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위, 그리고 노심초사
기원전 247년 장양왕(莊襄王)이 즉위 3년 만에 죽었다. 이제 겨우 열세 살의 진시황이 그 뒤를 이었다(진시황은 즉위 전에는 영정, 즉위 후에는 진왕 정, 황제 즉위 후에는 진시황으로 불렸다. 편의를 위해 진시황으로 통일한다). 어머니와 함께 조(趙)나라에서 귀국한 지 불과 4년 만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세 살 나이에 아버지와 떨어졌고, 6년 만에 아버지의 나라로 와서 세 식구가 함께 살기를 4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실권은 여불위에게 돌아갔다. 즉위하자마자 진시황은 상국(相國)으로 있던 여불위를 ‘중보(仲父)’로 높여 불렀다. 여불위를 아버지처럼 대하겠다는 의미였다. 나랏일은 어머니인 조태후와 대신들에게 형식적으로 위임했다. 이듬해에는 여불위의 식객으로 있던 이사(李斯)를 발탁해 장사(長史)에 임명하고 자문 역할인 객경으로 모셨다. 여불위가 추천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상으로 이것이 진시황과 이사의 첫 만남이었다.
얼떨결에 보좌에 오르긴 했지만 안팎의 상황은 어린 왕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여불위가 권력을 행사했고, 여기에 품행이 방정하지 못한 어머니까지 끼어들었다. 실권을 쥔 여불위와 조태후는 옛정을 되살렸다. 걸릴 게 없었기 때문이다. 한창 나이에 과부가 된 조태후는 자신에게 주어진 뜻밖의 권력을 한껏 만끽하려 했고, 여불위는 자신의 입지를 확실하게 굳히기 위해서라도 조태후의 유혹을 물리치기 어려웠다.
객관적 상황도 좋지 않았다. 즉위 3년째인 기원전 244년(16살)에는 큰 기근이 들었고, 이듬해에는 메뚜기 떼가 천지를 뒤덮고 천하에 전염병이 돌았다. 주변국과의 전쟁도 끊이질 않았다.
젊은 진시황은 이런 뒤숭숭한 상황에서 노심초사 자신의 처지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어린 나이에 산전수전 다 겪은 그인지라 생존력 하나만큼은 누구보다 강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 말수가 적었고, 혼자서 뭔가를 상상하고 이를 구체적인 계획으로 구상하는 일이 몸에 배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어떻게 행사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권력을 자기 수중에 넣어야만 했다. 성년에 점점 가까워지면서 권력에 대한 진시황의 야심도 커져만 갔다.
동생의 반란
지난 호에서 말한 바와 같이 진시황의 생애는 크게 네 단계로 나눠볼 수 있다. 이 중에 13살 즉위 후 22살까지 대권을 장악하고 친정(親政)하게 되는 두 번째 단계는 그가 자신의 리더십을 발휘할 기회를 노심초사 기다린 단계다. 어쩌면 이 시기가 진시황의 생애에서 가장 빛나는 때가 아닌가 한다. 이 기간에 그는 자신의 손으로 왕국을 통치하고 나아가 천하를 통일하는 꿈을 꾸며 자신의 리더십을 발휘하는 시뮬레이션에 몰두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가 그리는 이상적인 제국의 모습이 화려하게 펼쳐졌을 것이다.
즉위 후 안팎으로 결코 순탄치 않은 상황에 처해 있던 진시황이 스스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만든 결정적 계기는 2개의 난이었다. 하나는 진시황의 나이 21살 때 발생한 동생 장안군(長安君) 성교(成蟜)의 반란이고, 또 하나는 이듬해 진시황의 어머니와 그 정부 노애가 일으킨 반란이었다.
진시황의 동생으로 기록돼 있는 성교는 진시황 아버지 장양왕의 아들인 것은 분명하지만 어머니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배다른 동생일 가능성이 있다. 당시 성교는 군대를 이끌고 조나라를 공격하다가 갑자기 반란을 일으켰다. 성교는 둔류(屯留)에서 전사하고 그를 따르던 군관들도 모두 목이 잘렸다. 이어 둔류에 살고 있던 백성들을 모두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임조(臨兆)로 옮기는 조처까지 단행됐다. 심지어 성교와 관련 있는 장수들이 뒤이어 반란을 일으켰다가 군졸까지 모조리 육시를 당했다고 한 것을 보면 이 반란의 여파가 만만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누가 성교의 반란을 진압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전후 기록의 맥락을 볼 때 진시황이 직접 참전했거나 반란 진압을 지휘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왜냐하면 같은 해 내시를 가장한 노애가 진시황의 어머니 조태후와 사통하면서 불순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는데, 진시황은 몰래 사람을 심어 이들의 동태를 파악한 것으로 기록에 전해지기 때문이다. 진시황이 성교의 반란을 계기로 정치 일선에 나선 것이다. 첫 무대이긴 했지만 진시황의 손은 매서웠다. 반란 주동자는 물론 그를 따른 병사들까지 모조리 참살한 과정에서 그는 잔인한 면모의 일단을 선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