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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잊은 中國, 세계패권을 놓쳤다

187호 (2015년 10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동양은 사실 서양보다 오랫동안 세계를 지배했다. 200년 전만 해도 인도와 중국은 전 세계 경제의 3분의 2를 차지했다. 서양이 동양보다 앞서기 시작했던 것은 바다로 진출하면서부터였다. 사실 바다로 먼저 나간 것은 중국이었다. 15세기 명나라 영락제는 정화를 통해 대규모 남해원정을 시도했다. 하지만 내부의 정치적 분쟁 탓에 바다를 통한 교역을 지속하지 못했다. 사실 중국이나 인도는 자체적으로 많은 것을 해결할 수 있었기에 해외에 관심이 적었다. 하지만 서양은 가진 게 없었다. 그래서 해외로 눈을 돌렸고, 식민지를 개발하고, 무역을 통해 자본을 축적했다. 이 자본을 활용해 기술개발에 성공하고 이를 통해 세계를 지배했다.

 

오랫동안 동양이 세계를 지배했다. 200년 전만 해도 인도와 중국은 전 세계 경제생산의 3분의 2를 차지했다. 1400년대 큰 대도시 25개 중에서도 최대 도시는 중국의 난징이고 중국은 난징을 포함해 대도시 9개를 보유한 막강한 국가였다. 난징 다음으로 큰 도시는 인도의 비자야나가르였고 세 번째는 이집트였다. 유럽은 겨우 대도시 5개를 보유하고 있었다. 1500∼1800년 아시아는 인구, 경제활동, 무역에서 절대적 비중을 차지했다. 1500년대에는 인구 비중이 60%에 달했고 1750년대엔 66%로 증가했다. 세계 인구의 3분의 2가 아시아에 살았다. 인구가 많다는 건 그들을 먹여살릴 경제력이 있다는 반증이다. 1775, 아시아는 세계 생산의 80%를 차지했다. 18세기 인도는 영국인보다 생활 수준이 높았다. 18세기 중국은 농업생산성, 산업 및 시장의 다양성, 소비수준 측면에서 세계 최고였다. 유럽은 식민지를 통해 엄청난 부를 확보했지만 18세기에 이를 때까지 경제면에서 아시아에 밀렸다. 영국은 1700년까지 인도에서 완제품 면직물을 대량으로 수입했다. 품질과 가격 면에서 인도 제품이 월등했기 때문이다. 영국의 섬유업체들은 정부에 압력을 가해 인도산 면제품 수입을 금지했다. 1717년 프랑스 정부도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인도산 면직물과 중국산 비단수입을 금지했다. 하지만 19세기 이후, 200년이란 짧은 기간에 엄청난 부의 역전이 일어난다. 1800년대 초반 유럽의 비중이 급증하고 1900년대에 들어 중국과 인도가 급감하면서 지위가 역전된 것이다. 18세기 중국과 인도가 세계 부의 절반을 차지했지만 백 년 사이 유럽이 그 위치에 올라선 것이다. 도대체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

 

바다로 오래 나가지 못한 중국

 

오늘날 세계 인구는 60억 명을 육박한다. 600 전인 1400년대에는 35000만 명에 불과했다. 1800년대는 72000만 명이다. 400년간 인구의 80%는 농업에 종사했다. 인구 변화에는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1350년대에 발생한 흑사병과 17세기 중반 소빙기가 그것이다. 사람들은 인구밀도가 높은 곳에 집중적으로 거주한다. 농업혁명으로 잉여농산물이 만들어지자 도시와 문자가 탄생하고 교역이 시작됐다. 교역과 함께 제국이 부상한다. 비옥한 땅은 농업 문화가 차지했고 그렇지 못한 땅은 유목민이 가졌다. 유목민은 문명을 위협하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자급자족이 되지 않기 때문에 소금, 냄비, 옷감 등을 구하기 위해 대도시로 가서 그들이 사냥으로 얻은 것과 필요한 물건을 바꾼다. 유라시아 대륙 문명과 유목민은 서로 의존하는 관계였다. 하지만 기후 변화로 목초지가 메마르고 식량 위기가 닥치면 이들은 문명을 위협했다. 로마제국의 멸망, 한 왕조의 몰락 등이 그렇다. 13세기 몽골은 중국과 유럽을 차지했다. 다른 집단들도 인구가 증가하면서 새로운 토지를 찾아 나섰다.

 

1400년대 후반까지의 세계를 우선 살펴보자.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대서양을 횡단 항해했다. 1498년 바스코 다 가마의 아프리카 희망봉을 경유한 인도양 항해가 근대 세계 부상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반면 중국은 어떤가? 중국은 1400년대 이미 통일국가를 이뤘다. 인구는 1억 명에 육박했다. 1405∼1433년 사이 명나라 영락제는 중국의 권위와 세력을 사방으로 확장하는 정책을 펼친다. 정화의 남해원정이 그것이다. 300척이 넘는 선박에 27000명의 선원이 탔다. 목적지는 인도 서부의 무역도시 캘리컷이다. 이들은 세 가지 임무를 부여받았다. 첫째, 정변에서 도망친 조카를 추적하는 것이다. 둘째, 중국의 국위를 알리는 것이다. 셋째, 해외 무역을 장려하는 것이다. 이때부터 은으로 무역을 시작하면서 은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정화는 총 7번에 걸쳐 해외 원정을 한다. 동남아시아 향료제도를 지나 인도양을 순회했고 페르시아만을 거쳐 아프리카 동부해안의 모잠비크까지 항해했다. 그 결과 동아프리카를 포함한 수많은 이슬람 국가의 외교 사절이 중국에 왔고 20개국이 넘는 국가와 외교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이게 마지막이다. 1500년대 이후 바다에서는 중국 배를 볼 수 없었다. 이는 중대한 사건이다. 내부의 정치적 분쟁 때문이다. 바다로 나가는 대신 북쪽의 몽골과의 싸움에 집중해야 했다.

 

 

인도양은 모두가 눈독을 들인 무역의 중심지였다. 인도는 고도로 발전된 경제를 갖고 있었는데 서부의 구자라트, 남부의 마드라스, 북부의 벵골까지 방대한 지역에서 섬유를 만들었다. 면을 생산하고 모든 과정을 일괄 처리할 수 있었다. 당연히 상업이 발달했다. 중국과 달리 인도는 통일제국이 아니었다. 1500년까지 한번도 통일하지 못했다. 그나마 만들어진 통일국가도 1700년대 중반 분열되고 말았다. 이슬람 세계는 유럽을 차단시킨 유일한 세력이다. 세계사에서 이슬람 세력의 확장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슬람 세력의 번영은 유럽 무역을 위축시키고 유럽의 암울한 시기를 초래한다. 이들은 세 지역으로 나뉜다. 오스만제국, 페르시아를 통치했던 사파비 왕조, 인도를 정복했던 무굴 왕조가 그것이다. 1453년 오스만제국의 콘스탄티노플 함락은 기독교 세계에 엄청난 타격이었다. 오스만제국이 지중해 동부로 이르는 경로를 봉쇄하면서 유럽은 중국과 인도양에 이르는 무역로를 잃는다. 세계 무역에서 정말 중요한 사건이다.

 

 

무력으로 인도양을 차지한 유럽

 

아프리카는 거대 제국의 대륙이다. 아프리카 서부에는 번성했던 가나왕국이 있었다. 사바나기후, 열대우림기후, 사하라사막 등 세 가지 다른 생태계가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해 다양한 작물이 생산됐다. 아프리카는 이슬람 세력에게 중요한 지역이다. 7세기 이슬람 세력의 확장 이후 10∼12세기 사막 북쪽 제국들은 모두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말리왕국은 가나보다 더 번성했다. 1200∼1400년 서부 아프리카의 모든 무역을 장악하고 세금으로 엄청난 수입을 올렸다. 아프리카에서 생산되는 대부분의 황금은 아시아와 지중해, 북유럽과 연결되는 거대한 무역도시 카이로를 거쳐야만 했다. 아프리카에서는 토지를 개인의 재산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노동력이 부의 원천이었다. 아프리카의 노예제도는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역사학자 존 손턴의 해석이 이것이다. 노예의 최대 공급원은 흑해 연안에 거주하던 슬라브족이다. 오늘날 노예란 단어를 뜻하는 슬레이브도 슬라브족이란 명칭에서 유래했다. 베네치아 상인의 가장 중요한 거래품목 역시 슬라브 노예였다. 카이로 시장에서 이들은 향료 혹은 황금과 거래됐다. 아프리카 부자들은 땅 대신 노예를 보유했다. 노예들은 대부분 전쟁을 통해 확보됐다. 750∼1500년 사이, 매년 1만 명 정도가 노예로 전락했다. 750년 동안 500만에서 1000만 명 정도가 될 것으로 추산한다. 두 가지를 알아야 한다. 첫째, 15세기 유럽인들이 도착하기 전 이미 아프리카에는 거대한 제국들이 있었다. 둘째, 황금과 노예가 이들의 주요 수출품이다. 인도의 옷감, 중국의 도자기 등과 바꾸었다.

 

이때 유럽은 어땠을까? 유럽은 베네치아, 제노바 같은 도시국가부터 왕국, 공국, 공작령, 교구, 칼리프조까지 수많은 정치적 단위들이 있었고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유럽 귀족은 약탈자에 대비해 높은 성을 쌓고 농노들에게 세금을 거두고 군대를 양성했다. 11세기 전후 유럽은 방어를 목적으로 한 성이 많았다. 14세기 후반 화약을 이용한 대포가 등장한다. 화약과 대포는 11세기 중국이 발명했다. 몽골인들은 이를 개량해 대포를 만들고 13세기 후반 중국을 침략할 때 대포를 사용했다. 유럽을 공격할 때도 그러했다. 당시는 대포는 말을 놀라게 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종을 만들던 장인들이 대포를 제작했을 것이다. 네덜란드 같은 부자국가는 용병을 활용했다. 15세기 정치적 합병은 대포의 발전과 더불어 진행됐다. 1453년 오스만투르크는 대포를 앞세워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다. 같은 해 프랑스도 대포를 이용해 영국군을 이기면서 백년전쟁을 끝냈다. 유럽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부와 권력을 차지하고, 권력을 유지 강화하기 위해서다. 유럽은 가난했다. 겨울에 가축들에게 먹일 사료가 부족해 가축을 도축해 먹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를 위해서는 소금과 후추가 필요했다. 후추는 아시아에서 수입해야만 했는데 베네치아와 제노바가 창구였고 모두가 이를 점령하기 위해 애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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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 베네치아 상인들은 아시아의 향신료와 직물에 대한 무역을 사실상 독점했다. 유럽인들은 어떻게 하면 아시아와 직거래를 할 수 있을까를 고심했다. 육로는 이슬람이 봉쇄하고 있었다. 당연히 이들은 아시아항로에 대한 집착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최남단을 지나면 인도양에 이어진다는 사실을 믿고 있었다. 해마다 아프리카에 탐험대를 파견했고 그러다 적도 인근에 위치한 시에라리온에 도착해 아프리카와 무역을 시작했다. 면직물과 대포를 팔고 대신 황금과 노예를 사들였다. 그들의 목표는 아시아항로 개척이었다. 1488년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마침내 희망봉을 발견한다. 이제 아시아항로는 포르투갈 차지였다. 인도양 항로 개척에 성공한 이들은 인도양을 중심으로 무력을 동원한 무역을 시작한다. 무력으로 해상로를 장악하고 무역상들에게 통행세를 거둔다. 중국 마카오의 토지사용권도 차지한다. 중국과 교역이 금지된 일본과 교역하면서 많은 이익을 거둔다. 15세기 세계는 세 가지 특징이 있었다. 첫째, 중국과 인도는 싸고 우수한 품질의 제품을 생산할 수 있었다. 중국은 비단과 도자기, 인도는 면직물로 유명했다. 둘째, 향신료는 인도네시아 군도에서, 상아는 아프리카, 향은 중동, 금은 아프리카, 은은 일본에서 주로 생산됐다. 셋째, 유럽에서는 비단, 향신료, 면직물 등의 수요가 증가한다. 근데 유럽은 양모와 무기를 제외하면 팔 게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무력을 사용해 인도양을 차지한 것이다. 아메리카에서 발견된 엄청난 양의 은도 유럽 발전에 기여한다.

 

유럽은 삼각무역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특히 영국은 완제품을 아프리카로 수출해 노예들과 교환한다. 아프리카 노예들은 아메리카로 수출된다.

노예들은 농장에서 일을 했다.

 

 

연결을 시작한 세계

 

16세기가 되면서 여러 변화가 일어난다. 각자 고립됐던 지역들이 정기적으로 접촉을 시작했다. 1492년 콜럼버스는 아메리카와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대서양 항로를 만든다. 1571년 스페인은 필리핀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중국을 연결하는 태평양 항로를 확립한다. 새로운 두 항로를 통해 인구, 물자, 사상, 식량, 질병 등이 오고 간다. 최초의 세계화다. 여러 제국들이 꾸준히 성장하고 유럽에서는 독립국가 체제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전쟁도 계속 일어났다. 스페인은 1545년 엄청난 양의 은이 있는 포토시 광산을 발견하고 스페인은 이 돈을 활용해 유럽을 지배하려 했다. 하지만 1588년 영국함대에 패배한 후 꿈을 포기한다. 스페인으로 유입된 돈은 네덜란드의 무기상, 영국과 이탈리아 은행가들에게 넘어가고 확보한 은으로 인도양 무역에 사용한다.

 

그러다 마침내 산업혁명이 일어난다. 1750∼1850년의 일이다. 17세기 후반 영국에서는 옥양목으로 알려진 인도산 면직물이 크게 유행한다. 옷뿐 아니라 양모나 비단으로 만든 거의 모든 물건이 인도에서 수입된다. 실제 1700년 인도는 세계에서 가장 큰 면직물 수출국가였다. 참다 못한 영국은 18세기 초반 보호무역정책을 실시한다. 그러다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는 각각 동인도회사를 설립해 아시아 무역을 시작한다. 근대 기업의 시초라 할 수 있다. 그들의 목표는 아시아 무역에서 더 많은 수익을 거두는 것이다. 이들은 무력까지 갖췄다. 유럽 발전에는 아프리카 노예를 활용한 플랜테이션의 확립과 성장이 크게 공헌했다. 17세기, 처음에는 사탕수수를 생산하기 위해 도입했고, 나중에는 담배, 18세기에는 목화를 재배하기 위한 용도로 확대된다. 근데 노동력이 문제였다. 노동력은 필요한데 유럽에서 브라질로 이주하려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수입해 활용했다. 이게 삼각무역인데 삼각이란 영국, 아프리카와 신세계를 말한다. 유럽은 삼각무역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특히 영국은 완제품을 아프리카로 수출해 노예들과 교환한다. 아프리카 노예들은 아메리카로 수출된다. 노예들은 농장에서 일을 했다. 카리브해와 남아메리카 전역에서는 플랜테이션을 통해 사탕수수, 담배, 목화 등을 재배했다. 노예무역과 면직물 산업이 연계된 삼각무역은 영국 해운산업의 성장을 촉진시켰고 맨체스터가 면직물 산업의 중심지가 된다. 영국 면직물의 황금기는 미국 독립 직후 찾아온다. 1793년 엘리 휘트니가 조면기를 발명하면서 아메리카 목화 가격이 하락했기 때문이다. 증기기관을 이용한 방적기와 방직기가 개발되면서 가격이 더욱 하락하고 마침내 인도를 이긴다. 그러면서 서양이 동양을 역전하기 시작한다.

 

 

도시 산업노동자의 탄생

 

면직물은 도시의 산업노동자란 새로운 계층을 만들었다. 그들은 새로운 동력이 필요했다. 그게 바로 석탄을 사용한 증기기관이다. 면직물과 달리 석탄과 증기기관의 발전은 오직 영국에서만 일어났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영국도 인구 증가로 성장이 한계에 이르렀다. 1600년대에는 이미 산림이 많이 황폐화됐다. 런던에서 필요한 난방과 요리를 위한 연료 때문이다. 다행히 영국은 석탄이 있었다. 1800년 영국은 세계 석탄량의 90%에 달하는 1000t의 석탄을 생산했다. 더 많은 석탄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땅을 깊이 파야 했는데 번번이 지하수가 솟아 작업을 방해했다. 1712년 이 문제를 토머스 뉴커먼이 증기기관으로 해결하고 제임스 와트도 참여하는데 이런 기술이 모여 증기기관차로 발전한다. 1825년 광산에서 해안까지 11㎞ 거리를 달리는 기차를 최초로 만든다. 1830년 영국 철로는 수십㎞에 불과했는데 1840년에는 7200㎞를 넘었고 1850년에는 37000㎞에 이른다. 당연히 더 많은 석탄과 강철이 필요했다. 증기기관은 엄청난 생산성 증가로 이어지고 면직물 산업을 변화시킨다. 1790년 새뮤얼 크럼프턴이 발명한 뮬 방적기는 물레보다 백 배나 많은 실을 생산한다. 1830년 영국의 전체 인구 1200만 가운데 무려 50만 명이 면직물 공장에서 일을 한다. 산업혁명으로 영국은 면 수입국가에서 수출국가로 변신한다.

 

문제는 중국이다. 중국에는 수출할 만한 물건이 없었다. 설상가상 영국은 비싼 중국 차를 수입하기 시작하면서 무역적자가 눈덩이처럼 늘어났다. 다행히 신세계에서 수입된 은으로 어느 정도 벌충을 할 수 있었다. 당시 영국 노동자에게 차는 아주 중요했다. 차와 식민지에서 수입된 설탕과 목장에서 생산되는 우유를 마시는 것은 중요한 일과였다. 광부들은 차 값과 설탕 값으로 수입의 10%를 바칠 정도였다. 영국은 저렴한 가격에 차를 구입할 방법을 찾기에 이르렀다. 협상을 시도하지만 중국은 아쉬운 게 없었다. 은을 대신할 물자를 찾아야 했는데 그게 아편이다. 1773년 영국의 식민지 총독은 벵골 지역에서 아편을 생산해 중국에 수출하기 시작한다. 사실 총독의 가장 중요한 임무다. 영국은 공짜로 파이프를 공급하고 아주 싼 가격에 아편을 판매한다. 당연히 판매는 급증하고 많은 중국인이 아편에 중독된다. 아편이 수출되면서 중국에서 은이 나오기 시작한다. 중국 정부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아편창고를 압수하고 모든 아편을 바다에 버리자 영국은 해군을 파견해 중국을 공격한다. 이것이 바로 아편전쟁이다. (1839∼1842) 이 전쟁은 영국의 일방적 승리로 끝난다. 선체를 전부 강철로 만든 최초의 전함 네메시스 때문이다. 당시 중국 배는 전부 목선이었다. 작은 규모의 120마력 증기기관을 사용한 이 전함은 막강했다. 이 전쟁으로 영국은 난징조약을 맺고 여러 이권을 차지한다. 홍콩을 양도받고 손실보상으로 은화 2100만 달러를 받는다.

 

영국은 최초로 산업화에 성공하고 그 열매로 군대를 키워 세계 최강국으로 도약한다. 1830년 영국은 철, 증기기관, 면직물 생산을 사실상 독점한다. 엄청난 권력을 활용해 자국 물건을 세계 전역에 수출한다. 독일은 늦었지만 색다른 방법으로 산업혁명을 이룬다. 독일은 1870년까지 단일국가가 아니었다. 수많은 공국으로 분열돼 산업화에 불리한 여건이었다. 면직물을 거쳐 강철산업으로 가는 대신 바로 중공업으로 가는 과정을 택했다. 강철을 제련하는 베서머 공정을 개발하고 크루프가 혁신적인 대규모 사업에 성공하면서 독일의 산업화는 급속하게 발전한다. 러시아는 정부가 산업화를 주도한다. 1860년 농민들을 모두 해방시킨다. 하지만 여전히 토지를 소유한 귀족들이 토지를 임대하는 형태였다. 19세기 러시아는 식량과 천연자원을 수출하고, 대신 대부분 제조품을 수입에 의존했다. 산업을 거의 육성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1892년 세르게이 비테가 재무장관에 취임하면서 달라진다. 그는 적극적으로 산업화를 추진했다. 1860 1120㎞에 이르렀던 철로를 1900 58000㎞까지 증가시킨다. 천연자원을 용이하게 수송했다. 일본은 막강한 군대를 이용한다. 산업화를 통해 돈을 벌고 이 돈으로 막강한 군대를 육성하면서 강국으로 발돋음한다. 돈이 없으면 군대가 없고, 그럼 식민지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내용을 정리해보자. 왜 동양이 서양에 역전을 당할 것일까? 우선, 먹고살 만했던 동양은 절실함이 없었고 살기 힘들었던 서양은 뭔가 탈출구가 필요했는데 무역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이들은 바다로 나아갔다. 내부 문제에 골몰했던 중국은 약해졌고 밖으로 눈을 돌렸던 서양은 강해졌다. 둘째, 서양의 산업혁명이다. 서양은 번 돈을 근간으로 산업혁명을 일으켰다. 면직물 수입국가에서 수출국가로 변신한 것이다. 셋째, 힘의 우위이다. 화약을 만든 것은 중국이지만 이를 활용해 중국은 누른 것은 영국이다.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내부 문제 때문에 국제 정세를 무시하고 있는 건 아닌가, 외세에 대비한 기술력과 군사력을 갖고 있는가? 역사를 통해 배우지 못한 자는 잘못된 역사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역사는 알려준다.

 

한근태 한스컨설팅 대표 kthan@assist.ac.kr

 

필자는 서울대 섬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애크론대에서 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핀란드 헬싱키경제경영대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MBA)를 받았다. 대우자동차 이사, IBS컨설팅그룹 상무, 한국리더십센터 소장 등을 지냈고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겸임 교수를 맡고 있다.

 

동아비즈니스리뷰 351호 Diversity in Talent Management 2022년 08월 Issue 2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