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2년부터 1270년까지 강화도는 고려의 수도였다. 몽골군의 침공을 피해 고려는 개경에서 강화로 수도를 옮겼다. 강화 천도는 최우(최충헌의 아들)의 결단력과 판단력이 돋보인 작품이었다. 일반 백성도 아닌 고려의 최고 귀족층과 부호들이 포함된 개경 주민의 반대가 엄청났고, 주민들이 떠나자 노비들이 봉기해서 개경을 점령하는 등 후유증도 컸다. 하지만 최우는 단숨에 천도를 해치웠다. 당시 시대 상황을 감안할 때 대단한 추진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강화는 정말로 몽골군을 막아냈다. 40년간 몽골군은 전국을 유린했지만 강화도는 위협만 했을 뿐 단 한 번도 공격하지 못했다.
이후 강화도는 이 세상에서 누구도 막아내지 못한 몽골군의 침공을 막아낸 요새라는 명성을 얻었다. 이후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포함해 많은 전란 때마다 강화도는 정부의 피난처 내지는 주요한 군 주둔지로 애용됐다.
강화가 요새지로 각광받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일단 섬이어서 해전에 약한 몽고족이나 만주족과 싸울 때 유리했다. 섬의 외곽은 갯벌과 산으로 둘러싸여 자연 방어선을 형성하고, 그 안은 넓은 분지여서 평야와 집터를 제공한다. 강화도 주변의 바다와 물줄기는 물살이 빠르고 암초가 많다. 특히 지금 강화대교가 놓인 강화와 육지 사이의 좁은 수로는 화물선들이 자주 난파하는 위험 지역으로 악명이 높았다. 물살이 세서 시간을 놓치면 수로를 거슬러 올라가지 못해 바람과 조류가 바뀔 때까지 대기해야 했다. 이때 날씨가 나빠지면 배들은 힘을 쓰지 못하고 암초에 부딪혔다.
게다가 바다는 강처럼 쉽게 얼지 않는데, 이것이 큰 장점이 되었다. 내륙에 있는 강은 겨울이면 얼어붙고, 여울목이 많아서, 길을 안내하는 사람만 잘 두면 쉽게 도강할 수 있었다. 그래서 북방 민족은 거의 겨울철에 침공을 해왔다. 하지만 강화도는 그럼 점에서 보다 안전했다.
정부가 피난을 한 뒤에도 그 기능과 통제력을 상실하지 않으려면 세금을 받고, 행정망을 유지해야 했다. 강화도 주변의 바다는 험하기는 했지만, 개경, 서울과 가깝고 임진강, 한강, 예성강 하구여서 수운과 육운이 모두 가능한 교통의 요지였다. 남쪽으로는 섬들이 이어진 서해안이 펼쳐져 있다. 그래서 만에 하나 강화도가 위험에 처하더라도 우세한 해군력을 이용해서 서해안을 따라 도망갈 수 있었다. 조금 비겁한 이야기 같지만 전략적으로 퇴로가 열려 있다는 것은 중요했다. 일부러 막힌 지형에 들어가 옥쇄를 택하는 것은 용감하지만 무책임한 태도이기도 하다.
병자호란 때 허망하게 함락된 강화도
그런데 몽골 전쟁기에는 정말 훌륭하게 임무를 완수했던 강화도가 병자호란 때는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허망하게 함락되고 말았다. 청나라 군은 뗏목과 부교를 이용해 쉽게 강화도로 건너왔다. 그리고 처참한 학살과 비극이 벌어졌다. 충격을 받은 사람들은 해안 방어를 맡았던 수비 대장에게 책임을 돌렸지만, 사실 그의 책임이라고 할 수도 없다.
강화도가 난공불락의 요새라는 믿음에는 몇 가지 오류가 있었다. 그 오류의 첫 번째 원인은 닫힌 세상이었다. <열하일기(熱河日記)>의 저자 연암 박지원은 18세기 조선의 지식인 중에서 그 누구보다도 열린 지성을 지닌 선각자였다. 조선의 모든 사람들이 청나라를 오랑캐인 만주족이 세운 나라라고 굳이 멸시하고 외면할 때, 그는 중국을 선진국으로 인정하고, 진정으로 우리가 배우고 나아갈 바를 찾고자 했다. 그러나 중국 여행을 하기는 쉽지 않았다. 겨우 기회를 잡아 압록강 가에 섰을 때, 그의 나이는 44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