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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경영

절묘한 진법, 구체적 교육에서 나온다

임용한 | 16호 (2008년 9월 Issue 1)
삼국지의 주요 등장인물 대부분은 무장이다. 잊지 못할 명장면들이 펼쳐지는 장소도 거의 모두가 전쟁터다. 그렇다면 삼국지는 전쟁문학일까? 아이러니하게도 삼국지에서 사실성이 가장 결여된 부분이 전쟁 장면이다.
 
우선 관우, 장비, 여포의 카리스마를 대변하는 상징물인 청룡언월도, 장팔사모, 방천화극부터가 허구다. 이런 무기는 송나라 이후부터 제작되기 시작했다. 실제 원소의 100만 대군은 10만, 형주 공격 때 동원한 조조의 100만 대군은 15만, 적벽대전 때는 25만 명 정도였다. 제갈량은 운남 원정에서 일종의 지뢰를 이용해 대승을 거두는데, 이 시대에는 화약이 발명되지 않았다. 적벽 하늘을 태우고, 화공 때마다 등장하는 유황도 이 시대에 없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전쟁과 관련해서 삼국지가 남긴 최고의 허구는 바로 진법이다. 팔문금쇄의 진부터 시작해 삼국지에 등장하는 진법은 환상적이다. 진이 한 번 발동되면 사방이 제대로 보이지 않고, 병사들이 몇 배로 늘어나며, 심하면 안개가 끼고, 환상 속에 적군을 가두기까지 한다. 이 영향으로 진법을 계략이나 함정과 동일시하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진법 자체를 허구로 간주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조선 초기에 정도전이 만든 진법이 있다고 하면 정말 그런 것이 있었냐고 흥분하는 사람을 여러 명 봤다.
 
전투는 팀플레이, 진법은 軍의 대형
그러나 진법은 신비한 전술이 아니다. 그저 군의 대형일 뿐이다. 전투는 격투기가 아니고 팀플레이이기 때문에 적절한 분업과 대형이 필요하다. 이 원리는 현대전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다. 우리나라에서 진법 연구가 활발하던 때는 조선 초기였다. 정도전, 하륜, 변계량, 하경복이 차례로 진법을 저술하고 나중에 문종과 세조도 뛰어들었다. 당시에 군사제도를 대대적으로 개혁하다 보니 새로운 진법이 필요했던 것이다.
 
진법의 목적은 조직의 목적과 같다. 바로 조직의 역량을 극대화하고, 환경 변화에 신속하게 대처하며, 조직 운영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다. 진법에서 사용하는 대형은 일반적으로 사각, 삼각, 원형, 직선, 곡선 형태를 기본으로 한다. 돌격할 때는 삼각형, 수비할 때는 사각형, 포위되면 원형, 포위할 때는 곡선(날개)형을 주로 사용한다. 이렇게 말하면 간단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반월형, 학익, 장사진 등 대형 종류가 많고 또한 대단히 복잡하다. 여기에 새로운 조합이 가해진다. 진은 모든 부대가 똑같은 형태로 포진하는 것이 아니라 부대별로 다른 대형을 형성하며 움직인다. 중군은 사각, 우군은 삼각, 좌군은 곡진, 후군은 사각이다.
 
또 진마다 내부에 여러 병종을 적절히 배치해야 한다. 옛날 군대의 병력 구성은 지금보다 더 복잡했다. 병종은 크게 기병, 보병, 궁병으로 구분된다. 기병에는 중장, 경장의 구분이 있으며, 무기를 기준으로는 기창병과 기궁수로 나뉜다. 보병도 장창병, 단창병, 도수, 궁수, 노수(석궁), 도부수(도끼), 방패, 돌팔매, 총통(화약무기) 등의 병종이 있다. 당연히 이 배치도 진의 형태와 지형, 전술목적과 상대에 따라 적절하게 맞춰야 한다. 이 요인들을 모두 반영해서 순열 조합을 계산하면 엄청난 숫자가 나온다.


 
패턴 익혀뒀다 실전 때 적용
물론 이것은 이론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며, 전투 중에 무궁무진하고 다양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무엇보다 무선통신 기술이 없던 시대여서 신속한 연락과 일사불란한 지휘가 불가능했다. 따라서 깃발과 소리로 신호를 보내야 했다. 북을 치면 전진이고, 징을 치면 후퇴다. 북이나 징이 빠르게 울리면 빨리 움직이고, 천천히 울리면 천천히 움직인다. 이것도 훈련 때는 가능하지만 전투 중에는 잘 들리지도 않을 뿐더러 아군과 적군의 소리, 부대별 신호가 서로 뒤섞여 누가 어느 부대로 보내는 신호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전투 중에 복잡한 기동과 변형은 불가능하다. 대개는 적의 진형을 예상하고, 미리 익혀둔 패턴대로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론적으로는 온갖 변화가 가능하고, 지형과 상황도 다양하므로 진의 변화를 설명하기는 해야 했다. 요즘의 사관학교라면 하나하나 사례를 연구하고 세미나를 했겠지만, 옛날에는 교본으로 정리했는데 한 권의 책에 그 모든 것을 다 서술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묘안을 짜냈다. 진법에는 기본 형태만 서술하고, 다양한 응용과 변화 방식에 대해서는 원리만 제시하는 것이다. 참 좋은 아이디어라 할 수 있는데, 문제는 이 원리를 형이상학인 오행사상에서 찾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용이 이렇게 심오해졌다. 

“사각진은 토, 원진은 금, 곡선진은 수, 직선진은 목, 삼각진은 화이다. 상생의 원리로 보면 금은 수, 수는 목, 목은 화, 화는 토, 토는 금을 각각 낳는다. 상극의 원리로 보면 수는 화, 화는 금, 금은 목, 목은 토, 토는 수를 각각 이긴다.” 이렇게 복잡하게 써넣고 보니 미안했는지 다음과 같은 후기를 달았다. “가르쳐 익히기가 참으로 어려우므로 사각진만 가르치는 것이 좋다.”
 
500년 전의 병서지만 이 한 줄의 서술은 우리 사회가 지닌 전통적인 병폐 하나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일반화와 추상화를 지나치게 좋아한다. 그렇게 해야 무게가 있고 권위가 있어 보인다. 전쟁사 서술이나 주석을 보면 손자의 명언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완전완승이다”로 마무리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이 말이 적용되지 않는 전투가 있을까? 손자의 말은 보편적인 전제일 뿐이다. 교육은 이 전제를 실현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지, 그 전제를 되새김하는 것이 아니다.
 
전술 교육이든 경영 실습이든, 또는 개인의 경험을 정리하는 과정이든 간에 경험과 교육은 매우 구체적으로 서술되고 정리돼야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구체적인 내용을 제시하는 사례분석 같은 교육을 똑같은 상황이 발생하기 이전에는 별로 쓸모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일회용 치료제보다 다양한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명제나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요구한다. 기껏 사례교육을 실시해도 피교육자 스스로 그 사례에서 명제를 도출, 추상의 세계로 회귀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는 커다란 오류를 불러들일 수 있다. 추상적 명제를 암기한다고 해서 현실 대처 능력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개별 사례를 정확히 분석하는 것이 현실 대처 능력을 향상시키는 지름길이다. 대표적인 게 진법이다.
 
의외의 전술 택한 정도전의 진법
조선 초기에 정도전이 저술한 진법은 의외의 전투 방식을 채택했다. 적과 부딪히면 전위는 수비만 하고, 후위가 전개해서 적을 공격한다는 것이다. 좌익과 우익은 후위가 공격할 때 합세하거나 별도로 적의 약한 곳을 친다. 정도전의 이런 진법에 대해 당장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모든 비난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너무 소극적이다, 공격은 최선의 방어다, 적을 공격할 때 기동이 복잡하고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후위가 나아가 적을 공격하면 후방 기습에 무방비 상태가 된다 등등.”
 
이런 비난에 기름 붓는 격으로 정도전은 이 진법을 사용하는 이유를 이렇게 적었다. “패해도 망하지는(괴멸되지는) 않는다.” 그것도 여기저기에서 몇 번씩이나 이런 이유를 적어뒀다. 그야말로 소심한 문관, 전형적인 관료적 사고의 결과물처럼 보인다. 정도전은 병사들의 훈련을 위해 진의 운영 방식을 노래로 만들었다. 여기에도 “패해도 망하지 않는다”는 구절이 있다. 병사들이 “우리는 패해도 망하지는 않는다”라고 노래하면서 행군하는 모습은 좋게 봐주기 어렵다.
 
그러나 정도전에 대한 비판은 일반적 명제, 추상적 사고에 기초한 전형적인 접근 방식의 결과물이다. 추상적 사고에 기초한 논쟁을 아무리 벌여봐야 승부를 내기 어렵고, 좀 더 유용한 개선책을 찾을 수도 없다. 정도전의 ‘선방어 후공격’이란 전투 방식을 평가하려면 당시 조선군의 현실을 분석하고, 이것이 조선군에 적절하며 효율적인 것인지 평가해 봐야 한다.
 
조선은 건국 후 군제개혁을 단행했다. 군의 군벌화를 막는 것이 핵심이었다. 고려시대에 무신들의 쿠데타를 진절머리가 나도록 경험한 조선의 정략가들은 쿠데타를 방지하기 위해 군부의 사적 인맥을 차단하고 전문 무사 계급을 해체했다. 고려시대만 해도 같은 지역 사람들이 서로 장교가 되고 병사가 됐지만, 조선 군대는 오늘날처럼 전국에서 징병한 병사들로 채워졌다. 이렇게 하니 정말로 쿠데타 발생은 불가능해졌다. 대신 전투력이 뚝 떨어졌다. 특히 부대 간의 단결력이 떨어지고, 백병전을 담당할 무사가 부족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군대의 맨 앞에 서는 부대는 방패부대다. 원형 방패를 든 그리스와 로마의 중장보병은 최강의 전사들이었지만, 조선의 방패부대는 최하 등급의 부대였다. 조선 시대에 부대원을 뽑을 때는 보통 시험을 봤다. 방패부대는 활쏘기 같은 전투 능력을 전혀 점검하지 않고 달리기와 힘만 시험했다. 양손에 각각 50근짜리 돌을 들고 260m 이상을 걸어가면 합격이었다. 즉 건강한 성인남자라면 누구나 될 수 있는 병종이 바로 방패였다. 두 번째로 약한 부대가 창과 검을 사용하는 보병이다. 그래서 정도전은 이들에게 공격이 아닌 수비 임무를 부과한 것이다.
   
 
패해도 망하지 않는다”
대신 정도전은 가장 강한 부대가 공격을 담당토록 했다. 조선군 최강의 병종은 궁수와 기병이다. 조선의 궁수는 중국군에 비해 적어도 2배, 일본군보다는 5배 이상의 위력을 발휘했다.(일본군 궁수의 기본 사거리는 25m, 조선군은 140m였다. 같은 거리에서 화살의 속도와 위력도 훨씬 강했다) 돌격해 오는 적군을 오직 화살 공격만으로 저지하거나 괴멸시킬 수 있는 군대가 바로 조선군이었다. 그러므로 사격의 위력을 극대화하려면 적군의 이동거리를 최대한 늘려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적이 다가오게 하는 것이다. 적을 최대한 근접시키고, 진 앞에서 오랫동안 화망에 노출시키며, 상대적으로 약한 타격력을 보완하기 위해 후위와 좌우익이 합쳐서 적을 공격하면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정도전이 말한 “패해도 망하지 않는다”는 말에는 치명적인 패배를 피할 수 있다는 의미도 있지만, 수비만으로도 적에게 상당한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의미까지 담겨 있다.
 
전위의 수비 전술은 수동적이거나 소극적 대응이 아닌 사격을 위한 전술이다. 이렇게 적을 최대한 두들기는 동안 후위가 좌우익과 합세해 적의 약한 곳을 공격하면 상당한 성과를 볼 수 있다. 부족한 공격력을 병력으로 상쇄하고, 또 하나의 장기인 기병을 활용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구체적인 현실을 대입해 보면 정도전의 생각이 옳았고 적절했다. 그리고 이런 눈으로 진법을 분석하는 사람은 ‘공격이냐 수비냐?’라는 헛된 논쟁에 빠져들기보다 이 진법의 성패를 가늠하는 요인이 궁수의 파괴력을 최대한 높이는 데 달려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실제로 이런 깨달음이 세종 시절의 화포와 화차 개발로 이어졌다.
  • 임용한 임용한 | - (현)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의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저술
    yhkmy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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