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의 거울
Article at a Glance – 인문학
플루타르코스가 저서 <영웅전>에서 미래 로마 지도자들에게 ‘군주의 거울’로 제시한 첫 번째 인물이 바로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다. 로마시대의 ‘군주의 거울’은 ‘아테네의 영광(de gloria Atheniensium)’이었던 셈이다. 아테네라는 거울을 통해서 교훈을 얻고, 아테네의 영웅을 바라보면서 로마의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라는 것이다. 게다가 플루타르코스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철학자의 아테네를 소개한 게 아니라 결단의 행동력과 지혜의 혜안을 가졌던 영웅의 모습을 제시했다. 앎보다는 삶을, 감정보다는 냉철한 이성적 판단을, 숙고하는 삶(Vita contemplativa)보다는 행동하는 삶(Vita activa)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
편집자주
고전에는 현대 지성인들이 되새겨야 할 내용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메디치가문의 창조 경영 리더십과 마키아벨리 연재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김상근 연세대 교수가 ‘군주의 거울’을 연재합니다. 인문학 고전에서 시대를 뛰어넘는 깊은 통찰력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요즘 같은 총체적 난관의 시대를 일러 ‘아포리아(aporia)’라는 상태에 봉착했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는 최소 1200개의 섬으로 이뤄진 해양 국가였기 때문에 예로부터 뱃사람과 항해에 대한 개념과 기술이 발달했지요. 그리스의 뱃사람들은 배가 좌초돼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에 도달했을 때를 ‘아포리아(aporia) 상태’라고 불렀습니다. 위기의 단계보다 더 심각한,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최악의 상태’를 말합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도 그런 아포리아 상태에 봉착했다는 한탄이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습니다. 어떤 특단의 방법을 동원해도 사태가 해결될 것 같지 않는 절망감이 우리 모두를 우울의 극단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어찌 우리만 이런 절망을 느꼈겠습니까? 19세기 말,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의 분위기가 꼭 이랬습니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배하던 신성로마제국의 명성이 쇠락의 길로 접어들던 그 무렵, 비엔나에서는 절망의 징후가 곳곳에서 포착됐지요. 실력은 뛰어났지만 유대인이란 이유 때문에 교수 임용을 거부당했던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가 ‘꿈’ 이야기를 한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희망이 사라진 곳에 꿈을 통한 욕구의 충족만이 충동처럼 솟구쳐 오르기 마련이지요. 천재 음악가 구스타프 말러(1860∼1911)가 ‘탄식의 노래’를 발표(1880년)한 곳도 비엔나였습니다. 그 시대의 암울을 직시했던 또 다른 천재 예술가가 비엔나에 있었습니다. 바로 ‘키스’란 작품으로 유명한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입니다. 많은 분들이 클림트를 몽환적인 그림을 그린 화가로 알고 계십니다만 사실 그는 세기말의 아포리아 상태에 봉착해 있던 비엔나의 위기를 직감적으로 알아차렸고 그것을 작품으로 표현했던 탁월한 예술가였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기존 시스템에 저항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고전주의적인 그림을 최고로 치던 당대 예술가들의 고리타분한 생각에 과감하게 도전장을 내밀던 인물이었지요. 클림트는 이런 혁신적인 생각을 하던 일단의 젊은 예술가들과 함께 새로운 예술 저항 운동을 시작합니다. 세기말의 위기감이 절정에 달하던 1897년에 그는 이른바 ‘비엔나 분리파(Wiener Sezession)’ 운동을 시작하게 됐지요. 로마시대의 ‘군주의 거울’에 대한 글을 기대했는데 웬 뜬금없는 비엔나와 클림트 타령이냐고 나무라실 것 같아 간단히 비엔나 분리파의 첫 번째 전시회 포스터만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운동의 초대 회장이었던 클림트가 문제의 포스터를 직접 그렸는데, 여기서 오늘 우리가 주목하게 될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가 등장합니다.
1897년에 시작된 비엔나 분리파 운동의 첫 번째 전시회 포스터. 클림트의 작품으로 상단에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무찌르고 있는 테세우스의 역동적인 모습이 보인다.
잘 아시다시피 테세우스는 아테네의 건국 영웅입니다. 아테네를 건국한 시조(始祖)이고, 클림트의 포스터에 역동적으로 묘사돼 있는 것처럼 크레타 섬의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친 영웅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국력이 미약했던 초기 아테네는 크레타 미노스 왕의 다스림을 받고 있었는데 9년마다 소년 7명과 소녀 7명을 크레타 미로 속의 괴물 미노타우로스에게 바쳐야만 하는 노예 같은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만 테세우스는 이 괴물을 물리치기 위해 직접 크레타로 가게 됐고, 그곳의 공주였던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에게 미로 안에서 길을 잃지 않는 방법을 일러주지요. 결국 실타래를 풀면서 미로 속으로 들어갔던 테세우스는 괴물과 용감히 싸워 승리를 거둡니다. 클림트는 세기말의 암울한 기운이 감돌던 비엔나에서 ‘분리파’ 운동을 시작하면서 자신들이 걸어가야 할 길을 포스터에 담았습니다. 테세우스처럼 용감하게 괴물을 무찔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우리 안의 숨어 있던 미노타우로스를 때려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클림트가 새로운 시대를 앞당기기 위해 옛 시대(그리스)의 이야기로 돌아갔다는 것이 흥미롭지 않습니까? 현재의 모순을 극복하고 미래의 진보를 앞당기기 위해 테세우스라는 옛 시대의 이야기로 돌아갔던 클림트의 선택은, 우리가 옛 시대의 ‘군주의 거울’을 통해 미래를 준비하겠다는 것과 정확하게 닮아 있습니다. 미래를 보기 위해서는 먼저 과거를 봐야 합니다.
로마시대의 플루타르코스는 왜 그리스의 영웅에 대해 썼을까?
우리가 로마의 ‘군주의 거울’ 교재로 선택한 첫 번째 책은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입니다. 기원후 46년경에 태어나 120년에 임종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플루타르코스는 로마 오현제(五賢帝) 중의 한 사람이었던 트라야누스 황제 시절(98∼117년 재위)에 <영웅전>을 집필했습니다. 그러니까 로마시대의 역사가였다는 말입니다. 플루타르코스는 분명히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출신은 그리스였습니다. 그의 고향은 유명한 아폴로 신전이 있는 델포이에서 약 30㎞ 정도 떨어져 있는 작은 도시 카이로네이아(Chaeronea)입니다. 놀랍게도 그의 직업은 역사가나 전문 학자가 아니라 델포이 신전의 사제였습니다. 그는 생애 마지막 30년을 델포이에서 사제로 일했는데 마지막 20년 동안은 집필에 전념했고, 우리가 함께 읽게 될 <영웅전>도 그때 쓴 책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로마 오현제’ 중에서 두 번째 황제였던 트라야누스 시대와 세 번째 황제였던 하드리아누스 황제시대(117∼138년 재위) 말기에 걸쳐서 활동했습니다. 플루타르코스가 <영웅전>을 집필할 당시 로마제국은 다키아(지금의 불가리아와 루마니아)와 페르시아 정벌을 위한 대규모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의 최고 전성기였지요. 로마제국이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있을 때 플루타르코스는 그리스의 한 산골짜기에서 <영웅전>을 집필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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