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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미래? 역사를 공부해 지켜가기 나름!

한근태 | 197호 (2016년 3월 lssue 2)

Article at a Glance

 

자본주의 발전에는 기술이 큰 역할을 했다. 자본주의를 만든 핵심 산업은 면직, 증기기관, 철강, 철도 등이다. 이들이 경제, 사회, 문화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했다. 한편 자본주의에서 전쟁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쟁의 목적에는 영토 확장, 종교, 자원, 독립 등이 있다. 주목할 것은 불황으로 인한 전쟁이다. 대불황이 지속되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전쟁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1870년대 대불황 이후 제국주의 침략이 일어났고 1930년대 대불황 이후 2차 대전이 발발했다. 자본주의를 파괴하는 요소들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 중 하나는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역사를 통해 자본주의의 미래도 볼 수 있다.

 

무언가를 공부하는 최선의 방법은 바로 그 말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리는 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말을 매일 사용하면서도 정확한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쓴다. 그러다보면 쓸데없는 오해와 불필요한 갈등이 생긴다. 자본주의가 바로 그렇다. 우리는 철저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지만 자본주의가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잘 알지 못한다. 이번 호에서는 이러한 자본주의에 관한 책 <자본주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자본주의란 단어는 1840년대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이 자본가들에 의해 노동자들이 착취를 당하던 사회 체제를 비판하기 위해 고안했다. 자본주의의 반대는 공산주의다. 자본주의는 사유재산을 중시하고 공산주의는 공유재산을 중시한다.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는 정치 체제이고,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는 경제 체제다. 중국은 공산주의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당연히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고 따라서 재산에 대한 세금도 없다. 상속세도 없어 부모의 재산은 고스란히 자식에게 넘어간다. 소유세도 없어 집을 100채 소유해도 세금을 전혀 내지 않는다. 부동산 양도세가 없기 때문에 집값이 10배 올라도 차액을 모두 가질 수 있다. 결국 불평등이 심화돼 중국의 자산가 1%가 국내 자산의 3분의 1을 갖게 되기에 이르렀다.

 

자본주의와 기업

 

자본주의 하면 가장 먼저 기업이 연상된다. 그렇다면 기업(企業)이란 무엇일까? 어원을 보면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기업은 말 그대로 사업을 기획하는 곳이다. 영어로 회사를 뜻하는 Company는 함께(com) (panis)을 먹는다는 말이다. 빵을 함께 먹는 한솥밥 사람들 집합이 기업인 것이다. 기업은 인류에게 어떤 효용성이 있을까? 1931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미국의 철학자 니컬러스 버틀러는기업은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라고 주장했다. 석탄, 증기기관, 철도, 전기, 석유, 면직, 자동차 등 주요 발명품 모두 기업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기업이 없었다면 이런 발명품은 그저 발명의 산물만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았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체제가 있다. 그중 최선은 선의의 독재 체제이고 차선은 민주주의다. 최악은 악의적 독재다. 프랑스는 1851년 군사 쿠데타로 황제에 등극한 나폴레옹 3세 시대에 상당한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빅토르 위고는 나폴레옹 3세에 항거하다 영국으로 추방당해 거기서 소설 <레미제라블>을 썼다. 독일의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와 함께 1871년 독일 제국을 세워 큰 경제발전을 이뤘다. 러시아 또한 차르 체제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피노체트의 칠레는 1990부터 17년간 대통령으로 군림하며 철권정치를 했다. 수천 명을 학살하고 8만 명을 투옥시켰다. 하지만 그의 집권시절 칠레는 중남미국가 중 경제 성적이 가장 좋았다. 리콴유의 싱가포르도 비슷하다. 독재자 군림 시기에 경제적으로는 오히려 엄청난 발전을 이룩한 것이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어떤 관계에 있을까? 민주주의가 자본주의 발전의 필수요건이라 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기 전까지는 민주주의가 오히려 장애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특히 사회간접자본 건설에는 애로사항이 따를 수밖에 없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주민 간 갈등 등으로 추진에 비용이 많이 든다. 실제 스웨덴은 포스마크 원전의 사용 후 핵연료 영구 처분 시설 선정을 위해 지질조사를 하는 데만 30년이 걸렸다. 홍보관을 세워 무려 1만 번이나 정보공유를 위한 행사를 열었다. 민주 체제하에서는 어느 한 가지 결정을 하는 데 엄청난 노력과 비용이 든다.

 

패권주의(헤게모니)란 무엇일까? 강력한 국력을 지닌 국가가 권력을 앞세워 주변 국가들에게 영향을 끼치려는 정치성향이다. 이들은 크게 네 가지를 도구로 삼아 영향력을 행사한다. 첫째는 군사력이다. 힘을 앞세우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보잉이나 록히드마틴 같은 군수산업이 발전한다. 둘째는 식량무기다. 먹고사는 문제에서 자유로운 나라는 없다. 미국은 식량을 좌지우지하는 글로벌 기업들을 갖고 있다. 카길, ADM, 콘아그라, 콘티넨털 그레인 같은 회사가 그곳이다. 셋째는 에너지를 무기로 사용하는 것이다. 오일쇼크는 한마디로 석유를 무기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온 사건이다. 에너지를 가진 국가가 힘이 센 것은 당연하다. 이런 과정에서 석유를 채굴 가공하는 엑슨모빌 같은 회사가 발전한다. 넷째는 화폐무기이다. 기축통화인 달러를 찍어내는 미국이 많이 사용한다. 이처럼 화폐 주조로 얻는 이익을세뇨리지 효과라 말한다. 미국처럼 국제통화를 보유한 국가가 누리는 경제적 이익이다. 화폐를 찍어내면 교환가치에서 발행비용을 뺀 만큼 이익이 생기는데 그중에서도 기축통화국, 곧 국제통화를 보유한 나라가 누리는 이익을 통상적으로 세뇨리지 효과라고 일컫는다. 이 말은 중세 때 군주가 재정을 메우려 금화에 불순물을 섞어 유통시킨 데서 왔다. 마지막은 도덕 무기인 인권이다.

 

 

 

 

전쟁을 하는 이유

 

자본주의에서 전쟁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인간은 왜 전쟁을 하는 것일까? 우선, 영토확장 욕구가 가장 크다. 종교전쟁도 있다. 신교와 구교 간에 벌어진 십자군전쟁 등이 대표적 종교전쟁이다. 이외에도 왕위 계승을 두고 벌어지는 전쟁, 자원을 둘러싼 전쟁, 독립전쟁 등이 있다. 경제 전쟁도 있다. 아편전쟁은 경제 전쟁이다. 아편을 통해 돈을 벌려는 영국과 이를 막으려는 중국 사이의 갈등이 전쟁으로 번진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불황으로 인한 전쟁이다. 오래 지속되는 불황은 전쟁의 씨앗이 될 수 있다. 소득 불평등이 심하면 불황이 닥칠 가능성이 높다. 지도자는 장기 불황 타개의 방법으로 전쟁을 택한다. 독일은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해 연합군에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국민들의 불만은 당연히 클 수밖에 없었다. 이런 민심을 활용해 히틀러가 등장했고, 그는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우리 땅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비극이지만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경제적으로 큰 이익을 주기도 한다. 일본은 패전 후 불황에 시달렸지만 한국전으로 재기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 역시 베트남전쟁으로 특수를 누렸다. 전쟁은 경제에 보탬이 된다. 파괴된 것을 복구하기 위해 여러 물품이 필요하고, 이를 공급하기 위해 공장을 돌려야 하며, 사람들을 채용해야 한다. 미국이 강국이 된 이유 중 하나도 두 차례에 걸친 전쟁 덕분이다. 전쟁에 개입하지는 않고 물자를 공급하면서 늘어난 수요 때문이다. 전쟁을 하면 인적 손실이 불가피하다. 당연히 노동력이 줄고 직업을 구하기가 쉬워진다. 임금도 오르면서 사람의 가치가 커진다. 전쟁을 하면 기술개발의 필요성도 커진다. 전자레인지, 레이다, 제트비행기, 인터넷, 우주통신, 원자력발전 기술 등은 전쟁을 하면서 개발한 기술을 활용한 것들이다. 인터넷도 1969년 미 국방부가 내부의 컴퓨터를 연결해 정보를 교환하는 목적으로 만든아파넷이 시초였다. 전쟁은 자신의 상품을 보급하는 기회가 된다. 영국의 버버리 코트 산업은 참호전 때 군인들에게 지급되면서 성장했고, 콜라, 담배, 커피 등은 군인들의 필수품이 되며 성장했다. 19세기 독일의 철강왕 알프레드 크루프는 철강으로 대포를 만들어 독일 프랑스 전투에서 큰 위력을 발하면서 성장할 수 있었다.

 

기술과 지리가 빚는 양상

 

자본주의에는 기술의 발전도 큰 역할을 한다. 1997 <라이프>지는 지난 천 년간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100대 사건을 정리했다. 에디슨의 전구, 무선전신, 엑스레이, 화약, 플라스틱 발명, 마취제, 진화론, 신대륙 발견, 종교개혁, 프랑스혁명, 산업혁명, 미국 독립선언, 커피, , 코카콜라 등이 등장했다. 그중 1위는 요하네스 쿠텐베르크의 활판인쇄술이다. 인쇄술은 지식혁명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이전까지는 대부분 문맹이었다. 국왕, 귀족, 사제, 대학교수만이 서적을 볼 수 있었다. 일반인들은 글 대신 설교만을 듣도록 했다. 1450년이 되자 지식 독점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1455년 구텐베르크가 성경을 180부 인쇄한 것을 시발점으로 다양한 책들이 쏟아져나왔고 이로 인해 1517년 종교혁명이 일어났다. 마틴 루터는 로마가톨릭과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기 위한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성당 교회문에 붙였다. 이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은 많았지만 전파력이 약했다. 근데 인쇄술의 발달로 반박문이 대량 인쇄되면서 두 달 만에 유럽 전역에 퍼졌다. 이것이 종교혁명으로 이어진 것이다. 해양 무역의 발달도 사실은 선박 개선 및 항해장비 기술의 발달 덕분이다. 그전에는 노를 젓는 갤리선이 대부분이었다. 돛을 진화, 발전시키고 방향키가 달린 배를 만들면서 노를 젓지 않아도 방향을 통제할 수 있게 됨에 따라 기동성이 좋아졌다. 적재량도 커지면서 장기간 동안 항해할 수 있게 됐다. 나침반, 지도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자본주의의 발달에는 지리혁명도 큰 기여를 했다. 특히 해양 진출을 통한 무역의 발달이 자본주의를 발달시켰다. 해양 진출에는 포르투갈이 선구적 역할을 했다. 포르투갈은 국토의 북쪽과 동쪽이 스페인에 의해 둘러싸여 해양 진출에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교회 확장에 대한 욕구도 강했다. 항해왕 엔리케 왕자는 호기심이 강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전파를 사명으로 생각했다. 지리와 기상, 항해술을 연구하고 탐험 계획을 세웠다. 대서양 항해에 적합한 선박 카라벨(Caravel)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이 배는 풍향의 영향을 적게 받을 뿐 아니라 조작하기 쉬운 삼각 돛이 달려 있었다. 배와 수면이 닿은 부분이 작아 움직임도 빨랐다.

 

이 배로 1419년 서아프리카 일대를 탐험하면서 황금, 상아, 노예를 본국으로 실어나르기 시작했다. 아이보리코스트, 골드코스트, 슬레이버리코스트 등은 그때 붙여진 이름이다. 결국 1497∼1499, 바스코 다 가마에 의해 희망봉을 지나 인도의 캘리컷과 고아까지 가는 항로가 열렸다. 16세기 포르투갈이 인도양의 해양 무역 노선을 제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453년 오스만제국에 의해 비잔티움(동로마제국)이 몰락하자 육로를 통한 동방무역이 어려워졌다. 동방으로부터 향신료와 직물수입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새로운 무역로를 개척해야만 했다. 이 모든 것이 대항해의 시작이다. 지리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지리혁명이 가져온 결과는 무엇일까? 첫째, 농작물과 동물의 대이동이다. 동남아시아의 사탕수수··오렌지·레몬·라임·시금치·가지·바나나와 아메리카의 옥수수·담배·감자·호박·토마토·코코아·고무·파인애플·땅콩·아보카도, 아프리카의 밀·당밀·커피·면화, 유럽의 밀·보리·오트밀····돼지··토끼 등이 이동했다. 둘째, 자원의 이동이다. 사금은 아프리카에서, 은은 아메리카에서, 모피는 북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들어왔다. 부족한 인력 보충을 위해 흑인 노예를 수입했다. 셋째, 완성된 제조품의 이동이다. 유럽에서 만든 제품이 많이 넘어갔다. 넷째, 유럽에 가격혁명을 일으켰다. 1545년 남미의 은이 대거 유럽으로 이동했고 화폐량은 3배 증가하면서 물가가 상승했다.

 

농업혁명도 주목할 만하다. 오늘날 세계 인구는 72억 명이 넘는다. 18세기 후반 청나라에 고구마가 들어오면서 식량 사정이 좋아졌다. 인구가 1억 명에서 4억 명으로 늘었다. 기근이 들면 인구가 준다. 1845년부터 7년간 이어진 아일랜드의 감자 대기근으로 800만 인구 가운데 4분의 1이 굶어 죽었다. 남은 사람도 이민을 떠나면서 인구가 반으로 줄었다. 15세기 지리혁명의 결과 신대륙 식물이 유럽과 아시아로 전파됐다. 멕시코의 옥수수, 고추, 고구마가 유출됐고 안데스에서는 토마토와 감자가 유출됐다. 볼리비아에서 담배와 땅콩이 나왔고, 아마존에서는 카카오, 파인애플이 나왔다. 고구마는 구황작물로 큰 역할을 했고 감자도 그랬다.

 

자본주의를 만든 핵심 산업은 면직, 증기기관, 철강, 철도 등이다. 이들이 경제·사회 문화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했다. 레일과 기관차 제조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고 제철업과 기계공업이 발전했다. 철도 부설을 위해 토목업도 성장했다. 수송이 가능해지면서 도시와 지방의 연계가 늘어나고 유통비용이 줄면서 가격이 떨어져 농산물과 공산품의 수요가 커졌다. 기차 덕분에 이동이 쉬워지면서 여가 생활이 다양해졌다. 국민 간 통합의식도 강해졌다. 1860년까지 통일되지 못했던 독일 통일에는 철도부설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미국도 대륙횡단 철도의 역할이 크다. 철도역이 상권으로 부상하면서 기차역을 중심으로 한 부동산 가격이 올랐다.

 

시간의 정확성도 중요해졌다. 정시에 도착해, 정시에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교통수단 발달은 자본주의 발달에 많은 역할을 했다. 교통수단 자체의 제조업과 관련해 인프라 건설에 기여했다. 자동차 제조, 도로건설, 조선업, 항만건설업, 기차제조, 철도 부설, 철도역 건설 등이다. 물자와 사람을 이동시키는 운수업도 발달했다. 해운업, 철도업, 트럭, 렌트카업, 우주 운송업 등이다. 관광 수요도 증가했다.

 

 

커피의 발전도 눈여겨볼 만하다. 17세기 후반 유럽에 처음 커피가 소개됐다. 처음에는 이슬람국가에서 온이교도의 검은 물이라고 멀리했지만 점차 인기를 끌었다. 통치자 입장에서 사람들이 커피를 함께 마시는 커피하우스는 눈엣가시였다. 정치를 논하고 비판했기 때문이다. 영국의 찰스 2, 독일의 프리드리히 왕은 폐쇄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모이면 장이 서게 마련이다. 1700년 당시 런던에는 2000개가 넘는 커피하우스가 생겼다. 런던 조나단커피하우스는 나중에 런던 증권거래소, 로이즈하우스커피하우스는 로이즈보험회사, 발틱커피하우스는 런던해운거래소로 발전하고 예루살렘커피하우스는 동인도회사로 발전한다. 얼마 전까지 런던증권거래소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사람을 웨이터라고 불렀다. 이는 커피 역사의 잔재 때문이다. 미국도 그렇다. 한국에서도 커피 전문점은 폭발적인 성장세를 기록하고 있다.

 

유대인의 기여

 

자본주의의 발전에는 유대인의 기여가 크다. 그들은 똑똑한 걸로 유명하다. 스스로를 선택받은 민족으로 생각한다. 문맹률이 낮고 공동체 의식이 강하다. 서로 지혜와 정보를 나누고, 도움 주고받는 것을 중시한다. 유대인은 귀족, 영주, 기사, 농민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유럽인들이 맡기 꺼리는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데나 정착해 먹고살 수 있도록 머리를 활용하는 직업을 택해야만 했다. 생산보다는 유통인 행상, 무역업자, 배급 같은 직업이다. 지금도 그렇다. 제조나 체력을 바탕으로 한 일이 아닌 두뇌를 쓰는 변호사, 교수, 의사, 금융인, 공증인, 회계사, 기자 같은 전문 직종에 몸 담고 있다.

 

유럽국가들은 부유한 유대인들에게 빚을 졌다. 빚을 갚기 어려운 국가들은 유대인을 강제 추방했다. 13세기 영국, 14세기 프랑스, 15세기 스페인, 16세기 이탈리아, 17세기 독일 등이 그랬다. 유대인을 추방한 지역 경제는 몰락하고 받아준 지역은 융성했다. 1290년 에드워드 1세에 의해 영국에서 추방된 유대인은 벨기에의 플랑드르 브뤼헤로 넘어가 고급 모직물 산업을 일으켰다. 덕분에 브뤼헤는 중계무역도시로 성장한다. 그 후 브뤼헤가 기능을 상실하자 유대인은 안트베르펜으로 옮겨 다이아몬드 유통의 중심지로 만들고 유럽 최대 무역도시로 발전시킨다.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요소들이 있다. 첫째, 예상외로 길어지는 불황이다. 처음 불황은 1873∼1896년 사이에 일어났고 두 번째는 1929∼1945년에 벌어졌다. 1973년 이후 오일쇼크에서 1982년까지가 불황이다. 네 번째는 2008년부터 현재까지다. 불황에는 실업자가 증가하고 가계부채가 늘어난다. 정부의 연금 지급도 늘어나면서 재정이 악화된다. 기업 역시 매출이 줄어든다. 불만이 커져 사회 불안으로 나타나고 폭동이 일어나기도 한다. 둘째, 대불황이 지속되면 위기 타개를 위해 전쟁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1870년대 대불황 이후 제국주의 침략이 일어났고, 1930년대 대불황 이후 2차 대전이 발발했다. 패권을 놓고 미국과 중국이 대결하고 있다. 일본 역시 미국의 파트너로 갈등을 빚고 있다. 셋째, 기존 에너지원이 한계에 부딪혔을 때 새로운 에너지원을 개발해 난국을 타개했다. 18세기 영국의 나무가 한계였을 때 석탄으로 돌파했다. 공해를 유발하자 석유를 개발했고 또다시 기후변화가 문제가 되고 있다. 원자력이 있지만 안전 문제가 있다. 넷째, 자연재해로 인한 대재앙 발생 가능성이다. 화산 대폭발로 인해 지구는 소빙하기에 돌입하고, 대지진과 쓰나미 같은 대형 재해가 일어나고 있다. 기온 상승으로 인한 해수면 상승으로 저지대가 수몰됐다. 다섯째, 자본주의 활력이 떨어져 지속적 성장을 하지 못한다. 여러 문제를 창의적 방법으로 해결하면서 혁신이 된다. 하지만 기업가정신 부족으로 혁신하지 못하면 정체되고 새로운 체제를 원하게 된다. 여섯째, 다국적 거대기업이 세상을 지배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요즘, 모두가 어렵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다. 하지만 지금만 어려운 것은 아니다. 과거에도 어려웠고 미래에서 이런 일은 비일비재할 것이다. 이를 타개할 방법 중 하나가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다. 역사에서 배울 것이 많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역사에 해답이 있다. 역사학은 미래학이다. 자본주의의 역사를 보면 자본주의의 미래도 볼 수 있다.

 

한근태 한스컨설팅 대표 kthan@assist.ac.kr

 

필자는 서울대 섬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애크론대에서 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핀란드 헬싱키경제경영대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MBA)를 받았다. 대우자동차 이사, IBS컨설팅그룹 상무, 한국리더십센터 소장 등을 지냈고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겸임 교수를 맡고 있다.

 

 

  • 한근태 한근태 | - (현) 한스컨설팅 대표
    -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 교수
    - 대우자동차 이사 IBS 컨설팅 그룹 상무
    - 한국리더십센터 소장
    kthan@ass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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