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회원가입|고객센터
Top
검색버튼 메뉴버튼

Revisiting Machiavelli - 끝

'나는 국가를 논하며 지옥에 머물겠다'

김상근 | 125호 (2013년 3월 Issue 2)

 

 

편집자주

많은 사람들은 마키아벨리는권모술수의 대가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억울하게 살고 있는 약자들에게더 이상 당하지 마라고 조언했던 인물입니다. 이번 호로 마키아벨리 연재를 마칩니다. 시대를 뛰어넘는 통찰력을 주는 마키아벨리의 이야기 속에서 깊은 지혜와 통찰을 얻으셨기를 바랍니다.

 

 

마키아벨리, 메디치, 미켈란젤로

마키아벨리는 생애 말년에 다시 메디치 가문과 뒤엉키는 우여곡절을 겪는다. 메디치 가문 출신의 두 번째 교황이었던 클레멘트 7(1478-1534)가 마키아벨리에게 <피렌체사> 집필을 의뢰하면서 새로운 관계가 시작됐다. 두둑한 보수도 약속했다. 마키아벨리가 메디치 가문으로부터 공직자나 정치가가 아니라 전문 작가로 인정을 받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사>를 새로운 공직으로 나갈 수 있는 기회로 보고 심혈을 기울여 집필했다. 책에서 메디치 가문을 비판하는 일을 의도적으로 삼갔다. 피렌체가 오늘과 같은 위기의 도시가 된 것은 부패 때문이란 것이 <피렌체사>의 핵심 내용이지만 마키아벨리는 부패의 원인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자신을 주목하고 있는 메디치 가문을 자극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때는 1525, 마키아벨리는 집필을 완료한 <피렌체사>를 들고 로마로 갔다. 이 일을 맡긴 메디치 가문의 교황에게 <피렌체사>를 직접 헌정하기 위해서였다. 1525년은 교황 클레멘트 7세에게 난감하기 그지없는 해였다. 파비아(Pavia) 전투에서 프랑스 군대가 에스파냐 군대에게 대패해 그동안 친프랑스 정책기조를 유지하던 교황청에게 외교적으로 큰 부담이 됐기 때문이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겸하던 에스파냐의 왕 카를 5(1500∼1558)가 프랑스의 왕 프랑수아 1(1494∼1547)를 인질로 잡으면서 유럽 대륙의 정치판이 일대 소용돌이로 휩쓸려 들어간 때이기도 하다.

 

 

<피렌체사>를 헌정하기 위해 로마로 찾아 온 마키아벨리를 즉각 등용시켜 스페인의 마드리드에 외교관으로 파견하자는 의견이 교황청에서 논의됐다. 그러나 여전히 메디치 교황은 마키아벨리를 완전히 신임하지 않았다. 교황의 자문관들은 마키아벨리의 재능이 아까우니 한직(限職)이라도 줘야 한다고 교황을 계속 설득했다. 마키아벨리는 교황의 자문관들에게 하루속히 로마냐 사람들을 무장시켜 에스파냐의 공격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이것은 놀라운 통찰력이었다. 만약 교황청이 마키아벨리의 이 조언을 받아들였다면 2년 후 벌어질 참극을 사전에 막을 수 있었다.무엇 하나 확실하게 행동에 옮기는 것을 주저하던 교황과 자문관들은 마키아벨리를 결국 파엔차로 파견시키기로 결론을 내렸다. 교황을 대신해서 로마냐 지방을 통치하고 있던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Fracesco Guicciardini, 1483∼1540) 총독의 개인 자문관으로 임명했다. 귀차르디니와 마키아벨리는 막역한 친구 사이였다. 귀차르디니가 모데나의 장관을 지내던 시절부터 마키아벨리와 귀차르디니는 친밀한 편지 교환을 통해서 찐한 농담과 이탈리아 정세 판단을 재미삼아 주고받던 사이였다. 교황 클레멘트 7세는 새로운 임무를 맡고 로마를 떠나는 마키아벨리에게 <피렌체사>를 완료했을 때 지불하기로 약속했던 포상금의 거의 두 배를 선물로 줬다. 1523년부터 교황을 대신해서 로마냐 지방을 통치하고 있던 귀차르니디에게 마키아벨리는 천군만마와 같은 존재였다. 마치 유비가 제갈량을 얻은 뒤나와 제갈량이 함께 있는 것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다고 말했다는 수어지교(水魚之交)의 한 장면과 비슷했다.

 

다음 해인 1526,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에스파냐의 왕 카를 5세는 교황청을 향해 선전포고를 했다. 카를 5세는 포로로 잡힌 프랑수아 1세를 석방하는 조건으로 프랑스 남부의 부르고뉴 지방을 스페인에 양도하고 전 유럽에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권을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마키아벨리는 카를 5세의 이런 요구를바보 같은 짓이라고 일갈했고 예상대로 프랑수아 1세가 석방된 뒤 즉각 카를 5세와의 약속을 파기했다. 이에 격분한 카를 5세는 프랑스와 동맹을 체결한 베네치아와 피렌체, 로마 교황청에 대한 군사 공격을 결행한다. 대규모 국제전이 발발한 것이다. 무적의 스페인 군대와 독일 용병들이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반도로 남하를 시작하자 클레멘트 7세는 귀차르디니를 교황군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방어에 나선다.

 

마키아벨리는 프랑수아 1세가 석방되기 직전부터 기발한 제안을 해서 로마 교황청과 피렌체 정국을 뒤흔들어 놓았다. 피렌체 시민들은 메디치 가문의 새 리더였던흑기사단장조반니 데 메디치(Giovanni Dalle Bande Nere de’ Medici, 1498∼1526)를 중심으로 전쟁을 대비해서 민병대를 조직하고 클레멘트 7세는 교황청 자금을 융통해서 군자금을 마련하라는 제안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봤고 어차피 전쟁이 필요하다면 영웅과 군인, 돈이 급선무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클레멘트 7세는 마키아벨리가 피렌체 민병대장의 후보로 지목한흑기사단장조반니 데 메디치를 견제하고 있었다. 정통 메디치 가문이 아닌 방계(傍系)에서 태어난흑기사단장은 용병대장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1 정통 메디치 가문 출신의 적자였던 클레멘트 7세에게는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교황이 개인적인 친소관계와 가문의 주도권 때문에 마키아벨리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을 때 사태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형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의 군대와 독일 용병들이 이미 밀라노 인근까지 밀고 내려와 대규모 군사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탈리아가 다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든 것이다. 신성로마제국의 발호에 위기를 느낀 프랑스, 피렌체, 베네치아는 1527 517일 프랑스 코냑에서 이른바코냑 동맹을 체결한다. 로마령도 코냑 동맹에 가입했고 이탈리아 3국과 프랑스는 신성로마제국군과 독일용병이 집결해 있는 밀라노로 군대를 이동시켰다. 코냑 동맹의 총사령관에는 로마냐의 총독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가 임명됐다.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감이 이탈리아에 몰려들었다. 특히 피렌체인들은 거의 패닉에 빠졌다. 신성로마제국의 침략군은 밀라노를 함락시킨 뒤 로마로 진격할 것이다. 그렇다면 피렌체의 피해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밀라노에서 로마로 남하하는 행군로에 피렌체가 위치하기 때문이다. 교황청의 가신들은 로마보다 피렌체의 안전을 더 염려했다. 교황을 포함한 대부분의 로마 교황청 가신들이 피렌체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위기에 몰린 교황의 자문관들은 드디어 마키아벨리를 공직에 임명한다. 적의 침공을 앞두고 있는 피렌체는 다급한 마음에 마키아벨리라는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들었다. 마키아벨리는 <5인 성벽관리위원회>

의 서기장으로 임명됐다. 침략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피렌체 성벽을 재건축하는 일을 맡았지만 성벽관리위원회는 실질적으로 피렌체 방어를 위해 신설된 군사조직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이 조직의 서기장 자격으로 다시 베키오궁정에 당당히 모습을 드러냈다.

 

 

 

 

 

 

 

얼마나 꿈에 그리던 공직 복귀였던가! 그것도 평소에 늘 고민하고 연구하던 문제를 다루는 부서의 서기장이 된 것이다. 강대국으로부터 약소국가인 조국 피렌체를 구하는 것! 마키아벨리는 즉각 피렌체 성곽의 방어라인을 재구축하기 시작했다. 마키아벨리는 교황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산 미니아토 성당을 보루 바깥쪽에 위치시킬 정도로 피렌체 방어선을 좁게 유지하려고 했다. 미약한 피렌체의 군사력으로서는 이것이 최상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이 시점에 마키아벨리는 르네상스 최고의 예술가였던 미켈란젤로와 접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교황의 지시로 산로렌초 성당의 신 성구실에서 메디치 가문의 영묘와 조각 작품을 제작하고 있던 미켈란젤로는 이때 마키아벨리의 지시를 받거나 최소한 성벽 설계 문제로 협의했을 가능성이 높다. 마키아벨리가 사망한 뒤 피렌체 성곽의 방어선 구축을 위해 군사위원회가 구성됐는데 미켈란젤로가 이 위원회에서 활동했고 실제 피렌체 방어선 보루 설계를 위한 도면을 남기기도 했다.

 

 

코냑 동맹의 총사령관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는 피렌체의 성곽 공사를 위해 분주히 돌아다니던 친구 마키아벨리를 롬바르디아로 소환했다. 밀라노에서 대치하고 있는 신성로마제국의 군대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마키아벨리와 같은 책사(策士)가 필요했다. 마키아벨리는 다시 총사령관의 개인 자문관 자격으로 16세기 이탈리아의 대혼란 과정을 두 눈으로 지켜보게 된다.

 

교황 클레멘트 7세는 우유부단한 사람이었다. 마키아벨리가 가장 우려하고 혐오하던 리더십 스타일의 모든 점을 골고루 갖춘 인물이었다. 공격해야 할 때는 휴전을 선포하고, 휴전을 선포해야 할 때 공격의 나팔을 부는 그런 리더였다. 마키아벨리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교황 클레멘트 7세는 적국과 휴전협정을 맺었다. 신성로마제국의 군대가 아직 롬바르디아에 주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황은 서둘러 군사 대립의 불편함을 종결시키기 위해 외교적 판단을 내렸다. 당연히 교황은 굴욕적인 휴전 협정을 위해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교황청을 배신하고 신성로마제국 편에 붙었던 콜론나 가문을 사면하고 코냑동맹의 군대를 해산하는 동시에 100만 두카토가 넘는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귀차르디니와 마키아벨리는 이런 터무니없는 휴전에 반대했지만 당면한 문제를 회피하려고만 하던 교황을 돌려놓을 수 없었다. 교황은 완고했다. 마키아벨리는 코냑동맹 군대의 해산을 끝까지 반대했다. 오히려 지금 선제공격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고 주장했다. 마키아벨리가 당시에 쓴 보고서 내용은 이렇다.

 

“적이 알프스를 넘어오면 첫 번째로 당신들의 재산을 모두 내놓으라고 요구할 것입니다. 그들이 발걸음을 재촉하는 이유는 당신들을 약탈하겠다는 일념뿐입니다. 이런 사악함에서 벗어나는 길은 그 사악함을 먼저 응징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당신들의 성벽 아래에까지 왔을 때가 아니라 바로 지금 알프스에서 행동에 옮기는 편이 더 낫습니다.” 2  

 

모든 것이 한바탕 짧은 꿈일 뿐

마키아벨리의 예측은 정확했다. 선제공격만이 1527년의 대재앙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었다. 교황과 참모들은 마키아벨리의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파국은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나타나게 된다. 신성로마제국의 군대와 독일용병은 서서히 이동하며 로마를 옥죄기 시작했다. 적이 로마냐 지방을 통과하기 전에 선제공격을 해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하던 마키아벨리의 음성은 교황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마지막 순간에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던 교황 클레멘트 7세는 대신 돈으로 적장을 매수하려 들었다. 더 이상 군대를 이동시키지 않는다면 첫 분할금으로 6만 두카토를 먼저 주겠다는 흥정을 시도했다.

 

 

마키아벨리는 교황의 제안을 비웃었다. 틀림없이 적의 장수는 돈을 받은 다음에도 로마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6만 두카토란 거액을 이탈리아 군사의 급료로 지불하는 것이 더 현명한 판단이라고 봤다. 적장에게 돈을 주고 또다시 전쟁을 하느니 차라리 군인들에게 돈을 지불해서 사기를 올리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주군은 그런 지혜나 배짱을 가지지 못한 나약한 군주였다. 마키아벨리는 친구 베토리에게 자신의 답답한 심정을 격정적으로 토로한다.

 

“나는 조국을 내 영혼보다 더 사랑한다네. 내 육십 평생 경험을 두고 자네에게 감히 말하네만 지금보다 더 어려운 상황은 일찍이 없었다네. 평화는 필요하지만 전쟁은 불가피하고, 게다가 우리의 주군은 평화나 전쟁 어느 쪽을 위해서든 필요한 일을 하기가 여간 힘든 분이 아니던가?” 3

 

마키아벨리가 우려했던 현실이 눈앞에서 펼쳐지기 시작했다. 신성로마제국의 군대가 포(Po)강을 건너 피렌체에 가까이 접근했다. 메디치 교황의 미숙한 판단 때문에 피렌체가 다시 위기에 몰리자 반()메디치 정서가 팽배해졌다. 일단 클레멘트 7세의 최측근이자 코냑동맹의 총사령관이었던 귀차르디니와 피렌체 대주교인 리돌피 추기경이 중재에 나서 가까스로 폭동이 발발하는 것은 막았다. 그러나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귀차르디니와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도시 자체는 방어하지만 결국 친메디치 정부는 붕괴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귀차르디니와 마키아벨리도 예상하지 못하던 일이 발생했다. 피렌체 공격을 준비하던 신성로마제국의 군대와 독일용병들이 갑자기 공격로를 변경해 남쪽으로 신속히 말을 몰고 내려갔다. 피렌체에서 로마로 적의 공격 목표가 바뀐 것이다. 교황의 지시에 따라 피렌체 방어에 주력하던 이탈리아 연합군은 일시에 허를 찔렸다. 이탈리아와 프랑스 연합군은 모두 피렌체 방어를 위해 몰려 있었고 로마는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다. 1527 56일 이른바로마 대함락사건이 터졌다. 적의 갑작스런 공격에 당황한 클레멘트 7세는 산탄젤로 성에 숨어서 로마가 유린되는 것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봐야만 했다. 엄청난 성물 파괴와 신성 모독이 연일 계속됐다. 교황권의 상징인 시스티나 성당은 독일 용병의 마구간으로 사용될 정도였다. 개신교도였던 독일 용병의 수탈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만큼 잔혹했다. 기원 후 410년에 발발했던 고트족의로마 대함락(Sack of Rome)’ 이후 영원한 도시(City of Eternity)가 이렇게 야만적으로 유린된 적은 처음이었다.

 

로마 대함락과 메디치 교황의 몰락이 피렌체에 알려진 것은 511일이었다. 즉각 폭동이 일어났고 6일 뒤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에서 영구 추방됐다. 피렌체에서 폭동이 일어나 메디치 정권이 붕괴되던 시점에 마키아벨리는 오르비에토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피렌체에서 차로 약 2시간 정도 떨어진 산중턱의 작은 마을이다. 마키아벨리는 친구이자 상관인 귀차르디니에게 사표를 제출하면서 이제 집으로 돌아갈 때가 왔다고 말했다. 귀차르디니는 친구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며 긴 포옹을 나눴다. 한 시대가 끝났고 역사의 주인공들은 쓸쓸한 퇴장을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을 두 사람은 잘 알고 있었다.

 

고향 피렌체로 돌아가는 길. 마키아벨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은 회환과 눈물의 귀향뿐이었다. 미켈란젤로를 빼면 단테 이후 피렌체에서 가장 뛰어났던 인물이었던 마키아벨리는 이제 패잔병의 모습으로 쓸쓸히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육십 노구(老軀)를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멀게만 느껴졌을 것이다. 이제 그는 완전히 패자가 됐다. 그토록 염원하던 피렌체의 공직에 겨우 복귀했으나 공직을 맡겼던 메디치 가문이 축출되고 다시 공화정 정부가 세워졌다. 공화정 정부의 제2서기장을 맡았다는 이유로 메디치 가문으로부터 어깨꺾기 고문까지 받았으나 이제 메디치 가문의 부름에 응했다는 이유로 공화국의 배신자로 낙인이 찍혔다.포르투나(Fortuna)라는 행운이 여신으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한 마키아벨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가난으로 인한 멸시와 무료함뿐이었다. 절망에 빠진 마키아벨리는 페트라르카의 시구를 인용하면서 자신의 삶을 이렇게 차분히 관조했다.

 

“이제 분명히 알았네,

세상을 즐겁게 하는 모든 것이,

한바탕 짧은 꿈일 뿐이라는 것을.” 4

 

 

 

 

 

 

 

마지막까지 꿈꾸던 약자의 수호성자

겨우 집으로 돌아온 마키아벨리는 마지막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거친 식사와 불편했던 잠자리가 그의 몸을 망가트렸고 최후의 희망을 잃지 않으며 조국을 위기에서 구하려던 노력은 결국 고질병으로 이어졌다. 무엇보다 마음의 병이 육신의 병으로 이어진 것이다. <군주론>의 저자이자 <만드라골라>를 쓴 불세출의 코미디 작가! 무너져가던 16세기 이탈리아의 마지막 희망이자 구원자였던 마키아벨리는 고향 피렌체에서 임종을 맞는다. 그의 침상 주위에는 평소에 그를 아끼고 존경하던 친구들과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프란체스코 델 네로, 자노비 부온텔몬티, 루이지 알라만니, 야코포 나르디, 필리포 스트로치 등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사지가 뒤틀리는 고문을 당할 때도 유쾌함과 농담의 여유를 잃지 않았던 인물이다. 그는 영원한 이별을 아쉬워하며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친구들과 제자들에게 전날 꿈 이야기를 들려준다. 다가오는 죽음의 불안감을 애써 감추며 그는 다시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농담을 시작했다.

 

꿈에서 그는 누더기를 걸친 일단의 무리를 보았다. 가난에 찌들고 병이 들어 초라하기 그지없는 불쌍한 사람들이었다. 마키아벨리가 다가가 당신들은 누구냐고 물었을 때우리는 천국의 축복받은 사람들이라는 대답을 들었다. 가난하고 병든 무리들이 사라지고 이번에는 왕이나 궁정의 예복을 입은 고상한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나타났다. 그들은 함께 모여 진지한 표정으로 국가의 대사를 논의했다. 자세히 보니 무리 중에는 플라톤, 플루타르코스, 타키투스와 같은 고대의 유명한 석학들이 끼여 있었다. 그들에게 당신들은 누구냐고 묻자 그들은지옥에 떨어진 영혼들이란 대답이 돌아왔다. 역시 그들도 사라졌다. 이때 꿈꾸던 마키아벨리에게 하늘에서 어떤 음성이 들려왔다. “너는 누구와 함께 있고 싶으냐?” 마키아벨리는저는 처음 누더기를 걸친 무리들과 천국에 있기보다는 고귀한 영혼들과 국가의 대사를 논하며 지옥에 있기를 원합니다라고 대답했다.

 

마키아벨리는 끝까지 자조적인 농담을 던지며 최후를 맞이했다. 그는 1527 621일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의 유해는 622일 피렌체의 산타크로체 성당에 묻혔다. 피렌체에서 프란체스코 수도회를 대표하는 산타크로체 성당은 천재들의 무덤이라고 불릴 만한 곳이다. 비록 빈 무덤이지만 단테의 무덤이 있다. 미켈란젤로와 갈릴레이 갈릴레오도 안치돼 있다. 피렌체가 배출한 천재 시인과 천재 조각가, 천재 과학자 옆에 마키아벨리가 조용히 누워 있다.

 

그의 영혼은 지금 지옥에 있다. 천국에서 착각과 자기만족에 빠져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약자들에게 차라리 지옥으로 와서 단 하루라도 인간답게 사는 것이 어떻겠냐고 설득하고 있다.

 

 

 

김상근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 skk@yonsei.ac.kr

필자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립대 및 에모리대에서 석사 학위를,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 ㈜SK케미칼 고문도 맡고 있다. <르네상스 창조 경영>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 15권의 책을 냈다. 르네상스 시대의 창조적 영감을 현대적 언어로 재해석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인기기사