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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ential Cases in Books

돌 없는 쌀을 팝니다. 9조원 기부신화는 쌀 한톨에서 시작됐다

서진영 | 124호 (2013년 3월 Issue 1)

중화권에서경영의 신()’이라는 칭호를 제일 먼저 얻은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대만 제일의 갑부인 왕융칭(王永慶) 포모사 회장이다. 그는 1954 3 38세의 나이로 포모사플라스틱을 세웠고 이 회사를 시작으로 2010년 기준 계열사 30, 임직원 10만여 명, 매출 750억 달러의 기업집단으로 키웠다. 세상을 떠나면서 9조 원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라고 유언했다.

 

그의 사업 시작은 자그마한 쌀가게였다. 왕융칭은 1917 118일 대만 타이베이현(臺北縣) 신디엔(新店)의 즈탄(直潭)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15세 때 고향을 떠나 쟈이(嘉義)의 한 쌀집 점원으로 취직한다. 그는 1년 동안 점원으로 일하며 쌀과 관련된 업무를 배웠다. 그리고 내린 결론이쌀가게를 하면 굶어 죽지는 않겠다였다.

 

왕융칭은 고향으로 돌아가 아버지에게 창업자금을 부탁한다. 가난한 농부인 아버지는 돈이 별로 없었다. 빚을 내어 모아준 돈으로 왕융칭은 작은 쌀가게를 시작했다. 1931, 그의 나이 16세에 처음으로 쟈이에서 창업했다. 문제는 창업 이후였다. 쟈이에서는 이미 30여 개의 쌀가게가 매우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었다. 왕융칭은 자금이 부족했고 행인도 별로 없는 외진 골목의 한 귀퉁이에다 작은 점포를 얻었다. 아무리 봐도 경쟁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가게를 시작하고 시간이 흘렀으나 찾아오는 손님이 거의 없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왕융칭은 직접 쌀자루를 둘러메고 집집마다 다니면서 쌀을 팔기 시작했다. 하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왕융칭은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했을까? 왕중추가 쓴

<디테일의 힘>에서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며칠을 곰곰이 생각하던 왕융칭은 쌀의 품질과 서비스를 높여서 살길을 찾기로 했다. 당시만 해도 기껏해야 소를 이용해서 농사를 지었다. 곡물 수확과 가공기술이 매우 낙후했다. 추수한 벼는 모두 길에 펴놓고 말린 다음에 도정을 시작했다. 모래와 잔돌이 쌀에 섞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밥을 짓기 전에 항상 쌀을 일고 돌을 골라내야 했다. 매우 불편한 과정을 거쳐야 했지만 고객과 상인은 모두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크게 개의치 않았다.

 

왕융칭은 이 당연해 보이는 일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두 동생을 동원해서 쌀에 섞인 이물질을 모두 골라냈다. ‘돌 없는 쌀을 팝니다라는 문구를 가게에 붙이고 쌀을 팔기 시작했다. 다른 가게와 차별화(differenciation)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왕융칭의 쌀은 돌이 없다는 품질 경쟁력으로 차별화를 꾀했다. ‘왕융칭의 가게에서 파는 쌀은 밥을 지을 때 따로 돌을 골라낼 필요가 없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퍼졌다. 손님이 늘기 시작했고 그의 장사는 호황을 누렸다.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왕융칭은 서비스도 개선했다. 당시에는 고객이 직접 쌀을 들고 집에 가야 했다. 젊은이라면 몰라도 노인에게는 매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젊은이는 생계를 위해 바쁘게 뛰어다녔으므로 쌀을 사는 것은 대부분 노인의 몫이었다. 왕융칭은 이 점에 착안해서 고객의 집으로 직접 쌀을 배달했다. 좋은 쌀을 편하게 구입하니 손님에게는 일석이조였고 그의 가게는 늘 고객으로 북적거렸다.

 

왕융칭의 서비스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처음 온 고객의 집에 쌀을 배달해줄 때마다 몇 가지를 질문했다. “한 번 식사를 할 때 어느 정도의 양을 드십니까?” “식구는 몇 명이고, 어른과 어린아이는 몇 명입니까?” 수첩에는 쌀독 크기 등을 세세히 기록했다. 이 기록을 토대로 고객의 집에 쌀이 떨어질 시기를 예측해서 고객이 가게에 찾아오기 전 미리 알아서 배달했다. 일종의 데이터베이스 마케팅(Datebase Marketing)을 한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왕융칭은 고객이 쌀독에 쌀을 부어 달라고 할 때 쌀이 남아 있으면 모두 퍼낸 뒤 쌀독을 깨끗이 닦고 새 쌀을 먼저 담았다. 그리고 나서 남아 있던 쌀을 위에 부었다. 그래야 남아 있던 쌀이 변질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고객들은 왕융칭의 세심한 배려에 감동했고 다른 고객들을 데리고 왔다.

 

고객에게 쌀을 배달해주던 왕융칭은 대부분의 가정이 날품팔이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고 품삯도 제대로 받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가 쌀을 가지고 고객의 집을 방문하면 당장 쌀을 살 돈이 없을 정도로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이 많았다. 그는 외상으로 쌀을 준 다음에 여유가 생기면 돈을 지불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왕융칭의 쌀 품질과 고객 서비스 때문에 단골은 더 늘었다. 왕융칭은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모은 돈과 확보한 고객들을 기반으로 직접 정미소를 차렸다. 그는 사업이 커져서 어엿한 기업을 거느린 뒤에도 품질과 서비스의 디테일한 부분에는 소홀하지 않았다. 부하직원들은 모두 쌀알 하나하나를 관리하는 듯한 그의 세심함에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그의 행동을나무만 보고 숲은 볼 줄 모른다며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사람은 미국식 경영을 받아들여서 작고 사소한 부분은 다른 사람한테 맡기고 크고 굵직한 일에 집중하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왕융칭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나는 거시적인 부분에도 관심을 가지지만 세부적인 관리에 더 심혈을 기울일 것입니다. 세부적인 것을 연구하고 개선해서 2명이 할 일을 1명이 할 수 있게 만들면 생산력이 2배로 증가하는 셈입니다. 한 사람이 기계 2대를 작동시킬 수 있다면 생산력은 4배로 늘어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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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진영

    서진영sirh@centerworld.com

    - (현) 자의누리경영연구원(Centerworld Corp.) 대표
    - 최고경영자(CEO)를 위한 경영 서평 사이트(www.CWPC.org)운영 - OBS 경인TV ‘서진영 박사의 CEO와 책’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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