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with the Maestro 사진작가 구본창
편집자주
※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임승희(서강대 국어국문학과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그는 엄친아였다. 명문고와 명문대를 졸업한 뒤 대우실업에 입사했지만 미술을 배우고 싶어서 6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독일로 떠났다. 그는 원래 미대에 진학하려고 했으나 가족들이 반대해서 상과계열 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대기업에 들어간 뒤에도 미술을 동경했다. 유학을 떠난 직접적인 계기는 친구인 배창호 감독이 현대건설을 다니다가 그만두고 이장호 감독 아래서 영화감독의 꿈을 키우는 것을 보고 자극을 받아서다. 아버지에게 미국에 유학 보내달라고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우연히 한 중소기업에서 독일 함부르크 주재원을 뽑는 것을 보고 지원했다. 독일에서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해외여행조차 자유롭지 않았던 당시 독일은 신세계였다. 다채로운 포스터와 이미지가 거리마다 붙어 있었고 박물관에는 진귀한 유물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야말로 문화적인 충격이었다. 주재원으로 근무하면서 현지 교육기관에서 독일어를 배웠고 유학을 결심했다. 미술을 공부하다 사물을 바로 영상으로 옮길 수 있는 사진에 더 끌렸고 독일 대학에서 6년간 공부했다. “독일에서 회화와 디자인, 사진 등 여러 과목을 배웠는데 사진이 더 재미가 있었어요. 어느 순간 카메라가 제 눈처럼 움직여줬고 제가 보고 느낀 대로 따라준다는 확신이 들었죠. 대상의 본질을 좀 더 꿰뚫어보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배우면서 그런 작품을 찍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죠.”
구본창 작가는 1980년대 중반 국내 사진계에 등장해 추상화 같은 작품세계를 보여주며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당시 국내 사진계는 가난한 길거리 사람들과 탑골공원 노인 등 삶의 애환을 포착한 사실주의 계열의 사진이나 풍경 사진 대부분이었다. ‘기록의 미학’에 충실했던 국내 사진계에 그의 색다른 표현법은 논란거리였다. 처음에는 사진도 아니라는 반발마저 나왔다. 구 작가의 현란한 기법과 다양한 변화에 대해서 “외국의 유행을 적절하게 포장하는 데 급급하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국내외 전문가를 막론하고 구 작가를 한국의 현대 사진을 정착시킨 작가 중 하나로 꼽는 데 이견을 다는 사람은 없다. 그는 사진으로 사회 현상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대신 작가의 눈으로 새롭게 볼 수 있는 것에 대해 말하려고 했다. 구 작가를 서울 삼청동의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안정적인 대기업을 그만두고 사진작가를 선택했습니다.
당시에는 전업 사진작가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인생을 담보로 한 도박 같은 도전을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1980년대만 해도 전업으로 사진을 하겠다는 것에 대해 부모님들의 인식은 좋지 않았어요. ‘딴따라’라고 해서 예술계에 가는 것 자체를 곱지 않게 보셨죠. 그런데 직장을 그만두고 유학을 가겠다고 했으니 가족의 분위기는 긍정적이지 않았죠. 사실 저 자신의 결단도 쉬운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제가 그런 결단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다행스럽게도 그런 선택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30대 초반에 학업을 마치고 들어오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어요. 미래를 알 수가 없으니까요. 독일에 갈 때부터 잘한 선택일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죠. 저는 당시 한국의 직장생활이 견딜 수 없이 힘들었고 탈출하고 싶었던 욕구가 더 컸어요. 비슷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있다면 저는 도전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네요. 물론 그전에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 상황인지, 현재 직업이 내 인생관에 맞지 않은데 억지로 하고 있는 것인지 등을 저울질해 봐야겠죠. 또 자신의 가능성도 체크해 봐야겠고요. 후배들도 보면 직장을 여러 군데 옮기지만 결국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래서 어려운 시점은 어느 정도 견뎌야 해요. 하지만 직장이 자신의 적성에 맞는데 일 자체가 힘든 것인지, 아니면 적성에 맞지 않아서 힘든 것인지는 파악을 해야겠죠.
작품이 좋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요.
작가가 성공 요인을 자신의 입으로 말한다는 게 우습죠. 작가는 작품의 성공을 위해서 작품활동을 하는 게 아니니까요. 열심히 작업을 하다 보니 평판이 나오고 작품에 대한 선호가 따라 오는 것이죠. 하지만 굳이 말한다면 아마 제 사진은 특성상 다른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고 우리가 잃어버린 어떤 향수를 자극하는 요소가 들어 있는 것 같아요. 개념적이고 해석하기 어려운 다른 현대적인 작품보다는 제 작품의 많은 이미지가 어느 정도 감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폭이 크기 때문에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또 다른 요인은 작품 사진 이외에도 다양한 사진으로 먼저 대중과 친해진 게 도움이 된 것 같아요. 1985년부터 한국에서 작품 활동을 했으니 벌써 28년이 흘렀죠. 저는 처음부터 상업사진을 거부하지 않았어요. 영화 포스터도 찍었고 소설가 신경숙과 최인호 씨가 책을 낼 때도 제 사진이 쓰였죠. 패션쇼 사진과 광고사진 등도 찍었어요. 배창호 감독의 ‘기쁜 우리 젊은 날(1987년 개봉)’의 포스터 사진을 찍었는데 제작자인 이태원 태흥영화사 사장이 황신혜 씨가 너무 예쁘게 나왔다고 좋아했어요. 그래서 태흥영화사의 포스터를 제가 많이 찍었죠. 임권택 감독의 ‘장군의 아들’ ‘서편제’ ‘아제아제 바라아제’ 등의 포스터를 찍었어요. 그래서 제 이름이 서서히 알려진 것 같아요. 물론 미리 의도한 것은 아니고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죠.
또 다른 것으로는 국내에서 찍었지만 ‘버터 냄새’가 나게 찍었어요. 촌스럽지 않게. 사대주의랄 수도 있지만 당시 우리가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동경을 많이 했잖아요. 1980년대까지는 한국 사진에서 솔직히 현대적인 감성은 부족했죠. 제가 독일에서 사진을 배우고 와서 일종의 세련미랄까, 솔직히 추상화를 만든 것이죠. 당시 한국 사진계에서는 리얼리즘이 유행했고 길거리나 풍경 등 틀에 박힌 사진이 많았죠. 저는 서양에서 통용되는 시각언어를 단순화시키고 추상화시켜서 첫 눈엔 알 수 없지만 흥미로울 수 있는 것을 제시했어요. 사진으로 조금씩 보여준 것이죠. 패션 디자이너들도 외국에서 봤던 것을 제가 비슷하게 찍으니까 좋아했어요. 외국적인 느낌이 났으니까요. 국내에서 단순한 벽이지만 외국의 벽 같은 느낌을 줬고 모델들도 격이 느껴지게 해줘서 조금 달랐던 것 같아요.
또 피사체의 스토리와 인격을 보여주려고도 노력을 했어요. 다른 작가들은 모델을 찍을 때 어떤 예쁜 옷을 입고 모델은 얼마나 예쁜지를 보여줬죠. 사진에서 모델의 스토리와 인격을 보여주려면 그 사람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 여자의 눈빛에서 보여지는 스토리를 잡으려고 했죠. 피사체가 여자일 수도 있고 정물일 수도 있으며 다른 모티브들이 될 수도 있지만 그걸 해석하는 능력이 사람마다 다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경험과 인생관과 느낌으로 이 사람을 봤을 때 이 모델은 어떤 스토리가 있겠는지, 이 사람의 얼굴에서는 어떤 분위기가 풍길 수 있는지를 고민했어요. 모델의 스토리를 제 나름대로 조금 다르게 해석했던 것 같아요. 사진을 찍을 때만큼은 그 모델을 진짜 사랑해야 합니다. 좋은 사진이란 피사체가 가지고 있는 영혼을 훔쳐야 하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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