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은 세상을 움직인다 (Survival game)
경쟁은 인간을 더 열심히 일하게 만든다. 스타와 스토리를 만든다. 2011년 여름 대한민국의 TV예능은 오디션 프로그램이 대세다. 시청자는 누가 살아남을지 긴장하며 보고 출연자는 최선을 다해 남다른 모습을 드러내려 한다. 하지만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탈락한다고 거리에 나앉지는 않으니 알고 보면 넋 놓고 TV 보는 시청자들의 일상이 훨씬 더 치열하다. 경쟁에 담긴 사연과 스토리가 시청자를 끌어들였을 뿐이다. 방청객의 반응, 출연자 인터뷰는 스토리를 풀어가는 장치다. 올림픽이나 대선후보 경선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가장 치열한 경쟁은 ‘생존경쟁’이다. 누가 더 잘하나 봐서 돈이든 자리든 조금 더 주겠다는 ‘차별적 성과보상’ 정도와는 차원이 다르다. 우수사원, 좋은 기업이라고 상을 받아봐야 크게 달라지는 것도 없고 보너스 받고 승진했더라도 팔자를 고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잘못하면 일자리가 없어지고 아예 회사 경영권을 내놓아야 하는 생존경쟁과는 비교할 대상이 못 된다. 전쟁은 훨씬 더 치열한 생존경쟁이다. 이기면 남의 땅과 재산을 차지하지만 지면 다 뺏기고 죽거나 노예가 된다. ‘창의력 프로그램’ 같은 짓을 안 해도 죽기 살기로 신무기를 만들어야 하고 식량을 확보해야 한다. 겉치레나 그럴듯한 말 따위는 설 자리가 없다. 지배구조니, 경영권 승계니 고민할 필요도 없다. 못난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줘 봐야 버틸 수도 없고 같이 망해서 죽을까 봐 가신들이 먼저 반란을 일으킨다. 생사가 걸린 일에 남의 뒷다리 잡고 말 트집만 잡다가는 순식간에 목이 날아간다.
통신업체들의 ‘피가 마르는 마케팅 전쟁’이란 말이 있다. 과연 피가 마를까? 기술표준이 있고 규제당국에 의해서 시장구조가 짜인 상태에서의 마케팅 경쟁은 사실은 돈만 있으면 그리 어렵지 않다. (마케팅 예산을 놓고 벌이는 광고대행사, 판촉물 업자들의 경쟁은 치열하지만….) 통신시장과 기술의 변화를 내다보지 못해서 잘못된 투자를 하거나, 혹은 갖고 있는 고객기반에 집착하다 하루아침에 시장을 다 잃어버리면 회사가 바로 망한다. 이렇게 생존이 걸린 진짜 경쟁이 세상을 움직인다. 등수 매겨서 망신이나 주는 것은 이에 비길 바가 못 된다.
세상에서 원하는 것을 언제든 가질 수 없는 한 경쟁은 늘 존재한다. 다 같이 나눠 쓰려면 더 가지려는 욕망을 없애든지 누구든 다 가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2011년 대한민국에선 화석이 돼버린 칼 마르크스(Karl Marx)의 고민인데 경쟁에 지친 사람들에겐 가끔씩 ‘배려와 나눔’이란 아름다운 말로 다시 나타난다. ‘재원(財源)’이란 현실을 악역으로 동반해서….
경쟁이 빠진 일반론의 함정 (Competitive game)
경영학 책에는 경쟁을 생각하지 않는 황당한 일반론이 버젓이 등장한다. 강-약점과 기회-위협을 고려해서 전략을 도출한다는 SWOT를 생각해보자. 무거운 체중은 강점인가, 약점인가? 발레를 할 때는 약점이고, 씨름을 할 때는 강점이 된다. 같은 씨름을 해도 상대에 따라 다르다. 어떤 게임을 누구와 하느냐에 따라서 강-약점과 기회-위협이 달라지는데 SWOT 표를 그려서 전략대안을 도출한다고? 사실은 전략대안의 배경을 정리하는 방법일 뿐이다. ‘핵심역량’은 어떤가? 잘 모르는 일 함부로 하지 말라는 뜻이라면 수긍할 수 있지만 어떤 경쟁자와 어떤 게임을 할지도 모르는데 무턱대고 핵심역량을 찾는다면 리듬체조 선수든 투포환 선수든 무작정 토끼뜀을 100바퀴씩 돌게 하는 셈이다. 하물며 ‘핵심역량에 입각한 전략’에 집중하라니…. 오른손 펀치가 강한 권투선수일수록 상대는 여기에 대비하니 왼손 펀치가 잘 먹힐 수가 있고, 핵 펀치를 가진 선수와는 아예 누워서 싸우면 된다. (실제로 레슬링 선수 안토니오 이노키는 권투 세계챔피언 무하마드 알리와 이종격투기에게 이렇게 대응했다.)
학부 1학년 경제학 강의에서는 가격을 내리면 수요가 늘어난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경쟁을 생각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내가 가격을 내려도 경쟁자가 더 내리면 수요는 줄 수도 있고 사악한 경쟁자는 나의 현금이 바닥날 때를 기다려서 덤핑으로 내 숨통을 끊으려 든다. 경제학은 이런 상호작용을 산업분석에 도입하면서 게임이론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마일리지 프로그램(mileage program)이나 멤버십 포인트로 고객에게 혜택을 주면 경쟁사가 즉각 따라서 도입하고 결국 자기 고객을 지키는 효과에 그친다. 하지만 이런 경쟁적 상호작용의 결과로 고객들은 전보다 많은 혜택을 누리게 된다. 새로 경쟁에 뛰어든 업체는 고객들이 쌓아둔 마일리지가 없으니 불리하다. 일종의 경쟁제한 효과가 발생하지만 적극적 현금할인으로 대응하면 된다. 따라서 마일리지나 포인트를 무조건 현금으로 돌려주라는 주장은 경쟁의 이치를 모르는 얘기다.
경영학 책에 나오는 ‘필승의 전략’도 황당한 얘기다. 가위바위보와 같이 서로 수가 맞물리는 복합전략 게임(mixed strategy game)에서 ‘필승의 전략’ 따위는 없다. 우월한 전력을 갖고 있어도 몇 번의 전투에서는 질 수도 있고 작은 패배로 전쟁 자체가 달라질 수도 있다. 더구나 확실한 강점을 가진 전략이 있다면 상대방도 알 것이니 실전에서는 다른 백업 전략이 훨씬 잘 통한다. 게임이론 책 한두 권만 읽어도 다 아는 내용이다. 그런데도 왜 황당한 얘기들이 교과서에 버젓이 나올까? 경쟁을 교과서에 집어넣으면 설명이 복잡해진다. 경쟁자의 반응에 따라서 상황이 달라지면 설명해야 할 경우의 수가 늘어난다. 경쟁자가 의도적으로 바보짓을 하거나 엉뚱한 반응을 보이는 등 비합리적 전략을 쓰면 이론 자체가 흔들려버린다. 자기가 아는 이론에 안 맞으면 아예 현실을 무시하는 학자들에겐 짜증나는 일이다. 1페이지 왼쪽 끝에서 300페이지 오른쪽 끝까지 이어서 써야 하는 교과서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경영학 책에 경쟁이 나오다 마는 이유가 아닐까?
나의 경쟁자는 누구인가? (Competitive scope)
눈앞에 주어진 시장과 산업구조를 어쩔 수 없는 숙명으로만 받아들이는 개인이나 조직은 남의 뒤꽁무니만 따라다닐 뿐이다. 전략은 나에게 유리한 게임을 고르거나 만드는 데서 시작된다. 정당의 당내경선을 생각해보자. 경선에 출마하려면 먼저 규칙이 유리한지 봐야 하고 다른 후보와 연대를 하든지 적당한 조연을 끌어들여서 유리한 판을 만들어야 한다. 감동적으로 져서 다음 기회를 만들고 미래 경쟁자를 눌러줄 후보를 밀 수도 있다. 경선 자체를 엉망으로, 혹은 어이없는 해프닝으로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1990년대 미국의 PC제조업체는 돈을 벌기가 힘들었다. 윈도 운영체제를 쥔 마이크로소프트와 프로세서를 쥔 인텔이 마진을 다 가져가고 대형 전자제품 유통업체들의 입김이 거셌다. 전형적인 홀드업(hold-up) 상태이다. 한국, 대만에서 값싼 제품이 쏟아져 들어왔다. 여기서 델컴퓨터는 온라인 주문을 받아서 외주생산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게임 자체를 바꿨다. 2010년 애플은 이동통신 서비스와 이와 관련한 어플리케이션, 콘텐츠의 사업구조를 단말기 중심으로 돌려놓았다. 규제환경 때문에도 해외부문에 덜 민감하던 통신산업을 ‘범세계적인 문화현상’을 만들어서 애플을 중심으로 한 글로벌 게임으로 바꿨다. 예전 같으면 통신망에 부담이 가서 통신사들이 서비스에 탑재시키지 않았을 어플리케이션도 이젠 아이폰, 아이패드에서 인기를 끌면 통신사가 거부하기 어렵게 됐다.
눈앞의 제품과 기술만 놓고 경쟁을 생각하는 것도 미련하다. 대체재(substitute)가 있는 경우 경쟁의 폭은 훨씬 넓어진다. 영희를 짝사랑하는 철수는 앞집 삼식이를 경쟁자로 생각하지만 정작 영희는 수녀가 되고 싶어 할 수도 있다. 가발업체 사장은 대머리가 유행하면 망한다. TV제조업체는 누구와 경쟁을 하고 있을까? 방송 프로그램을 P2P 형태로 다운로드 받아서 컴퓨터 동영상으로 보는 사람이 많아졌고 아예 케이블을 직접 대형 모니터에 연결해서 TV 대신 사용하는 사용자도 늘고 있다. 컴퓨터에 모니터와 TV를 같이 연결해서 인터넷 검색과 동영상 감상, TV시청을 같이하면 스마트TV가 바로 구현된다. 책상에서 떨어져 편하게 보려면 마우스 대신 무선 리모콘을 쓴다. 평범한 10대들이 이미 자기 손으로 직접 구현하고 있고 일부 PC방에선 2000원만 내면 쓸 수 있는 서비스다. 삼성의 대표 제품들이 사라질 수 있다는 이건희 회장의 지적은 이미 ‘현재상황’이다. 방송사는 나의 제한된 시간과 관심을 놓고 인터넷, 동영상, 만화책과 경쟁하는 셈이다.
전혀 다른 방식의 제품과 기술이 나오면 소비자는 하루아침에 등을 돌린다. 어제까지 5.25인치 디스켓에 만족한다던 소비자가 3.5인치가 나오자 순식간에 돌아서고 다시 CD로 옮겨간다. USB메모리, 외장형 하드디스크나 메모리카드 때문에 CD도 사라지고 있지만 온라인 서버에 저장하는 클라우드 컴퓨팅이 본격화되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른다.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하버드대 교수가 말하는 현상파괴적 변화(disruptive change)인데 인텔의 CEO였던 앤드 그로브가 “편집증 환자나 돼야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이라고 장단을 맞춘 부분이다.
편집증 환자는 머리가 아프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길지, 심지어 하늘이 무너지진 않을지 걱정하기 때문이다. 외장형 하드디스크 업체인 시게이트 테크놀로지(Seagate Technology)를 생각해보자. 비슷한 업체들과 안정성, 속도, 원가, 판매망을 놓고 비교하면 구체적인 사업전략이 나온다. 그런데 잘 모르는 메모리카드 업체들과 비교하자니 벌써 머리가 아프다. 클라우드 컴퓨팅의 미래까지 생각하면 도대체 누구와 어떻게 경쟁해야 할지 막막해진다. 아파트 단지의 꽃 노점상이 동네 빵집의 메뉴나 약국에 새로 수입되는 강장제 가격에 신경 쓰는 꼴이다.
결국 경영자는 감당할 수 있는 범위까지 경쟁을 생각하는 운7기3의 도박을 하게 된다. 첨단의 기술, 혁신적 제품일수록 편집증은 더 심해진다. 미래 트렌드가 어떻게 전개될 것이라고 그럴듯하게 떠드는 분들이야 나중에 좀 틀렸다고 누가 시비 걸 리 없으니 마음 편하지만 한번 사업전략을 세워서 투자하면 돌이킬 수도 없는 기업가들은 자칫 3대가 망하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수많은 기업연구소들이 하는 ‘선행기술 연구’나 ‘기술동향 연구’는 경쟁의 폭을 조금이라도 더 넓게 내다보려는 조심스런 노력이 아닐까? (돈만 잔뜩 쓰고 황당한 걱정만 하는 편집증 환자라는 구박을 받곤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