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니어엔 ‘튜터’, 시니어엔 ‘에이전트’
업무 숙련도 따라 AI 역할 달리해야
Article at a Glance
생성형 AI가 자료 조사, 초안 작성, 데이터 정리 같은 주니어의 업무를 빠르게 대체하면서 기업의 전통적인 경력사다리가 흔들리고 있다. 문제는 이런 저난도 업무가 단순한 허드렛일이 아니라 시행착오와 피드백을 통해 판단력과 전문성을 쌓게 하는 ‘학습 과정’이었다는 점이다. AI는 숙련자의 반복 업무를 덜어주는 인지적 오프로딩 수단이 될 수 있지만 초심자에게는 필요한 사고와 경험까지 대신하는 인지적 아웃소싱으로 작용해 숙련 형성을 방해할 수 있다. 따라서 같은 AI라도 주니어에게는 질문과 검증을 유도하는 튜터로, 중간 숙련자에게는 판단을 비교·보완하는 코파일럿으로, 전문가에게는 반복 업무를 위임하는 에이전트로 다르게 활용해야 한다. 기업교육 역시 표준화된 교육과정을 제공하는 데서 벗어나 실제 업무 흐름 속에서 어떤 경험을 사람이 직접 겪게 하고, 어떤 일을 AI에 맡길지를 설계하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 결국 AI 시대 교육팀의 핵심 역할은 사라지는 업무 경험을 대신할 새로운 성장 경로를 만들어 미래의 시니어가 자랄 수 있는 경력사다리를 다시 설계하는 데 있다.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vq5WhoPCWQ8 캡처
가브리엘 페테르손2026년 3월 미국 경제지 『포천』은 스웨덴 출신의 한 22세 청년을 소개했다. 인구 5000명 남짓한 소도시에서 자란 가브리엘 페테르손이다. 그는 고등학교를 중퇴해 대학은커녕 고교 졸업장도 없다. 그런데 현재 그의 직장은 세계 최고 수준의 AI 인재들이 모인 오픈AI다. 영상 생성 모델 ‘소라(Sora)’ 팀의 연구자로 일하며 억대 연봉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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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손을 이 자리까지 이끈 것은 학위가 아니라 독특한 학습 방식이었다. 그는 스타트업 사무실 소파에서 1년간 숙식을 해결하며 실제 프로젝트에 매달렸다. 모르는 개념에 부딪히면 AI에게 “다섯 살 아이에게 설명하듯 알려달라”고 요청했고, 이해가 될 때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질문했다. 그는 이를 ‘재귀적 빈틈 채우기(recursive gap filling)’라고 부른다.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에 뛰어든 뒤 필요한 지식을 거꾸로 파고들며 빈틈을 하나씩 메우는 방식이다. 확산 모델(diffusion model)처럼 대학원에서나 배울 법한 개념도 프로젝트에 필요하면 AI와 문답을 거듭하며 며칠 만에 익혔다.
역설적이게도 같은 시기, 이와 다른 방향의 데이터가 확인되고 있다. 스탠퍼드 디지털경제연구소의 에릭 브린욜프슨 연구팀이 미국의 급여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생성형 AI 확산 이후 AI 노출도가 높은 직군에서 22~25세 초년생 고용이 약 16% 감소했다고 발표했다. 같은 직군 내에서 신입이 아닌 경력자들에게는 이런 감소 추세가 나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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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대 연구진이 6200만 명의 이력서와 28만5000개 기업의 채용공고를 분석한 결과도 비슷하다. 생성형 AI를 도입한 기업에서 주니어 채용은 6개 분기 만에 약 8% 줄어든 반면 시니어 고용은 오히려 늘었다. 연구진은 이 현상에 연공 편향적 기술 변화(seniority-biased technological change)라는 이름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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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장면을 나란히 두고 보면 우리 시대 인재육성의 역설이 선명해진다. AI는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개인 학습 도구가 됐지만 동시에 조직 안에서 인재가 성장하던 경로를 지우고 있다. 개인은 그 어느 때보다 빨리 배울 수 있게 됐는데 조직은 그 어느 때보다 사람을 키우기 어려워졌다. 이 간극을 메우지 못하면 기업은 5년 뒤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게 된다. “AI가 주니어의 일을 대신하게 되면 미래의 시니어는 누가, 어떻게 키울 것인가.”
사다리는 이미 흔들리고 있다:
2026년의 데이터 생성형 AI가 가장 빠르게 흡수한 업무 목록을 살펴보자. 자료 검색, 데이터 정리, 초안 작성, 회의록 정리, 기초 분석 등 정확히 조직 내 신입들의 과업이다. 문제는 이 과업들이 단순한 허드렛일이 아니었다는 데 있다. 투자은행의 애널리스트는 수백 장의 피치덱(투자자나 의사결정자에게 사업·프로젝트의 핵심을 짧게 설명하고 설득하기 위한 발표자료)을 만들며 거래 구조를 익혔고, 로펌의 1년 차 변호사는 수많은 문서를 검토하며 계약의 감각을 길렀으며, 신입 기획자는 회의록을 쓰며 조직의 의사결정이 실제로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배웠다. 결과물의 관점에서 보면 낭비였을지 몰라도 학습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이 곧 커리큘럼이었다.
그 커리큘럼이 AI 확산으로 지금 해체되고 있는 것이다. PwC가 27개국 10억 건 이상의 채용공고를 분석한 2026년 ‘AI 일자리 바로미터(AI Jobs Barometer)’에 따르면 AI 노출도가 높은 직군의 신입 공고는 노출도가 낮은 직군의 신입 공고보다 7배 높은 확률로 전략적 의사결정, 이해관계자 관리, 리더십 같은 경력자의 스킬을 요구했다. 이들 직군의 신입 공고에 새로 등장한 스킬의 52%는 전통적으로 숙련자에게 기대되던 역량이었다. PwC는 이를 시니어화(seniorization)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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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 일자리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신입이 갈 수 없는 일자리로 변한 것이다. 뉴욕 연방준비은행 데이터에서 2025년 4분기 미국 최근 대졸자 실업률은 5.7%로 전체 평균을 웃돌았고 전공과 무관한 일을 하는 불완전고용률은 42.5%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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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만 나오면 첫 직장은 보장된다던 수십 년간의 공식이 뒤집힌 것이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한국 대기업의 인재 육성 모델은 이 충격에 구조적으로 더 취약하다. 지난 수십 년간 한국 기업의 인재 육성은 ‘대규모 신입 채용 → 저난도 업무 수행 → 선배의 피드백 → 순환배치 → 숙련과 승진’이라는 정교하게 맞물린 사슬로 작동해 왔다. 신입은 난이도 낮은 업무를 하며 조직을 배우고, 선배는 그 결과물을 고쳐주며 후배를 키우고, 회사는 순환배치로 제너럴리스트를 만들어 관리자와 임원으로 올려 보냈다. 채용, 육성, 평가, 승진, 승계가 모두 이 사슬 위에 설계돼 있다.
문제는 AI가 이 사슬의 첫 고리인 업무를 잘라내면 뒤의 고리들이 연쇄적으로 헛돌게 된다는 점이다. 신입에게 맡기던 보고서 초안, 데이터 취합, 회의 지원 업무가 AI로 넘어가는 속도는 이미 현장에서 체감되고 있는데 그러면 선배는 무엇을 피드백하고, 회사는 무엇을 근거로 순환배치와 승진을 결정해야 하는가. 난이도 낮은 업무를 반복하며 익숙해지고 어깨너머로 보고 배우던 육성 시스템의 대체재는 아직 설계되지 않고 있다.
허드렛일이 사라지면 전문가가 사라지는 이유
: 학습 공백의 인지과학 그렇다면 지루하고 반복적인 일은 AI에 맡기고 사람은 더 고차원적인 판단과 창의적인 일에 집중하면 되지 않을까. 문제는 일이 그렇게 단순하게 나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New Future of Work 2025’ 보고서는 생성형 AI가 인간이 기울이는 ‘노력의 위치(locus of effort)’ 자체를 바꾼다고 설명한다. 과거에는 문제를 정의하고 자료를 검토하며 답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사람이 끊임없이 생각하고 판단했다면 생성형 AI를 활용할 때는 AI가 먼저 만들어낸 여러 결과물 가운데 무엇이 더 나은지를 선택하는 쪽으로 인간의 역할이 이동한다는 것이다.
필자 역시 이런 변화를 체감한다. 과거에는 조직의 문제를 처음부터 스스로 정의하고 해결책을 고민했다면 요즘은 생성형 AI에 먼저 질문을 던진 뒤 AI가 제시한 여러 선택지를 놓고 생각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비유하자면 논술형 문제를 직접 풀던 방식에서 AI가 만들어준 4지선다형 문제의 답을 고르는 방식으로 바뀐 셈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사람이 직접 고민하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판단하는 기회가 줄어든다는 점이다. 전문성은 단순히 정답을 많이 아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정의하고, 가설을 세우고, 틀린 답을 수정하는 수많은 판단의 축적을 통해 만들어진다. AI가 이 과정의 상당 부분을 대신하면 당장은 일이 빨라질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이 약해질 수 있다. 이것이 생성형 AI가 가져올 수 있는 ‘인지적 탈숙련(cognitive deskilling)’의 위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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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생각해보면 우리의 전문성은 결과물을 소비하며 생기지 않는다. 결과물을 만드는 과정에서 겪는 시행착오, 즉 인지과학자들이 말하는 ‘바람직한 어려움(desirable difficulties)’에서 생긴다. 이것이 현장에서 말하는 ‘맨땅의 삽질’인데 AI는 정확히 그 삽질을 없애주고 있다.
최근 연구는 이 우려가 측정 가능한 현상임을 보여준다. MIT 미디어랩 연구팀이 학생 54명에게 뇌파(EEG) 장비를 씌우고 에세이를 쓰게 한 실험에서 챗GPT를 사용한 집단은 검색이나 무보조 집단보다 신경 연결성이 가장 낮았고 이후 AI 없이 같은 과제를 수행할 때 성과가 떨어졌다. 연구진은 이를 인지 부채(cognitive debt)라고 명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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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의 산출은 빨라지지만 그 비용이 미래의 역량에서 차감된다는 뜻이다. 앤스로픽 연구진이 2026년 공개한 실험은 더 직접적이다. 프로그래머 52명에게 낯선 코딩 과업을 학습하게 했을 때 AI 보조를 받은 집단은 이후 같은 스킬 평가에서 통제집단보다 약 17% 낮은 점수를 받았고 AI에 전면 위임한 경우 학습 손실이 가장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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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실 밖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의학 저널 랜싯 위장병학·간장학(The Lancet Gastroenterology & Hepatology)에 실린 다기관 관찰연구에 따르면 AI 기반 용종 탐지 시스템을 3개월간 사용한 내시경 전문의들은 이후 AI의 도움 없이 검사를 수행했을 때 병변 발견율이 유의하게 낮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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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 경력의 전문가도 석 달이면 감각이 무뎌지는데 아직 감각을 만들지 못한 주니어는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결과들이다.
네덜란드 오픈대(Open University of the Netherlands) 교육심리학 명예교수 파울 키르슈너는 여기서 중요한 구분을 제안한다. 이미 충분한 역량을 갖춘 숙련자가 기억이나 계산, 자료 정리처럼 자신이 할 수 있는 인지 작업의 일부를 도구에 맡겨 머릿속 부담을 덜어내는 것은 ‘인지적 오프로딩(cognitive offloading)’이다. 반면 초심자가 스스로 생각하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길러야 할 능력까지 도구에 맡기는 것은 ‘인지적 아웃소싱(cognitive outsourcing)’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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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는 ‘효율성 확보’고 후자는 ‘성장의 유예’다. 하지만 겉으로는 둘 다 AI와 잘 협업하는 직원으로 보인다는 점이 문제를 어렵게 만든다.
요컨대 AI 시대의 학습 공백은 세 가지 역설로 요약된다. AI는 저숙련자의 생산성을 가장 크게 올리지만 바로 그 때문에 전문성 형성 과정까지 건너뛸 위험이 있다. 또 AI의 결과물을 검증하려면 전문성이 필요한데 전문성을 기르던 경험은 AI가 대신하고 있으며, 기업은 당장의 효율을 위해 주니어를 줄이지만 그 결정으로 미래의 시니어 공급을 스스로 끊게 된다. MIT의 경제학자 앤드루 맥아피 교수의 말이 정확히 이 고민을 가리킨다. 어려운 지식 노동일수록 그 일을 잘하는 사람 곁에서 루틴한 업무를 도우며 배워 나가게 시작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 자동화를 너무 많이 접목하면 사람들은 대체 어디서 일을 배우느냐는 것이다.
학습 자체가 재정의되고 있다:
상향식에서 하향식으로 문제는 과거의 경력사다리를 그대로 복원하는 데 있지 않다. AI가 기존의 저난도 업무를 없애는 동시에 지식의 빈틈을 훨씬 빠르게 메워줄 수 있다면 이를 활용해 새로운 학습 경로를 설계할 수도 있다. 전통적 학습은 상향식(bottom-up)이었다. 기초 이론부터 차곡차곡 쌓아 올린 뒤에야 실전 문제에 도달하는 커리큘럼 중심 모델이다. 학교가 그랬고 기업교육이 그랬다. 하지만 도입부에 소개한 페테르손 사례에서 학습은 정반대인 하향식(top-down)으로 진행된다. 실전 문제에서 출발해 그 문제를 푸는 데 필요한 지식의 빈틈을 AI와의 재귀적 문답으로 그때그때 메운다. 과거 하향식 학습이 소수의 천재에게만 가능했던 이유는 빈틈을 메워줄 교사가 늘 곁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있다. 24시간 옆에 있고, 어떤 수준의 질문에도 답하며, 학습자의 이해 수준에 맞춰 설명을 조정하는 개인 교사가 모두의 삶에 들어왔다. 페테르손 사례가 말해주는 것은 분명하다. AI 네이티브 학습자에게는 지식의 축적 순서가 아니라 질문의 품질이 성장 속도를 결정한다.
이 전환을 기업의 언어로 번역한 사람이 팔란티어 CEO인 알렉스 카프가 아닐까 싶다. 그는 2026년 1월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 블랙록 CEO 래리 핑크와의 대담 중 “AI가 일자리를 만들 것인가, 없앨 것인가”라는 질문에 “인문계 일자리는 파괴될 것이다”라고 답했다. 학위와 자격증이라는 포장으로 경력을 증명하던 시대가 끝나고 실질적 가치를 만드는 역량이 그대로 드러나는 시대가 온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어 “다가오는 혁명은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당신이 하는 일의 실제 시장가치를 드러낼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그의 주장 전부에 동의하기는 어렵다. 특히 인문학적 소양의 가치에 대한 그의 평가절하는 반론의 여지가 크다. 그러나 우리가 흘려들을 수 없는 대목이 있다. 그는 “적성을 검증하는 다른 방식(different ways of testing aptitude)”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드론 영상을 분석하는 미 육군의 AI 시스템 ‘메이븐’을 다루는 핵심 인재가 명문대 출신이 아니라 전문대를 나온 전직 경찰관이었다는 사례를 들었다. 팔란티어는 실제로 대학 학위 없이 실력만으로 선발하는 펠로우십을 운영하며 채용의 문법을 바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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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과 연차라는 기준이 힘을 잃어갈 때 조직은 무엇으로 성장 가능성을 판별할 것인가.
한국에서도 이 논의는 이미 본격화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2026년 6월 신입 수시채용부터 학력 제한 전면 폐지를 공식화했다. 지원 자격에서 ‘4년제 학사 이상’ 같은 요건을 모두 삭제하고 그 자리에 스스로 질문하고 본질을 파고드는 역량, 변화 적응력, 사고적 다양성이라는 새로운 인재 기준을 세웠다. 더 흥미로운 것은 검증 방식의 전환이다. 하반기부터는 자기소개서를 폐지하고, 지원자가 면접장에서 직접 거대언어모델(LLM)을 활용해 직무 과제를 수행하는 ‘반나절 심층면접’을 도입했으며, 우수 참가자에게 서류전형을 면제하는 AI 해커톤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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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위라는 포장 대신 AI와 함께 실제 문제를 푸는 모습을 직접 보고 뽑겠다는 것으로 AI 시대의 인재를 별도의 기준으로 정의하고 관리하겠다는 선언이다. 카프가 말한 ‘적성을 검증하는 다른 방식’이 한국 대기업의 채용 제도로 활용되기 시작한 셈이다.
콘텐츠가 아니라 연결이다:
아마존의 학습자 여정 학습의 재정의를 조직 차원에서 가장 체계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사례가 아마존이다. 아마존에서 HR을 담당하는 조직의 이름은 PXT(People eXperience & Technology)다. 그 산하 PXT 아카데미는 전 세계 30여 개국, 8000명에 달하는 HR 전문가를 지원하면서 흥미로운 진단을 하게 됐다. 사내 LMS에 콘텐츠는 1만4000개나 쌓여 있는데 역량 격차는 오히려 벌어진다는 것, 즉 문제는 콘텐츠 자체가 아니라 ‘연결’이라는 것이다. 이 팀은 적절한 콘텐츠를, 적절한 학습자에게, 적절한 시점에 연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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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진단 위에서 아마존이 강조하는 개념 전환이 ‘학습 여정(Learning Journey)’이 아닌 ‘학습자 여정(Learner Journey)’이다. 한 단어 차이지만 설계 철학이 다르다. 아마존이 미국 인사관리협회(SHRM, Society for Human Resource Management) 콘퍼런스에서 강조한 구분인데 학습 여정은 콘텐츠가 중심이다. 조직이 표준 커리큘럼을 만들어 모두에게 일률적으로, 아마존의 표현을 빌리면 ‘땅콩버터 바르듯’ 균일하게 펴 바른다. 이에 반해 학습자 여정은 학습자가 중심이다. 그 사람이 지금 어디에 있고, 무엇이 필요한지에서 출발해 개인화된 경로를 만든다. 이를 위해 아마존은 먼저 AI가 활용할 ‘지식의 원천’을 체계적으로 구축했다. 18개 핵심 역량별로 30~70페이지가 넘는 심층 지식문서(Textbook)를 만들고 이를 지역과 직무에 따라 어떻게 적용할지를 정리한 실무 지침서(Playbook)도 마련했다. 이렇게 축적한 지식 위에 AI 챗 에이전트 ‘Ask the Library’를 연결했다. 학습자는 정해진 교육과정을 따라가는 대신 자신의 경력과 업무, 학습 목표를 입력한다. 그러면 AI가 추가 질문을 던져 필요한 역량과 상황을 파악하고 축적된 지식 가운데 필요한 내용을 골라 개인별 학습 경로를 설계해준다. 같은 역량을 배우더라도 신입과 경력자에게 서로 다른 학습 과정이 제시되는 식이다. AI는 콘텐츠를 만드는 방식도 크게 바꿨다. 기존에 4시간 걸리던 콘텐츠 제작 작업이 25분으로 줄어 제작 시간이 약 90% 단축됐다. 다만 AI가 만든 결과물을 그대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모든 콘텐츠는 전문가의 검증을 거친 뒤에만 배포한다. AI가 만들고, 사람이 검증하며, 최종적으로 학습자가 자신의 성장을 주도하는 구조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앞에서는 AI가 학습 과정을 대신하면 인지 부채와 탈숙련이 생긴다고 했는데 이제 다시 AI에 학습을 맡기자는 것인가. 그런 뜻은 아니다. 핵심은 ‘AI를 쓰느냐’ 자체가 아니라 ‘AI가 무엇을 대신하느냐’에 있다. AI가 정답을 바로 제공해 학습자의 사고 자체를 대신하면 그것은 앞서 말한 인지적 아웃소싱이다. 반면 AI가 답을 바로 알려주는 대신 질문을 던져 스스로 생각하게 하고, 틀린 부분을 찾아보게 하며, 왜 그렇게 판단했는지 근거를 묻고 다음 단계로 이끌어준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AI가 생각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돕는 ‘사고의 발판’, 즉 스캐폴딩(scaffolding) 역할을 하는 것이다. 아마존의 ‘Ask the Library’가 인지 부채를 만들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에이전트는 정답 콘텐츠를 배달하는 자판기가 아니라 후속 질문으로 학습자의 현재 상태를 파악한 뒤 다음 여정을 제안하는 안내자로 설계됐다. 18개 역량별 자기성찰 도구는 채점도 평가도 하지 않고 결과는 100% 학습자가 소유한다. 답을 주는 대신 자기 상태를 스스로 진단하게 만드는 것이다. 같은 AI 튜터라도 답을 대신 말해주도록 설계하면 ‘아웃소싱 기계’가 되고 생각을 요구하도록 설계하면 ‘학습 기계’가 된다. 이것이 기업교육 담당자가 AI 학습 도구를 도입할 때 던져야 할 첫 번째 질문이다.
주목할 것은 아마존이 말하는 워크플로 러닝(workflow learning)이다. 학습을 별도의 시간과 장소에서 일어나는 이벤트가 아니라 업무 흐름 속에 심는다는 개념이다. 예컨대 AI 에이전트가 직원의 캘린더를 스캔해 다음 주에 어려운 인사 면담이 잡혀 있다는 걸 확인한다면 먼저 다가와 관련 가이드를 제안하는 식이다. 교실로 사람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순간에 학습 활동이 알아서 찾아오게 만드는 것이다. 조직 학습의 단위가 과정(course)에서 여정(journey)으로, 학습의 장소가 연수원에서 워크플로로 이동하는 모습은 바로 이렇게 일어난다.
나의 실험
: AI 오피스와 함께 배우기 이 변화는 필자에게도 일어나고 있다. 필자는 ‘AI 오피스’라고 이름붙인 에이전트 팀을 운영한다. 매일 새벽 에이전트들이 밤사이 발표된 AI와 HR, 리더십 관련 연구와 주요 뉴스, 레딧(Reddit) 같은 해외 커뮤니티의 논의까지 수집하고 검증해 아침 브리핑으로 정리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에이전트 팀에는 필자의 연구 관심사와 강의 맥락, 글쓰기 방식을 학습시킨 ‘이중학 페르소나’가 설정돼 있어서 브리핑은 단순 요약이 아니라 “이 연구는 다음 학기 리더십 수업의 이 대목에 쓸 수 있다” “이 현상은 진행 중인 연구의 새 가설로 확장할 수 있다”는 활용 제안까지 담아 도착한다. 그리고 이 리포트들과 필자가 던진 프롬프트, 오간 대화는 위키 형태로 필자의 PC에 차곡차곡 쌓인다. 요즘 실리콘밸리에서 자주 이야기하는 ‘회사 두뇌(company brain)’를 만드는 셈이다. 구성원들이 업무 과정에서 얻은 지식과 고민, 판단의 근거를 AI에 축적해 필요할 때 누구나 다시 꺼내 쓸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AI에 생각을 맡겨 사람의 사고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생각한 결과가 조직 안에 쌓이고 다음 생각의 재료가 되게 하는 방식이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이동 중 궁금한 점이 생기면 텔레그램에 연결한 개인 AI 에이전트에 “이 방법론에는 어떤 한계가 있는지 반박 논문을 토대로 설명해 달라”고 묻는다. 답을 한 번 듣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이해가 될 때까지 다시 묻고 따져가며 생각을 발전시킨다.
그렇다면 왜 필자에게는 이 방식이 인지 부채로 이어지지 않는가. 앞서 소개한 키르슈너의 구분이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필자에게는 20년 가까이 축적된 판단 기준이 있다. 어떤 연구가 과장됐는지, 어떤 수치의 정의가 수상한지, 어떤 주장이 내 연구 맥락에서 의미가 있는지를 가려내는 기준이다. 그래서 AI에 수집과 정리라는 ‘수행’을 맡기는 것은 이미 형성된 역량을 얹는 오프로딩이고, 그 덕분에 필자는 무엇을 물을지 정하는 질문과 무엇을 믿을지 정하는 판단 과정에 하루의 인지적 노력을 쓴다. 노력의 위치가 이동했을 뿐 노력의 총량은 오히려 늘었다. 그러나 똑같은 시스템을 아직 판단 기준을 만들지 못한 대학원 신입생에게 준다면 어떻게 될까. 그에게 아침 브리핑은 검증할 대상이 아니라 그대로 믿을 정답이 되고 같은 도구가 역량 형성 자체를 건너뛰게 만드는 아웃소싱이 된다. 여기서 우리가 고민해볼 지점이 하나 있다. 같은 이유로 AI를 시니어와 주니어에게 같은 방식으로 쓰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숙련자에게는 위임의 폭을 넓혀 생산성을 높이고, 주니어에게는 검증과 반박을 요구하는 마찰을 남겨 판단 기준부터 만들게 해야 한다. AI 사용 정책은 직급이 아니라 ‘판단 기준의 보유 여부’로 차등 설계돼야 하는 것이다.
HR을 위한 제언:
빼앗기는 숙련과 새로 만드는 숙련 핵심은 ‘AI를 쓰게 할 것인가’가 아니다. AI에 맡길 일과 사람의 성장을 위해 사람이 직접 겪어야 할 일을 구분하는 것이다. 바꿔 말해 우리는 두 개의 목록을 만들어야 한다. AI에 빼앗기는 숙련의 목록과 AI를 통해 새롭게 만들어낼 수 있는 숙련의 목록이다. 그리고 이 구분의 밑바탕에는 이 글을 관통해 온 하나의 설계 원칙이 놓여야 한다. 숙련자의 오프로딩은 넓히되 초심자의 아웃소싱은 설계를 통해 막아야 한다. AI가 사고를 대신하게 하지 말고 사고를 요구하게 만들어야 한다.
첫째, 주니어의 일을 없애는 대신 판단력을 기르는 새로운 경력사다리를 만들어야 한다. 단순히 주니어의 역할을 ‘초안 작성자’에서 ‘AI 산출물의 검증자’로 바꾸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AI의 결과물을 제대로 검증하려면 이미 어느 정도의 판단 기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검증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검증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설계하는 것이다. 예컨대 AI에 바로 보고서 초안을 만들게 하기 전에 주니어가 먼저 문제를 정의하고 자신의 가설과 핵심 논점을 적도록 할 수 있다. 그다음 AI가 만든 결과와 자신의 판단을 비교하고, 무엇이 달랐는지, AI가 놓친 가정은 무엇인지, 어떤 근거가 더 필요한지를 찾아내게 한다. AI가 분석한 내용이라면 출처를 역추적하고 신뢰도를 판단하게 할 수 있다. 마지막에는 시니어와 함께 결과를 복기한다. 이때 시니어가 단순히 정답을 알려주는 데 그치지 않고 “나는 이 대목에서 왜 의심했는가” “어떤 신호를 보고 판단을 바꿨는가”를 설명해야 한다. 과거의 도제 관계가 시니어의 일을 거들며 자연스럽게 배우는 구조였다면 이제는 먼저 판단하기→AI와 비교하기→근거를 검증하기→시니어와 복기하기라는 과정을 통해 판단의 암묵지를 의도적으로 전수하는 구조가 돼야 한다. 같은 AI라도 숙련 수준에 따라 맡겨야 할 역할은 달라진다.
정리하자면 아직 판단 기준을 형성하는 신입 사원에게는 AI는 정답을 대신 내주는 대리인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고 사고를 자극하는 튜터이자 스캐폴드여야 한다. 어느 정도 판단 기준이 생긴 구성원에게는 자신의 판단과 AI의 판단을 비교하고 검증하는 코파일럿이 될 수 있다. 한편 충분한 숙련을 갖춘 전문가에게는 반복적인 수행을 위임하고 예외 상황과 중요한 판단에 집중하도록 돕는 진정한 에이전트가 될 수 있다. 같은 AI를 모든 구성원에게 같은 방식으로 제공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둘째, 육성 시스템을 커리큘럼 중심에서 학습자 여정 중심으로 전환해야 한다. 아마존 사례의 교훈은 콘텐츠를 연결하는 데 집중하라는 것이다. 연 1회 직급별 교육처럼 전 직원에게 같은 과정을 ‘땅콩버터 바르듯’ 펴 바르는 모델에서 벗어나 AI 에이전트가 개인의 업무 맥락과 역량 상태를 파악한 뒤 필요한 순간에 학습을 워크플로 안으로 배달하는 모델을 시범적으로라도 도입할 때다.
이때 AI 튜터는 ‘육성의 민주화 장치’가 될 수도 있다. 과거에는 일부 임원이나 핵심 인재에게만 제공되던 일대일 코칭과 밀착 피드백을 이제는 훨씬 많은 구성원이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에서도 앞서의 원칙은 동일하게 적용돼야 한다. AI 튜터가 정답을 빠르게 제공하는 데 초점을 맞추면 학습자가 스스로 생각해야 할 과정까지 대신하게 된다. 반대로 질문을 던지고, 근거를 요구하고, 오류를 찾게 하고, 스스로 자신의 판단을 설명하도록 설계한다면 AI는 사고를 빼앗는 도구가 아니라 사고를 훈련하는 도구가 된다. 결국 중요한 것은 AI 튜터를 도입했느냐가 아니라 그 AI가 사람 대신 생각하도록 설계됐는지, 사람이 더 많이 생각하도록 설계됐는지다.
셋째, 그렇다면 교육팀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교육팀의 역할은 ‘교육과정 운영자’에서 ‘성장 경험 설계자’로 바뀌어야 한다. 지금까지 교육팀의 일은 교육 니즈를 조사하고 과정을 개발해 운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학습이 연수원을 떠나 워크플로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교육팀이 설계해야 할 대상은 과정이 아니라 일 그 자체가 된다. 어떤 업무를 AI에 맡겨도 되는지, 어떤 경험은 구성원의 성장을 위해 사람이 직접 겪어야 하는지, 업무 흐름의 어느 지점에 의도적인 학습 마찰을 심을지, AI 튜터의 피드백과 현업 리더의 피드백을 어떻게 연결할지를 설계해야 한다. 이는 교육 전문가이기 이전에 일(事)의 전문가여야 가능한 일이다. 올해 SHRM 콘퍼런스를 관통한 메시지도 결국 같았다. 교육 담당자는 ‘사람 전문가’에 머물지 말고 ‘일의 전문가’가 돼야 하며 나아가 미래의 일을 예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참고할 만한 모델이 팔란티어의 FDE(Forward Deployed Engineer)다. FDE는 본사에 앉아 제품만 만드는 엔지니어가 아니라 고객사 현장에 직접 들어가 상주하면서 사람들이 어떻게 일하는지 살펴보고 고객과 함께 문제를 해결한다. 앞으로 교육 담당자도 이처럼 현장에 깊숙이 들어갈 필요가 있다. 구성원이 업무를 처음부터 끝까지 어떻게 수행하는지 살펴본 뒤 어떤 과정은 사람이 직접 해보며 실력을 길러야 하고, 어떤 과정은 AI에 맡겨도 되는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교육과정을 하나 더 만드는 일이 아니라 구성원이 실제 업무의 어느 순간에 배우고 성장하는지를 찾아내는 것이다. 어떤 업무에서 주니어가 판단 기준을 익히는지, 선배의 어떤 피드백을 통해 숙련이 전수되는지, AI 도입으로 어떤 경험이 사라지고 있는지를 업무 흐름 전체에서 살펴봐야 한다. 그리고 사라진 경험이 성장에 꼭 필요한 것이었다면 이를 대신할 새로운 학습 경험을 업무 안에 다시 설계해야 한다. 그렇게 보면 교육팀의 새로운 니즈 조사도 달라진다. 교육 이수율과 만족도만 볼 것이 아니라 우리 조직의 어느 업무에서 숙련이 만들어지고 있는지, AI가 어떤 경험을 없애고 있는지, 사라진 경험을 무엇으로 대체해야 하는지를 찾아내는 일이 중요해진다. AI 시대의 교육팀은 교육을 더 많이 공급하는 조직이 아니라 사람이 전문가로 성장할 수 있는 경로가 업무 속에서 끊어지지 않도록 설계하는 조직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