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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e Study 朝鮮 : 영조의 ‘균역법’ 개혁

기본 툴 바꾸며 현장을 꾸준히 파악. 혁신의 원칙 보여준 영조의 ‘균역법’

김준태 | 225호 (2017년 5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영조는 1724년 즉위한 지 20여 일 만에 양인 백성들에게 과도하게 부과되고 있는 각종 군역과 세금의 문제를 개혁하겠다고 선언했다. 과도한 세 부담에 백성들의 삶은 어려워지고 있었지만 영조의 개혁실행을 막는 기득권의 저항도 엄청났다. 가장 이상적인 방법인 ‘양반에게 세금을 물리는’ 방식은 결국 성공하지 못했고 ‘서민 감세’ 형식으로 문제를 풀어냈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었기 때문에 30년이 지나서는 폐단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조의 개혁에 대한 의지와 리더십은 이 시대에 주는 교훈이 크다. 영조는 우선 신하들을 다그치며 끝까지 개혁을 포기하지 않았고, 현장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자 노력했으며, 단호한 의지와 리더십을 보임으로써 신하들이 이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영조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만들어 관철시키지는 못했지만 조세의 균등 과세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기도 했다. 기업의 혁신, 국가의 개혁을 고민하는 리더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리더의 자세’라 할 수 있다.



편집자주

조선에서 왕이 한 말과 행동은 거의 모든 것이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여러 가지 기록 중 비즈니스 리더들이 특히 주목해봐야 할 것은 바로 어떤 정책이 발의되고 토론돼 결정되는 과정일 것입니다. 조선시대의 왕과 마찬가지로 기업을 이끄는 리더들 역시 고민하고 판단하며 결정을 내리고 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미 해당 정책이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알 수 있는 상황이기에 더욱 면밀히 성공과 실패의 요인들을 분석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정통한 연구자인 김준태 작가가 연재하는 ‘Case Study 朝鮮’에서 현대 비즈니스에 주는 교훈을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영조시대의 화두, ‘균역법’

“요사이 전국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은 아침저녁 먹을 밑천조차 없는데 의탁할 곳이 없어 이리저리 떠도는 이들의 신포(身布)를 이웃이나 죽은 이들에게까지 징수하고 있다 들었다. 심지어 한 사람이 온 문중의 역을 떠안는 경우도 있다 하니, 슬프도다! 살아서 편안함을 누리지 못한 우리 백성들이 죽은 다음에도 신역(身役)을 면하지 못하는구나!”1

1724년, 보위에 오른 영조(英祖, 재위 1724∼1776)는 즉위한 지 20여 일 만에 이와 같은 교서를 발표하며 양역(良役)을 변통(變通)2 하겠다고 천명했다. 양역이란 토지세와 공납(貢納)과 함께 조선의 백성들이 부담했던 3대 의무로, 16세에서 60세 사이의 성인 양인(良人)3 남자가 담당하는 부역(負役)이라는 뜻에서 ‘양역’이라고 불린 것이다. 일정 기간 군대에 복무하는 ‘군역’이 대표적으로, 직접 군인이 되지 않는 사람들은 대신 국방경비로 군포 2필을 납부해야 했다. 그런데 조선 초기와 달리 ① 양반층이 군역대상에서 이탈하면서 그 몫이 일반 백성들에게로 전가됐고 ② 양반 인구의 비율이 늘어난데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연이은 대기근을 거치면서 양인 인구가 감소한 상황에서 ③ 새로운 군영이 창설되는 등 국방력 확충을 위한 재정 수요는 오히려 늘어나게 되면서 문제가 생겨났다. 조세환경이 악화됐지만 각 고을에 할당된 군포의 총액은 변함이 없으면서 (심지어 늘어나기도 하면서) 고을수령들은 정해진 양을 채우기 위해 군포를 무리하게 거둬들였고 그 과정에서 죽은 사람에게 군포를 징수하는 백골징포(白骨徵布), 어린아이를 군적에 올리는 황구첨정(黃口簽丁)의 폐단이 발생한 것이다. 살기가 힘들어 집을 떠나 유민(流民)이 된 경우 그 사람의 몫을 일가에게 대신 거두는 족징(族徵), 이웃에게 거두는 인징(隣徵)도 백성들을 힘들게 했다.

이처럼 양역 제도가 문란해지면서 민심이 매우 악화되자 임금과 조정은 대책 마련에 나선다. 그대로 둘 경우 자칫 민생이 파탄 나고 국가의 존립마저 위협받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논의가 지지부진해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는데 기존 관성을 유지하려는 반발 때문이었다. 국가의 필수재정을 유지하면서 백성의 부담을 줄여주려면 기관통폐합·인력감축을 통해 지출 비용을 절약하고 다른 세원을 발굴해 세입을 늘려야 한다. 하지만 자신들, 혹은 자신이 속한 기관의 이익과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지출 절감을 반대하는데다 특히 새로운 세원으로 지목된 양반층이 저항하면서 양역변통 작업은 계속 표류했다. 숙종 대에 관련 논의가 많이 이뤄졌지만 어떤 결론을 내리지도, 무엇을 바꾸지도 못한 것은 그래서다.

그러나 상황은 갈수록 악화됐기 때문에 그대로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무엇이든 해야 했다. 영조가 왕이 되자마자 양역변통을 핵심 의제로 설정하며 신하들의 노력을 촉구한 까닭이다. 신하들도 각자의 진단과 대책을 내놓았는데 우선 중앙의 군영과 지방의 병영들이 원칙 없이 무분별하게 설치됨에 따라 군역 비용이 과도하게 소모되고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 최규서는 “예전에는 없었던 것들이 요즘 들어 많이 생겨났으니 훈련도감 또한 국초에는 없었던 것이며 그 밖에 새로 설치한 몇 개의 군문과 각사의 추종(騶從, 각 기관에 속해 일하는 하인) 또한 옛날에는 없었으나 오늘날 새로 생긴 것입니다. 감영(監營)과 병영(兵營) 및 군읍(郡邑)에도 새로 설치한 것이 있습니다”4 라 했고, 이명헌도 “지금 부역을 고르게 하는 방법은 신포를 감하는 것보다 급한 것이 없는데, 신포를 감하는 방법은 쓸데없는 병력을 줄이는 것보다 더 우선되는 것이 없습니다. 대개 오위(五衛)를 혁파하고 훈련도감과 어영청 두 군문을 뒀고 또다시 금위영, 총융청, 수어청의 병영을 두게 되자 군액이 날로 증가돼서 한 집안에 병사로 있는 자가 옛날엔 하나이던 것이 지금은 다섯이 됐고 옛날엔 둘이던 것이 지금은 열이나 되니 백성이 어떻게 곤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5 라는 상소를 올렸다. 양란 이후 조선은 국방력 강화를 명분으로 5군영을 설치했는데 국왕 호위와 수도 방어라는 성격과 임무에서 서로 겹친다. 얼마든지 통합 운영이 가능한 것이다. 각 지방의 병영과 진보(鎭堡)도 경쟁적으로 설치되면서 백성들에게 군역의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으니 이를 통폐합하거나 감축함으로써 지출을 줄이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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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포의 과잉 징세를 방지하고 세수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방법으로 결포제(結布制)와 호포제(戶布制)도 제시됐다. 결포는 소유한 토지의 넓이에 따라 부과하는 것으로 경제력·조세 부담 능력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합리적이지만 역역(力役)을 토지세로 전환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에 옳지 않다는 의견이 많았다. 토지세가 따로 있는 데다 공납 역시 대동법 이후로 쌀로 납부하도록 돼 있기 때문에 농사 소출에 가해지는 세금이 지나치게 많게 되고, 또 흉년이 들 경우 세입이 일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다. 다음으로 호포는 사람이 아닌 가구를 기준으로 군포를 부과하는 방식으로 양반가도 포함된다는 점에서 세수를 크게 늘릴 수 있는 조치였다. 양역의 폐단은 “문(文)도 아니고, 무(武)도 아니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고먹는 자들이 공교로운 계교로 군역을 면함에 따라 이것이 모두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에게 귀결된 데서 연유한 것”6 으로 더욱이 양반 역시 본래는 국역(國役)을 담당했었던 만큼 호포제를 통해 양반을 다시 양역 부과대상에 포함시킨다면 일은 쉽게 해결될 수 있었을 것이다. 영조도 “양역은 호포를 시행한 연후에야 이 폐단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다”7 , “나는 호포의 제도가 약간 나을 것으로 여긴다”8 라며 계속 호포제를 지지했는데 하지만 사대부들의 거센 반발을 사게 되면서 뜻을 접는다.

예컨대 이광좌는 “오늘날의 이른바 양반이란 일하지 않으면서 밥을 먹고 또한 (세금, 역 등을) 납부하는 일을 즐겨하지 않으니 갑작스레 전에 없던 군역의 책임을 지운다면 장차 잡아가두고 매를 쳐야 하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찌되겠습니까?”9 라고 했다. 양반이 놀고먹고 세금도 내지 않는 존재라고 비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뒷부분이다. 기존에 없었던 과세가 갑자기 부과되면 양반의 반발이 셀 것이고 이를 강제로 다스리다보면 나라가 혼란스러워질 것이라는 경고였다. 이 밖에도 이종성은 조선의 양반은 가난한 자라며 양반으로서 공장(工匠)이나 상인(商人)이 될 수 없고 또 몸소 농사를 직접 짓는 짓은 “죽어도 할 수 없는 일”이니 “양역(良役)을 지는 백성이 비록 극히 애처롭기는 해도 힘써 농사를 짓고 땔감을 져 나르고 하면 그래도 마련할 길이라도 있지만 만일 양반에게 돈이나 베를 내라고 하면 한 푼, 한 실오라기인들 어디서 구하겠습니까?”10 라며 양반에게 양역의 부담을 줘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철저히 양반의 입장에 선 논리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호포는 제도상의 문제점도 가지고 있었는데 부잣집과 가난한 집의 구분 없이 일률적으로 역을 부과하게 되므로 불평등하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었다. 가난하고 힘든 백성들을 구제한다는 취지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에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군포를 2필에서 1필로 줄여주자는 감필(減疋)론이었다. 지금 당면한 문제는 백성의 과중한 부담을 완화시켜주는 데 있으니 거기에 집중하자는 것이다. 영조는 처음에는 여기에 찬성하지 않았다. “나라의 저축이 비록 바닥이 난다고 하더라도 백성이 가난한 것보다는 낫다”11 고 생각하긴 했지만 재정 부족 없이 감세하기 위해서는 보다 면밀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또한 “이것은 일시적인 혜택으로, 사람들의 마음은 만족스러움을 알지 못하니 만약 1필을 줄여 주면 또 반드시 반 필을 바라게 된다. 그리고 인족(隣族)에 대한 폐단은 어떻게 구제할 수 있겠는가?”고 묻는다. “바로잡을 좋은 정책은 강구하지 않고 감면하는 정사만 갑자기 시행한다면 장래의 폐단이 심해질 것”12 이며 이것으로 인징·족징 등은 어떻게 해결하겠냐는 것이다.

그러나 양역변통 논의가 계속 지연되면서 백성의 고통이 심화되자 영조는 감필론으로 선회했다. 양역변통의 실무를 담당했던 홍계희는 “결포는 시행할 수 없고 호전(戶錢)13 도 시행할 수 없는 상황이니 군포의 절반을 감면해주고 줄어든 만큼에 대해서는 따로 충당할 방도를 강구하는 것이 그만두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14 라고 했는데 감필 역시 단점이 있지만 제대로 시행한다면 현재의 양역보다는 폐단이 훨씬 적으리라는 것으로 영조도 이를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마침내 영조는 1750년(영조 26) 양역의 절반을 감하라는 명령을 내리는데15 이에 따른 세수 감소를 해결하기 위해 ① 결전(結錢)을 도입하고16 ② 여결(餘結)17 을 찾아내 세금을 부과하며 ③ 비축미를 일부 이획하고 ④ 선무군관(選武軍官)18 을 도입하여 이들에게 군포를 내게 하며 ⑤ 어염세(魚鹽稅)19 를 국가의 세원으로 돌리고 ⑥ 감혁(減革)과 수용(需用)20 의 조치를 단행했다.

영조는 감필에 따른 새로운 양역제도의 이름을 ‘균역법’이라고 지으며 “‘균(均)’자는 바로 ‘경(輕)’자의 뜻이다”21 라고 했는데 역을 ‘균등’하게 부과하는 길은 이제껏 지나친 부담을 짊어진 백성의 고통을 ‘가볍게’ 해주는 데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균역법은 당시 백성들의 부담을 대폭 감소시켜주면서 많은 환영을 받았고 왕실과 부유층이 백성 보호를 위해 참여하는 구도가 되면서 사회통합의 효과도 가져오게 된다.

그런데 균역법은 도입된 지 30여 년 만에 위기를 맞았다. 정조 대에 이르러 균역법이 일으키는 폐단이 심각하게 논의됐으며 균역법의 폐지까지 거론됐다.22 이는 균역법이 양역이 문란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의 가장 큰 과제는 백성들에게 가해진 과중한 부담을 해소하는 데 있었지만 그렇게 된 원인, 즉 피역자(避役者)가 늘어난 것, 국가에서 요구하는 군역 비용이 늘어난 것, 백성들이 안정적인 소득을 얻지 못하는 것 등에 대한 대책이 함께 따르지 못한다면 본질은 놔두고 드러난 현상만 바로잡는 일이 된다. 이 중 세 번째, 백성들의 소득을 증대시키고 경제적 안정을 가져다주는 것은 포괄적이고 장기적인 과제이기 때문에 논외로 한다고 하더라도 세원을 늘리고 쓸데없는 비용 지출을 줄여야 세액을 줄여준 균역법이 효과를 볼 수가 있다. 하지만 앞에서도 살펴봤듯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는 양반을 양역 부과대상에 포함시키고자 한 호포제는 좌절했고, 조직과 인력구조 개편 역시 이뤄지지 못했다. 지출은 여전히 체계가 없고 세수 부족은 해결되지 못했는데 세액만 줄여준 셈이니 폐단이 없으려야 없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양역은 1871년 고종 대에 이르러 흥선대원군이 호포제를 공식 시행하고 나서야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



영조시대 세재개혁의 교훈

이상의 사례는 혁신이나 개혁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본질을 바꾸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본 툴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새로운 결과를 도출할 수 없는 법이다. 병의 뿌리를 제거하지 않고 겉으로 나타나는 병증만 치료한다면 언제든 병은 재발하게 된다. 균역법은 이 점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절반의 개혁이 돼버린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영조의 노력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비록 근본적인 혁신에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영조가 보여준 스탠스는 개혁에 임하는 리더의 모범이라고 할 만하다. 사실 양역 변통은 사대부들에게 절실한 문제가 아니었다. 안민(安民)을 완수해야 한다는 정치적·도덕적 사명에 따라 관심을 갖기는 했지만 군역은 어디까지나 사대부들의 생활세계와는 관련이 없는 문제였다. 더욱이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양반 또한 군역에 포함돼야 한다는 주장이 개진되고 있었기 때문에 의견만 분분할 뿐 적극적인 의지를 보여주는 사람이 드물었다. 숙종 때 변통 논의가 실패하고 영조 역시 양역변통을 강조했음에도 균역법 시행까지 26년이나 걸렸던 것은 바로 그래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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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영조가 신하들을 다그치며 끝까지 이 문제를 포기하지 않은 것은 매우 잘한 일이었다. 영조는 “우리나라는 고식(姑息)23 이 습성이 돼 있다. 지난번에 2품24 이 모여 양역(良役) 변통의 문제를 의논하라고 분부했건만 한 달이 지나도 거행하지 않고 있다. 백성을 구제하는 방책에 대해서도 이러하니 대체 장차 무엇을 하겠는가?”25 라며 신하들을 엄히 질책했고, “지금 백성들은 물에 빠진 듯,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을 겪고 있기 때문에 기필코 변통을 하고자 한 것이다. 정성이 지극하면 쇠와 돌도 뚫을 수 있는 것인데, 여러 신하들의 정성이 부족한 것 같다”26 며 신하들의 책임의식을 자극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영조는 “양역의 폐단은 말만 들어도 마음이 아프다. 지난해에 특별히 교정청(矯正廳)을 설치하라고까지 명했는데도 지금까지 미뤄왔으니 모두가 내가 덕이 없는 탓이다”27 라며 자책하는 모습도 거듭해서 보였다. 조선시대에 임금의 자책은 신하들 역시 자핵28 해야 하는 일로 임금이 이렇게까지 하는데 신하들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영조가 수시로 이러한 언급을 할 때마다 신하들은 면피하기 위해서라도 대책 마련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는데 덕분에 양역 변통 대책은 느리지만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영조는 현장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양역제도의 개편을 추진한 26년 동안 끊임없이 전국에 어사를 보내 “양역을 변통하는 것은 오늘의 급선무이니 마땅히 자세히 살펴 아뢰라”29 고 하였으며, 실태조사와 대안 마련을 위해 각 도에 구관당상(句管堂上)을 파견하기도 했다. 구관당상이란 특별한 임무를 담당하는 고위관리로서 영조는 수령과 백성을 직접 만나보고 양역의 허실(虛實)을 확인하라는 명을 내렸다.30 영조는 해당 지역의 관찰사를 지냈던 사람, 즉 현지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당상관을 파견함으로써 조사의 정확성을 기하고자 했다.

이러한 어사와 구관당상의 파견은 수령들을 긴장시키기 위한 목적도 있었는데 “인징과 족징을 한다는 소문이 들리면 어사를 보내 비밀리에 살피게 할 것이고 발각되면 무거운 벌로 처벌할 것”31 이라고 경고했다. 왕이 직접 이 문제를 챙기고 있다는 신호를 계속 줌으로써 혹시 모를 현장 관리자들의 전횡과 과실을 예방하고자 한 것이다.



아울러 영조의 단호한 의지와 리더십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영조는 실무자들에게는 “연나라 소왕이 악의를 기용하듯 믿어주고 비방을 막아주겠다”32 “공도(公道)를 넓히다가 비방을 받는다면 내가 경을 위해 도울 것이다”33 라고 했다. “이번 일이 백성들에게 혜택이 가게 된다면 그 공은 경들과 함께 나눌 것이고, 백성으로부터 원망을 받게 된다면 그 원망은 나 혼자 들을 것”34 이라고도 말한다. 자신이 방패막이가 돼 줄 테니 소신껏 일하고 설령 일이 잘못되더라도 모든 책임은 자신이 질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영조는 “양역을 끝내 변통하지 못한다면 조선은 반드시 망할 것이다”35 “군포를 다시 2필로 되돌린다면 조선은 없어지게 될 것이다”36 “이제 2필을 회복시키자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마땅히 팽형(烹刑)에 처하겠다. 만일 선 군관이 한 번 동요되면 어염 등의 일도 반드시 틈을 타서 발론해 끝내는 와해되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다”37 라며 균역법의 흔들림 없는 시행을 강조하기도 했는데, 이왕 도입한 것이라면 전력을 다해 추진해야 성과를 볼 수 있지 이런저런 말들에 휩쓸리다보면 제대로 시행해보기도 전에 좌초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영조가 비록 근본적인 해결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조세의 균등 과세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 점도 중요하다. 영조는 균역법을 공포하기 직전 창경궁 홍화문 앞에 나가 백성들을 만나며 양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하교했다. “위로는 삼공(三公, 재상)으로부터 아래 사서인(士庶人, 사대부와 평민)에 이르기까지 부역은 고르게 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백성은 나의 동포이니 백성과 함께해야 한다. 너희들(유생, 양반)의 처지에서 백성을 볼 때에는 너와 나의 구별이 있을지 모르나 내가 볼 때에는 모두가 나의 자식이다.”38 리더의 비전을 구성원에게 명확히 제시한 것으로 이러한 영조의 하교가 훗날 백성을 위한 여러 제도 개혁의 근본정신으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공동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할 수 있다.

무릇 개혁은 종합 예술과도 같은 작업이다. 현재에 파생되고 있는 문제점을 극복해야 하고 미래에 예상되는 문제점에 대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방식을 고수해서는 안 되며, 특히 본질에서부터 창조적인 파괴가 이뤄져야 능동적인 대응과 혁신이 가능하다. 그런데 모든 새로운 길은 위험하게 여겨지기 마련이다. 편안함을 해치는 불필요한 행동, 익숙함을 위협하는 쓸데없는 조치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따라서 이러한 반응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명확한 비전과 설득이 필요하다. 개혁의 당위성을 보여주고,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때로는 단호하게, 때로는 온화하게 구성원들을 이끌어야 한다. 이것이 리더의 역할이다.

리더가 아무런 생각도,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일을 벌인다면 조직을 위험에 빠트리는 행동이겠지만 신념과 가치, 비전과 준비가 뒷받침됐다면 현재의 플랫폼에 불 지르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균역법이 비록 미완으로 끝나기는 했지만 비슷한 시간이 투입됐음에도 숙종 대에는 못하고 영조 대에는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영조가 어젠다를 제시하고 끊임없이 자극을 줬기 때문이다. 영조의 노력이 있었기에 비로소 조직이 움직이고 개혁안이 도출됐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김준태 성균관대 동양철학문화연구소 연구원 akademie@skku.edu

필자는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정치외교학과 한국 철학을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를 거치며 10여 년간 한국의 정치사상과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연구했다. 특히 현실 정치에서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와 재상들에 집중해 다수의 논문을 썼다. 저서로는 주간지에 연재한 역사 칼럼 ‘세종과 정조의 대화’를 보완해 엮은 <왕의 경영>, 올바른 리더십의 길에 대해 다룬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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