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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의 리더십 집중 해부-4

불안에 빠진 워커홀릭, 不死를 꿈꾸다

김영수 | 48호 (2010년 1월 Issue 1)
진시황의 생애
진시황의 리더십을 본격적으로 분석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진시황의 생애는 크게 네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제1단계:출생∼즉위 전(1∼13세, 기원전 259년∼기원전 247년, 13년)
제2단계:즉위 후∼친정 전(13∼22세, 기원전 247년∼기원전 238년, 10년)
제3단계:친정 후∼천하통일(22∼39세, 기원전 238년∼기원전 221년, 18년)
제4단계:천하통일 이후∼사망(39∼50세, 기원전 221년∼기원전 210년, 12년)
 
이 네 단계를 염두에 두고 진시황의 간략한 생애와 그의 삶에 영향을 준 주요 사건들을 연대순으로 제시한다. 즉위 이전의 진시황은 ‘영정’, 즉위 이후의 진시황은 ‘진왕 정’, 황제 즉위 후에는 ‘진시황’으로 부르기로 한다.

 

 
생애로 본 진시황의 성격과 심리
진시황은 외국에서 태어났다. 인질로 와 있던 아버지 이인(異人)이 여불위의 도움을 받아 겨우 사람 행세를 하게 되고, 이어 여불위의 애첩이었던 조희(趙姬)를 아내로 맞아들여 진시황을 낳았다. 그런데 이인에게 시집 올 당시 조희는 이미 임신을 한 상태였다. 다시 말해 진시황의 생부는 여불위였던 것이다. 진시황의 출생에 얽힌 미스터리는 지금도 말끔하게 해결되지 않았지만 대체로 여불위가 그의 생부라는 설이 우세하다.
 
여불위의 보살핌 덕분에 어린 영정은 생활고에 시달리진 않았다. 하지만 인질의 아들이었기에 신변의 불안은 컸다. 게다가 아버지 이인은 영정이 세 살 되던 해에 여불위의 도움을 받아 고국인 진으로 귀국하고, 영정은 어머니와 타국에 남게 되었다. 그렇게 아홉 살이 될 때까지 영정은 타국 조(趙)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훗날 영정이 진왕으로 즉위한 뒤 여불위와 어머니 조희가 지난 정을 못 잊어 불륜에 빠진 사실로 미루어볼 때, 아버지 이인이 귀국하고서 영정이 귀국할 때까지 6년 동안 어머니 조희와 여불위의 관계는 심상치 않았을 것이다. 요컨대 세 살 이후 아홉 살이 될 때까지 영정은 타국에서 홀어머니와 함께 하루하루를 불안하게 보낼 수밖에 없는 불우한 처지였다. 여기에 절대적인 후원자 여불위의 위세에 눌려 조용히 숨죽인 채 모든 불만을 속으로 삭이면서 울적한 나날을 보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홉 살에 아버지 이인이 태자로 책봉되면서 아버지의 나라로 돌아온 영정은 비로소 가정다운 가정을 맛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고, 열세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어린 나이에 한 나라의 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즉위 후 스물두 살 때 친정을 시작할 때까지 진왕 정은 막강한 여불위의 그늘에서 조용히 지냈다. 더욱이 그사이 어머니인 조 태후는 여불위와 불륜관계를 다시 시작했다. 이에 불안을 느낀 여불위는 노애라는 정력이 절륜한 남성을 환관으로 꾸며 태후에게 바친다. 태후는 노애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둘이나 낳았고, 급기야 진왕 정의 자리를 찬탈할 음모까지 꾸민다.
 
기원전 238년 진왕 정의 친정을 계기로 노애는 반란을 일으켰고, 진왕 정은 이 반란을 신속하게 진압하는 놀라운 모습을 보였다. 이 과정에서 진왕 정이 보여준 치밀한 전략 수립과 전광석화와 같은 행동은 열세 살 즉위 후 그가 어떤 생각과 준비를 하면서 살아왔는지를 다시 생각하도록 하기에 충분했다. 그는 조용히 이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는지 모른다. 그는 세 살 이후 난잡한 어머니와 위압감을 느끼기에 충분한 여불위의 틈바구니에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감춘 채 살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는 늘 혼자서 앞으로의 계획을 구상하고 이를 실행할 기회를 엿보았다. 하지만 이런 치밀한 성격과 함께 그의 영혼 깊은 곳에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어머니에 대한 증오심도 깊어지고 있었을 것이다.

 

 
진시황의 생애에서 또 하나 두드러진 대목은 그가 몇 차례의 암살 위기를 겪었다는 점이다. 진시황에 대한 암살 시도는 기록상으로만 세 차례 있었다. 그중에서도 형가(荊軻)는 거의 그를 죽일 뻔했다. (시기는 분명치 않지만 형가의 친구였던 음악가 고점리(高漸離)도 눈이 먼 상태에서 진시황을 암살하려다 실패했다.) 천하통일 이전에 두 차례, 이후에 한 차례였다.
 
콤플렉스 덩어리
진시황은 그 자체로 콤플렉스 덩어리였다. 아버지의 사랑을 거의 받지 못한 채 최고 권력자에 올랐고, 어머니에겐 극도의 증오심을 품었다. 실세 여불위에 대해서는 늘 두려움을 느끼며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의 난잡한 생활로 여성에 대한 환멸감을 갖게 됐다. 그가 평생 정식 황후를 두지 않은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진시황의 성격은 우울하고 음침했다. 유년기를 늘 혼자서 보낸 탓에 어둡고 생각이 많았다. 모든 것을 혼자 생각했고, 상상을 통해 미래를 시뮬레이션하는 데 익숙했다. 상의할 대상도, 대화 상대도 없었다. 당연히 독단적 성격이 형성됐다. 암살 위협도 그의 성격에 큰 영향을 끼쳤다. 어둡고 우울한 성격에 보태어 아무도 믿지 못하는 극도의 신경질적 의심병까지 생긴 것 같다.
 
그는 자신을 짓누르는 모든 압박과 스트레스를 일로 풀려고 했다. 매일 업무량을 정해놓고 그것을 다 하지 못하면 잠도 자지 않았다는 기록은 그가 확실히 ‘워커홀릭’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천하통일 이후에는 자신의 제국을 작동시키기 위한 시스템 마련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시스템을 몸소 점검하기 위해 엄청난 규모와 장기간에 걸친 제국 순시를 햇수로 13년 동안 다섯 차례나 단행하는 의욕을 보였다. 한 차례 순시를 나가기 위한 준비와 그 규모 및 기간을 감안하면, 순시에서 돌아오자마자 바로 다음 순시를 준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 후 죽기 전까지 그는 거의 절반 가까이를 외부에서 생활했다.
 
워커홀릭은 과로를 동반하고, 과로는 갖가지 병을 불러온다. 진시황이 유달리 불로장생에 집착한 것을 단순히 허황된 미신 때문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다. 그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건강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진 제국이란 진시황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몸에 점점 이상이 생길수록 그는 불로장생에 집착했고, 결국은 과대망상으로까지 진전됐다. 그 과정에서 각종 약물을 섭취했고, 결국 약물 중독이라는 또 다른 병을 갖게 됐다.
 
진시황의 삶을 대충 훑어만 보아도 그가 결코 정상적인 성격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거의 모든 콤플렉스를 다 가지고, 대단히 복잡한 성격과 종잡을 수 없는 심리 상태를 지닌 최고 통치자였다. 그의 성격과 심리에 대한 이와 같은 정보를 토대로 다음 호에는 진시황의 리더십을 검토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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