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ty Innovation
편집자주
한국 최고의 마케팅 사례 연구 전문가로 꼽히는 김민주 리드앤리더 컨설팅 대표가 전 세계 도시의 혁신 사례를 분석한 ‘City Innovation’ 코너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급격한 환경 변화와 거센 도전에도 굴하지 않고 성공적으로 도시를 운영한 사례는 행정 전문가뿐만 아니라 기업 경영자들에게도 전략과 조직 운영, 리더십 등과 관련해 좋은 교훈을 줍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어른이 되기 전 누구나 한번쯤은 동화 속의 세계에 사는 자신을 상상하고 동화 속의 무대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꿈을 꾼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의 배경이 된 평화롭고 아름다운 스위스 산속 마을도 아이들의 상상 속에 자주 등장하는 동화 속의 무대다.
동화 속에서 하이디는 산꼭대기의 할아버지 집에 산다. 이 집 앞에는 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고 염소 떼가 노닌다. 꼬불꼬불 오솔길을 따라 매일 설레는 마음으로 하이디를 찾아오는 페터(Peter)와 친구 하이디 덕분에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는 부잣집 소녀 클라라(Clara)도 있다. 아이들은 ‘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읽으며 맑고 아름다운 알프스 초원을 뛰노는 자신을 상상한다.
그런데 동화 ‘알프스 소녀 하이디’의 실제 배경이 된 마을이 현실에 존재한다. 스위스의 조그만 마을, 마이엔펠트(Stadt Maienfeld)다.
1. 마이엔펠트는 어떤 곳인가?
마이엔펠트는 스위스 동남부에 위치한 그라우뷘덴주(Kanton Graubünden)의 작은 산골 도시다. 그라우뷘덴은 동북쪽으로 리히텐슈타인 공국과 오스트리아와 마주한 산악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그라우뷘덴은 스위스의 큰 행정구역(한국의 도에 해당)인 칸톤(Kanton) 중에서 가장 면적이 넓은 곳으로 전체 스위스 국토의 17.2%를 차지한다. 면적은 넓지만 대부분이 산악지대여서 인구밀도는 매우 낮다. 전체 스위스 인구의 2.5%가 이곳에서 살고 있다.
마이엔펠트는 시에 해당되는 슈타트(Stadt)로 불리지만 2010년 인구는 2554명에 불과하다. 그래도 성장하는 도시다. 2000년 인구가 2368명이었으니 10년간 인구가 11%나 늘어난 셈이다. 버스를 이용해 마이엔펠트에 가려면 스위스 동부쪽 가장 큰 도시인 취리히에서 자르간스까지 1시간, 다시 자르간스에서 마이엔펠트까지는 10분 정도 걸린다.
마이엔펠트의 가장 큰 수입원은 와인산업이다. 공기가 맑고 포도가 자라기 좋은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포도 농사와 와인제조산업이 크게 발달했다. 와인과 더불어 마이엔펠트의 큰 수입원이 하이디를 소재로 한 관광산업이다.
마이엔펠트는 시라고 하지만 깊은 계곡에 있는 작은 산골 도시다. 그런데도 이곳을 찾는 관광객은 연간 8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이는 대도시의 관광객 수와 비교하면 보잘것없게 들릴 수도 있지만 도시의 전체 인구(2500여 명)와 오지에 가까운 지리적인 위치를 고려하면 무시할 수 없는 수치다. 게다가 하이디 마을은 겨울에 눈이 많이 오는 곳이어서 1년 중 3월에서 11월까지만 개방된다. 말하자면 9개월간 8만 명의 세계 관광객을 매년 불러 모을 수 있다는 것인데 하이디가 아니었다면 실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2. ‘알프스 소녀 하이디’의 탄생 배경
‘알프스 소녀 하이디’는 여류작가 요한나 슈피리(Johanna Spyri, 1827∼1901)가 1880년 내놓은 동화다. 슈피리는 마이엔펠트가 아니라 취리히에서 25㎞ 정도 떨어진 히르첼(Hirzel) 마을 출신이다. 의사의 딸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슈피리는 변호사와 결혼해 경제적으로는 큰 어려움 없이 살았다. 그의 아들은 병약했다. 슈피리는 아들을 데리고 공기가 좋은 마을로 요양을 다녔다. 아들이 요양하기 좋은 장소를 물색하던 중에 친구의 소개로 온천 마을인 바트라가츠(Bad Ragaz)를 알게 됐다. 바트라가츠를 찾은 그는 바로 아래 동네인 마이엔펠트의 전원적인 풍경에 흠뻑 빠졌다.
슈피리는 ‘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단 3주 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이 동화에는 그 당시 현실이 그대로 반영돼 있다. 동화 속의 배경이 되고 있는 19세기 후반 스위스는 산업화 열풍에 빠져 있었다. 급격한 산업화 속에서 빈부 격차는 커져갔다. 당시 산골 마을에 사는 아이들 중 상당수는 학교에 가지 못하고 도시의 공장이나 시골 마을의 농장에서 일을 해야 했다. 부모가 없어 하이디처럼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맡겨진 아이들도 많았다. 입을 덜기 위해 자식을 목장에 보내는 부모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 아이들은 주로 산속에서 염소나 소떼를 돌보는 일을 했다.
동화 속 하이디는 역경을 이겨내는 ‘명랑소녀’로 그려진다. 실제로 하이디의 시대를 살아가는 상당수 어린이들에게는 사는 것이 고통 자체였다. 작가 슈피리는 주변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는 소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마이엔펠트에 살던 어린 소녀, 소년들의 생활을 직접 관찰하고 이 동화를 썼다고 한다. 우울한 현실을 살아가는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기 위해서 이 동화를 쓴 것이다.
3. 알프스 소녀와 마이엔펠트를 부활시킨 일본 만화영화
알프스 소녀와 마이엔펠트를 부활시킨 일본 만화영화 '알프스 소녀 하이디'
정보 유통의 속도가 느린 시절에 쓰여진 ‘알프스 소녀 하이디’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진 않았다. 하이디를 전 세계에 알린 것은 바로 일본의 만화영화였다. 1974년 일본의 다카하타 이사오(Takahata Isao)는 ‘알프스 소녀 하이디’라는 만화영화를 선보였다. 하이디 하면 떠오르는 볼이 빨간 귀여운 소녀의 모습이 바로 다카하타에 의해 탄생됐다. 다카하타는 직접 마이엔펠트까지 와서 그곳의 경치와 사람 사는 모습을 확인하고 이 만화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보기만 해도 마음이 즐거워지는 만화영화 속의 하이디와 산속 전원 생활을 보며 하이디와 그가 사는 스위스 산속마을에 대한 동경을 품게 됐다. 그리고 경치가 빼어난 산, 맑은 공기, 아기자기한 오솔길, 하이디가 금방이라도 뛰어나올 것 같은 마을 분위기에 이끌려 일본 관광객들이 마이엔펠트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사실 ‘알프스 소녀 하이디’는1937년 미국에서 흑백영화로 만들어져 큰 인기를 끈 바 있다. 천재 아역배우로 소문이 났던 셜리 템플(Shirley Temple)이 하이디 역할을 맡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줬다. 그러나 유럽에 하이디를 크게 알린 것은 바로 1974년에 만들어진 일본 만화영화였다.
오늘날 마이엔펠트를 찾는 관광객들의 출신 국가를 분석해 보면 일본인들이 단연 많다. 일본인이 전체 관광객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그 다음이 1937년 영화 속의 하이디와 스위스 산골 마을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미국인으로 전체 관광객의 4분의 1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나머지는 유럽인들과 기타 국가의 관광객이다.
4. 하이디 되르플리를 조성한 마이엔펠트
마이엔펠트에 가면 하이디 마을, 즉 하이디 되르플리(Heidi Dörfli)라는 동화 속 풍경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마을이 있다. 하이디 마을은 해발고도 660m의 산 중턱에서 시작돼 룬바발트(Lunvawald) 숲길, 페터의 집을 지나 고도 1111m에 위치한 하이디와 할아버지가 살던 통나무집으로 이어진다. 마이엔펠트 시와 관광청은 1998년 하이디 동화 복원 계획을 마련하고 하이디가 사는 마을인 되르플리를 복원했다. 오염된 세상, 테러에 시달리는 현대적 삶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자연에 대한 회귀 열풍이 전 세계적으로 불고 있을 때였다. 시당국은 마이엔펠트 고지대의 집들을 사들이고 이곳을 동화 속 하이디 마을로 조성했다. 그리고 이곳에 작가 슈피리가 동화 속에서 마이엔펠트 풍경을 토대로 그려낸 ‘되르플리’ 마을을 본떠 되르플리라는 이름을 붙였다. 1996년 동화 속 하이디가 살던 시절과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125년 정도 된 집을 사들이고 이 집을 하이디의 집으로 복원했다. 그 집에 있는 오래된 물건들을 그대로 전시하고 부족한 물건들은 그 시대에 맞게 복원했다고 한다.
복원된 하이디 집 안에 들어가면 비록 인형이기는 하지만 할아버지와 페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이디 침대는 물론 귀여운 옷이 걸린 하이디 옷장도 있다. 집안의 소박한 가구 및 농기구들을 보면 동화 속 하이디가 살던 시절의 스위스 산골 마을의 풍경과 사정을 어림 짐작할 수 있다.
“설마 하이디의 마을이 현실에 존재할까”라는 생각에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은 동화 속 마을 모습을 보고 큰 감동을 받는다. 작가가 마이엔펠트의 풍경을 직접 보고 동화를 썼기 때문에 이 마을이 인공적으로 조성됐다고는 해도 동화 속 마을과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진다. 하이디와 페터가 돌보던 염소 떼들이 동화와 만화영화 속의 모습처럼 한가로이 풀을 뜯는 모습과 하이디가 뛰어다니던 작은 오솔길을 보면서 동화 속의 세상에 온 듯한 착각에 빠진다.
5. 체험을 강조한 동화 마케팅
인간이나 도시나 운이라는 것이 있다. 마이엔펠트는 세계 어느 도시도 쉽게 얻을 수 없는 하이디라는 대행운을 만났다. 아마 마이엔펠트 주변의 도시들, 스위스 다른 산골 마을들은 “왜 작가 요한나 슈피리가 우리 마을에 와서 하이디를 쓰지 않았을까” 하며 아쉽고 부러운 마음이 간절할 것이다. 이렇게 모두 부러워하는 마이엔펠트에 또 하나의 행운을 가져다준 것은 물론 일본 만화영화 ‘알프스 소녀 하이디’다. 그 만화영화를 보고 수많은 전 세계 어린이들, 그리고 후에 어른이 된 사람들이 알프스 소녀 하이디에 대해서 환상과 동경을 품게 됐기에 마이엔펠트 하이디 마을은 탄생할 수 있었다.
마이엔펠트가 이런 행운을 거저 얻은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세계인들, 특히 일본 사람들의 하이디에 대한 상상을 초월하는 애정을 마이엔펠트 시 당국이 읽어냈다는 점이다.
첫째, 시 당국은 현대인들이 꿈꾸는 동화 속의 세상에 대한 동경을 간파하고 동화 속의 하이디마을을 현실에 그대로 옮겨 놓았다. 목가적이고 평화로우며 자연적인 삶이 어떠한 것인지를 잊고 살던 현대인들은 마이엔펠트의 하이디 마을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마이엔펠트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은 짧은 순간일지라도 자신이 사는 찌든 세상에서 벗어나 동화 속 자연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곳에 가면 현대인이 지니고 사는 모든 번뇌를 다 잊을 수가 있다. 방울을 딸랑거리며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염소 떼들과 함께 어우러져 지천에 핀 이름 모를 들꽃들을 보고 있으면 더는 부러울 게 없다. 이처럼 마이엔펠트를 다녀온 사람들은 마음에 지니고 있던 상처를 하이디의 밝은 웃음을 통해 치유를 받고 돌아온다.
둘째, 시 당국과 관광청은 하이디마을을 단순 복원하는 식의 하드웨어에만 신경 쓰지 않았다. 관광객의 상황을 고려해 어린 시절의 향수와 현실에서 얻을 수 없는 마음의 위안을 얻는 경험을 제공하기 위한 관광 코스를 치밀하게 설계했다.
마이엔펠트 기차역에 내리면 하이디가 사는 마을에 어울리는 아주 작은 역사가 관광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개인 관광객들이 쉽게 목적지를 찾을 수 있도록 시 관광청은 색깔로 이정표를 표시해주고 있는데 기차역에서 빨간색 표시를 따라가면 단거리 관광 코스가 나온다.
걷는 속도에 따라 보통 2∼3시간이면 돌아볼 수 있는 이 코스는 시내를 가로지르며 시청 등 시내 구경을 한 후 하이디 공원을 거처셔 최종 목적지인 하이디 마을에 도착하도록 돼 있다. 파란색 표시는 시간 여유가 있는 관광객들을 위한 장거리 코스로 총 6∼7시간이 소요되며 하이디 마을을 돌아본 후 작가 슈피리가 글을 썼다는 작은 마을까지 돌아보도록 짜여 있다.
셋째, 주변 지역의 자원과 연계해 관광지의 매력을 높였다. 단체 관광객들이나 주변을 천천히 돌아보고 싶은 사람들은 동화 속 클라라가 요양했던 바트라가츠 온천에 가서 온천을 한다. 바트라가츠는 동화 속에 길게 등장하지 않았지만 동화 속 내용을 그대로 살려 온천과 요양 마을이라는 이미지를 강조하고 있는데 하이디랜드라는 이름으로 관광객들을 끌어모으고 있다.
마이엔펠트는 동화 알프스 소녀 하이디의 배경일 뿐 그 어디에도 하이디의 흔적은 없었던 평범한 산골 도시였다. 이 도시는 스위스 산 자락 어딘가에 하이디의 마을이 존재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을 위해 동화 속 세계를 완전히 재창조해냈다. 산골 도시 일부 땅을 확보하고 헌 집들을 사들여 동화 속 모습과 똑같은 마을 모습을 복원해낸 것이다. 이를 통해 관광객들이 하이디가 그곳에서 살았다고 믿게 만들었다. 관광객의 욕구를 파악하고 주어진 자원을 절묘하게 활용해 관광자원화한 마이엔펠트시의 노력이 작은 스위스 산골 마을을 세계적인 관광지로 만들었다.
김민주 리드앤리더 컨설팅 대표 mjkim8966@hanmail.net
필자는 마케팅 컨설팅 회사인 리드앤리더 대표이자 비즈니스 사례 사이트인 이마스(emars.co.kr)의 대표 운영자다. 서울대와 시카고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했으며, 한국은행과 SK에너지에서 근무했고 건국대 겸임 교수를 지냈다. <로하스 경제학> <글로벌 기업의 지속가능경영> <하인리히 법칙> 등의 저서와 <깨진 유리창 법칙> 등의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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