 '전략적 바보'였을까?

유정식 | 97호 (2012년 1월 Issue 2)
 
  
소니와 마쓰시타 사이에 벌어진 ‘비디오 포맷 전쟁’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소니는 베타맥스라는 포맷을, 마쓰시타는 VHS란 포맷을 각각 비디오 녹화 방식으로 채택했는데 결국 VHS가 시장을 석권했다. 이 이야기는 경영의 세계에서 전략의 실패가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베타맥스가 VHS보다 기술 면에서, 비디오 품질 면에서 우수함에도 불구하고 녹화할 수 있는 분량이 영화 한 편을 다 담기에는 짧아서 영화 보기 좋아하는 소비자들이 외면했다는 이야기, 소비자의 니즈를 사전에 간파하지 못하고 오로지 기술적인 우위에 ‘취해’ 판매자 중심으로 사고했다는 이야기, 개방적인 포맷(VHS)이 폐쇄적인 포맷(베타맥스)보다 여러 VCR 제조업체에 매력적이었다는 이야기 등이 그 내용이다. 이야기의 대부분은 ‘소니는 바보였고 마쓰시타는 영리했다’란 식으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진짜로 소니는 ‘전략적 바보’였을까?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이런 평가는 소니가 실패했고 마쓰시타는 성공을 거둔 후에 결과론적으로 내린 ‘사후 평가’에 지나지 않는다. 베타맥스와 VHS가 초기에 시장에 출시될 때는 베타맥스가 시장을 석권하리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소비자들이 좋아하는 TV프로그램을 VCR로 녹화했다가 나중에 보려는 니즈가 강했기 때문이다. 사실 소니는 그런 니즈를 잘 파악했기에 그에 딱 맞는 베타맥스 포맷을 내놓은 것이었다. TV프로그램 녹화에는 분량이 특별히 길 필요가 없었고 VHS보다 상대적으로 비싼 테이프 가격은 좋은 화질이라는 장점으로 상쇄할 수 있었다.
 
비싼 테이프 가격, 폐쇄적인 포맷, 필요 이상의 화질 등 전략을 멍청하게 세워서 소니가 실패했다기보다는 소비자들의 니즈가 TV 프로그램 녹화에서 영화 대여를 통한 감상으로 옮겨갈 것이라는 점을 미리 간파하지 못해서 실패했다고 봐야 정확한 판단이다. 소니는 베타맥스를 출시하기 전에 CTI라는 회사가 영화 대여업에서 크게 실패한 것으로부터 교훈을 얻어 자신들의 전략 방향을 나름대로 옳게 설정했다. CTI 사례를 통해 소비자들이 집에서 영화를 감상하기를 그다지 원하지 않는다고 ‘합리적’으로 판단한 것이다. 반면 VHS의 성공은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격’인 셈이다. 마쓰시타가 전략을 영리하게 세웠기 때문이 아니다.
 
 
소니가 과거의 사례와 소비자의 니즈를 철저하게 연구해 전략을 세웠는데도 마쓰시타와의 비디오 포맷전쟁에서 패한 이유는 바로 불확실성 때문이다. CTI가 영화 대여업을 시작하고 실패하는 동안 불붙지 않았던 영화 감상 니즈가 갑작스레 커지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다. 이 불확실성이 소니의 실패를 옳게 지적하는 단어다.
 
소니는 베타맥스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아 1992년에 새로운 레코딩 기술인 MD를 출시했다. 하지만 이 기술 역시 실패하고 만다. 소니는 최근(2011년 7월)에 80분짜리를 제외한 모든 MD의 판매를 중단한다고 발표해 실패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CD보다 작은 크기의 MD는 내구성이 강하고 쉽게 녹음이 가능했다. 그럼에도 역시 CD와 후에 나오는 플래시 메모리에 밀리고 말았다.
 
소니가 철저하게 전략을 수립했는데도 MD가 실패한 이유 역시 불확실성이다. 바로 곧이어 인터넷이 일반화되고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소비자들은 MD가 아니라 하드디스크에 음악을 저장하고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기 시작했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원하는 음악을 다운로드받을 수 있게 됐기 때문에 번거롭게 MD에 따로 저장해 재생할 유인이 작았다. 소니의 전략은 훌륭했지만 인터넷이 야기한 불확실성에 대해서까지 대응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마이클 레이너는 기업이 실패하는 이유는 잘못된 전략에 있지 않고 훌륭하게 수립된 전략이 예상치 못한 불확실성을 만나기 때문이라고 정리한 바 있다. 훌륭한 전략은 환경의 불확실성에 따라 크게 성공할 수도 있고 크게 실패할 수도 있다. 성공과 실패 중 어디로 갈지는 사실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여기에서 ‘내 그럴 줄 알았다’는 사후 가정은 전략의 성공 확률을 높이는 데 아무 소용이 없다.
 
그렇다면 훌륭한 전략을 성공으로 이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훌륭한 전략이 처하게 될 미래의 불확실성에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시나리오 플래닝’이다.
 
시나리오 플래닝은 훌륭한 전략을 수립할 때 “환경이 이러이러할 것이니 이렇게 하기로 하자”라고 했던 가정을 근본적으로 다시 검토하는 과정이다. 훌륭한 전략이 처하게 될 미래의 여러 가지 상황을 몇 개의 시나리오로 구분한 다음에 각 시나리오에 맞게 전략을 따로따로 마련하는 ‘전략 포트폴리오’를 가져야 불확실성에 따른 전략의 실패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 물론 시나리오 플래닝만 가지고 전략 리스크를 온전하게 헤지(hedge)할 수는 없다. 누가 봐도 훌륭하게 만들어진 전략일수록 ‘이것이 최선이다. 이것 이외에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다’는 고집을 유발한다. 시나리오 플래닝은 훌륭하게 수립된 전략이 가지게 될 경직성을 부드럽게 완화하는 효과를 가함으로써 불확실성에 크게 휘둘리지 않도록 만드는 방법이다.
 
소니의 전략은 진짜 멍청했을까? 진짜 멍청한 전략은 무엇일까? 요즘 소니는 상당한 위험에 처했다. 그동안 그들이 세운 전략이 멍청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불확실성 때문일까?
 
 
유정식 인퓨처컨설팅 대표 jsyu@infuture.co.kr
필자는 포항공대 산업경영공학과에서 학사 학위를,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인퓨처(inFuture)컨설팅 대표를 맡고 있다. 전략 및 HR 분야에서 다수의 컨설팅 프로젝트를 수행했고 <시나리오 플래닝: 불확실한 미래의 생존전략> <경영, 과학에게 길을 묻다>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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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정식

    - (현) 인퓨처컨설팅 대표
    - 왓슨와이어트, 아더앤더슨 시니어 컨설턴트 역임
    - 기아자동차, LG CNS 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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