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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바나의 원칙’, 뇌를 지배한다

정재승 | 24호 (2009년 1월 Issue 1)
미국 뉴욕대 심리학과 게리 마커스 교수가 쓴 신작 ‘클루지(Kluge)’에 따르면 우리 인간의 뇌는 ‘엉성하기 짝이 없는 애물 컴퓨터’다. 클루지는 사전적 의미로 ‘고물이지만 애착이 가는 컴퓨터’란 뜻이다. ‘서투르고 세련되지 않은 해결책’을 뜻하기도 한다. 체계적으로 미래를 계획하고 설계할 만큼 영리한 종족이지만 동시에 주의 깊게 짠 계획을 순간의 쾌락이나 즐거움 때문에 내팽개칠 만큼 어리석은 존재라는 얘기다. 인간은 진화적으로 아직 충분히 완성되지 않은 존재이며, 진화는 지난 수만 년 동안 순간적인 생존에 최대한 유리하도록 설계된 비효율적인 컴퓨터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우리는 다이어트를 결심하고서도 눈앞의 치즈 케이크나 삼겹살 때문에 내일로 미루기 일쑤고, 1만2만 원을 아끼기 위해 시내 반대편까지 걸어가서 할인마트를 이용하면서도 300만 원이 넘는 평면 텔레비전은 과감하게 ‘지르는’ 비합리적인 존재다. 사람들에게 ‘96% 무해한 음료수’와 ‘4% 유해한 음료수’ 가운데 하나를 반드시 고르라고 하면 무엇을 선택할까. 대부분의 사람은 96% 무해 쪽으로 선택한다. 똑같은 음료를 두고서 단지 ‘무해’라는 어휘가 주는 안정감 쪽에 끌리는 ‘프레임 효과’가 여지없이 통하는 종족이 바로 지구상에서 가장 ‘합리적인 동물’이라고 자처하는 우리 인간이다.
 
기억력은 또 얼마나 부실한가! 시간이 흐르면 왜 우리의 기억은 불분명해지는 걸까. 너무 많이 기억하거나 나쁜 기억을 간직하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롭지 않아서라는 ‘낭만적인 합리화’로 위안하기도 하지만 좋지 않은 옛일만 지워진다는 보장도 없고, 정확한 기억이 불필요하단 증거도 없다. 순간순간 생존을 염려하던 시대에 깊은 사고보다는 순간 반응이 목숨을 유지하는 데 유리했기 때문에 인간의 기억은 정확성보다 속도가 우선이었다는 것이 진화심리학자들의 설명이다. 우리가 종종 배우자와 누가 설거지를 할 차례인지를 놓고 매번 다투는 것은 자신이 예전에 설거지한 일은 명확히 기억하지만 상대방이 한 설거지는 잘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전반적으로 더 많은 일을 했다고 믿고 심지어 불끈 화를 내기도 한다.
 
합리적 인간’이 쾌락을 찾는 이유
인간이 늘 미래를 계획하고 설계하는 합리적인 존재이면서도 충동구매를 하고 불합리한 선택을 반복하는 이유는 우리가 다른 동물 못지않게 쾌락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영국의 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회의 시간에 섹스에 대한 공상을 하는 사무원이 3명 중 1명꼴이라고 한다. 우리의 마음은 중요한 순간에도 이따금 딴 데 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심리적 공백으로 우리가 잃게 되는 경제적 손실은 무려 15조 원에 이른다고 하니 이만저만한 손실이 아니다. 우리가 해로운 줄 알면서도 흡연, 섹스, 비디오게임, 인터넷 등의 중독에 빠져드는 것도 같은 원리다. 한 기결수가 90일의 금고형을 선고받은 뒤 89일째 되는 날 감옥에서 탈출을 시도한 실화는 인간이 얼마나 충동적인지를 보여 주는 전형적인 사건이다. 당장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10만 원짜리 자기앞수표와 3년 동안 현금으로 바꿀 수 없는 20만 원짜리 수표 가운데 앞의 것을 선택하는 사람이 많은 현상도 비슷하다. ‘오늘 10만 원’을 ‘3년 후 30만 원’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뇌가 바로 우리의 클루지다. 진화는 우리가 행복하도록 우리를 진화시킨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복을 추구하도록 진화시켜 왔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제적 선택은 이런 계획적인 소비와 충동구매 사이에서 벌어진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아주 합리적으로 구매하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조금만 더 사려 깊게 생각하면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데도 충동적이거나 세련되지 않은 선택을 하는 것은 ‘최적화가 진화의 필연적인 결과가 아니라 진화 속에서 생겨날 수 있는 하나의 가능한 결과일 뿐’이기 때문이다. 진화는 이전 결점을 서둘러 고쳐 나가는 ‘땜장이’의 처지와 비슷하다. 자연 선택은 당장 이로운 유전자들을 선호하고 장기적으로 더 나을지도 모를 대안들을 폐기하는 경향이 있다. 마치 오늘 사용한 편법이 내일 문제가 되더라도 지금 당장 제품을 팔아야만 하는 경영자의 처지와도 비슷하다고나 할까.
 
이렇게 생존에 위협을 받으면서 안전을 지향한 초기 인류 시절의 사고방식 위에 지금의 판단 체계가 세워졌다는 것은 복잡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의 비극이다. 세상은 ‘제온 5100 듀얼코어 프로세서’ 속도로 돌아가고 있는데 우리의 뇌는 1만 년 전 원시 사회에서 안전하게 살아남으면서 자신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데 안달이 나도록 디자인돼 있다. 그래서 위대한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도 말하지 않았던가. “나는 천체의 운동을 계산할 수 있어도 사람들의 광기를 계산하지는 못한다.”
 
1만 년은 우리의 몸이 그 사이에 등장한 사물들에 적응하려고 변화하기에는 매우 짧은 시간이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1만 년도 더 전에 우리 조상이 지닌 것과 똑같은 진화된 심리적 기제를 아직까지 지니고 있다. 이것을 ‘사바나 원칙(Savanna principle)’이라고 부른다. 복잡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뇌는 아직도 사바나 원칙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세상의 비극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아줌마들은 샤넬 가방을 보면 쾌락의 중추가 자극받고, 아저씨들은 근사한 술을 보면 쾌락의 중추가 요동을 친다. 이 요동이 충분하기만 하면 바로 구매 행위로 이어진다. ‘남들이 다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샤넬 가방을 살 가치가 있으며, ‘너는 내 진정한 친구야’라는 친구의 한마디는 한 턱을 내기에 충분하다. 형편이 안 되도 상관없다. 카드 할부라는 제도가 있으니까.
 
쾌락의 중추가 요동치지 않는다면? 남들보다 덜 요동친다면? 그래도 상관없다. 이때를 대비하기 위해 준비해 놓은 비장의 무기인 다니엘 헤니와 이효리가 있으니까. 헤니가 가방을 권하고 이효리가 술을 흔들면 우리의 쾌락의 중추는 누구나 요동을 칠 것이다.
 
더욱 불행한 것은 우리는 자신이 술 때문에 쾌락의 중추가 자극받은 것인지 이효리 때문에 쾌락의 중추가 자극받은 것인지 구별하지 못한다. 헤니가 가방을 권하면 내가 마치 가방을 받은 것처럼, 내 남편이 가방을 선물한 것처럼 착각한다. 그리고 그 순간만큼은 내 삶의 질이 단번에 올라간다. 멋진 이성이 우리의 원시 뇌를 자극하듯이 현대 소비사회에선 ‘명품 브랜드’가 그 역할을 하고 있다.
 
편집자주 비즈니스에서 성공하려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인간의 의식구조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과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정재승 교수가 인간의 뇌에 대한 최신 연구 성과 및 경제적 의미를 연재합니다. 인간 심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만나 보기 바랍니다.
 
필자는 카이스트 물리학과에서 학부, 석사, 박사 과정을 마쳤다. 미국 예일대 의대 정신과 연구원, 고려대 물리학과 연구교수를 거쳐 카이스트 바이오 및 뇌공학과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정재승의 과학콘서트> <도전, 무한지식> 등이 있다.
  • 정재승 정재승 | - (현) 카이스트 바이오 및 뇌공학과 부교수
    - 미국 컬럼비아의대 정신과 교수
    - 예일대 의대 정신과 연구원, 고려대 물리학과 연구교수
    jsjeong@ka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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