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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d Management

잠바사장 들이 그립다

최명기 | 76호 (2011년 3월 Issue 1)

 
지금은 회장, 대표이사, CEO 등 회사의 최고 책임자를 칭하는 직함이 여러 개지만 필자가 어렸을 때는 사장 하나뿐이었다. 돈과 사람을 모아 회사를 설립하고, 물건을 만들어서 파는 모든 과정이 사장을 통해 이뤄졌다. 잠바를 입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장, 거래처, 은행, 채무자 사이를 오가면서 일했던 사장들이 현재의 한국을 만들었다. 필자의 아버지도 잠바를 입고 무섭게 일했던 대한민국의 사장 중 한 명이었다.
 
소비시장이 크고, 금융이 발달한 미국과 유럽에 비해서 한국의 사장들은 더욱 지독하게 회사를 운영해야 했다. 그런데 어느새 한국도 선진국 반열에 들어서면서 기업가들은 귀찮은 일에 일일이 신경 쓰는 ‘잠바 입은 사장’이 아닌 ‘세련된 CEO’가 됐다. 몇 억 원씩 돈을 들여 우르르 사람들을 이끌고 해외의 유명 회사를 벤치마킹하러 다니는 것으로, CEO의 책무를 다한다고 생각하는 ‘글로벌 리더’들도 양산되는 듯하다.
 
옆 나라 일본을 봐도 예외는 아니다. 마쓰시타의 일대기를 다룬 책인 <아버지 마쓰시타>를 읽으면 지금의 늙은 경제대국 일본과는 다른 약동하는 청년 일본의 모습이 나온다. 먼지 날리고 냄새나는 좁은 공장에서 온 가족이 숙식하면서 마쓰시타가 전기 소케트, 자전거 라이트를 만들어 악착같이 돈을 모으는 이야기가 소개돼 있다. 마쓰시타와 함께 일본의 3대 기업가로 꼽히는 혼다 소이치로(혼다 기연 창업자), 이나모리 가즈오(교토세라믹<현 교세라>창업자) 역시 지독한 사장들이었다. 그런 사장이 지금 일본에는 없다. 원천기술과 자금은 있지만 제대로 일하는 사장이 드문 것이 일본 기업의 현실이다.
 
장기 불황 속에서 일본의 모든 회사들이 뒷걸음질치는 가운데 도요타가 나 홀로 성장했던 것은 오너일가의 지배구조가 확실하고, 그들이 지독하게 경영진을 몰아세웠기 때문이다. 불황 속에서 10배의 성장을 이룬 일본전산도 나가모리 시게노부 같은 사장이 있었다.
 
반면 소니, 산요, 도시바, 히타치 같은 일본을 대표하는 대기업은 장기 불황 속에서 성장 속도가 지지부진했다. 소니는 궁여지책 끝에 외국인인 하워드 스트링거를 회장으로 앉혔다. 영화, 음반, 게임 같은 사업에서 글로벌 시장을 공략하겠다는 의도였다. 하워드 스트링거는 일본 중역들이 모두 까만 색 정장을 입고 회의를 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방송에서 얘기한 적이 있다. 명예를 중시하는 일본의 기업 정신을 이해하지 못한 사례로 여겨진다. 그가 회장을 하는 동안 삼성과 소니의 격차는 점점 벌어졌다.
 
미국에는 대학교 중퇴 학력의 사장 한 명이 악착같이 직원들을 독려해서 불과 몇 년 사이에 적자투성이의 회사를 전 세계 시가 총액 2위의 기업으로 만들었다. 그 회사는 다름 아닌 애플이고, 그 사장은 스티브 잡스다. 스티브 잡스야말로 ‘잠바 사장’ 정신으로 똘똘 뭉친 인물이다. 과거 소니의 공동창업자인 모리타 아키오는 진공관을 대신해 트랜지스터를 이용해 라디오를 처음 만들고, 이부카 마사루가는 어디에서나 음악을 듣기 위해 워크맨을 개발했다. 제품의 기획부터 사장이 관여하고 참여했기에 직원들은 이를 악물고 판매했다. 스티브 잡스는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라는 제품 아이디어를 내고, 직원들을 쥐 잡듯 독려했고 직접 제품을 발표하며 시장을 주도해나간다.
 
제대로 된 ‘잠바 사장’은 줄어들고 세련된 글로벌 리더를 표방하는 CEO들만 늘어나서는 곤란하다. 흔히들 고령화가 나라를 위기에 처하게 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일할 사람이 줄어드는 육체의 고령화는 마음의 고령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유럽 선진국들의 성장률이 저하되는 이유는 돈과 지위를 가진 기업 의사결정권자들의 마음이 고령화됐기 때문이다. 한때는 지독했지만 지금은 늙어버린 사장들의 마음이 고령화되면 과거처럼 기업을 열정적으로 경영하지 못하고 위험을 회피하게 된다.
 
한국도 ‘잠바 사장’ 정신을 가진 기업 대표들이 은퇴하면서 소위 글로벌 리더십에 도취된 CEO들이 넘쳐나고 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기본기에 충실하면서 진취적인 젊은 사장들은 점점 씨가 마르고 있다. 잠바를 입고 밤낮으로 동분서주하던 사장들이 그립다. ‘잠바 사장’의 핵심 DNA는 무엇일까? 필자는 헌신, 근성, 눈치, 배짱, 끈기 등 다섯 가지를 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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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신 과거의 잠바 사장들은 회사를 최우선에 두고 밤낮으로 일했다. 자신이 만든 좋은 물건을 보면서 성취감을 느꼈다. 억지로 고객의 입장에 설 필요가 없었다. 자신이 만든 물건을 자신부터 사용했으니 사장 역시 고객의 한 명이었다. 지금은 자신의 회사에서 어떤 제품을 개발하는지 파악조차 못하는 CEO들도 많다. 과거 사장 중에서는 회사를 위해서라면 굴욕도 감수하는 경우가 많았다. 공장 허가를 얻기 위해, 대출을 받기 위해 사장들은 머리를 조아리라면 조아리고, 무릎을 꿇으라면 꿇었다. 회사는 적자가 나도 고급 외제차를 몰고, 외국에서 몇 달을 보내는 ‘글로벌 CEO’가 운영하는 회사가 제대로 돌아갈리 없다.
 
근성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부하직원들에게 물건을 집어던지거나 소리를 지르면서 분을 터뜨리던 이들이 옛날 잠바사장이다. 안 되는 일도 되게 하고, 될 때까지 시도하는 대단한 집착이 지금과 같은 세계적인 기업을 만든 원동력이었다. 창의적이고 좋은 아이디어도 중요하지만 실제 남보다 앞서서 제품으로 만들어내는 게 더 중요하다. 21세기에는 착한 기업이 더 성공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영학자들이 있지만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남들보다 앞서서 좋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조건 해내겠다’는 근성이 있어야만 한다.
 
눈치 사장은 돈 냄새를 잘 맡아야 한다. 어떤 일이 돈이 되는지 안 되는지를 빨리 알아채야 한다. 지금 이 일에서 손을 떼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조금만 더 투자해야 할지를 빨리 판단해야 한다. 시험문제처럼 답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바뀐다. 학교 1등과 사회 1등이 다르다는 말은 얼마나 눈치가 있느냐와 관련 있다. 신기술과 관련된 창업에서 창업자가 사업이 아닌 기술을 사랑하는 경우가 있다. 자신이 원하는 기술을 계속 개발하는 수단으로 회사를 생각하는 사장은 아무리 옆에서 해당 기술이 시장성이 없다고 조언해도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흔히 눈치라고 하면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현대 경영에서는 ‘빠른 직감’과 일맥상통한다. 눈치가 빨라야 제때 판단하고 제때 행동해 성공할 수 있다.
 
배짱 망하는 것이 겁나면 사업을 할 수 없다. 손해를 감수할 수 있는 배짱이 있어야 사업은 커나갈 수 있다. 규모를 감당할 수 있고, 고통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배짱이 있어야 싸울 수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항상 상대방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병력으로 싸움에 임했다. 상대방과 비슷한 병력으로 싸움에 임한 적이 없다고 한다. 질지도 모르는 싸움은 피하고 이길 수 있는 싸움만 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의 군대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실제 경영 전장에서는 기술도 달리고, 돈도 모자라고, 사람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싸워야만 하는 경우가 많다. 그때는 배짱과 오기 빼고는 내세울 것이 없다. 항상 이기는 싸움만 해온 ‘글로벌 CEO’들은 배짱과 오기로 덤벼오는 국내외 경쟁자들을 마주치면 질려버리게 된다. 과거에 미국과 일본의 대기업들이 돈도 없고, 기술도 모자라고, 경험도 없는 한국 기업에 번번이 졌던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두둑한 배짱으로 죽기 살기로 덤비는 한국의 ‘잠바 사장’들에게 질려버렸기 때문이다.
 
끈기 1998년 한국 외환위기 때 많은 사람들은 한국 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망한 기업도 많았지만 예상을 뒤엎고 끈질기게 버틴 기업도 제법 많았다. 이런 한국 기업들을 보면서 그 끈기에 감탄한 외국인들이 많았다고 한다. 외환위기에 따른 고환율은 한국 기업으로 하여금 수출경쟁력을 가지게 했고, IT 붐이 불면서 한국 기업들은 재도약 할 수 있었다. 이익이 많이 나지 않는 회사의 경우, 서양식 경영 관점에서 보면 파산 후 자산을 매각해 그나마 남는 자산을 회수하는 것이 이익이다. 이런 소위 합리적 사고 때문에 미국에서는 M&A가 흔하고 기업을 갈갈이 분해해서 매각하는 기업사냥꾼들이 많다. 하지만 한국의 잠바 사장들은 부도가 날 때까지 절대로 자신의 회사를 포기하지 않았다. 회사가 부도나서 문 닫는 것을 목숨을 잃는 것과 같이 여겼다. 그렇게 몇 번을 기사회생하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해 더욱 탄탄해진 기업들도 적지 않다.
 
경제는 마음이다. 필자는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하루에 1시간씩만 일의 목적 자체를 인식하면서 뭔가 더 나은 방법으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일한다면 생산성이 급증할 것이라고 믿는다. 특히 기업을 책임지는 CEO들이 과거의 ‘잠바 사장’들처럼 헌신, 근성, 눈치, 배짱, 끈기를 갖고 일한다면 한국 경제는 더욱 무섭게 도약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편집자주 DBR이 기업을 운영하거나 직장 생활을 하면서 심리적 어려움을 겪고 계신 독자 분들에게 상담을 해드립니다. 최명기 원장에게 e메일을 보내주시면 적절한 사례를 골라 이 연재 코너에서 조언을 해드릴 예정입니다. 물론 소속과 이름은 익명으로 다룹니다.
  • 최명기 | - (현) 정신과 전문의·부여다사랑병원장
    - 경희대 경영대학원 의료경영학과 겸임교수
    myongki@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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