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강 상무를 구하라
드디어 성과평가의 기간이 돌아왔다.
지난 연말 성과평가는 미래생명사업본부가 구성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고, 아직 프로젝트도 구체화되지 않았으며, 더군다나 팀원들을 평가할 만큼의 스킨십도 많지 않았던 상황에서 아무래도 형식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이번이 이 회사로 이직 후 진행하는 실질적인 첫 번째 성과평가.
내가 매긴 성과평가 결과가 성과급에도 반영이 되고, 더 나아가 구성원들의 승진을 비롯한 향후 회사 생활에까지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니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신뢰할 수 있는 결과를 내놓을 수 있을까?’
자칫 나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누군가가 불이익을 당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누가 봐도 납득할 수 있는 객관적인 평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결국, 나의 선택은 회사의 평가지표 외에 우리 팀원들의 성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나만의 가이드라인’을 작성해 활용하는 것.
오직 업무 수행 성과에만 의거해서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팀원들도 공감하는 결과를 내기 위해 지난 일주일 동안 고심하며 작성한 가이드라인의 항목만 무려 47개!
줄이고 줄여서 다시 30개 항목으로 만든 이 내용을 팀원들에게 배포하고 미리 작성해 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이와 함께 개인별 업무수행계획과 수행실적을 바탕으로 한 최종 평가는 개별 면담을 통해 모두가 동의하는 선에서 확정하고자 한 것이다.
더불어 이 껄끄러운 기회를 계기로 팀원들과 한층 더 가까워지고 소통하는 기회로 삼고 성과평가의 취지도 알려줄 겸 직원들과 개별 사전 면담을 진행하기로 했다.
흠흠… 첫 번째 사전 면담자는 좀 불편하긴 하지만 매도 먼저 맞는 편이 낫다고, 가장 불편한 관계를 이어오고 있는 박 수석연구원을 방으로 호출했다.
내가 만든 가이드라인 문항들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던 박 수석연구원이 길게 이어진 정적 끝에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각 항목마다 A부터 E까지 자가 평가를 우선 해보라는 거죠?
“그렇죠. 근태관리부터 업무 실적까지… 객관성을 보장하는 항목으로만 넣어놨으니 부당하게 느껴지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고 나면 본부장님이 빨간 펜으로 첨삭 지도를 해주시는 거고요?”
“….? 처.. 첨삭.. 지도라뇨? 관리자 입장에서 판단한 결과를 제시하고 최종 합의점을 찾겠다는 거죠.”
“이런 말씀드리기는 좀 그렇지만요. 항목 몇 개만 좀 보겠습니다. 담당 업무를 얼마나 많이 처리했는가? 이건 대체 뭘 기준으로 잡는 겁니까? 그동안 결제 받은 서류가 많으면 A, 적으면 E 등급인가요?”
“그.. 그건….”
“(말을 가로채며) 실행 가능한 프로젝트를 얼마나 수행했는가? 그럼 신상품을 기획했는데 기술적인 문제 때문에 포기한 프로젝트는 무리한 기획을 한 직원이 문제인가요? 아니면 기획을 따라가지 못하는 연구직원이 문제인가요?”
“혹시 이 가이드라인이 박 수석의 성과평가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 같아서 그러는 겁니까?”
그러자 박 수석연구원의 얼굴이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단호한, 어쩌면 불쾌한 표정으로 바뀐다.
“지금, 시험 보십니까?”
“!?!?”
“직원들의 직급이 다 다르고 업무가 다 다른데 어떻게 똑같은 표 한 장을 놓고 시험 점수 매기듯이 점수를 내겠다는 거죠? 그것도 회사 평가 기준이 엄연히 있는데 본부장님 마음대로 말입니다. 물론, 그게 더 좋은 기준이라면 당연히 받아들이겠지만요.”
“아, 아니.. 난.. 아무래도 객관적인 지표를 동일하게 모든 구성원에게 적용하는 게 공평할 것 같아서 그런 겁니다만….”
그러자 이번에는 황당한 표정을 짓는 박 수석연구원.
“본부장님. 우리 사업팀의 전 과장이나 임 주임, 손 사원만 해도 연봉과 연차가 다 다르고, 그만큼 회사에서 기대하는 성과도 다 다른 것 아니겠습니까?”
“그.. 그렇.. 겠죠.”
“아니, 어떻게 똑같은 잣대가 공평한 잣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이해가 안 되네요. 구성원들이 다 다른데 말이죠. 그리고요. 이 가이드라인에 오직 ‘성과’와 ‘수치’만 제시돼 있는데요. 우리 팀에서는 오직 성과만 내면 좋은 직원입니까? 조직 분위기를 해치거나 업무 사기를 떨어뜨리는 직원도요?”
!!!!!
“이렇게 수치나 객관성에 집착하시는 이유가 뭔지는 알겠는데요. 그렇게 부하직원 평가에 자신이 없으시면 어떡합니까?”
이어서 정곡을 찌르는 듯한 박 수석연구원의 마지막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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